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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신부 문정현

길 위의 신부 문정현

‘길 위의 신부’가 세상을 사랑하는 방법

“으응? 안 기자여? 내일은 오전에 익산에 있으니까 아침 일찍 내려오게.”
전화기로 들려오는 문정현 신부의 목소리는 활기에 넘쳤다. 참 신기하다. 거의 매일 같이 반미시위가 열리는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싸움’을 일삼는데도 문 신부는 지치는 법이 없다. 하루도 쉬는 날이 없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그가 마침 오전에 잠간 짬이 난다는 말을 듣고 부리나케 익산행 첫차에 몸을 실었다.
올해 예순 셋의 나이, 그는 오래 전부터 협심증에다 무릎 관절염으로 고생하고 있다. 특히 협심증은 시위 현장에서 몇 차례 구급차에 실려갔을 만큼 상태가 좋질 않다. 또 집회 때마다 플래카드나 시위용품을 빼앗아가려는 경찰에 맞서 두 손으로 이를 움켜진 채 뺏기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다 상한 어깨는 지금 불건 하나 제대로 들 수 없을 정도로 통증이 심하다. 게다가 1975년 4월 9일 인혁당 사건관련자들이 사형집행을 당한 날, 그는 시신마저 탈취하려는 박정희 군사정권에 맞서 시신탈취 차량 밑에 드러누웠다가 차량에 갈려 다리를 다친 일도 있었다. 그 후유증으로 지금까지 지팡이에 의지한 채 지내오고 있다. 그의 말마따나 온몸이 ‘종합병동’인 셈이다.
지난 30년간 문 신부는 그렇게 싸우며 거리의 신부가 되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만 꼽아봐도 용산 미군기지 이전, 군산 미군기지 이전, 매향리 쿠니사격장과 파주 스토리사격장 폐쇄, 소파개정, 전동록씨 죽음과 미선이 효순이 두 여중생의 죽음에 대한 항의, 이라크 침공과 대북 압박정책 규탄 등 끝없이 계속돼온 반미투쟁의 최선두에 섰다. 이러한 그의 행적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참으로 이 땅의 모든 모순의 집약점이 미국임을 절감하게 된다.
그러면서 문 신부는 미군 범죄에 고통 받고 죽임을 당하는 민중들 속에서 살다시피 했다. 전국 방방곡곡 미군 관련 문제가 발생하는 곳마다 찾아다니며 반미시위를 주도하고 이를 막는 경찰에 맞서 온몸으로 저항했다.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 있으니 민중들로부터는 ‘반미신부’로, 경찰들로부터는 ‘깡패신부’로 불리는 것이다.
시위 현자에서 문 신부를 만날 때마다 도대체 저 열정이 어디에서 나올까 궁금했다. 그 궁금증이 풀린 것은 그가 생활하는 곳, 익산의 ‘작은 자매의 집’을 찾고 나서였다.
2000년 여름, 필자는 문 신부와의 인터뷰를 위해 전북 익산시 월성동의 한적한 농촌마을에 위치한 ‘작은 자매의 집’을 찾은 적이 있다. 그곳에는 부모와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장애고아 40여 명이 생활하고 있었다. 모두 정신지체에 소아마비 등 이중 삼중의 복수장애아들이었다.
새벽미사 시간에 맞춰 도착한 필자를 제일 먼저 반겨준 이도 바로 이 아이들이었다. 낮선 사람에게 경계심을 느낄 법도 하건만 천진난만한 아이들은 필자의 가슴에 안기고 팔다리를 붙잡으며 정신없을 만치 환영인사를 건네 왔다. 그중 얼마 전 가출을 했다가 거지꼴로 되돌아왔다는 영훈이는 “아저씨, 신부님 만나러 왔어? 우리 신부님 요새 미국놈들 하고 싸우느라 바뻐. 근데 신부님이랑 미국놈들이랑 사우면 누가 이겨?”하며 물어오기도 했다.
그 아이들과 함께 미사를 올렸다. 영성체 시간에 문정현 신부는 와글거리는 아이들의 입 속에 일일이 사탕 하나씩을 물려주었다. 의사 표현조차 서툰 아이들에게 정성스레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넣어주는 것을 보면서 필자는 새삼 그가 신부임을 실감했고, 그 모습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그때 문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서울에서 집회를 마치고 아무리 피곤해도 밤늦게 꼭 내려 와요. 이 녀석들이 내게는 전부나 다름없어요, 아이들과 미사를 올린 뒤 함께 아침식사를 할 때가 제일 행복하거든요, 나를 보고 어디서 그런 열정이 나오느냐고 묻는데 그 답은 바로 이 녀석들입니다”
왁자지껄한 아이들이 온통 음식을 흘리며 밥을 먹는 동안 그는 아이들을 어루만지며 간밤에 아픈 데는 없었는지 일일이 살폈다. 식사를 끝낸 아이들을 특수학교로 보내고 난 뒤 그는 채 쉬지도 못한 몸으로 다시 투쟁의 거리로 나갈 채비를 서둘렀다. 그 모습을 보면서 필자는 정말로 그의 건강이 걱정이 됐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
“다 하느님이 주신 목숨인데 별일이야 있을라고. 더 이상 쓸모가 없다면 데려가실 거고, 아직 쓸데가 있다면 보살펴주시겠지.”

