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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30 소식지 원고 '농사 에세이'초안

 옥산 밭으로 통하는 길은 돌이 많은 흙길이라 공룡 트럭으로 올라가는 경우에는 차가 덜컹거려서 깜짝 놀라면서 잠에 깬다. 밭 근처에는 개장수 아저씨가 기르는 개들이 살고 있다, 그 옆에서 한참 밭일 하고 있는데 개가 옆에서 퍼질러 자고 있으면 괜시리 질투가 나곤 한다. 밭의 입구를 지키는 개는 사람이 다가가면 사납게 짖어대지만 내가 그 자리에서 가만히 개를 응시하면 바로 꼬리를 내리는 게 조금은 우습다. 그 개는 정말 성실히, 낮잠을 포기해서까지 내가 그곳을 지나칠 때마다 짖어댔고, 머지않아서 나는 옥산에서 거미만큼 그 개를 싫어하게 되었다. 그 개를 지나 조금 샛길로 빠지면 연못이 보이는데 그 곳에는 소금쟁이와 바로 옆 나무에는 거미가 산다. 나는 그 거미를 지나치게 의식해서 그 큰 몸을 과장되게 움직여 발이 물에 빠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거기서 물을 길러 고구마 밭으로 가서 물을 주는데. 물통에 물이 떨어지는 것이 보일 때마다 이상한 공포감을 느낀다. 또 물을 뜨려면 그 개를 마주쳐야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몇 번 다녀오면 허리에 진득한 통증이 느껴지고 저 멀리 내가 엄두도 못 낼만한 속도로 물을 주는 종민쌤이 매우 얄밉게 느껴져서 옆에 지나갈 때쯤 다리를 걸고 싶은 충동을 참는다. 고구마가 비닐에 닫으면 타 죽기 때문에 고구마순 주위에 흙을 덮어줘야 한다. 종민쌤과 재환쌤은 쪼그려 앉아서 일을 하지만, 나는 쪼그려 않으면 몇분 안돼서 다리가 저리기 때문에 털퍽 주저앉아 일을 한다. 그래서 나의 청바지 엉덩이 부분은 똥 싼 듯이 누렇게 되어 난감하다. 율량동 상리의 밭은 고랑과 고랑 사이가 좁아 몸을 운신하기가 힘들다. 게다가 길게 세로로 길게 나있어 앉아서 일을 하면 옥수수에 가려 주위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한참 그 속에서 일하고 있으면 평생 옥수수 밭에서 혼자 일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 느낌이 기묘해서 문득 일을 하다가도 일어서서 주위를 둘러보곤 한다. 그와 별개로 나 같은 거구가 폭이 좁아 앉지 못하고 쪼그려 앉아 일하는 것은 정말 고역이다. 그래서 몇 걸음 못가고 지쳐서 앉아있는데 몇 시간 전에 왔다간 택시 손님이 유기한 것이 아닐까하는 근거 없는 의심이 드는, 작은 개 한 마리가 눈치 보면서 다가온다. 그리고 한 10분 정도 서로 비비적대면서 즐겁게 같이 논 다음 나는 밭으로 들어가고 개는 몇 번 기웃거리더니 어디 갔는지 안 보인다. 걱정이 되서 이리저리 둘러보았지만 개는 나타나지 않았다. 복잡 미묘한, 연민 비슷한 감정이 들었다. 얼른 농사일을 제쳐두고 그 개를 찾아가고 싶다는 생각과 책임질 수 있는가라는 의문 사이를 오가면서 농사일을 하다 보니 어느새 어둑어둑 해졌고 공룡 트럭을 타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공룡으로 출발하였다.

나는 이번 해 농사를 3월 달부터 농사일을 시작해서 지금까지 꾸준하게 결합해왔고 그 이전에 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 에도 틈틈이 농사에 결합하였다. 이렇게 길다면 길다고 할 수 있고 짧다면 짧다고 할 수 있는 시간동안 농사에 결합하면서 나름 얻어간 것은 조금 있다고 생각한다. 일단 신체, 나의 몸이란 것을 진지하게 생각해볼 기회가 되었다. 나는 120kg에 육박하는 거구이다. 보통 근육 때문에 무게가 많이 나가는 사람이 있지만 나는 논외로 쳐도 상관없다. 내 나름대로의 창피함 때문인지 몸이란 것에 대해서 필사적으로 무시해왔다. 농사를 계기로, 그러니까 주기적으로 몸을 사용할 때가 오면서 내 몸을 다시 생각해야할 필요성이 생겼다. 몸무게 문제만이 아니라 일에서의 신체의 리듬, 동선을 관리해야할 필요성을 느꼈고 일을 꾸준히 할 수 있는 몸을 만들어어야 겠다는 다짐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일이나 활동을 할 때 심지어 공부를 할 때조차 주의를 둘러보거나 챙기지 않고 자신의 일에만 몰두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농사를 하면서, 일을 같이 하면서 같이 일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이나마 몸으로서 이해하게 되었다. 이렇게 농사는 나에게 처음 겪는 종류의 자극이었고 좀 더 나의 몸과 사람들과의 관계들을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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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24 녹생평롱 136

이 글의 중심이 되는 키워드는 프란치스코 교황과 해방신학 그리고 방법론으로서 가난한 교회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행적, 발언들을 중심으로 소외받는 이들이 중심이 된, 해방신학을 이야기하고, 그들을 섬기기 위해서는 교회가 가난한 교회, 낮은 교회가 되어야한다고 이야기 한다.

