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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리세요? (114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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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성민입니다.
요즘 어떻게들 지내십니까?


벌집을 쑤셔놓은 듯 온통 난리인 세상에서
혼자 조용히 살아가는 게 불가능해져서
무거워진 마음을 일으켜 촛불집회에 참석했습니다.


역시나 많은 사람들이 모였더군요.
10대 20대의 젊은 참가자들이 많았고
여성들의 높은 참여율이 눈에 띄었습니다.
음~ 헬조선에서 가장 쌓인 게 많은 이들이기 때문인가요?


여느 집회와 달리 참가자들의 자유발언이 많아서 좋았습니다.
자유발언을 신청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곤란할 정도였습니다.
“바람이 불면 촛불은 꺼진다”는 김진태 의원의 발언 때문에 집회에 참가했다는 고등학생
세월호 사고 때 자기 아들도 고2였다며 미안함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어머니
그냥 있을 수 없어서 대정읍에서 버스를 대절해서 참가했다는 농민


사람들 속에 앉아서 그 얘기들을 가만히 듣고 있는데
실수로 제가 들고 있던 촛불이 꺼졌습니다.
옆사람에게 초를 내밀었더니 살며시 불을 붙여줬습니다.
그렇게 온기가 전해져서 촛불이 다시 살아났고
‘박근혜는 퇴진하라’라는 구호과 함께 들어올린 촛불 속에 열기가 뿜어져나왔습니다.


촛불이 전하는 온기와 그 온기가 모인 열기 속에서
제 자신을 향해 외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당당하게 외쳐라!”

 


(연영석의 ‘이씨 니가 시키는 대로 내가 다 할 줄 아나’)

 

2


촛불집회에서 고등학생들의 발언이 많았습니다.
그들의 당당한 목소리를 들으며 예전 저의 모습이 비춰졌습니다.


제가 고3이던 어느날 학교에서 일찍 귀가를 시켰습니다.
이유도 모르고 일찍 집으로 가는데 버스가 시내 중심가에서 멈추고 말았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차로를 막고 데모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버스에서 내린 저는 대학생들의 데모를 구경하다가 자연스럽게 시위대열에 합류했고
그때 ‘전두환은 물러나라 훌라 훌라’하는 노래도 따라불렀습니다.
그게 87년 6월항쟁이라는 걸 나중에야 알게됐습니다.


저는 그때까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전혀 몰랐던 것입니다.
4.3이나 5.18이니 하는 말은 금시초문이었고
군사정권이나 독재정권이니 하는 말도 들어보지 못했었습니다.
세상이 시키는 대로 공부만했던 그저 착한 학생이었을 뿐입니다.


그런 저에 비하면 촛불집회의 고등학생들은 한참을 앞서 있었습니다.
역시 공부와 성적에 시달리고 있을 그들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를 잘 알고 있었고
그런 세상을 향해 당당하게 목소리를 높일줄 알고 있었습니다.
역사가 후퇴하다보니 나라가 이런 꼴이 돼버렸다고 투털거리고 있었는데
바닥에서 흐르는 역사는 저를 제껴서 앞서나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고등학생들이 사회적 문제에 대해 발언을 하면
근엄한 표정의 어른들이 나와서
“청소년들은 아직 정체성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훈계를 합니다.


정체성이 완성된 어른들이 만든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이라면
정체성이 완성되지 않은 청소년들에게 좀 배워야 하지 않을까요?

 


(‘거리의 시인들’의 ‘음악이 뭔데’)

 


3


30년전 대학생들 틈에서 ‘전두환은 물라나라’를 외쳤던 제가
지금은 고등학생들과 함께 ‘박근혜는 퇴진하라’를 외치고 있습니다.
30년이라는 세월이 무상함을 느껴질 정도로 빠르게 흘렀고
흘러가버린 세월이 허탈할 정도로 비슷한 상황에 서 있었습니다.


전두환, 노태우를 몰아내기 위해 그렇게 열심히 싸운 결과
결국 그들을 쫓아낼 수 있었습니다.
백담사로 도망간 놈을 잡아다가 결국 구속도 시켰습니다.
역사는 그렇게 치열한 투쟁 속에 한발자국 나아가는 것이려니 했지만
민주적 정권교체로 들어선 이들은 너무나 쉽게 역사와 화해를 해버렸습니다.
감옥에서 나온 전두환과 노태우는 다시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다녔고
그 자양분 속에서 몇 번의 세탁을 거친 그들은 다시 힘을 모았습니다.
그렇게 이명박이 들어섰고, 그 뒤를 박근혜가 이어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다시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왔습니다.


박근혜가 여전히 버티고 있는데
벌써 화해를 얘기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가장 유력한 야당의 대선주자라는 자가 그렇습니다.
이 짧은 순간에도 역사는 또 반복되려합니다.


지금의 고등학생들이 어른이 됐을 때는
뭔가 다른 이유로 거리에 나와야하지 않을까요?

 


(판소리 ‘순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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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민이가 종이접기를 몇 년 전부터 취미로 하고 있는데
이제는 하루의 일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조카들을 제외하고는 나눠줄 사람이 딱히 없어서
접어놓은 것들이 쌓여가고 있네요.
블로그에 ‘종이접기’를 보시면
허접한 수준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을 겁니다.
성민이가 접어놓은 것들이 탐나는 분들은 연락주세요.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나눠드리겠습니다.


성민이 메일 smkim1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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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해서 농사를 배워가고 있는 성민이가
첫해 농사로 울금을 수확했습니다.
꽤 많은 양을 수확해서 울금가루도 만들었습니다.
농사는 수확만이 아니라 판로도 고민 해야하는 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울금의 효능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졌으니
제주도 애월에서 수확한 울금이 필요하신 분은 연락주십시오.
010-7696-4454 (판매는 저희 아버지가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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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민이가 꿈을 다시 꾸기 시작했습니다.
성민이 꿈은 ‘혁명 휴양소’를 만드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와서 쉴 수 있는 곳’이
‘치유 속에 혁명이 씨를 뿌릴 수 있는 곳’이었으면 하는 바램이지요.
성민이는 돈도 없고 사람도 없어서
이 꿈을 이루려면 적어도 10년은 노력해야할 것 같습니다.
10년의 호흡으로 혁명 휴양소를 같이 만들어가실 분들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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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민이 부모님이 4남매를 키우던 집이 자식들이 하나 둘 씩 떠나면서 휑해져버렸습니다.
그 집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리모델링해서 민박으로 바뀌었습니다.
민박집 컨셉이 ‘부모님과 제주여행’이랍니다.
블로그를 만들었으니 한 번 구경와보세요.
여기 -> http://joeun0954.blog.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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