감나무에 묶인 아이

“이 나쁜 놈들아!”하며 경찰을 향해 불호령을 내리다가도 ‘작은 자매의 집’에 들어서면 ‘어이구 내 새끼들’하며 연신 매달리는 아이들을 안아주느라 정신없는 문정현 신부, 그가 장애아동들을 돌보는 일에 뛰어든 것은 1986년부터다.
당신 전북 장수군 장개성당에서 주임신부로 근무했던 그는 농민들과 함께 ‘소싸움’을 벌이느라 쉴 틈이 없었다. 새마을운동중앙본부장으로 있던 전경환씨(전두환 전대통령의 동생)가 병든 수입소를 들여오는 바람에 농민들이 엄청난 피해를 입으면서 터져 나오기 시작한 소싸움의 불길은 장수군에도 불어 닥쳤다. 격렬하게 전개된 농민들의 소싸움에 뛰어든 문 신부는 연일 농성과 집회로 바쁘게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 주민들을 만나기 위해 자연부락을 돌던 중 한집에서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했다. 부모가 들일을 나가며서 아이를 마당 감나무에 묶어 놓은 것이었다. 아이를 돌볼 대책이 마당찮았던 부모로서도 피치 못한 선택이었을 터.
“아이 옆에는 음식 그릇이 놓여 있더군요, 완전히 개를 키우는 꼴 이었습니다 순간 눈물이 왈칵 치솟았어요. 이 아이를 두고 내가 무슨 목회며, 농민운동인가 싶은 생각에 뒤통수가 얼얼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당장 성당 옆 묵은 창고를 개조해 방을 만들어놓고 낮으로는 그 아이를 돌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돌보기 시작한 아이들이 하나둘씩 늘다보니 어느새 10여 명이 되었다. 그 뒤 1988년 현재의 ‘작은 자매의 집’ 자라에 있던 집을 인수해 아이들을 본격적으로 돌보기 시작했다. 주로 시청이나 경찰서를 통해 소개받은 버려진 아이들이었다. 특히 다른 복지시설에서도 난감해하던 정신지체, 중복장애아동들을 데려다 키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일은 결코 순탄하게만 진행되지는 않았다.
“1992년일 겁니다. 그때는 지금처럼 아이들을 돌봐주는 사람도 제대로 없었죠, 그래서 제가 직접 봉고차에 아이들을 싣고 다니며 밥을 사 먹이곤 했어요. 두 놈씩 식당으로 데려다가 밥을 먹이는데 중간에 한 놈은 어디론가 도망쳐 버리고 또 한 놈은 차안에서 소리치고 울고..... 그땐 너무 힘들어 차라리 문을 닫을까도 생각했어요, 그런데 다행히도 이 일을 맡아줄 수녀님이 나타나더라고요, 다 하느님의 배려겠지요.”
아무리 정을 쏟아도 한번씩 가출하는 아이들이 있다. 그럴 때면 경찰과 시청을 찾아다니며 꼭 찾아달라고 신신당부를 해놓고 직접 찾아 나서기도 한다. 경찰과 시청에서도 싸움꾼 신부의 아이들에 대한 사랑을 아는지라 발 벗고 나서준다고 한다. 또 버림받은 장애아동들이 발견되면 그들한테서 ‘저, 신부님...’하며 연락이 온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데려다놓은 아이들이 이제는 40여 명이 되었다.
돌보는 아이들의 수가 늘어날 때마다 문 신부의 고민도 그만큼 늘어난다. 10여 년 새 시설의 규모도 커졌고, 외부 장애아동들을 위한 어린이집도 운영하게 됐지만 한편으로는 이 아이들을 언제가지 돌볼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깊어지는 것이다.
“규정상 만 18세가 되면 시설에서 나가야하는데 막막해요, 뾰족한 대책이 없으니 계속 데리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그래도 법적으로는 문제가 될 수밖에 없잖아요. 감사라도 나오면 솔직히 당국이나 저나 서로 답답한 노릇이죠. 이 아이들이 나가면 다른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독립시킨다면 어떤 식으로든 공동생활이 가능하도록 여건을 만들어줘야 하는데 그 돈을 제가 전적으로 부담하기도 힘든 일이고, 정부 지원 받는 것도 한계가 많고...”
그런데 실은 그보다 더 큰 고민이 있다. 밖으로만 바쁘게 돌아다니는 자신이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고 있는가에 대한 염려다. 그래서 어떨 때에는 자신을 대신해 아이들을 더 많이 안아줄 수 있는 절고 생각 바른 신부가 한 명 있었으면 싶기도 하다. 마침 괜찮은 젊은 신부를 한 명 찾아냈는데 문 신부로부터 영향을 받은 그 신부는 데모하는 일에 관심이 더 많아 걱정이라고 한다. 하긴 호랑이 밑에 고양이 새끼가 나오는 법은 없는 것이지만.
“데모하는 일이나 아이들을 돌보는 일이나 제 몸 속에서는 한 가지예요. 모두 하느님의 가르침 속에서 사는 이이죠, 가장 어렵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 속으로 돌아가는 것은 곧 하느님 속으로 들어가는 일입니다. 근데 참 신기해요, 전국의 시위현장을 쫓아다니다 돌아와 저 아이들을 보면 새로운 힘이 생기거든요, 저 아이들이 제 에너지의 원천인 거죠, 그럴 때마다 생각합니다. 아, 내게 이 아이들을 보낸 것이 하느님의 배려구나, 저 아이들을 통해 당신에게로 오는 길을, 다시 민중들 속으로 들어가는 길을 찾으라는 뜻이구나...... 아마 죽을 때까지도 저 아이들과 함께 있을 겁니다.”