 

동정 : 연민 / 동정은 행동으로 표출되고 연민은 마음으로 표출된다. 동정보다는 연민 때문에 우리는 더 마음이 아프고 마음이 묶인다. 마음이 묶여버려서 연민은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동정하는 사람은 타자를 통해 내 자신은 그것을 이미 갖고 있거나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자긍심을 느낀다면, 연민하는 사람은 타자를 통해 내 자신도 그것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결핍감을 느낀다. 요컨대 동정은 이질감을 은연중에 과시한다면 연민은 동질감을 사무치게 형상화한다. 물에 빠진 사람을 동정한다면 우리는 119 구조대를 부를 테지만, 물에 빠진 사람을 연민한다면 우리는 팔을 뻗어 손을 내밀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지독한 동정은 오직 사랑 때문에, 사랑의 내용을 망치는 쪽으로 나아간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지독한 연민은 사랑의 형식을 망가뜨릴지라도 내용을 채우려는 쪽으로 나아간다.-마음사전

 

불법이민자 수용소-람페두사섬

http://well.hani.co.kr/411015

http://weekly.donga.com/docs/magazine/weekly/2011/05/09/201105090500032/201105090500032_1.html

http://www.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31218_0012602117&cID=10105&pID=10100

http://w3.sbs.co.kr/news/newsEndPage.do?news_id=N1002033838

http://nancen.org/1090

이상적인 난민촌을 건설하는 방법

http://nancen.org/1143

복음의 기쁨

http://www.cbck.or.kr/book/book_list.asp?p_code=k5280&seq=402434

http://www.cbck.or.kr/bbs/bbs_read.asp?board_id=K1200&bid=13010162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en/apost_exhortations/documents/papa-francesco_esortazione-ap_20131124_evangelii-gaudium.html

해방신학

http://ko.wikipedia.org/wiki/%ED%95%B4%EB%B0%A9%EC%8B%A0%ED%95%99

http://mirror.enha.kr/wiki/%ED%95%B4%EB%B0%A9%EC%8B%A0%ED%95%99

http://jajuminbo.net/sub_read.html?uid=11137&section=sc8

http://www.laborsbook.org/book.php?uid=11&no=2586

 

노동 헌장

http://info.catholic.or.kr/dictionary/view.asp?ctxtIdNum=607&keyword=%B1%B3%C8%B2&gubun=01

https://www.google.co.kr/url?sa=t&rct=j&q=&esrc=s&source=web&cd=3&ved=0CDYQFjAC&url=http%3A%2F%2Forg.catholic.or.kr%2Fycw%2FText%2F%25EC%2582%25AC%25ED%259A%258C%25EA%25B5%2590%25EB%25A6%25AC%2F%25EB%2585%25B8%25EB%258F%2599%25ED%2597%258C%25EC%259E%25A5.hwp&ei=eESAU4u3JIWmkAXRnIH4Aw&usg=AFQjCNE0OpWotuIXQv47TbjPneks9nodnA&bvm=bv.67720277,d.dGI&cad=rj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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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21 녹색평론 136 원주지역의 협동운동과 장일순

녹색평론 136

원주지역 협동조합과 장일순

이 글은 한국 협동조합의 발원이 된 원주 지역 협동조합의 설립 배경과 과정, 그리고 장일순 선생님의 생명운동을 설명하고 이후 생명운동과 일본생협운동론의 부분적 수용을 기반한 한살림 설립배경을 설명한다. 그리고 지금의 정부주도의 협동조합이 결코 협동조합의 자율성, 자립성, 자주성을 해치지 않는 방향에서 진행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대표적인예로서 원주 그룹의 협동조합 운동을 들고 마지막으로 원주그룹과 같은 한국형 협동조합운동의 시도를 되돌아보고 배울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협동조합,

 

http://ko.wikipedia.org/wiki/%ED%98%91%EB%8F%99%EC%A1%B0%ED%95%A9

 

안티고니쉬 운동

http://fr.catholic.or.kr/louischang/whoego/5bu/antigonish.htm

http://www.kdec.re.kr/board/bbs_viewbody.php?code=bbs_edu_pds&page=8&number=269&keyfield=&key=&PHPSESSID=670583ef81a9b82b03c218fa7001a16b

