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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여유 있게 푹 쉴 수 있는 하루였습니다. 지난 주에 휴가를 마치고 울산으로 복귀하고 나서 열흘 동안 정말 정신 없는 나날의 연속이었습니다. 각종 회의와 여러 가지로 처리해야 될 일들이 쌓이면서 열흘이 훌쩍 지나고 나니, 벌써 8월 15일입니다. 이제 입추도 지나고 말복도 지나서 그런지 아직도 낮에는 30도가 넘는 무더위가 지속되지만, 저녁이 되면 비교적 선선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이렇게 서서히 여름이 지나가나 봅니다.
작년 이맘때 개인적으로 많은 고민을 하면서 장기휴가를 논의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6개월을 제주도에서 푹 쉬고, 올 3월에 복귀해서는 지금까지 정말 정신 없는 나날의 연속이었습니다. 오늘 하루 잠시 숨을 돌리고 나서 다시 9월초까지는 또 바쁜 일정들이 기다리고 있고, 9월 중순에 추석 휴가를 다녀오다보면 곧 10월이 다가오겠군요. 이렇게 올 한해도 끝을 행해 달려가다보면 곧 연말이 되고, 이어 새해가 밝아오게 됩니다.
저는 항상 이맘때면 '올해를 어떻게 정리할까?'를 생각합니다. 올해는 특별히 개인적 화두를 잡고 고민해 본 것은 없지만 개인적으로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기에 2000년을 정리해보는 것은 많은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지금부터 슬슬 올해를 정리하기 위한 작업들을 해야겠군요.

얼마 전에 한 동지가 저에게 재정적 지원을 의뢰해왔고, 저는 매우 즐거운 마음으로 그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재정적으로 얼마를 지원 받는다는 것보다 제 주위에 선뜻 그런 제안을 하는 동지들이 있다는 사실이 저를 매우 가슴 벅차게 만들었습니다. 본인이 돈을 많이 버느냐의 여부와 상관없이, 또 지원 액수가 많으냐 여부에 상관없이 그런 동지적 애정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자체는 매우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2년 전에 제가 화두로 부여잡았던 '희망'이라는 문제에 대해서 생각을 정리하면서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힘겨운 현실에서 조그마하지만 소중한 변화들을 가져올 수 있는 작지만 소중한 관계들'에서 저는 '희망의 단초'를 발견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지금의 현실에서 그 '희망의 단초'를 확인합니다. (그렇다고 다른 동지들도 재정적 지원을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솔직히 제가 일하는 곳에서 활동비를 지급 받고 있기에 재정적 어려움은 별로 없습니다.) 저도 우리 동지들에게 그런 '작지만 소중한 관계'로서 다가설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또 한편으로 '돈'이라는 문제를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도 되었습니다.
2년 전에 '희망'이라는 문제를 생각하면서 이 문제와 연관된 현실에 대해서 생각을 정리해 본 적이 있습니다.

