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리버풀 항만 노동자의 파업투쟁

리버풀 항만 노동자의 파업투쟁

­1995년 9월에서 1998년 1월까지­





크리스 베일리(Chris Berry)·영국 노동넷 활동가

번역: 원영수·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국제기획실장






1. 파업의 배경


리버풀 파업의 의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맥락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일국적-국제적 배경을 살펴볼 뿐만 아니라, 영국노동조합의 역사와 그 안에서 항만노동자들의 역할 등과 관련된 여러 측면을 검토해 봐야 할 것이다.

영국은 세계 최초의 산업국이며, 따라서 노동조합의 발생지이다. 초기의 노동조합은 숙련노동자들의 지위를 방어하기 위한 조직이었다. 이 '직능별' 노동조합은 비숙련 노동자들을 조합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정치적 입장은 온건했고 노동당을 지지했다.

1889년 최초의 항만파업은 영국의 노동조합운동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사회주의자들­칼 맑스의 딸인 엘레노어 맑스가 파업위원회의 서기였다­이 주도한 이 파업은 항만노동조합을 설립하는 데 성공했다. 이 노동조합은 곧 영국의 모든 주요한 항구에서 수만명의 비숙련 항만 노동자들을 모았다. 이에 고무된 다른 산업의 비숙련 노동자들 또한 조직하기 시작하였으며, 그것이 바로 '새로운 노동조합운동'(New Unionism)으로 알려진 비숙련 노동자들의 '일반'노동조합 결성의 흐름이었다.


"이들 비숙련 노동자들은 낡은 노동조합의 화석화된 동지들과는 아주 다르다. 낡은 형식주의적 정신, 예를 들어 기술공의 직능적 배타성과 같은 흔적은 전혀 없고, 반대로 하나의 우애로 뭉친 모든 노동조합을 조직화, 그리고 자본에 대항하는 직접투쟁을 위한 전면적 구호가 보인다."(주1)


일반노동조합의 결성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항만 노동자들은 노동조합 역사 전체를 통틀어 항상 영국의 노동조합운동에서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들의 힘은 영국이 섬나라이고 수입에 의존한다는 사실에 기인 한 것이었다. 항만노동자들의 전국적인 파업행동은 정부가 원치 않는 심각한 경제적 결과를 가져왔다.

항만 노동자들은 결국 운송일반노동조합(Transport & General Workers' Union, TGWU)의 한 분과가 되었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그들 자신만의 강력한 전통은 발전시켰다. 그러나 이 전통은 영국 노동조합운동의 나머지 흐름과 항상 일치했던 것은 아니며 자주 TGWU 지도부와 충돌하곤 했다. 과장되어서는 안되겠지만, 항만노동자의 전통중의 한 측면은 의심할 바 없이 국제주의였다. 하역작업의 성격상 국제주의는 전세계 항만노조의 특징이다. 1889년 최초의 파업은 다른 나라의 항만노동자들의 전폭적 지지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다. 특히 호주의 항만 노동자들은 거액의 파업기금을 영국 노동자들에게 기부했었다. 또한 영국의 항만노동자들도 수없이 많이 다른 나라의 항만노동자나 선원들을 지지하는 행동을 취했다.

그러한 경우가 1949년 5-7월에 일어났는데, 이 파업은 영국 항만노동자들의 미래 역사를 결정함에 있어서 주요한 역할을 했던 사건이다. 이 때 영국 전역의 항만노동자들이 어떤 캐나다 선박에 대한 작업을 거부했다. 이 행동은 생존권을 위해 투쟁하는 캐나다 선원노조를 지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파업은 현장의 숍스튜워드들이 주도했으며, 전국 수준에서는 TGWU 지도부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지도부는 노동자들에게 작업에 복귀하라고 명령하려 했다.