 

삥땅 사건

삥땅 심포지엄

‘원주 내부에서는 뭐 데모고 뭐 이거 해가지고는 이 교회가 하는 목적 자체도 그렇고 짖 낮은 운동이다, 말하자면 그 생각하는 수준이 낮은 수준이다 이거야. 그래서 ’생명‘을 위주로 운동을 해야 되겠다 하는게..., 70년도 4월 달에 ’삥땅심포지엄‘이라는 게 있었어. ... 그게 생존권에 대한 심포지엄이야. ...’

http://cluster1.cafe.daum.net/_c21_/bbs_search_read?grpid=1J89o&fldid=aokH&datanum=145&openArticle=true&docid=1J89oaokH14520091112092021

http://www.justice.or.kr/korea/history/meet/200007_01.htm

http://www.catholicnews.co.kr/news/quickViewArticleView.html?idxno=11411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0042900329206021&officeId=00032&publishDate=1970-04-29&isPopular=0

 

원주 교구

http://ko.wikipedia.org/wiki/%EC%B2%9C%EC%A3%BC%EA%B5%90_%EC%9B%90%EC%A3%BC%EA%B5%90%EA%B5%AC

 

비노바 바베

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mallGb=KOR&ejkGb=KOR&clickOrder=LEB&barcode=9788992378789

http://wisdomhouse7.tistory.com/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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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16 해석에 반대한다. 내용 없는 신앙.

 

이 글은 내용 없는 신앙심, 종교적 동조에 대한 이야기이다. 글은 처음의 신이 죽은 이후에 각각의 맥락들을 짚어준 이후에 종교적 동조에 대해 설명한다. ‘종교적 동조는 오랜 대의가 내리막길에 있다는 사실이 밝혀질 때, 그 대의를 걷어찬다는 것 자체가 더 이상 불필요하다는 현실이 느껴질 때 비로소 시작된다.’ ‘대게 종교적 동조는 극히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로 이어진다. 예로서 종교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의식이 천박해지고 진실성을 잃게 된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책은 이에 대한 대표적인 예로서 발터 카우스프만이 편찬을 맡은 ‘Religion from tolstoy to Camus'이다. 이 책은 종교적 동조를 반영해준다. 이 책은 톨스토이, 니체, 윌리엄 제임스, 머튼 스콧 에슬린등 다양한 이들의 글을 담고 있다. ‘서문에서 카우프만은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종교를 ’지지‘한다. 위대했던 종교적 인물들이 대중적 종교에 찬사를 보낸 적은 없지만” 이라 말한다.’ 이는 결코 일반화 될 수 없는 각각의 종교들을 일반화 시킨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을 뭉뚱그려 종교를 지지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보통 사람이 종교를 믿는다고 할 때 그들의 철학적 주장을 신봉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저 그가 ‘특정한 상징 체계와 역사적 집단을 신봉한다는 뜻이다. ’또한 종교를 섬기는 이유가 예언적이고 비판적인 태도 때문이라면 우리가 착각하는 것이다.‘ 종교가 비판적인 이유는 거기서의 사회적 맥락, 특수한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비판을 그 비판의 뿌리와 분리시켜서는 안된다.‘ ’하나의 사상이 허약해 질때에는 그 사상이 도매금으로 다른 사상들과 타협하려 하는 시기이다. 현대적 진지함은 셀수 없이 다양한 전통속에 존재한다. 우리가 일체의 경계를 흐려놓은 채 이를 종교적이라 부른다면, 옳지 못한 지적 목적만이 횡횅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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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15 녹색평론 136호 무위당 잘 놀다가 가신 '자유인'

녹색평론 좌담.

무위당, 제일 잘 놀다가 가진 ‘자유인’

이철수. 화가

황도근 상지대 교수, 무위당학교 교장

김용우 원주 한알학교 교장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사회)

 

녹색평론 136호에 첫 챕터인 좌담 ‘무위당, 제일 잘 놀다가 가신 ‘자유인’을 읽었다. 김종철님이 사회자를 맡았고 주로 이야기 하는 것은 무위당과 오랜 시간 같이 있었던 분들이었다. 이들은 집적 무위당의 사상을 말하지 않고 우회해서 무위당에 대한 일화, 같이 지내면서 보고 체험한 이야기를 말한다. 그리고 난 나는 무위당에 대해서 하나도 사전지식이 없이 이 글을 읽었고 읽고 나서는.. 잘 모르겠다. 글 자체가 잘 모르는 이를 대상으로한 친절한 글이 아닌것도 있지만 이 글을 읽기위한 무위당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 없이 읽어서 그러한 듯 하다. 이 녹색평론 136호에 남은 무위당에 대한 2개의 글을 읽으면 조금 더 알지도 모르겠다. 그럼에 도 알 수 있는 것은 그 분은 글로서 표현하는 학자라기 보다는 행동으로서 삶속에서 표현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이제 장일순 선생님에 관한 2개의 글이 남았다. 이 글에서는 장일순 선생님의 삶의 방식을 중점적으로 담았다면 다음 두 글은 그의 철학, 사상을 다룰 것이라 짐작한다.