미군의 표적이 된 소년 문정현

문정현 신부 하면 따라붙는 이름이 있다. 바로 문규현 신부. 전북지역에서 두 사람은 큰 신부, 작은 신부로 통한다. 동생인 문규현 신부와 함께 운동권 형제신부로 유명한 문정현 신부의 집안은 5대에 걸친 독실한 카톨릭 집안이다. 1979년에 작고한 아버지(문범문)와 현재 아흔이 넘은 어머니(장순례) 슬하의 4남3녀 중 문정현 신부가 둘째, 문규현 신부가 넷째다. 그 사이에 있는 누이도 수녀다. 한 대에 세 명의 성직자가 났으니 카톨릭 집안으로서는 큰 경사임에 틀림없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묻자 문 신부는 ‘한가한 소리하고 있다’며 면박부터 준다. 그러면서도 어린 시절 겪은 미군정과 6.25전쟁, 그리고 신부가 되기로 결심한 이야기를 펼쳐 놓았다.
문 신부의 고향은 전북 익산시 황등면, ‘작은 자매의 집’이 있는 월성동 바로 인근이다. 전주에서 살던 부모님이 그곳으로 옮겨와서 문 신부를 낳았다. 아버지는 농사지을 땅은 별로 없었어도 다행히 과자 만드는 기술이 있어 아주 궁핍하게 살지는 않았다.
친가와 외가 모두 독실한 카톨릭 집안이라 어린 시절의 기억도 신앙생활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6.25가 터지고 고향마을에 인민군이 들어왔을 때, 모두들 드러내놓고 신앙생활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문 신부의 부모는 아이들과 함께 이불을 뒤집어쓰고 하루 세 번식 기도와 찬송을 올렸다. 그리고 김대건 신부와 이승훈 선생 등 108위 순교 성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종교적 신념을 잃지 않도록 했다.
“한 날은 아버님이 이렇게 물었어요, ‘너 종교가 뭐냐?’ 그래서 ‘천주교입니다’라고 했더니 ‘공산주의자들은 천주교를 싫어하는데 그럼 인민군이 너한테 천주교를 믿느냐라고 물으면 뭐하고 대답할래?’ 하시는 거예요. ‘그래도 천주교를 믿는다고 대답할 겁니다’라고 말하니 대견해 하셨지요.”
문 신부의 아버지는 마을의 공소 회장을 할만큼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친일 반공으로 흘러간 여느 천주교인들과는 달랐다. 이념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청교도적인 신앙인이었다. 믿음과 의리를 중시하고 매사에 예의바르고 근본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진자 신앙인임을 강조했다고 한다.
미군정 때나 종전 직후 교회나 성당에서는 외국에서 들어온 이런저런 구호물자를 나누어주면서 주민들의 환심을 사고 선교에 나선 경우가 많았다. 워낙 어려운 시절인지라 물자를 나눠 줄 때에는 주민들이 교회나 성당으로 몰려들었다. 다들 오늘은 개신교 신자, 내일은 카톨릭 신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럴 때도 아버지는 옷 한 벌 얻어오는 일이 없을 정도로 처신이 엄격했다.
또 전쟁이 끝나고 고향마을에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된 반공포로들이 두 명 들어온 일이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모두 그들을 경원했지만 아버지는 그들을 헌신적으로 돌봐 카톨릭에 입교하도록 만들기도 했다.