이와 같이 TGWU 지도부와 숍스튜워드 간의 힘의 시험 뒤에는 주요한 정치적 문제가 놓여 있었다. TGWU는 그 당시 노동당 정부와 긴밀히 협력하고 있었고 따라서 자신들이 조합원을 통제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싶어했다. 숍스튜워드는 조합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중 다수는 공산당원이었다. 영국 공산당은 수많은 현장의 조합들 사이에 비공식적인 숍스튜워드 조직을 결성했었다.

마침내 노동조합은 런던파업의 지도자 3명을 노동조합에서 추방하고 그 밖에 많은 지도자들이 노동조합 내에서 직위를 맡지 못하게 금지하였다. 모든 공산당원에 대해서도 비록 당원임을 증명하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금지조치가 취해졌다. 런던의 항만 노동자 19,000명은 추방당한 숍스튜워드를 지지하는 파업에 돌입했다. 이들은 결국 3천명의 군대의 위협 아래 일터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은 TGWU 지도부의 행동은 비공식적 항만 숍스튜워드 운동을 파괴하기는커녕, 오히려 운동의 성장을 자극하였을 뿐이다. 또한 항만노동자에 대한 TGWU의 통제에 새로운 위협을 가져왔다. 추방당한 조합원들은 TGWU에 실망한 다른 항만노동자들과 함께 다른 항만노조인 전국항만하역노조(National Amalgamated Stevedores and Dockers' Union, NASD)에 가입하였다. 이 노조는 런던에 국한된 작은 노조였지만, 새로운 조합원 가입과 더불어 곧 TGWU에 대한 전투적 반대파로 성장했고 다른 항구에서 TGWU 조합원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이 작업은 리버풀에서 특히 성공을 거두었다. TUC는 NSAD가 새로운 조합원을 TGWU에게 돌려주도록 강요하려고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이 모든 것의 결과, 오랜 기간동안 이론상으로 항만노동자는 오직 풀타임 TGWU 간부들에 의해 대표되었지만, 실제로는 그들은 흔히 TGWU와 NASD 조합원들이 포함된 비공식적 숍스튜워드 위원회에 의해 지도되었다.

1967년 정부가 개입하여 이 상황을 해결하려 하였다. 정부는 보고서를 준비하였고, TGWU도 이에 따르기로 동의하였다. 숍스튜워드들이 노동조합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받지만, 노동조합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되었다. 비록 이로 인해 숍스튜워드들은 전과는 달리 TGWU의 구조를 통해 활동하고 결국 NSAD는 사라지게 되었지만, 숍스튜워들이 비공식적 조직을 유지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이들은 전국항만스튜워드운동(National Port Steward Movement, NPSM)을 주도했으며, 이 운동은 영국의 모든 항구의 항만노동자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NPSM은 수많은 비공식적 유럽 항만노동자 회의를 조직하였다. 이 회의들의 주된 목적은 필요시에 서로를 지원할 수 있도록 서로 교역하는 항구의 노동자들 사이에 관계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유럽의 다양한 국가노동계획을 보호하는 것에 대해 특별한 강조점이 주어졌다. 이런 계획은 유럽에서 임시직 노동사용에 반대하여 항만노동자들을 보호하는 전통적인 방식이었다. 이는 또 항상 전세계 항만노동자들의 주요한 문제이기도 했다. 선박의 입출항에 의존하는 항만작업의 특성상, 사업주들은 항상 필요할 때만 고용하는 임시직 노동의 사용을 선호했다. 영국에서 전국항만노동계획(NDLS)은 1947년에 설립되었다. 등록 항만노동자들은 직접 이 정부소유 기구에 고용되며, 단지 간접적으로 여러 사업주에게 고용된다. 그들은 보장된 최저임금을 받았다.