 

무위당 장일순

‘그동안 녹색평론도 무위당 선생님이 말씀하셨던 협동운동, 생명운동의 정신을 나름대로 확산시키는데 노력해왔습니다’ -본문중에서

‘젊은 시절에 일찍부터 학교도 설립 운영하셨고, 60년대 부터는 지역사회를 살리기 위한 신용협동조합을 전개하시면서 농촌자립운동에도 깊이 관여하시다가 80년대에 접어들어스는 ’한살람‘을 태동시키는데 중점적인 역할을 하셨다는 것은 우리가 잘 아는 사실입니다.’-본문중에서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의 연보 및 사상, 작품 등

http://www.muwidang.org/page/view.php/sub2-1

위키백과

http://ko.wikipedia.org/wiki/%EC%9E%A5%EC%9D%BC%EC%88%9C

저서

노자이야기 삼인

나락 한알 속의 우주 녹색평론사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

 

부미방 사건

http://ko.wikipedia.org/wiki/%EB%B6%80%EC%82%B0_%EB%AF%B8%EA%B5%AD%EB%AC%B8%ED%99%94%EC%9B%90_%EB%B0%A9%ED%99%94_%EC%82%AC%EA%B1%B4

 

 

 

 

 

백기완

위키백과

http://ko.wikipedia.org/wiki/%EB%B0%B1%EA%B8%B0%EC%99%84

유성기업 희망버스 관련 백기완 선생님의 인터뷰

http://www.youtube.com/watch?v=XPBCl-5Obq8

 

리영희

내가 아직도 기억하는 문구가 있다. 뉴스타파를 첫 시작에 나오는 리영희 선생님의 짧은 인터뷰인데 웬지모르게 가슴이 남는다. ‘내가 종교처럼 숭앙하고 목숨을 걸어서라도 지키려는 건 국가가 아니야. 소위 애국 이런 게 아니야. 바로 '진실'이야.’

 

저서

새는 좌 우의 날개로 난다 한길사

전환시대의 논리 창비

대화 한길사

우상과 이성 한길사

희망 한길사

역정 창비

21세기 아침의 사색 한길사

자유인 자유인 한길사

반세기의 신화 삼인

인간만사 새옹지마 범우사

분단을 넘어서 한길사

동굴 속의 독백 나남

역설의 변증 한길사

스핑크스의 코 까치

 

http://mirror.enha.kr/wiki/%EB%A6%AC%EC%98%81%ED%9D%AC

http://ko.wikipedia.org/wiki/%EB%A6%AC%EC%98%81%ED%9D%AC

http://www.youtube.com/watch?v=QCb2Uka7OS8

 

국대안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안 반대운동

http://ko.wikipedia.org/wiki/%EA%B5%AD%EB%8C%80%EC%95%88_%ED%8C%8C%EB%8F%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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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15 녹색평론 원전 제조사의 책임을 묻는다. 최승구 발제문

원전 제조사의 책임을 묻는다. 최승구

이 글은 일본에서 자이니치(재일조선인)들이 법원에 원전제조사도 원자력 사고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내용의 송장을 전달한 것을 기반으로 일본에서 자이니치들의 ,배경을 서술하고, 이후에 자이니치들이 원자력 문제에 대해 투쟁할 것임을 설명하고, 결국 원자력은 대안이 될 수 없으며 일부 열강(일본, 한국등)들이 원자력에너지를 다른 나라에 파는 행위는 용납될수 없다고 말한다. 이 글은 자이니치들의 투쟁들을 ‘히타치 투쟁’을 통해 설명한다. 일본이라는 민족국가 속에서 자이니치, 즉 재일조선인들은 경계에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일본의 특수성을 생각하면 재일조선인들은 일본에게 적대적인 위치에 있을 수 밖에 없다. 마치 대한민국에 사는 이주민 노동자와 비슷한 위치에 있을 것이라 어설프게나마 추측한다. 책에서 나왔듯이 이 자이니치는 같은 땅에 사는 사람이라면 모두 평등하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민족국가에 맞서 투쟁을 하였고 일정량의 성과을 쟁취할 수 있었다. 나는 언젠가 씽크라는 만화잡지에서 ‘노마드’라는 용어를 설명할 때 예로서 ‘외국인 노동자’를 이야기 했을 때 장면이 생각난다. ‘‘~(특정 국가)사람 아니다 나는 한국 사람이다’에서 담겨져 있는 뜻은 나는 국적을 지니지 아니한다. 그저 한국에서 사는 사람으로 인정해 달라, 라는 뜻이다‘ 라는 설명이었다. 비슷하게 글에서도 자이니치의 투쟁은 민족국가에 편입하고자하는 욕망의 발현이 아니라 그저 그 땅에 살고있는 사람으로서 평등하게 대우받을 권리의 주장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이니치의 투쟁은 민족국가에 대한 평등을 위한 투쟁으로만 한정되지 않는다. 외국인 근로자가 비정규직 투쟁에 연대하듯이, 재일 조선인 또한 그 땅에서 사는 이로서 받아야할 권리 뿐만 아니라 그 곳을 지킬 의무를 가지고 원전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재일 조선인, 자이니치, 외국인 근로자

