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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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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기 전에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니

독립영화로 관객수 2만명을 넘긴 흥행작인데다가 잘 만들어지기는 했는데

관념적 사색이 강한 영화라는 리뷰가 거슬렸다.

그래서 볼까말까 망설이다가

‘삶을 성찰하게 하고 비관 속에 희망을 얘기한다’는 식의 낚시성 리뷰를 보고

혹시나해서 영화관을 찾았다.

  

처음부터 음울한 분위기 속에 상직적인 장면들로 시작한 영화는

관객을 긴장하게 만들었지만

관념적인 영화라는 사전 정보가 있었기에

마음을 내려놓고 그냥 흘러가는대로 바라봤다.

  

애인이 떠나버려서 홀로 남겨진 가출 소녀가 자살을 시도하다가 제인을 만나고

제인을 통해 가출청소년들의 그룹홈인 팸생활을 하게 되면서 이야기는 흘러간다.

서로의 과거나 삶에 대해서는 별로 얘기하지 않고

우울하고 끈적끈적한 분위기 속에서 덤덤하게 이야기는 흘러간다.

그러다가 충격적인 사건이 충격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일어나서 처리되고는

오갈 곳이 없어진 소녀는 완전히 분위기가 다른 또다른 팸으로 옮겨지고

이번에는 냉혹하고 질퍽한 분위기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이야기가 흘러간다.

  

시차가 왔다갔다 하면서 이야기구조가 엉켜있었지만

그리 난해하거나 관념적이지 않았다.

우울하고 질퍽한 분위기가 물씬했지만

삶의 밑바닥에서 풍겨나오는 그 분위기에 익숙하다면

그건 삶의 냄새였다.

그렇다고 그 분위기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이 아니라

친절하지는 않지만 나름 스토리를 갖는 이야기 속에서

서로의 삶들이 부딪치고 타협하고 싸우고 깨지면서

세상살이의 한 풍경을 비췄다.

  

가출해서 오갈 데도 없고 마음 둘데도 없는 소녀는

죽다가 살아난 후

잠시 불편한 안식을 찾는듯하다

다시 삶의 구렁텅이로 떨어져서 무기력하게 흘러가는데

그곳에서 발버둥치는 이들이나 무기력하게 따라가는 소녀나

진창이기는 매한가지였다.

진창은 원래 그런 곳이니까.

  

영화는 삶의 밑바닥이 진창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데

다큐멘터리처럼 차갑게 드러내는 것도 아니고

휴먼드라마처럼 감동적으로 각색하는 것도 아니었다.

영화적 기교에 빠져들지 않으면서

삶의 밑바닥을 뒹구는 이들이 느끼는 절망과 갈망을 느끼게 해주려고

아주 정성스럽게 다듬고 매만진 그런 영화였다.

혹여나 그들의 삶이 다칠까봐

자극적인 소재는 아주 조심스럽게 다루는 예민함도 갖추면서...

  

그러다보니 초반의 걱정은 사라져버리고

영화의 분위기에 푹 빠져들어서

많지 않은 대사 하나하나를 곱씹으면서 보게 됐다.

“네명이 케익 세조각을 먹으려고 덤벼들면 어떻게 되겠냐? 안 먹고 말지. 치사해지면 인간은 끝이야.”

“꿈갔던 시간은 끝나고 다시 이전으로 돌아갔다. 내 얘기를 들어줄 사람도 없고, 나에게 얘기를 들려줄 사람도 없는...”

“어떻게해야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지... 정말로... 모르겠어요.”

멋있게 폼을 잡으려는 대사가 아니라 삶의 진창 속에서 흘러나온 그 대사들은 내 가슴에 콕콕 박혔다.

  

영화는 아주 비극적이고 절망적인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야기 순서를 섞어놓아버림으로 영화는

이야기 흐름상 중간에 들어가야할 한 장면을 엔딩으로 보여줬다.

성소수자들이 모여 파티를 여는 자리에 초대받은 소녀는

“태어나면서부터 계속 절망적이기만 하다가 아주 가끔 행복이 찾아오는 것야. 그거면 됐지, 뭐”라며

자신이 트렌스젠더임을 드러내는 제인의 얘기를 듣는다.

그리고 제인의 마지막 한마디가 끝나고 참가자들은 즐겁게 노래하며 춤을 춘다.

“죽지 말고 오랫동안 쭉 불행하게 살아가자고요.”

 

일요일 낮에 극장에는 나 혼자 뿐이었다.

관객이 혼자뿐인 영화관의 장점은

울어야할 때 주위에 신경쓰지 않고

마음껏 울수 있다는 점이다.

그들이 즐겁게 춤추는 모습을 보며

눈물이 흘러내리게 내버려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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