1989년 마가렛 대처정부는 NDLS를 제거하였다. 이 조치는 항만 노동자들과의 대결을 촉발하기 위한 것이었다. 대처는 의회에 통과시킨 일련의 반노동조합적 법률로 무장하고 있었고 전통적으로 영국의 노동조합 중에서 가장 전투적인 부분인 광원노조를 이미 패배시킨 바 있었다. 대처는 이제 항만노동자들의 노동조합을 파괴하기로 결심한 상태였다. 그 결과 TGWU는 공식적인 전국항만파업에 들어갔지만 결국 패배했다. 파업동안 정부는 이직을 원하는 항만 노동자에게는 퇴직수당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수천명이 상황에 낙담하여 이 선택을 받아들였다. 모든 주요항만에서 전통적인 하역노동이 제거되고 비조합원 비정규고용이 정착하면서, NPSM은 붕괴하고 사실상 사라졌다. 오직 하나의 항구만이 남았다.­리버풀.

리버풀 항만노동자들은 제일 마지막으로 직장에 복귀했다. 그들은 리버풀에서는 비정규직 노동을 불사용, 숍스튜워드의 선출과 머시항 숍스튜워드위원회의 존속을 보장받고 나서야 복귀했다. 대처가 항만노동자들을 패배시키기 오래전에, 그들의 전통적인 힘은 항만업에서 새로운 기술의 발전으로 이미 심각하게 침식당하고 있었다. 대처는 이미 존재하는 상황을 이용할 수 있었다. 컨테이너화의 발달은 수많은 항만노동자들이 이미 1970년대 직장을 잃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항만 노동자들은 새로운 기술의 사용에 반대하고 현재보다 높은 수준의 인력사용을 주장함으로써 저항하려고 했었다. 컨테이너화의 산업에 대한 완벽한 충격은 리버풀 항에서 사용되던 노동력의 규모를 고려하면 드러난다. 파업과 해고 이전에 400명의 리버풀 노동자들은 1957년 16,000명이 다루었던 것과 같은 양의 화물을 처리하고 있었다.

컨테이너화에서 비롯된 다른 발전도 항만노동자들의 패배를 이해하기 위해 검토할 필요가 있다.­영국 동해안의 작은 항구의 엄청난 발전. 1960년대초 펠릭스토항은 약 100명을 고용하고 있었고 여전히 증기크레인을 이용하고 있었다. 오늘날 이 항구는 약 1,800명의 노동력을 고용하고 영국 전체 컨테이너 하역의 35%를 취급하는 최대의 항구가 되었다. 전국항만노동계획이 시작되었을 때, 100명 이하를 고용하는 소규모 항구는 배제되었다. 여기에 펠릭스토항도 포함된다. 나중에, 60년대와 70년대 이 항구가 성장하자 항만당국은 이 계획 외부에 남아 있기 위해 TGWU와 별도의 협상을 했다. 항만노동자들은 상용직으로 고용되어 있었고 개별 사용자가 아닌 항만당국에 직접 고용되는 형태였다.

1970년대 영국의 모든 주요 항구들이 컨테이너화를 둘러싸고 항만노동자와 사용자간의 일련의 대치국면에 돌입했던 동안, 펠릭스토항은 제한없이 컨테이너항을 건설하는 방향으로 급속히 전진했다. TGWU는 이런 상황에 대해 아주 흡족해 했다. 앞에서 서술한 것처럼, TGWU 내에서 항만노동자들의 역사는 현장 숍스튜워드 운동과 TGWU지도부간의 투쟁의 역사였다. TGWU 상근간부들이 직접 협상했던 펠스토우 노동조합협정은 노동조합 지도자들에게 전혀 그런 문제를 야기하지 않았다. 동시에 펠릭스토항의 노동자들은 자신을 전통적 의미의 항만노동자로 생각하지 않았다. 이스트 안젤리아의 농업지역에서 모집된 이들에게는 다른 곳의 항만 노동자들이 가진 역사나 전통이 전혀 없었다. 그들은 항만 숍스튜워드운동에 전혀 참여하지 않았고 NDLS를 둘러싼 투쟁을 그들과는 무관한 투쟁으로 바라보았다. TGWU 지도부는 이들이 이런 입장을 유지하도록 적극 후원하였다.