자이니치, 재일 조선인은 대한 독립 이전에 일본으로 이주한 조선인들과 그 자손, 그리고 독립 후 일본에 이민간 한국인을 일컫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교포는 해당 국가의 영주권을 취득한 사람이다. 그 나라에서 태어난 2세 이하 뿐만 아니라 실제로 이주해서 10여년 넘게 체류하여 영주권을 취득하면 한국에서는 주민등록이 말소되고 해외교포로 등록된다. 그러나 재일교포는 일본에서 ‘외국인’으로 분류되어 일본내 선거권이 없다.

기본적으로 적을 둘데가 너무 멀리 있는 그럼에도 지금 밟고 있는 땅에서 또한 적대 받는 이들이다. 그렇기에 다양하게 바라볼 수 있는 특수한 위치인 듯 싶다. 이들은 ‘뿌리 뽑힌 자들’, 고향은 사라지고 적대적인 현실에 마주한 이들이며, 동시에 두 나라 국경, 경계에 서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들은 민족국가라는 테두리가 공식적으로나 비공식적, 관습적으로나 유지되고 있는 공간에서 ‘외국인’, ‘공동체 외부의 적대적인 존재’인 동시에 차별의 대상이다. 그렇기에 그들의 삶은 적대적 현실에 대한 투쟁의 삶이다. 책에서의 대표적인 예가 재일조선인의 투쟁이다.

 

원전제조사 책임 부가.

현제 원자력손해배상법은 책임을 사업자에게만 부과하고 원전을 만든 원전제조사에게는 어떠한 책임도 없다. 동시에 원전을 파는 것을 주도한 국가 또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후쿠시마 원자력사태의 원전 제조사 히타치는 사고 뒤에도 어떠한 비판 없이 원전 수출을 감행하고 있다. 이는 원전을 수출하는 것이 국가 전략으로 추진하는 국가와, 원전제조사들의 이해 관계 때문에 생긴 조항이다. 이러한 조항 덕분에 원전은 다양한 사건, 사고에도 불구하고 계속 확장하고 있다. 이에 39개국, 4,128명의 원고에의한 소송이 진행되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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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14 해석에 반대한다.

연극 구경 발제문

수잔 손택

수잔 손택은 현대에 최고의 연극들은 개인의 심리를 파고드는데에 전념한 작품들이고, 현대의 연극에서 들을 수 있는 공적인 목소리는 거칠고 귀에 거슬리며, 몽매하다고 비판한다. 이 ‘연극 비평’은 이러한 후자의 연극들을 비평한 글이다. 이 글은 아서 밀러의 ‘몰락 이후’ 유진 오닐의 ‘백만 장자 마르코’, 롤프 호흐후트의 ‘대리인’에 다다른다. 이 지점에서느 이 연극들의 한계들을 이야기 한다, 그리고 이들의 단점은 ‘어떠한 형식을 취하든, 관습적인 ’진지함‘을 통해서는 지성을 바랄 수 없다. 나는 오히려 희극을 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희극에서의 위험은 지적단순화가 아니라, 격조와 취향의 결핍이다.’ ‘격조와 취향의 결핍은 모든 문제를 희극적으로 다룰 수는 없다는 사실 때문에 연유한다.’ 라고 말한다. 이에 대한 예로서 영화, 찰리 채플린의 ‘위대한 독재자’와 스탠리 큐브릭의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혹은 어떻게 나는 근심을 그만두고 폭탄을 사랑하게 되었나’를 이야기 한다. 그리고 다시 연극으로 돌아와 가면이라는 연극장치를 쓴 연극들을 본다. ‘가면은 정서를 단순하고 뚜렷하게 보여주며 ... 짧은 시간 안에 미덕과 악덕을 정의해주는 효과적인 장치이다. ... ’검둥이‘라는 어리석은 인물상이 미덕을 가리키는 중요한 가면으로 떠오르고 있다. ... 이는 철저하게 고통과 희생을 당했다는 점 때문이다.’ ‘이러한 검둥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새로운 투쟁의식이 유태인을 전형적인 인물상으로 삼아 왔던 낡아빠진 자유주의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이 투쟁 의식을 발생시킨 정서가 자유주의라는 사상을 경멸하기는 했지만, 우리가 여전히 희생자 가운데에서 미덕의 이미지를 찾는다는 특징은 건들이지 못했다.’ 이러한 연극으로는 제임스 볼드윈의 ‘찰스 나리를 위한 부르스’, 르로이 존스의 단막극 ‘네덜란드인’이 있다. ‘찰리 나리를 위한 부르스’의 한계는 흑인이라는 ‘가면’을 사용했음에도 이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기보다는 다른 주제에 빠져들어 갔다는 것이다. ‘찰리 나리를 위한 블루스’에 경우에는 ‘금지된 성적 열망을 둘러싼 고뇌, 이 열망에 직면함으로써 야기되는 정체성의 위기, 이 위기에서 헤어나기 위해서 동원하는 분노와 파괴성’이 주제가 되었다. ‘걷보기에는 오데츠와 같지만, 내면은 테네시 윌리암스다’  '네덜란드인' 또한 흑인이라는 가면을 가지고 갔음에도, '성적인 입장만 표명하다가 인종 문제는 빼먹고 말았다.' 