“아버지가 얼마나 종교적 삶에 철저했는지 이런 일도 있었어요, 아버지의 매제, 그러니까 제 고모부가 노름에 빠진 일이 있었죠. 하루는 동네 어느 집에서 화투판을 벌이고 있었는데 그 소리를 듣고 아버지가 바로 쇠스랑을 들고 쫓아갔어요. 놀란 저도 뒤따라가 보니 화투판이 벌어진 그 집 방문을 열어젖히고는 쇠스랑을 화투판 위에 그대로 내리찍더군요, 놀란 사람들이 혼비백산해 다 도망갔죠.”
그런 아버지의 신실한 마음은 문 신부에게 그대로 전해졌다. 본당의 주임신부가 한번씩 ‘너는 공소 회장 아들이니 당연히 신학교를 가야 한다’고 말하면 문 신부는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중학교 때부터 소신학교(중고등학교 과정은 소신학교, 대학과정은 대신학교라 불렀다)를 지망했으나 전쟁통에 가지를 못하다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인 1955년 서울로 올라와 성신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1958년 카톨릭대학에 입학해 6년 과정을 졸업한 뒤 1966년 12월 16일 사제서품을 받았다.
이렇듯 문 신부의 어린 시절은 철저한 신앙생활로 이어졌지만 그 중에서도 잊혀지지 않는 운명과도 같은 사건이 하나 있다. 바로 미군과 관련된 사건이다.
전쟁 당시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마을에는 미군이 진주했다. 동네 초등학교에 진을 친 미군부대 주변에는 그 시절 어디를 가나 그랬듯 동네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아이들은 미군이 나타나면 어설픈 영어 발음으로 ‘기브미 쪼꼬랫’을 외치며 몰려들었다. 그 속에는 소년 문정현도 있었다. 그런데 한 날은 미군 병사 두 명이 초콜릿을 얻어먹기 위해 줄서있던 그를 불렀다. 그리고는 뒷산으로 데려갔다.
“저를 데려간 미군은 제 머리 위에 깡통을 올려놓더니 저를 세워놓고 표적 맞추기 놀이를 했어요, 그때 공포에 질려 부들부들 떨던 기억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지금까지도 미군은 그 당시 우리를 대했던 태도에서 달라진 게 없어요, 우리 국민을 인간 취급도 하지 않잖아요, 범죄를 저질러도, 심지어 사람을 죽여도 그들은 아무런 죄의식이 없죠. 그때나 지금이나 그들은 늘 점령군이니까요.”
소년 문정현은 그 공포를 신앙의 힘으로 극복했지만 청년 시절의 문정현은 그때의 두려움을 실천을 통해 극복하기 시작했고, 이제는 미국이 두려워하는 한국의 가장 대표적인 ‘반미인사’가 되었다.
신앙 속에서 자라온 어린 시절에 대한 후회는 없지만 한 가지 아쉬움이 남는 것이 있다. 그것은 당시 카톨릭 신앙이 우리 민족 고유의 풍습을 미신처럼 여겨 배척하는 바람에 관혼상제를 비롯한 민족전통문화에 익숙하지 못하다는 점이다. 하지만 필자에게는 그것이 하등문제처럼 여겨지지 않는다. 삼보일배로 유명한 동생 문규현 신부처럼 문정현 신부 역시 다른 종교에 대해 대단히 개방적이다. 그리고 노동자, 학생들의 마당극과 탈춤, 새만금에 세운 장승과 솟대 등 민중적 정서와 전통에 대해서도 익숙하고 늘 건강한 공동체 의식을 강조해왔다. 낡은 지배층의 민족문화 대신 집회시위 현장에서 공유된 건강한 민족.민중문화가 어느새 문 신부에게 생활의 일부분이 되고 있는 것이다.