1989년 직장복귀 이후에 리버풀 노동자들은 고용을 유지하기 위한 일련의 투쟁에 직면하게 되었다. 1991년까지 항만노동자의 숫자는 1989년 1,100명에서 대략 500명으로 줄었다. 이들은 머시항 숍스튜워드 위원회에 기초한 전통적인 민주적 조합구조를 통해 고용불안에 대한 투쟁을 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1991년 40명의 정리해고에 관한 투쟁에서 회사측은 숍스튜워드에 대한 인정을 철회하였다. 1년이상 회사측은 TGWU의 상근간부들과 직접 협상하려고만 하였다.

1993년 현재 리버풀항을 관리하는 머시항만하역(Mersey Docks & Harbour Company, MDHC)사는 작업관행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겠다고 발표했다. 노동자들이 여전히 TGWU의 간부가 아닌 비공식적 숍스튜워드를 따른다는 것을 알고서, 회사측은 숍스튜워드를 인정하고 그들과 다시 협상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회사측은 숍스튜워드들이 자신의 역할과 영향을 제한하는 협정에 서명하는 데 공의하고 우편투표를 통해 선출하는 데 동의해야만 그들의 복귀를 인정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새로운 협정에 서명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투표용지의 후보명 옆에 별표를 하도록 하여, 비록 그 선출되더라도 조합이나 회사의 인정을 받지 못할 것임을 나타내도록 하였다.

회사측이 밝힌 근본적인 새로운 관행은 주말잔업수당의 폐지와 하루중 아무시간에나 시작하는 12시간 교대제의 도입이었다. 동시에 평균임금은 크게 삭감되었다. TGWU 간부들이 이런 변화를 수용한 반면, 숍스튜워드들은 이에 대한 투쟁을 이끌려고 시도하였다. 회사측은 모든 항만노동자들에게 90일전 정리해고통지를 보냄으로써 대응하였다. 회사측은 지역신문에 신규채용 광고를 내고 가능한 대체노동력으로서 1,800명을 면접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항만노동자들은 겨우 5표차의 다수로 이 변화를 받아들였다. 새로운 협약은 항만노동자와 회사측 사이에 엄청난 마찰을 불러왔고, 새로운 작업규칙을 위반한 혐의로 개인에 대한 징계가 끊임없이 이루어졌다. 어떤 경우에는 170명 이상이 그런 징계에 직면하기도 했다.



2. 파업, 1995


자본과 노동자의 갈등은 1995년 9월 전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된 파업에서 절정에 이르게 된다. 이 파업의 직접적인 원인은 1991년 MDHC사의 자금으로 설립된 별도의 회사인 토사이드(Torside)사가 고용한 젊은 항만노동자들과 관계되었다. 토사이드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은 MDHC에 직접 고용된 노동자들보다 낮은 임금을 받으면서 다른 항만노동자들의 지위를 침해하는 데 이용되곤 했다. 항만노동자들은 이 회사를 설립하는 데 동의했었다. 왜냐하면 이 회사에 고용된 대부분이 자신의 자식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 새로운 회사를 수용함으로써 항만의 미래와 노동조합 전통을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1995년 9월 25일, 5명의 토사이드 노동자들이 임금지불에 대한 분쟁으로 잔업을 거부했다고 해고당했다. 나머지 토사이드 노동자들도 이들을 지지하여 파업에 들어갔다. 다음날 그들은 MDHC 노동자들을 상대로 피켓팅을 했고, 그들도 피켓라인을 넘지 않았다. 9월 29일, 토사이드와 MDHC 노동자 500명 전원이 회사측에 의해 해고당했다. MDHC는 새로운 임시노동력을 확복하기 위해 캐나다계 용역회사인 드레이크 인터내셔널(Drake International)과 계약을 했다.