 

이 글의 제목, 연극구경에서 알 수 있듯이 이 글은 수잔 손택이 그 당시의 연극을 보고 쓴 글이다. 하나의 작품을 깊게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의 연극의 흐름들을 몇 편의 연극들을 들어 설명한다. 대체로 작품에 대한 찬사보다는 가혹한 비평을 중심으로 글을 진행한다. 솔직히 이 연극들 중에 내가 집적 본 연극은 하나도 없다. 연극이라는 장르 자체가 진입장벽이 워낙 높은지라(비싼지라, 그리고 선택의 영역이 좁은지라) 연극 자체를 잘 보질 못하고, 거의 글로만 보는 것이 다이다.(솔직히 그 마저도 몇 안된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연극의 기억은 글이고 이는 무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슬픈 사실에도, 마치 글은 읽으면 한 작품을 다 알고, 그 작품의 비판까지도 다 아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글이 군더더기 하나 없고, 설득력이 있다. 약간의 열등감과 함께, 이 글을 읽으면서 내내 들었던 생각은 연극에 대해 감탄하기보다 글에 대한 감탄이 주를 이루었다. 표현 하나하나, 비유 하나하나가 재미있고 참신했으며, 동시에 번잡스럽지도 않았다. 표현, 문장 외에도 글로서 어떤 무언가 비판을 하려면, 어떠한 방식으로 비판을 해야하는지를 알게 해주는 글인듯 싶다. 이 글을 읽으면서 '아, 이게 비판이구나 내가 쓴 글은 뭐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글에서 내가 자극을 받은 것은 이러한 지점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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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12 녹색평론 136호 내가 겪은 후쿠시마 서의동

내가 겪은 후쿠시마 3년 -

서의동 경향신문 특파원으로 3년간 일본에서 근무

원전 마피아.

책에서 원전 마피아를 ‘부정부패한 정치권, 관료, 도쿄전력 및 원전 건설업체들이 이익을 나눠먹는 강고한 구조,’이라고 말한다. 즉 원전 마피아는 원전을 둘러싸고, 정부, 민간 회사, 학계간의 공생, 비리 관계를 일컫는다.

국책민영, 도쿄 전력, 원전 민영화,

‘일본의 원자력반전의 민영화 구조는 국책 민영으로 되어있다. 국책민영이란 정부가 중장기적인 원전정책을 세우면 민간기업이 원전을 짓고 돌리는 방식이다. 정부는 전력회사의 지역독점 체제를 보장하고 공사비는 전기요금으로 벌충하도록 지원해왔다. 발전비용에 일정한 이윤을 곱하는 총괄원가방식으로 전기요금이 산정되는 만큼 전력회사 입장에서는 원전을 지을수록 유리하다.’ -http://world.khan.kr/728 도쿄전력이라는 괴물

이러한 원자력발전의 민영화는 결국 그 원전으로부터의 안전을 위협한다. 결국 민간회사는 이윤을 추구하는 단체이기에 결국 안전보다는 이익을 중심에 두고 움직인다. 이러한 문제가 가장 두드러진 것이 사고 처리의 민영화이다.

 

http://www.rigvedawiki.net/r1/wiki.php/%EB%8F%84%EC%BF%84%EC%A0%84%EB%A0%A5 - 도쿄전력의 비판, 사례

사회적 소비

기존의 소비에서 고려해야 할 것은 상품의 효용성과 그것을 살 개인이 뿐이다. 그 물건이 어떤 과정에서 나왔는지, 누구를 착취해서 만들었는지 등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에 비해 사회적 소비는 다르다. 그 물건을 사고 소비하는 동시에 소비자는 그 물건에 담긴 그 효용 이상의 것을 가진다. 사회적 소비에서 소비자는 상품뿐만 아니라 상품의 사회적 책임 또한 같이 짊어진다. 예를 들면 공정무역 물건이 있을 것이다.

