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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산일기

 

오래간만에 본 생생한 리얼리즘 영화였다.

가난을 피해서 목숨을 걸고 찾아온 이 땅에서 또 다른 가난과 차별을 겪어야 하는 탈북자들의 얘기를 이념적 잣대가 아니라 삶 그 자체로 그려낸 진지한 영화였다.

탈북자라는 그들의 신분이 아니라 그들이 살아가야 하는 삶 자체를 중심에 뒀기 때문에 탈북자의 얘기라기보다는 이 사회의 밑바닥을 살아가는 이들의 얘기라는 보편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이 큰 장점이었다.

감독 자신이 옆에서 같이 호흡했던 탈북자의 삶을 그렸기 때문에 그 생활과 대화가 거의 다큐멘터리 수준으로 생생했다.

 

대도시 인텔리의 부채의식과 같은 시선으로 소외되고 억압된 이들의 삶을 작위적으로 그려서 매우 불편했던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과는 정반대의 영화였다.

‘무산일기’에서 보여주는 밑바닥의 삶보다 1cm 정도 나은 삶을 살고 있는 나와 같은 사람에게는 이보다 더 공감이 가는 얘기가 있을 수 없다.

그 가난, 그 무시, 그 무관심, 그 차가움, 그 비굴함, 그 외로움...

그게 뭔지 아는 사람은 감정을 주입하면서 오버하지 않는다.

그냥 그 삶 자체를 보여주는 것만으로 모든 걸 얘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노래방에서 일하던 주인공이 노래방 도우미들과 함께 찬송가를 즐겁게 부르는 장면에서 눈물이 났다.

그 잠시의 즐거움과 따뜻함과 행복이 얼마나 눈물겨운 것인지를 알기 때문이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여 주인공의 모습이었다.

교회 성가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예쁜 여 주인공는 밤에는 노래방에서 불법으로 술을 팔고 도우미들을 고용해서 돈을 벌고 있다.

예쁘고 세련된 서울의 여자는 자신의 삶의 고달픔을 위로하기 위해 교회와 찬송가로 스스로를 위로하지만, 다른 이가 접근할 수 있는 선을 명확히 할 정도로 자기중심적이다.

자신의 삶을 침범할 것 갔다 싶으면 냉혹하다 싶을 정도로 차갑고 이성적으로 행동한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 순수함이 남아 있지만, 그 순수함도 자신이 느낀 미안한 마음만큼만 상대를 배려한다.

그래서 그만큼만 따뜻하게 대하지만 상대를 이해하고 배려하면서 관계를 넓혀가려고 하지 않는 자기중심적 이기심은 버리지 않는다.

전형적인 서울사람의 모습이었다.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에서 김복남의 친구였던 해원이 막판에 보여줬던 어설픈 이해와 동정이 없다.

그래서 더 현실적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렇게 큰 감동을 주지 못했다.

생생한 삶의 얘기들이 가슴으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쏟아 부어졌기 때문이다.

카메라의 시선은 감독이자 주연인 남자 주인공의 얼굴과 표정에 맞춰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바라보는 것들에 맞춰져 있었다.

그래서 남자 주인공의 뒷모습이 유난히 많이 나온다.

관객들에게 사회 밑바닥을 힘겹게 살아가야 하는 탈북자들의 삶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 마음이 너무 강했다.

그러나보니 삶의 힘겨움이 가슴으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보여지는 것이 되 버렸다.

그렇게 보여지기에 급급한 삶은 깊이를 가질 수 없는 피상적 삶이 되 버리는 것이다.

과거 80~90년대 학생운동 출신들의 민중소설이가 독립영화에서 흔히 나타났던 목적의식성의 과잉이 이 영화에서도 반복됐다.

자신의 자의식에 갇히지 않고 사회와 삶의 문제를 담담하고 생생하게 보여줬지만, 가슴으로 전해지는 것이 아닌 머리로 다가오는 영화의 한계를 보여줬다.

 

소비와 젊음의 상징인 홍대 앞에서 이 영화를 보고나서 오래간만에 서울의 밤거리를 걷다보니 ‘무산일기’가 내 얘기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가난하고 외로운 나는 이제 탈북자이기도 하다.

찬송가가 위안이 되지는 않겠지만, 누군가의 손을 잡고 찬송가를 부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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