이에 맞선 리버풀 노동자들은 완전히 불가능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들은 원래 수만명의 항만노동자들이 참가했다가 결국 패배한 투쟁에서 남은 최후의 500명이었다. 그들은 이 투쟁의 일부였던 다른 항만에 지원을 호소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이제 임시직화 된 상태였고 그 어디에서도 노동조합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유일하게 노동조합이 남아 있던 펠릭스토항의 노동자들은 리버풀이 상징하는 노동조합운동에 동조하지 않았으며, 설사 그러하더라도 TGWU 지도부가 리버풀을 지지하는 행동을 취하지 못하도록 했다. 토사이드와 MDHC는 별도의 회사로 등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MDHC 항만노동자들의 파업행동은 동조파업(secondary action)이었고 대처의 반노동조합적 법률하에서는 불법이었다. TGWU 지도부, 특히 사무총장인 빌 모리스는 어떤 다른 TGWU 노동자들의 연대행동을 막기 위해 이 사실을 들먹이면서 그런 행동은 노동조합에 대한 법률적 소송을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실, TGWU 지도부가 표명한 이런 입장은 명백히 핑계에 불과하다. TGWU 지도부는 항상 리버풀 항만노동자들이 대표하던 민주적인 현장전통에 대해 적대적이었으며, 마침내 그것이 사라지게 되자 즐거워했다. 그들은 펠릭스토항에 존재하는 노사협조구조를 대단히 선호하였으며 항만 숍스튜워드운동이 마침내 패배한 이후에 이런 구조가 다른 모든 항만에 세워질 수 있기를 희망했다. TGWU 지도부는 한편으로 리버풀 항만노동자들에게 동조를 표했지만, 처음부터 이 투쟁을 패배로 바라보았다. 그들은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최선의 것은 최대한의 퇴직금을 받아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리버풀 항만노동자들은 그렇게 하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2년반 동안 투쟁했다. 이 기간동안 여러번 그들이 겪었던 곤경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투쟁을 끝내기 위해 42,000달러에 이르는 정리해고 수당을 받기를 거부하였다. 엄청난 곤경에 맞서 투쟁하려는 이런 결의 뒤에는 리버풀 항만노동자들과 그들 가족의 민주적 노동조합운동의 100년 전통이 놓여 있다. 1889년 이전에 항만 노동자들은 최하계층으로, 매일 임시 육체노동을 두고 서로 싸우는 미숙련 어중이떠중이 노동자로 간주되었었다. 그들은 민주적 노동조합조직을 건설하고 사수함으로써 이런 비인간적 조건에서 벗어났다. 이는 항만 노동자 공동체에서 위대한 자부심의 원천이었고, 특히 리버풀에서 강력했다. 각 세대는 이 전통을 사수하고 다음 세대로 넘겨주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이는 정리해고수당을 거부하는 한 항만 노동자의 말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조합증을 들고서 말했다. "나는 사후 세계를 믿는다. 내가 아버지를 다시 만나면, 아버지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았노라고 말하고 싶다."

영국에서 이 투쟁을 지속하면서 엄청난 어려움에 직면했으면서도, 항만 노동자들은 전국 항만스튜워드 운동 시대에 세워졌던 국제적 접촉을 새로이 재건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리버풀과 교역하는 유럽의 다른 항만을 방문하기 시작했고 그 곳의 항만 노동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로 인해 그들은 훨씬 더 멀리 떨어진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의 리버풀과 교역하는 다른 항만까지 방문하였다. 이들 항만 노동자들과 논의한 이후에, 그들은 1996년 2월 17-23일 리버풀에서 국제 항만노동자 회의 개최를 호소하였다. 이 회의에 리버풀,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미국, 뉴질랜드, 스페인, 그리스, 스웨덴, 이탈리아, 덴마크, 독일, 프랑스, 벨기에,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 등에서 50여명의 대표가 참석하였다.