당장 먹고사는 문제에서부터 장난이 아닙니다. 학생일 때는 학생이라고 집에서 돈을 타고 썼지만 이제는 그럴 수도 없습니다. 내가 선택한 일이니 만큼 당연히 제가 제 앞가림은 하고 살아야 합니다. 물론 집에 손을 벌릴 형편도 아니고요. 그렇다고 제가 하는 일이라는 것이 월급이 나오는 것도 아니어서 생계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또 다른 방면으로 알아보아야 합니다. 운동을 하면서 가장 어려운 문제 중의 하나가 재정문제라는 것은 저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 아르바이트를 해야 합니다. 그래도 저는 운이 좋아서 2년쯤 전부터 지금하고 있는 일을 구해서 조금은 숨통이 트입니다. 울교협에서는 제가 제일 갑부입니다.
하루 여섯 시간 일해서 월급 50만원(60만원이었는데 올 초에 10만원 삭감되어서 지금은 50만원입니다) 받으면 방 값 11만원, 각종 세금이나 공과금으로 2~3만원, 교통비 5~6만원, 식비 5~6만원 하면 기본적으로 나가는 것이 25만원 선입니다. 최근에는 적으면 5만원에서 많으면 10만원까지 저금을 할 수 있는 여유도 생겼습니다. 그러면 10만원에서 15만원 정도 쓸 수 있는 돈이 남습니다. 처음에는 이 정도면 그런 대로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택도 없습니다. 담배 값에 술이라도 한 두 번 먹게 되고, 중간에 신발이나 옷도 사고, 책도 사고 하다보면 그마저도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결국 월말이 되면 3~4만원씩 돈을 꿔야 됩니다. 어쩌다가 제주도나 서울이라도 갔다오면 두 달 동안은 완전 꼼짝마라하고 초긴축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2년을 아르바이트하면서도 통장에 있는 돈은 백만원을 조금 넘을 뿐입니다. 이러다가 실직이라도 되면 6개월 정도 겨우 버틸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래도 저는 아직 혼자 살고 주위에 제가 당장 걱정해야 하는 사람이 없어서 월 50만원으로 빠듯하지만 살아갈만 합니다. 그런데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어 살거나, 주위에 생계를 지원해야 할 조건이라면 상황은 더욱 어려워집니다. 요즘 게가 받는 월급 정도면 저임금이기는 하지만 극도의 저임금은 아닙니다. 하청업체에서 하루 종일 일하고도 저보다 조금 많은 70~80만원선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중소기업 노동자들은 여성노동자들의 여구 저와 비슷하게 받거나 아주 많이 받아도 100만원을 넘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현대자동차와 같은 대공장 노동자들의 경우 매일 두 시간씩 잔업하고, 한 달의 반은 야간노동을 하면서 받는 월급이 100만원 안팎이고, 10년차가 넘어도 150만원을 겨우 받습니다. 사무직이나 서비스직에 있다고 해도 편차는 크겠지만 남자들의 경우 100만원에서 150만원 사이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동지들도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경우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부분 이 정도 선들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월급 50만원 받는 입장에서 100만원 받는 사람을 보면 나보다 두 배는 받으니까 살만하겠다고 생각이 들 수는 있을 것입니다. 총각일 때야 어느 정도 살만하겠지만, 결혼해서 애라도 있으면 50만원이나 100만원이나 큰 차이가 없더군요. 나중에 애가 둘 정도 되고 그 애들이 크면서 학원도 보내고 학교도 보내고 하다보면 최소 150만원은 받아야 아껴 쓰면서, 겨우 살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50만원이나 100만원이나 150만원이나 50보 100보입니다. 요즘 맞벌이들도 많이 한다고 하지만 부부가 맞벌이 해보아야 둘이 버는 것이 150만원에서 200만원 선입니다. 하지만 맞벌이하다보면 애들 맡겨야 하는 문제 때문에 돈은 더 들어가게 됩니다. 결국 깝깝해서 맞벌이까지 해보지만 생활은 특별히 나아지는 것이 없습니다.
먹고살려고 아둥바둥거린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실감을 하는 셈이지요.

이 글을 쓴지 2년이 지났지만 역시 세상은 달라진 게 없습니다. 저는 아르바이트 대신 활동비를 받는다는 커다란 조건의 변화가 있지만 빡빡한 생활은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노동자의 반이 넘는 500만명 가량이 비정규직 노동자라는데 대부분의 생활은 나아진 것이 없습니다. 엘리트들이 다닌다는 서울대 경비 아저씨들은 나이가 보통 40~50대인데 하루 10시간씩 경비를 서면서도 한 달 받는 월급이 50만원 정도랍니다. 내 후배 한 명은 섬유업체 하청에 다니는데 휴일도 특별히 없이 주야 3교대를 빡빡 돌아서 한 달에 50만원 조금 넘게 받는답니다.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은 부족한 생계비를 충당하기 위해 토요일 철야 특근이나 휴일특근도 마다하지 하는 형편입니다. 물론 이런 사람들보다 돈 많이 버는 사람도 많겠지요. 한 달에 200만원 이상 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경제가 많이 나아져서 다시 과소비가 문제라고 언론에서 떠들고 있는데 우리들이 살아가는 모양은 이렇습니다.