형제의 약속, 형제의 눈물

“너, 이런 내 모습을 보면서도 신부가 되고 싶냐?”
“내가 형님 때문에 신부 되겠다는 건 줄 아슈? 나는 내 갈 길을 갈라요.”
창살 안의 푸른 수의를 입은 형의 말에 동생은 퉁명스레 대답했다.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형은 차가운 면회실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자신의 뒤를 이어 험난한 시대에 사제의 길을 택한 동생에게 축복을 드리는 카톨릭의 의례였다. 동생의 얼굴에서는 눈물이 쏟아졌다.
“형님, 나도 형님이 가는 길을 같이 갈 겁니다.”
“그래, 우리 고통 받는 민중들의 신음소리를 영원히 잊지 말자.”
1976년 5월 4일 서울구치소 면회장. 두 달 전 3.1 명동구국선언 사건으로 구속된 형 문정현 신부를 전날 사제서품을 마친 동생 문규현 신부가 면회를 왔다. 1966년 사제서품 이후 줄곧 억눌린 민중들의 삶의 현장에서 그들과 함께 해온 형은 그 뒤 1974년 정의구현사제단을 결성하고 군사정권과의 전면전에 나섰다.
그런 형을 눈물로 지켜보던 동생은 형의 길을 따르기로, 아니 험난한 그 길에서 형과 함께 동지가 되기로 결심하고 신학대학을 지망했다. 그리고 형보다 10년 뒤인 1976년 마침내 사제서품을 받았다. 한국현대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운동권 형제신분가 탄생되는 순간이며 그 후 30년 가까이 민중, 통일, 반미, 환경, 생명 등 우리 사회 모든 진보운동의 현장에 형제신부의 족적이 하나둘씩 새겨지기 시작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때의 기억을 형 문정현 신부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제가 민주화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민청학련과 인혁당 사건이 계기였죠. 특히 1974년 7월에 원주교구장이셨던 지학순 주교님이 유신독재를 규탄하는 양심선언문을 발표한 것이 결정적으로 작용했어요, 그때부터 이 정권과는 타협할 수 없다. 싸워야 한다는 각오가 커졌고, 특히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에게 사형집행이 이루어진 다음부터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유신독재에 맞섰죠. 그런 과정을 당시 신학생이던 문규현 신부가 쭉 지켜봐 왔어요. 인혁당 문제로 다리를 다쳐 고생을 할 때 동생에게 물어봤어요. ‘이 시대의 사제가 갈 길은 결국 이런 것인데 내가 당하는 이 꼴을 보고도 사제가 되어야겠냐?’ 동생이 그래요. ‘나도 그런 것쯤은 다 아는데 무슨 말씀을 그리 하시오.’ 동생은 사제서품을 받자마자 정의구현사제단에 가입했어요, 그 뒤로 오늘까지 27년 동안 둘도 없는 동지로 함께 한 길을 걸어왔습니다.”
문정현 신부는 자신이 겪는 고통을 보고도 사제의 길을 결심한, 아니 그 때문에 더욱 더 실천적 사제의 길을 걸었던 문규현 신부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그런 애정이 있기에 문규현 신부가 새만금갯벌 보존을 위해 서울까지 삼보일배에 나섰을 때, 기꺼이 그 길을 동행했고, 직접 캠코더를 들고 동영상으로 65일간의 역사적인 투쟁을 꼼꼼히 가록해두었다.
이런 형제의 동지애적 사랑이 가장 크게 꽃핀 것은 아마도 1989년 7월 전대협 대표로 임수경 씨가 방북했을 때, 문정현 신부가 문규현 신부에게 방북을 제안하고 임수경 씨와 함께 귀환하도록 권유한 일일 것이다.
“당시 7월 말 정의구현사제단 회의 때 제가 먼저 얘기를 꺼냈어요. ‘카톨릭 신자인 임수경을 제대로 놓아둘 수 없다. 이미 그 집안은 쑥대밭이 됐는데 우리가 그들을 지켜줘야 하지 않는가, 신부를 보내 임수경과 함께 오도록 하자’고 제안했죠.”