1995년 12월, 크리스마스가 있는 주에 세명의 리버풀 노동자가 뉴저지주 뉴워크(Newark)항에서 리버풀에서 입항하는 어틀랜틱 컴패니언호에 대해 피켓팅을 시작했다. 3일간 이 항구에서 일하던 주로 푸에르토리코계 하역인부들은 리버풀 노동자들의 피켓라인을 넘기를 거부했다. 하역노조인 국제하역협회(International Longshoremens Association)는 뉴워크항 당국과 무파업협정에 서명한 바 있었다. 노동조합측은 하역 노동자들에게 피켓라인을 넘지 말라는 지시가 노동조합에서 내려오지 않았고 피켓라인을 넘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개인 양심의 문제라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항만당국에서 평소임금보다 더 많은 액수를 준다고 했지만 아무도 피켓라인을 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연대행동의 소식이 인터넷을 통해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뉴워크항의 행동이 있기 몇주전 노동넷 웹사이트가 투쟁하는 리버풀 항만노동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만들어 졌다. 노동넷은 또한 노동 메일링리스트와 개인들에게 항만노동자들의 투쟁에 관한 정기적인 메시지를 올리고 있었다. 아무도 어떤 결과가 나올지 확실할 수는 없었지만, 곧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를 방문했던 항만노동자들은 도착했을 때 일부 사람들은 이미 인터넷을 통해 그들의 투쟁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고 보고했다. 노동넷이 받았던 첫 번째 긍정적 반응은 일본의 항만노동자들로부터 였는데, 그들은 리버풀 노동자들에게 기금을 보내겠다고 알려왔다.

뉴워크 항만노동자들의 행동에 관한 소식은 특히 미국에서 굉장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동부해안의 하역 노동자들은 엄격한 계약조건 때문에 파업에 들어가는 경우가 매우 드물었고 따라서 그런 연대행동은 획기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노동넷은 이런 행동을 칭찬하고 리버풀 투쟁에 관해 더 많이 알고 싶어하는 수많은 메시지를 받았다. 이들 중에는 미국 서해안의 하역노동자들부터의 메시지도 있었다. 곧 이들중 한명이 리버풀을 방문하기 위한 준비가 이루어졌다.

이런 식으로 인터넷은 아직 방문하지 못한 항구들과 접촉하고 리버풀 투쟁을 전세계적으로 널리 알리는 데 특히 유용했다. 어떤 경우에, 예를 들어 캐나다에서 리버풀 항만노동자를 지원하는 전국적 네트워크들이 인터넷을 통해 세워졌다. 처음에 항만 노동자들은 여러 곳에서 오는 지원을 주로 투쟁기금을 모으는 수단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리버풀과 교역하는 일부 항구의 항만노동자들로부터 리버풀발 선박에 대한 행동을 기대했지만, 다른 곳에서 그들을 대신하여 노동자들이 파업할 것이라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리버풀과 교역하는 항구들이 직접 접촉하지 못한 지역을 방문하는 초기의 작업 가운데 많은 부분이 '항만여성회'(Women of the Waterfront, WOW)에 주어졌다. 리버풀 항만노동자들의 부인과 동거인들이 이 조직을 세웠다. 이 조직은 1985-86년 영국광원파업에 적극 참가했던 광원 부인들에게 기반을 두었다. 이들은 광부들과 그들 가족을 먹이기 위해 돈과 음식을 확보하려고 광산지역 외부에서 파업에 대해 지지를 확보함으로 파업에서 중대한 역할을 했었다. 이런 조직들에서 활동했던 여성들의 조언을 받아, WOW의 여성들은 이제 이런 종류의 사업을 국제적 무대에서 전개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엄청난 반응을 얻었고 항만노동자들에 대한 국제적 지지를 크게 증대시켰다.