그래서 DJ DOC는 '부익부 빈익빈'이라는 노래를 부르나 봅니다.

돈 없어도 차 없어도 내가 자주 가는 곳은 압구정동. 내가 널 본 것도 압구정동. 돈, 쉽게 쓰는 돈, 아쉬운 줄 모르고 계속 쓰는 돈. 멋진 자동차에 니 몸에 쳐바른 돈, 끊길 줄도 모르고 니 주머니에서 계속 나오는 돈.
에라, 막써라, 막살아, 그래 너 잘났다.
돈으로 여자를 구워삶아, 적당히 익혀먹어, 세상 너 편한데로 살아 좋겠다. 부르조아.
A-HA. 돈 많아 부르조아 좋아하는 여자들이 너무 많아.
WHY, WHY. 왜 난 니들처럼 살 수 없나?
오늘도 어제와 같은 똑같은 하루는 반복돼.
오늘도 어제와 같은 똑같은 하루는 반복돼.
모두 그렇게, 다 각자 그렇게 다 살아갈 바 업이 있겠지. 그 길이 있겠지. 계속 다 목적은 다 같아. 그 끝은 돈. 하지만 다 달라, 그 이름 돈.
언제나 벗어날 수 없는 테두리에 끄트머리 지푸라기 하나 부여잡고 살아가리. 세상에 빠듯한 우리 인생살이. 대체 돈이 뭐니. 돈, 아니, 아니, 돈, 돈.
조에 사람이 사네 마네, 말이 되네, 돈, 돈
돈에 사랑을 하네 마네 얘기되네.
오늘도 내 외로운 주머니속 500원에게 물어봤어.
너 머니, 머니. 인생의 길잡인가 운명의 매개첸가.
내 나이 21. 나의 눈에 비친 세상, 돈에 돈에 의한 돈을 위한 세상.
오늘도 어제와 같은 똑같은 하루는 반복돼.
오늘도 어제와 같은 똑같은 하루는 반복돼.
당신은 부자, 그 덕에 땅도 사, 돈 남아돈다, 집도 사, 아줌마 옷도 사고 또 사고, 절대로 드러나지 않는 돈의 밑바닥, 얼마나 좋을까.
누군 없는 것도 서러워서 허리띠 꽉꽉 졸라메고 살아가는 판에 누군 여기 펑펑 저기 펑펑 막 써대고 살아가니 얼마나 좋을까. 흥청망청 아무 생각없이 펑펑. 돈 지랄한 인간들이 나라망쳐, 청춘바쳐 몸바쳐 열심히 일한 사람들만 피해봤어. 버림받은 직장, 소외된 가정, 불변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 있는 놈은 항상 있지, 없는 놈은 항상 없지.
오늘도 어제와 같은 똑같은 하루는 반복돼.
오늘도 어제와 같은 똑같은 하루는 반복돼.

특별히 색다를 것 없지만 속시원한 노래입니다. 그래서 일까요? 우리의 고상하신 어른들은 청소년에게 해로운 영향을 줄 수 있다면서 '18세 미만 청취불가'라는 빨간딱지를 이 음반에 붙이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게되면 18세 미만의 청소년들이 이런 좆같은 세상에서 보호될 수 있기나 한 것처럼. 18세 이상의 성인은 그런 세상에서 보호될 필요가 없을까? "현실적 억압에다가 억압의 의식을 부가함으로써 현실적 억압을 더욱 억압적이게" 만드는 것이 두려운 것이겠지요.
DJ DOC 보다 150년 전에 맑스는 이 문제를 문학적 표현을 사용하면서 철학적으로 정리했었습니다.