문 신부의 제안은 8월 5일 정의구현사제단 상임위에서 만장일치로 가결됐다. 문제는 ‘누구를 보내느냐’였다. 그때 문정현 신부는 문규현 신부를 추천했다.
그러나 그러한 마음을 먹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의 공안탄압 분위기로는 그 앞에 닥칠 고난과 역경이 어느 정도일지 짐작이 되고도 남았다. 사지에 보내는 심정과도 다를 바 없는 일이었다. 그 일에 문정현 신부는 동생을 추천한 것이었다.
“미국에서 공부중인 문규현 신부가 적임자라고 생각했어요, 당시 동생은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필리핀으로 발령 날 예정이었죠. 마침 전주교구에서 미국 동포사회를 방문하는 신부가 있길래 사제단의 결정사항을 문규현 신부에게 전하도록 했습니다. 뒤에 들이니 동생은 크게 고민하고 갈등했다고 하더군요. 결국 그 결정을 문규현 신부가 수용했죠.”
결정을 수용하면서 문규현 신부는 다른 사람을 통해 형에게 연락을 해왔다. 남쪽 여론이 심각하다는데 가서 돌아올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때 문정현 신부는 문규현 신부에게 분명히, 꼭 전달해달라고 신신당부하면서 이렇게 전했다.
“제3국으로 돌아올 수는 없고 돌아와서도 안 된다. 그대로 판문점을 넘어와라. 물론 잘못하다가는 미군한테 총 맞아 죽을 수도 있다. 그 자리에서 죽어도 좋다. 반드시 넘어 와라.”
동생은 형의 충고를 받아들여 ‘어린 양’ 임수경을 보호해 손을 잡고 판문점을 넘어왔다.
“그 이야기를 동생에게 전해달라고 하면서 펑펑 울었습니다. 내가 동생한테 죽을 수도 있다며, 그래도 죽을 작정을 하고 그렇게 하라고 말하면서 왜 그리 눈물이 나던지......”
이 대목에서 문정현 신부는 목이 메었다. 눈가에도 눈물이 그렁그렁 했다.
비밀리에 방북을 준비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교단 내에서 쏟아질 비난이 마음에 걸렸다. 궁리 끝에 찾은 묘안은 요코하마에 거주하는 하마오 주교를 찾아가 이 사실을 알리고 승낙을 받는 일이었다. 과거 일본 적군파에 의해 비행기 납치를 당했다가 평양에서 풀려난 일이 있는 하마오 주교는 남북관계의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던 터라 이를 흔쾌히 승낙했다. 이것이 후에 교단 내의 비난여론을 극복하는 데 큰 힘이 됐다고 한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카톨릭도 통일문제에 확실히 눈을 떴죠. 우리 민족의 통일은 성서적 견지에서도 마땅히 실천해야할 일입니다.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앞에 두고 어떻게 동족을 적으로 규정하며 그들과의 화해를 요구하는 사람들을 국가보안법으로 잡아넣을 수 있겠어요? 그런 성서와의 불일치는 정면으로 돌파해야 한다는 각오가 새롭게 생겨난 것도, 통일논의를 활성화하고 국가보안법을 철폐하는 싸움에 정의구현사제단이 앞장 설 수 있었던 것도 모두 문규현 신부의 방북 덕택이었습니다.”
문규현 신부의 방북을 결정했을 때, 아마도 그는 조성만 열사를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1988년 5월 명동 카톨릭회관 옥상에서 ‘조국통일’을 외치며 할복 투신한 조성만 열사(요셉)는 바로 문 신부가 전주 중앙성당에서 직접 영세를 주었던 잊지 못할 제자였다.
“성만이의 죽음을 전해 듣고 통곡할 수밖에 없었어요. 무엇이 젊은 세대들로 하여금 자신의 몸을 내던지도록 만드는가, 그렇게 되기까지 우리 사제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번민하고 고통 받고 기도하며 보냈습니다. 그리고는 우리가 가야할 길이 결국은 통일의 길이다라고 결심하게 됐습니다.”