항만 노동자들이 기금을 모으기 위해 미국 서해안을 방문했을 때 그들은 거기에서 재정적 지원 이상의 것을 받을 가능성이 있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들은 잠시 피켓팅을 했고 로스앤젤레스 항에 멈추었는데, 처음으로 리버풀항과 교역하지 않는 항구에서 행동을 획득했던 것이다. 그들이 세운 트럭의 기사들은 이런 행동에 깊은 감명을 받아, 그들이 리버풀 항만노동자들의 조합에 가입한 다음, 몇 주 후에 항만을 봉쇄할 수 있는지 묻기도 하였다.

이런 상황에 고무된 항만 노동자들은 1997년 1월 20일 그들의 투쟁을 지지하는 국제행동의 날을 선포하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한 국제노련의 간부가 100년동안 최대의 국제노동계급행동이라고 묘사했던 일이 벌어졌다. 27개국 105 항구와 도시에서, 항만노동자, 하역노동자 및 기타 노동자들이 현장집회, 대중집회, 영국대사관과 영사관 앞의 시위, 준법투쟁 및 30분에서 24시간까지의 전면파업에 참여하였다. 연대행동을 취했던 노동조합들 가운데 전일본항만노조와 미국 서해안의 국제항만노조(ILWU)는 국제운송노련(International Transport Workers Federation, ITF)의 회원이었다. 그들은 ITF가 공식적으로 이 행동의 날을 지지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비록 실제로는 어떤 행동도 조직하지는 않았지만, ITF는 이를 지지했다. 이는 TGWU 지도부를 격분시켰고, 그들은 ITF가 앞으로 리버풀을 지지하는 어떤 행동도 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이는 빌 모리스와 TGWU 지도부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그들은 항만 노동자들과 가족들에게 정리해고 수당을 받고 투쟁을 접으라고 설득하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그러나 국제적 지원은 항만 노동자들이 투쟁을 계속하도록 고무하였고 TGWU 지도부의 일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두 번째 국제행동의 날이 1997년 9월 8일 리버풀 숍스튜워드들에 의해 호소되었다. 이번에는 TGWU의 반대 때문에, ITF는 행동을 지지하지 않았다. 그러나 별다른 차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행동의 규모는 첫 번째 것보다 더 컸다. 특히, ILWU는 알라스카에서 로스앤젤레스까지 북미 서해안 전체를 24시간 동안 마비시켰다.

ILWU의 강력한 지지는 이제 리버풀을 지지하는 또다른 강력한 국제행동을 가져오는 데 이용되었다. 리버풀을 출발한 어떤 선박도 미국서해안에 가지 못했지만, 런던의 테임스항에서 출발한 선박은 갈 수 있었다. MDHC는 이 항구의 항만당국을 소유하고 있었고, 리버풀항을 이용하는 회사들 또한 테임스항을 이용하고 있었다. 1997년 9월말,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의 지역사회는 리버풀항을 이용하는 한 회사의 컨테이너를 선적한 채 테임스항을 출발한 넵튠 제이드(Neptune Jade)호에 대해 피켓을 설치했다. 하역노동자들은 하역을 거부하였고, 오클랜드에서 하역하려고 몇차례 시도했으나 결국 떠날 수 밖 에 없었다. 얼마 후 이 배는 캐나다의 밴쿠버항에 정박했지만, 지역사회와 하역노동자들로부터 비슷한 대접을 받았고 또다시 하역에 실패하고 말았다. 마침내 이 배는 일본으로 향했다. 그러나 역시 일본에서도 두 항구가 테임스항 컨테이너에 대해 작업하기를 거부했다. 컨테이너를 실은 채 영국으로 되돌아가는 비용은 엄청났을 것이다. 그 대신에 이 배는 홍콩에서 화물과 함께 팔렸다. 이 행동은 선박 소유주들과 보험사들 사이에서 커다란 두려움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국제행동의 날보다 훨씬 더 강력한 것이었다.