화폐를 통하여 나에게 존재하는 것, 내가 그 대가를 지불하는 것, 즉 화폐가 구매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나, 즉 화폐소유자 자신이다. 화폐의 힘이 크면 클수록 나의 힘도 크다. 화폐의 속성들은 나의 - 화폐 소유자의 - 속성들이요 본질력들이다. 따라서 내가 무엇이고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는 결코 나의 개정에 의해서 규정되지 않는다. 나는 추하다, 그러나 나는 아름다기 그지없는 여자를 사들일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추하지 않은데 왜냐하면 추함의 작용, 즉 추함이 갖고 있는 사람들을 질식케 하는 힘은 화폐에 의해서 없어지기 때문이다. 나는 - 나 개인적으로 보아서는 - 절름발이이다. 그러나 화폐는 나에게 24개의 다리를 만들어준다; 따라서 나는 절름발이가 아니다; 나는 사악하고 비열하고 비양심적이고 똑똑하지 못한 인간이지만 화폐는 존경받으며 따라서 화폐의 소유자 또한 존경받는다. 화폐는 지고의 선(善)이며 따라서 그 소유자도 선하다. 그밖에도 화폐는 내가 비열하기 때문에 겪는 곤란에서 나를 벗어나게 한다; 따라서 나는 존경할만한 사람으로 가정된다; 나는 똑똑하지 못한 사람이다. 그러나 화폐는 만물의 현실적인 정신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 소유자가 똑똑하지 못한 사람일 수 있겠는가? 게다가 그 소유자는 똑똑한 사람들을 살 수 있다. 똑똑한 사람들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자가 그 사람들보다 더 똑똑하지 않겠는가? 인간의 속마음이 동경하는 모든 것을 화폐를 통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나란 사람은 인간의 모든 능력을 가진 것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나의 화폐는 나의 모든 무능력을 그 정반대의 것으로 전환시키는 것이 아니겠는가?
화폐가 나를 인간적 삶에 결합시키고, 사회를 나에게 결합시키고, 나를 자연 및 인간과 결합시키는 끈이라면, 화폐는 모든 끈들의 끈이 아니겠는가? 화폐는 모든 끈을 풀기도 하고 매기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화폐는 보편적인 절연수단(切緣手段)이지 않겠는가? 그것은 진정한 분할화폐이자 진정한 결합수단이며 사회의 전기 화학적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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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문에 또한 화폐는 개인에 대해서도 그 자신 본질이라고 주장하는 사회적 등등의 끈들에 대해서도 그와 같은 전도시키는 힘으로써 나타난다. 화폐는 성실함을 성실하지 않음으로, 사랑을 미움으로, 미움을 사랑으로, 덕을 패덕으로, 패덕을 덕으로, 종을 주인으로, 주인을 종으로, 우둔을 총명으로, 총명을 우둔으로 전환시킨다.
화폐는 현존하면 활동하고 있는 가치의 개념으로서 만물을 혼동시키고 전도시키기 때문에, 화폐는 만물의 보편적 혼동이요 전도이며, 따라서 전도된 세계요, 모든 인간적 자연적 질(質)들의 혼동이요 전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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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인간이라고 전제하고, 세계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인간적 관계라고 전제한다면 너는 사랑을 사랑과만, 신뢰를 신뢰하고만 등등으로 교환할 수 있다. 네가 예술을 향유하기를 바란다면, 너는 예술적인 소양을 쌓은 인간이어야 한다; 네가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한다면 너는 현실적으로 고무하고 장려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 인간이어야만 한다. 인간- 그리고 자연-에 대한 너의 모든 관계는 너의 의지의 특정한 대상에 상응하는 너의 현실적·개인적 삶의 특정한 표출이어야 한다. 네가 사랑을 하면서도 되돌아오는 사랑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면, 즉 사랑으로서의 너의 사랑이 되돌아오는 사랑을 생산하지 못한다면, 네가 사랑하는 인간으로서의 너의 생활표현을 통해서 너를 사랑받는 인간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너의 사랑은 무력하며 하나의 불행이다.