“이놈들아, 화염병 더 가져와”

문정현 신부를 두고 전북지역의 노동자들은 ‘노동자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지역 노동자들이 해고당하고 끌려가고 수배되고 구속되면 그는 혼자서 단식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기어이 복직시키고 석방시켜냈다.
1999년 군산 기아특수강 해고노동자 2명이 경찰에 구속되었을 때, 문 신부는 혼자 군산시청 앞에서 규탄 기자회견을 갖고 노천 단식농성에 돌입해 기어이 구속방침을 철회시키기도 했다. 또 1998년 9월 만도기계 파업 때 익산공장에 경찰이 투입되자 혼자서 공장 안으로 들어가다 경찰에 의해 질질 끌려나오는 등 특히 노동자들의 문제에 대해서는 만사를 제쳐놓고 뛰어다녔다.
이렇듯 지역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안에 뛰어들고, 전국 각지에서 벌어지는 온갖 투쟁에 대한 청탁을 마다하지 않다 보니 대책위원장, 공동대표 등을 맡고 있는 조직만도 수십 개에 달한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또 있다. 바로 ‘문 대책’이다. 이에 대해 문 신부는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정리한다.
“사제의 직이란 게 뭐겠어요. 주님의 가르침을 다라 역사의 사건에 현존하고 연대하고 동참하는 것 아니겠어요? 특히 가난하고 억울하고 소외받는 이들의 삶의 현장에 함께 서 있는 것이야말로 사제의 역할입니다. 전 그 역할에 충실한 뿐이에요. 그것이 나의 신앙인 샘이고요.”
그러면서 그는 오늘의 문정현을 만든 것은 다름 아닌 노동자들이라고 밝힌다.
“제가 1970년대부터 이날까지 제법 명망가로 인정받고 있잖아요. 근데 그 시절 함께 했던 사람들은 지금 대부분 다른 길을 걷고 있어요, 정부 여당은 물론이고 한나라당, 심지어 관변단체에도 들어가 있더군요, 하지만 아무리 세상이 좋아졌다 하더라도 디제이 정부 때도 그렇고 지금 노무현 정부에서도 노동문제만큼은 유신시절로 되돌아가고 있어요. 노동자들이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고 노동자들의 투쟁을 백안시하는 것도 여전하죠, 저는 다만 그들의 정당한 투쟁을 지지하고 함께 했을 따름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의 저를 만든 것은 노동자들이에요. 내 눈을 틔운 것도 노동운동 덕택이고, 이 나이까지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고 여전히 현장을 지키도록 만든 것도 다 노동자들의 힘입니다.”
노동자들과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 한 가지. 1987년 7~8월 노동자 대투쟁의 열기가 전국을 휩쓸었을 때 전북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때 문 신부는 익산 창현성당 주임신부로 일했는데 성당 지하에는 지역노동단체인 ‘노동자의 집’ 사무실이 들어와 있었다. 한 날은 시위도중 경찰의 무자비한 진압에 만신창이가 된 노동자들이 사무실에서 화염병을 제작하다 문 신부에게 들킨 일이 있었다.
“밤에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 지하로 내려가 보니 ‘그 짓거리’를 하고 있더군요, 버럭 소리를 지르며 못하게 제지했죠.”
하지만 노동자들은 문 신부가 잠든 새벽 2시부터 몰래 작업을 계속 했다. 다음날 문 신부는 노동자들과 함께 집회에 참석했다. 이날도 경찰의 폭력진압이 자행됐고, 노동자들은 준비된 화염병을 던지며 맞섰다. 경찰의 폭력진압을 직접 겪어본 문 신부는 화가 나서 “이놈들아! 화염병 더 가져와!”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밤새 제작한 화염병은 이미 바닥5난 상태. 문 신부는 “밤새 만들면서 겨우 그것밖에 못 만들었냐”고 구박해 노동자들은 몸들 바를 몰랐다고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문 신부와 노동자들이 일체감을 이루게 되었음은 당연한 일, 그 뒤 노동자들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문 신부를 찾았고, 문 신부는 그들의 청을 기꺼이 들어주었다. 돈이 필요하다면 돈을 주었고, 잠자리가 필요하다면 잠자리를 주었다 피신처가 필요하다면 그들을 숨겨주었고, 끌려가면 경찰서로 쫓아가 기어이 풀어놓게 만들었다.
그런 문 신부가 있기에 노동자들은 든든하고, 또 문 신부의 신상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만사를 제쳐놓고 달려온다. 1999년 8월 문 신부는 군산 미군지지-미 제8전투비행단 울프 팩-앞 집회에서 미군 헌병들에게 잡혀 부대 안 초소로 끌려가 뒤로 수갑이 채워지는 수모를 겪은 일이 있었다. 이 소식을 듣고 지역의 노동자들이 삽시간에 모여들었다. 이들 노동자들의 시위로 그날 도로가 마비되고 군산 시가지가 온통 떠들썩했다고 한다. 이 일 이후 문정현 신부는 5년째 매주 금요일마다 미군부대 앞에서 벌어지는 금요집회에서 조금이라도 문틈이 벌어지면 쏜살같이 부대 안으로 치고 들어간다. 든든한 노동자들의 후원이 있으니 이제는 ‘잡아갈 테면 잡아가 봐라’며 배짱을 퉁길 정도가 되어 버린 것이다.
노동자들의 문제에 발벗고나서는 문 신부에게 고마움을 느낀 노동자들이 문 신부가 주도하는 미군기지 철수 사움에 적극 참여하는 것은 당연할 터. 해고됐다 복직된 노동자들이 시간이 나지 않을 때에는 그 부인이 아이를 들쳐 업고 집회에 나올 정도다. 이렇다보니 어느새 이 지역에서는 노동운동과 반미운동이 자연스레 결합되고 있다. 군산, 익산지역이 시문운동과 민중운동, 노동운동과 반미운도의 단결력이 높은 데에는 이처럼 문 신부의 역할이 컸던 것이다.