글 정리

회피되고 있는 피폭문제

앞서 책은 방사능의 문제가 실존의 문제 이며 이러한 방식으로 이야기 되어야한다고 말한다.그리고 그렇지 않은 현실, 방사능 피폭문제를 애써 무시하는 경향과 정확한 과학적인 판단보다는 신념의 영역으로 받아들여진다고 이야기 한다.

 

방사능 속에서 살아가기

그렇다면 일부 후쿠시마 지역을 제외하고 다른 지연은 방사능에게 무관한가? 이 글인 그러하지 않다고 말한다. 방사능 문제가 실존의 영역의 문제이고 이는 1차 당사자의 문제만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러한 예로서 식수문제를 예를 든다.

 

원전민영화란 무엇을 뜻하는가.

이 글은 원전사고에 대한 일본의 대응방식을 비판하고 이에 대한 원인으로서 ‘원전 민영화’와 사고처리의 민영화, 그리고 몇몇의 정치권, 관료, 건설업체, 도쿄전력이 이익을 나눠먹는 ‘겐시료쿠 무라’를 말한다. ‘정작 현장에서 근로자들이 일회용품으로 취급된다.’ 원전사고의 현장은 수많은 원청과 하청업체들이 다단계 피라미드 구조로 되어 있으며 이 과정에서 ‘임금가로채기가’ 발생한다. 그리고 이 글은 고보씨의 말을 들어 원청이 집적 노동자들을 고용해 안정성을 높이고, 노동환경을 개선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쉬움이 남는 시민사회의 대응

아베정권은 영토분쟁을 이슈로 원전 사태를 묻고 원전의 재가동에 필사적이다. 그럼에도 원전 이후에는 에너지 절약의식이 급격히 고양되었다. 소비적이던 전기 사용이 사태 이후에는 크게 달라졌으며 그리고 더 돈이 들어도 에너지절약형 상품을 사는 등 ‘사회적 소비’를 실천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일본은 원전 20기부의 에너지 소비량을 줄였다. 그리고 이 글은 마지막으로 일본의 탈원전은 이미 현실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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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09 녹색평론 136 정치를 왜 하는가.

정치를 왜 하는가. 하승수

 

1. 정치를 왜 해야 하는가.

이 글은 새로운 정치를 하겠다고 표방하고 있는 쪽은 실제 먹고 사는 문제, 사람이 사는 문제(밀양의 문제)에는 관심이 없으며, 밀양의 주민이 고통 속에 매여 있는 문제를 들여다 보지 않는다면 정치는 과연 왜 존재하는지 말하면서 기존의 정치판을 비판한다.

 

2. 기존 투표제 선거에 반하는 추첨제 민주주의

그리고 글은 새로운 대안적인 선거 방식으로서 추첨제 민주주의를 예를 든다. 추첨제 민주주의의는 기존의 투표로서 대표자를 선출하는 방식이 아니라 무작위로 추첨하여 대표자를 선정하는 방식이다. 예로서 글에서는 녹색당 대의원 선출 방식을 방식을 이야기 한다. 녹색당의 대의원 추첨방식은 30명당 평균 1명씩의 대의원을 뽑되, 지역별, 성별, 연령별로 할당한 후에 무작위로 추첨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추첨제 대표자 선출 방식이 좋은 지 설명하는 사례를 든다. (글 자체가 워낙 짧은 글이라 추첨제 민주주의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는다.)그리고 그 반대에 대한민국의 대의제, 그것도 기득권 중심의 대의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대한민국을 비판한다. 그리고 하승수는 ‘제도에 매몰되지 않으면서도, 제도를 바꿔야 한다’라는 고민과 그러한 제도의 영역 밖에서 작게라도 그런 대안들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3. 녹색당이 정치에 참여하는 이유

그리고 이 글은 실제 녹색당의 선거 사례를 들으면서 녹색당의 선거운동의 방식(개인의 삶을 희생하지 않는.)과 선거 운동 자체에서 얻은 에너지, 그리고 이익들을 이야기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밀양의 이야기를 들면서 결국에는 ‘할머니들이 포크레인 앞에 서지 않도록 할 수 있는 정치, 후쿠시마 같은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정치, 방사능과 유전자조작식품이 밥상을 위협하지 않도록 하는 정치, 도시의 반지하에서 빈곤과 고립을 견디다 못해 세 모녀가 자살을 선택하지 않도록 하는 정치’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는 녹색당이 하고 싶은 정치가 그러한 정치일 것이다.