너무도 섬득하리만치 적나라한 글이지만, 이 글이 쓰여진지 150년이 지난 현실은 맑스의 섬득한 묘사가 가소로울 정도로 더욱 섬득한 현실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나의 사랑이 "사랑을 하면서도 되돌아오는 사랑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무력하며 하나의 불행"이 되어서는 안되겠지요.

요즘 '스콧 니어링 자서전'을 보고 있는데 스콧 니어링은 이런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 같은 경제문제에 중압감을 느껴, 나는 세 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째, 지출을 최소한으로 줄일 것.
둘째, 학교 밖의 수입원을 늘일 것.
셋째, 수입의 일부를 노후생활을 위해 적립할 것.
이 세 가지 원칙 중에서 가장 지키기 힘든 것은 사치와 낭비가 미덕인 풍요로운 사회에서 소박하고 검소한 생활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일이었다. 첫 번째 단계는 없어서는 안 되는 생활필수품 외에 옷가지와 가재도구, 가구 같은 사유재산은 출세주의자에게나 가치가 있을까 대부분 아무런 본질적 가치도 없는 신분의 상징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었다.
나야 출세주의자가 될 의향도 없었고 출세주의자인 적도 없었으니, 갖고 싶은 것은 물론 꼭 필요한 것까지 최소한으로 줄이는 게 당연했다. 가능한 한 내가 먹을 것은 직접 재배해서 만들어 먹고, 빨래, 집짓기, 수선·수리도 손수 하고, 병을 치료하는 데 많은 비용이 드는 것을 피하기 위해 최상의 건강을 유지하고, 집세·이자·세금 같은 고정비용을 늘리지 않고, 이자를 물어야 하는 돈이나 물건은 절대 꾸거나 빌리지 않으며, 반드시 현금을 사용하고, 적어도 1년 간의 실직은 견뎌낼 수 있는 예비비를 적립해 두고, 언제 닥칠지 모르는 위급한 상황에 대비해야 하는 것이다.
진정한 경제학자로서 이러한 기본원칙을 따르다 보면, 최소한의 에너지와 돈을 지출하면서도 최대한의 만족을 얻게 되고, 분배문제를 계속 연구하여 개인경제와 가정경제의 효율성을 확립하고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나는 저소득 대학 강사의 행복한 삶을 위한 이 세칙들을 가정과 사회에서 실천하는 일에 착수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 일을 시작함과 동시에 나는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곤경에 빠지고 말았다. 가족과 친구, 친지들은 내 황금률에 따라 생활하지 않았다. 그들은 대개 인간의 행복은 자신이 소유할 수 있는 재화와 편의시설, 사유재산의 총량과 직결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 나는 어느 모로 보나 가진 것이 많을수록 행복은 줄어든다고 대꾸했다. 나는 이런 견해를 개진함으로써 그들의 일상생활과 행동양식, 기득권, 안락한 생활을 꿈꾸는 미래상에 이의를 제기했다.
어느새 나는 입센이 말하는 '사회의 적'이 되어가고 있었다. 내가 만약 나의 도덕률을 실천하고 다음 세대에게도 그것을 따르라고 권하는 데 성공한다면, 나는 기성사회를 교란하거나 심지어는 기성사회의 붕괴를 부추기는 불순분자가 될 판이었다. 그렇지만 내 입장에서 볼 때, 그 원칙들은 단지 좀더 공정하고 온정있고 소박한 생활방식으로 가는 길을 열어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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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경제적으로 전혀 부족한 게 없고, 대부분의 편의시설과 당시로서는 사치품이라고 할 만한 것들까지 많이 갖추고 살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나는 학창시절에 이미 부의 위험을 알게 되었다. 가진 것이 많은 사람들은 육신의 욕망에 따르다가 타락하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착취하여 자기 배를 불린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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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그 어느 때보다는 지금 나는 부가 타락했다고 확신하고 있다. 덧붙여 말하자면, 부유한 나라는 부유한 개인과 마찬가지로 재물 때문에 부패하기가 쉽다. 한 사람은 부유하고 다른 한 사람은 가난하다면, 그 두 사람 다 불평등 때문에 타락한다. 가난한 나라가 이토록 많은 세상에서 한 나라가 부유할 경우, 부패의 정도는 훨씬 심각하다.
인류 전체가 풍족하고 안락해진다면 모든 인간이 타락할 것이라는 결론이 나오는 것일까? 나는 '그렇다'고 대답하고 싶다. 확실하게 지속되는 안락보다 더 인간을 타락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 부를 피하지 않고 되레 그것을 추구했더라면 나는 분명 안이한 삶에 말려들었을 것이다.