국제적 행동이 리버풀항의 노동자들을 지지해 일어나는 동안, 항만노동자들은 국내에서 분쟁을 끝내라는 압력에 계속 직면하고 있었다. 새로운 노동당 정부가 출범했다. 토니 블레어는 대처의 반노동조합적 법률을 폐기하기는커녕, 영국의 법률이 노동조합의 활동에 대해 가장 제한적이라고 자랑하였고(주2), 이런 방향으로 상황을 몰고 갈 의사를 분명히 하였다. 그의 중심정책은 영국을 세계경제에서 자본에게 매력적으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리버풀 항만노동자들이 보여주고 있는 영국의 이미지는 확실히 그가 없애고 싶어하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빌 모리스와 TGWU 지도부는 항만노동자들이 정리해고수당을 받고 투쟁을 끝내도록 강요하기로 결정했다. 항만 노동자들은 TGWU 내부에서 노동조합의 정책을 변화시키기 위해 투쟁해 왔었다. 노동조합의 파업을 포함한 캠페인을 통해 승리할 의도로 투쟁할 것을 촉구하는 일련의 결의안이 조합지부들에 의해 통과되었다. 1997년 12월 1일 TGWU 총집행위원회 회의에서 이 결의안에 관한 토론이 거부되었다. 사무총장 빌 모리스는 집행위원들에게 사본을 제출하기를 거부한 5쪽 분량의 법률적 권고안에서, 동의안에 대해 토의하게 되면 조합이 대처가 도입하고 노동당정부가 그대로 둔 고용법규를 위반하게 된다는 주장을 펼쳤다. 1998년 1월 26일 머시사이드항 숍스튜워드 위원회의 의장인 짐 놀런은 전세계의 지지자들에게 리버풀 항만노동자들이 오랜 투쟁을 끝내기로 결정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무대 뒤편에서, 그 자세한 내용은 결코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지만, TGWU 지도부에 의해 파업을 중단하라는 엄청난 압력이 숍스튜워드들에게 가해졌다.





3. 파업투쟁의 교훈


노동운동의 역사를 통해 노동자들은 자본가들과 투쟁했을 뿐 아니라, 조합의 상근간부에 대한 조합원의 민주적 통제를 유지하기 위해 투쟁해야만 했다. 영국 항만노동자들의 이야기는 지역사회과 긴밀하게 연결되고 또 동일화된 민주적 조합구조를 위해 투쟁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궁극적으로 그들의 패배는 생산과 분배를 지구화하고 그런 공동체를 파괴하는 새로운 기술에 의해 야기된 세계의 주요한 변화로 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리버풀 노동자들의 투쟁은 모든 사람에게, 그들이 대표했던 것 역시 지구화될 수 있고 또 지구화되어야 한다는 점을 명백히 입증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살고있는 리버풀 밖을 거의 벗어나지 못했지만, 전세계의 사람들이 자신과 동일한 문제에 직면하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ILWU가 발간하는 신문 '디스팻쳐'(The Dispatcher)의 사설은 리버풀 파업투쟁의 종결에 부쳐 이렇게 말했다. "우리 모두는 리버풀에 살고 있다!"

리버풀 항만 노동자들의 패배는 영국 노동조합 운동사 한 페이지의 끝을 장식했지만, 그들의 지난한 투쟁은 세계 노동운동사에서 새로운 장을 열은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들의 투쟁에서 얻는 교훈은 지구적 자본의 권력에 맞서 이길 수 있는 국제적 노동운동의 건설에서 중대한 역할을 할 것이다. 그들은 전세계 노동자들이 나아가야 할 길을 밝혔다.




<미주>


1) 헤르만 쉴루터에게 보내는 편지, 1890년 1월 11일, [맑스-엥겔스 서간집}, 463쪽.

2) {더 타임스}(The Times), 1997년 3월 31일.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