눈물로 정으로 끌어안은 세상

2000년 연말 청와대에서 문 신부에게 연락이 온 적이 있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 기념으로 청와대에서 종교인 만찬이 열리니 참석해달라는 요청이었다. 하지만 문 신부는 “제가 요즘 좀 바빠서 안되겠습니다”하며 일언지하에 거절했다고 한다.
사실 디제이는 문 신부하고도 각별한 사이이다. 1970년대 디제이가 박정희 정권에 의해 납치당하고, 가택연금 당하던 시절 문 신부는 군사독재의 인권탄압을 규탄하면서 유신정권과의 싸움에 나섰던 것이다. 그 후 문 신부는 디제이에 대해 각별한 정을 갖게 되었고, 대표적인 디제이 지지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1997년 한총련 연세대 사건 때, 김영삼 정부가 학생들에 대해 대대적인 폭력탄압을 자행하는데도 디제이가 이런 김영삼 정부를 비판하기는커녕 김영삼 정부와 똑같이 한총련 학생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것을 보고 문정현 신부는 그때가지의 지지를 철회했다고 한다.
“그 모습을 부면서 ‘아, 이 사람이 이제는 민주화보다는 권력쟁취에만 매몰되어 있구나, 앞으로는 개인의 영달로 빠져들겠구나’하는 느낌을 받았어요. 실제 디제이 집권기간 동안 그런 점을 무수히 확인했어요. 특히 노동자들에 대한 대접은 과거 군사정권, 독재정권과 다를 게 없더군요, 그나마 성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고 6.15공동선언을 합의한 일인데 그마저도 개인의 영광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자꾸 의구심이 들게 됐어요, 그러니 그 축하잔치에 갈 마음이 나겠어요? 나하고는 거리가 먼 자리라고 생각했죠.”
그는 디제이에 대한 이런 느낌은 노무현 정부에게서도 마찬가지로 든다고 한다.
“당선 이후 노 대통령은 ‘친미적 자주’란 말로 국민들을 현혹시키고 촛불시위에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솔직히 저는 지난 대선 때 노대통령을 찍지 않았어요. 그래도 이회창 씨가 될까봐 간이 철렁했고, 노무현 씨가 당선돼 안도감을 가졌죠, 그런데 취임한지 몇 달도 안 된 지금 참여정부가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노 대통령에게 기대할 게 뭐가 있을까 하는 심정뿐입니다.”
문 신부는 현실정치 문제에 대해서는 가다지 발언을 하는 편이 아니다. 어차피 자신이 가는 운동의 길과 제도권 정치의 길이 다르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에 대해서는 주로 원론적인 부분에서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할 뿐인데 한 가지 대목에서는 꼭 목소리를 높였다. 정치권으로 들어간 이들이 권력의 맛에 서서히 길들여져 현장에서 투쟁하는 이들을 무시하는 듯한 모습을 볼 때마다 화가 난다고 했다.
“보수우익 정치인들이 하는 말이야 어차피 말 같지도 않은 것이 태반이니 아예 무시해버리죠, 그런데 운동권 출신이란 작자들도 국회의원이랍시고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국가경제가 흔들린다는 등 반미시위로 한미관계에 이상이 생긴다는 등 하는 소리를 종종 듣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속상하다 못해 분노가 치밀어요, 제발 한때의 운동경험을 팔아 출세하려고들 하지 말았으면 해요. 그냥 자기들의 생각이 변했으면 변했다고 인정하면 그만이지 왜 현장을 끝가지 지키려는 사람들에게 시대가 변한 것을 모른다느니 하면서 헛소리를 하는지 몰라.”
입에서 불같은 내용들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 모습이 필자에게는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문정현 신부만큼 철저한 현장운동가가 어디 있겠는가. 1970~80년대 한때 자신과 함께 운동했던 재야의 명망가들이 이제는 권력의 한 축으로 스며들어간 상황이지만 그는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결 같다. 그가 서 있는 곳은 늘 민중의 살의 터전이었고, 그곳에서 단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았다. 그래서인가. 문 신부는 자신을 ‘남는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영원히 현장을 떠나지 않고 현장에 남는 사람......
현장에 남는 사람이란 곧 현장을 지키는 사람이다. 현장을 지키는 사람이야말로 민중을 지키는 사람, 역사를 지키는 사람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문정현 신부는 참으로 ‘남는 사람’이다. 역사에 남는 사람, 민중의 가슴에 남는 사람 말이다. 특히 과거의 얄팍한 운동경력을 팔아 출세를 기대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가는 오늘과 같은 시대에 문 신부야말로 하느님이 가르친, 의로움의 승리를 말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눈물 많고 정 많은 신부님, 어려서부터 음악과 예능에 소질이 많아서인지 그는 대단히 감성적인 사람이다. 그가 세상을 사랑하는 방법도 마찬가지다. 눈물로 정으로 감성으로 세상을 끌어안는다. 그렇기에 분노할 때에는 그 심정을 불같이 토해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랑을 우리도 한번 해보지 않을 텐가. 억울하고 힘없는 이들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사랑. 그러자면 우선 문 신부처럼 분노할 줄도 알아야 한다. 분노할 줄 모르는 사랑은 한낱 허상일지도 모르는 것이기에.
문정현 신부의 홈페이지(munjh.or.kr)에는 그런 자신의 한평생 여정이 담김 한 편의 자작시가 소개되어 있다.

휘몰아치는 회오리 피할 길 없구나
길바닥에 꼭 박혀 있는지라
쉽게 뽑히지는 않겠지만
뽑히면 날릴 수밖에
어쩔 수 없구나
최후를 맞는 날!

(<나의 운명> 전문)


- '행동하는 양심'중에서, 안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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