물론 저는 금욕주의자는 아닙니다. 하지만 "가진 것이 많은 사람들은 육신의 욕망에 따르다가 타락하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착취하여 자기 배를 불린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런 현실을 바꿔내기 위해 운동이라는 것을 하는 것이겠지요.

무슨 논문을 쓰는 건 아닌데 오늘은 장황한 인용문들로 가득 채워지고 말았습니다.
'돈'이라는 가장 현실적인 문제 앞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문제를 결부시킨다는 것은 분명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평생 씨름해야하는 문제이고, 가장 현실적인 문제인 만큼 가장 힘겨운 문제이기도 합니다. 어렵고 힘겨운 것이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엄연한 현실이라면 "인간- 그리고 자연-에 대한 너의 모든 관계는 너의 의지의 특정한 대상에 상응하는 너의 현실적·개인적 삶의 특정한 표출이어야 한다"라는 맑스의 언명이 더욱 중요해집니다.
금욕주의자가 아닌 현실주의자임을 자처하는 저는 가장 중요하고 현실적인 이 '돈'이라는 문제 앞에서, 역시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또한 결코 회피할 수 없고 회피해서는 안되는 문제이기에 정면으로 부딪히면서 싸워나가야 하겠지요.
각자의 삶이 결코 여유로운 것이 아니면서도 동지를 위해서 다문 얼마라고 선뜻 지원할 수 있고, 오빠를 찾아오면서 없는 돈에 필요하리라 생각되는 것을 잔뜩 사들고 오고, 그런 동생에게 얼마 되지 않는 돈을 쥐어 보내고, 빠뜻한 살림에도 휴가비하라고 몇 푼 쥐어주고... 이런 일상적인 모습들에서 '되돌아오는 사랑'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한 선배랑 얘기를 하다가 제가 '이쁜 여자'에 대해서 농담반 진담반으로 얘기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 선배가 "어떤 여자가 이쁜 여잔데?"라고 묻더군요. 그래서 저는 우스개로 "테레비에 나오는 탤런트 같은 애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선배가 "세상에 안 이쁜 사람이 어디있냐? 사람은 다 이쁜거야?"라고 하더군요. 순간 띵했습니다.
공개적인 석상에서 얘기를 하거나, 글을 쓸 때는 "잘못된 부르조아적 미의식"이 어쩌고, "남성중심적 가부장적 문화"가 어떻고 하면서 떠들다가 일상으로 돌아오면 나 역시 그런 잘못된 문화에 물들어 있음을 느꼈습니다. 어떠한 사상이나 이론도 자신의 삶 속에서 체화되지 못한다면 아무 쓸모가 없음을 강조하면서도 제가 스스로 그 모순에 빠져있었습니다. 제 자신이 너무 한심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다 아름답습니다. 물론 사회적 위치와 관계들 속에서 추악한 인간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런 잘못된 관계는 고쳐나가야 하는 것이겠지요. 아름다움의 기준을 왜곡시키는 현실에서 정말 아름다운 모습을 만들어가야겠습니다. 제 스스로부터 동지들에게 그런 모습으로 다가설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군요.
오늘은 얘기가 길었습니다.
다음에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되돌아오는 사랑'으로 다시 만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2000. 8. 15
울산에서 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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