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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파시즘

독일 파시즘의 “녹색분파”의 경험은 생태론이 지닌 정치적 폭발성의 냉정한 신호이다. 이것이 생태 이슈와 우익 정치 사이에 내재적이고 불가피한 연계가 반드시 있다고 시사하는 것은 아니다. 이 글에서 개관했던 반동적인 전통 외에도, 그에 못지않은 좌익 해방적인 생태론의 전통은 독일과 그 외 여러 곳에 항상 있었다. 그러나 일정한 패턴을 식별할 수는 있다. “인류의 점증하는 자연 지배에 의해 야기된 문제들에 대한 관심들이 과도한 이데올로기를 채택하는 보다 많은 그룹들에 의해 점점 더 공유되면서, 가장 일관된 ‘자연을 위한 질서’라는 응답은 극단적인 우파를 정치적 구체화의 기초로 삼았다.” 이것이 그저 보수적이거나 무정치적인 환경주의의 표현을 직접적으로 파시스트의 변종과 결합할 때 보여 지는 일반적인 특징이다.
확실히 역사적 기록은 “자연에 따라 사회를 개혁하고자 원하는 이들이 왼쪽도 아니고 오른쪽도 아니라, 단지 생태 지향적일 뿐”이라는 공허한 주장이 그릇된 것임을 보여준다. 환경 테마는 좌로부터도 우로부터도 동원될 수 있고, 사실 그것이 무엇이든 어떤 정치적 포장을 갖기 위해서는 명시적인 사회적 맥락을 요구한다. “생태론” 단독으로는 어떤 정치도 규정하지 않는다. 그것이 정치적 의미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사회에 대한 어떤 이론을 통해 해석되고 매개되어야 한다. 사회적인 것과 생태적인 것 사이에 매개된 상호관계에 대한 유념의 실패가 반동적인 생태론의 특질이다.
이미 언급했듯이 이러한 실패는 가장 일반적으로는 “자연에 따른 사회 개혁”이라는 요구를 취한다. 즉 ‘자연 질서’ 혹은 ‘자연 법칙’에 대한 어떤 견해를 정식화하고, 인간의 요구와 행동을 그것에 종속시킬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결국 환경과 맺는 사람들의 관계를 형성하고 구성하는 근거를 이루는 사회 과정과 사회 구조는 연구되지 않은 채 방치된다. 그와 같은 고의적인 무지는, 모든 자연의 개념은 사회적으로 생산된다는 사실을 흐리게 하며, 권력 구조에 대해 질문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에게 명시적으로 ‘자연적으로 정해진’ 상태라는 위치를 부여한다. 따라서 명료한 사회-생태적 연구를 생태신비주의로 대체하는 것은 사회-자연 변증법의 복잡성을 정화된 일자로 환원하기 때문에 파국적인 정치적 반향을 야기한다. 이데올로기적으로 충만한 ‘자연 질서’는 타협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그것의 주장은 절대적이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현대의 녹색주의들에 의해 제출된 슬로건, 즉 “우리는 왼쪽도 아니고, 오른쪽도 아니며, 다만 앞쪽일 뿐이다”라는 슬로건은 역사적으로 순진하고 정치적으로 치명적이다. 해방적 생태 정치를 창조하기 위해 필요한 기획은 고전적인 에코파시즘의 유산과, 현대 환경 담론과 맺고 있는 그것의 개념적 연속성에 대한 적확한 이해와 인식을 요구한다. 비판적인 사회적 관점에서 벗어난 ‘생태’지향 단독만은 위험하게 불안정하다. 파시스트 생태론에 관한 기록은, 적절한 조건 아래에서는, 그와 같은 지향이 급격하게 야만으로 귀결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 ‘에코파시즘’중에서, 지넷 빌, 피터 스타우든마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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