 

하승수

현제 녹색당 공동위원장을 맡고 있으며, 저서로는 ‘행복하려면 녹색’, ‘지역 지방자치 그리고 민주주의’,‘젊은 지성을 위한 세계인권사’을 냈다.

 

추첨제 민주주의

자료. http://kgreens.org/61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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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25 해석에 반대한다. 이오네스코 요약, 발제문

이오네스코는 실존주의파에 속하는 프랑스의 시인, 소설가, 극작가이다. 그는 전위극, 부조리극의 대표로 알려져 있다. 내가 아는 그의 작품은 대머리 여가수인데 실제 연극을 본 것은 아니고 대본으로 보았다. 처음 부조리극을 접한 나는 나름 꽤 신선했다. 서로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만 계속 대화가 어긋나고 파탄나는, 언어 그 자체는 오가지만 그 사용자들은 다른 공간에 존재하는 듯한 대화는 평소 비슷한 상황을 많이 겪는 나에게는 공감가는 내용이었으며 재미있게 읽었던 것이 기언 난다. 그렇기에 이오네스코라는 작가는 나에게 호감형인 작가였다. 그래서 수잔 손택의 '이오네스코'를 보고 이 살짝 놀랐다. 이 글이 처음으로 말하는 것은 '이오네스코는 진부하다'이고 이 문장을 설명하는 것으로 글은 끝난다. 이 글을 계속 읽으면서 나름 부조리극의 대부라고 배웠는데 뭔가 칭찬하나는 나오겠지라고 나름 안타까운 마음으로 읽다가 글이 끝났다. 내가 가진 정보라고는 이오네스코의 대본을 읽은 기억과 이 글밖에 없어서 이 글로만 애기를 한다면, 이오네스코는 자기 노력, 공부, 자기 갈등 그리고 간절함이 부족한 예술가는 결국 재미없고 진부한 그렇기에 자기를 포장하려 하고, 방어하고자하는 사람이 되기 마련이지 싶다. 

 

이오네스코는 진부하다. 책은 이보다 이오네스코를 더 잘 표현하는 수식어를 찾지 못한 듯 하다. ‘이오네스코의 평론 ‘노트와 반노트’에는 연극을 도구로서 보는 견해가 있는데 이는 연극이란 현실을 뒤틀어 현실을 새롭게 인식하게 해주는 도구라는 것이다.’ 이는 ‘연극과 그 분신’에서 아르토가 이야기 한 것이다. 이오네스코는 아르토와 마찬가지로 문학적 연극을 경멸하며 모든 심리적 요소를 거부하여 리얼리즘이 거부한다. ‘이러한 이오네스코의 주장은 아르토의 주장을 희석시켜 나온 것일 뿐이다.’ ‘이오네스코는 증오 없는 아르토, 광기 없는 아르토이다.’ 그의 평론 또한 진부하고, 빈약할 뿐이다. 그의 글에서 쉽게 들어나는 구도는 소위 ‘아둔한 비평가들과 우매한 대중들’에 맞서서 투쟁하는 잘난 이오네스코라는 구도이다. ‘이오네스코의 완고한 자부심 뒤에는 고집스럽고 애처로운 불안감이 숨어 있다’ 또한 이오네스코는 자신이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그의 글은 같은 말을 계속 되풀이 한다. ‘이오네스코는 사상에 희생당한 예술가이다. 그의 작품에는 사상이 범람한다. 결국 그의 재능은 조잡해졌다’ ‘흔히들 그의 연극은 의미 없음, 소통의 단절에 관한 것이라 말하지만 이는 대부분의 현대 예술에서 본래 의미에서의 재재를 더 이상 논할 수 없게 됬다는 사실을 관과한 것이다. 즉, 제재 자체가 기법인 것이다. 이오네스코의 연극은 의미 없음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의미 없음을 연극적으로 이용 한 것일 뿐이다.’ ‘그렇기에 그의 연극의 결말은 지극히 일정한 형식의 반복이다. 처음부터 다시 하거나, 폭력으로 끝난다. 이는 그의 사상 때문이 아니라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악몽은 몸을 가눌 수 없는 황폐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오네스코의 연극은 전위적 감수성을 지닌 통극 희극이다.’ ‘또한 이오네스코는 사상에는 거의 재능이 없는 사람이며, 동시에 사상에 대한 혐오감을 지닌 인물이다.’ ‘그는 모든 입장을 취하는 동시에 거부하면서, 사상이란 인간이 만들어낸 가증스럽고도 쓸데없는 물건이라 넌더리낸다.’ 그에게 모든 정치는 파시즘이며, 악이다. 그는 반 지성주의를 표명한다.‘ '이오네스코의 연극은 처음에는 기괴한 것의 기괴함 때문에 흥미를 끌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끝에 가서 남는 것은 진부한 것의 진부함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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