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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와 십자가 못 박음

반유토피아적 관점에서 보면 몸, 또는 삶 자체가 주체를 십자가에 못 박는다.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 육정이 아니다. 몸과 육정을 동일시하고 이 몸과 육정이-영원한 영혼인-주체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으로 간주한다. 몸의 필요를 ‘육정의 충동’-예를 들어 비고는 이 충동을 본능의 충동이라고 부른다-과 혼동하고 이 필요가 주체를 못살게 군다고 본다. 주체는 이 육체의 충동을 지배함에 따라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을 받아들인다. 이처럼 주체는 자신을 괴롭히는 이해와 쾌락에 대항해 자신을 방어한다. 여기서 표어는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이지 결코 십자가를 극복하는 것이 아니다. 삶 전체가 십자가 못 박음으로 바뀌고 구원은 현세의 삶을 저세상의 삶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십자가 수용은 단순히 수동적인 것만은 아니다. 몸의 필요가 십자가에 못 박는다.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자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를 지배해야 하고 못 박는 자에게 압력을 가해야 한다. 따라서 자신을 괴롭히는 몸을 괴롭혀야 한다. 십자가를 수용함은 주체를 못살게 구는 육체를 못살게 구는 것이다. 여기서 의도하는 바는 몸을 지배하는 것이다.
이것은 주체가 육체에 대항해 벌이는 십자군 전쟁이다. 사도 바울로에 따르면 몸이 해방되면 그 결과 육정과 죄가 죽는다. 그러나 반유토피아적 관점에서는 이와 반대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즉 육체에 대항한 십자군 전쟁의 결과로서, 즉 십자가에 못 박는 자를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몸을 지배한다. 이제 십자가에 못 박는 자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을 삶이라고 부른다. 켐피스는 [그리스도의 모방]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단 그리스도를 위한 고통이 달콤하고 즐겁다고 느끼면, 그대는 잘 사고 있다고, 지상낙원을 발견했다고 믿어도 된다.

십자가에 못 박는 자-즉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음은 이제 지상낙원의 감미로움으로 바뀐다. 이 감미로움에서 “세상과 육정이 너의 지배 아래 있을 것이다.” 이런 형태의 지상낙원에서 출발해 결정적인 형태의 천상낙원을 생각한다.

그러나 주님, 당신을 위해 모든 피조물과 작별하는 자, 영혼에 대한 갈망으로 자연을 침해하고 육체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 그래서 맑아진 의식으로 당신께 깨끗한 기도를 드리고 내적.외적으로 세속적인 것을 모두 털어낸 뒤 천사들의 합창 속에서 칭송을 받는 자는 축복받을지어다.

우리는 이 글에서 반유토피아적 주체의 패러다임을 볼 수 있다. 오늘날 다양한 형태의 반유토피아에도 이 패러다임이 나타난다. 주체는 몸과 대립하는 영혼이다. 비고는 이 영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의 삶 자체 안에 죽지 않는 존재, 스스로 재건하는 존재가 있다. 이 존재는 악에 저항하고 희생을 무서워하지 않으며 죽음을 이긴다.”
이 영혼은 “이해나 쾌락과 상응하지 않는 다른 차원의 가치”를 갖는다. 이 주체의 중심에 영혼과 육체의 관계가 있고 여기서 고통을 야기하는 것은 필요를 갖는 육체이다. 영혼은 육체의 필요와 쾌락으로 인해 고통 받고-따라서 영혼은 십자가에 못 박힌다-이 육욕은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영혼이 해방된다. 주체의 핵심으로서 영혼은 쾌락을 추구하는 살아 있는 육체를 구제할 수 없고 따라서 영생을 천사의 삶으로 인식한다. 이 삶은 필요를 갖지 않는 육체의 삶, 천상적 육체의 삶이다. 이 육체는 쾌락을 추구할 수도 또 그럴 필요도 없는 육체이다. 따라서 이 천상적 육체는 더 이상 필요 충족의 어려움을 갖지 않고 따라서 그 필요를 충족하는 ‘새 땅에서의 새 몸’이 아니다. 이와 반대로 어떤 필요나 쾌락도 느끼지 않는 육체이다. 즉 거세된 몸이다. 따라서 이 관점에서 본 지상낙원은 필요 위에 서는 것이지 결코 필요를 충족하는 것이 아니다. 즉 천국은 현세적 삶의 반대이다.

나와 함께 영원한 삶을 누리려면 현세적 삶을 무시해야 한다. 하늘나라에서 들어올림을 받고 싶으면 이 세상에서 너를 낮추어라. 나와 함께 지배하고 싶으면 나와 함께 십자가를 져라. 단지 십자가를 섬기는 자만이 참복의 길, 진정한 빛의 길을 발견할 것이다.

이와 달리 지옥은 필요를 느끼고 필요를 갖는 영원한 육체의 세계이다. 지옥에서 몸은 여전히 감각성을 유지한다. 즉 갈증, 배고픔, 고통을 느낀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천국이든 지옥이든 필요를 누리고 충족시키는 세계에 대한 상상력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지옥에서는 필요가 영구적인 것이고 그 필요로 인해 영구히 고통 받으나 천국에서는 그 필요가 존재하지 않는다. 육체적 감각성은 저주스러운 것이고 행복은 이 모든 감각성으로부터 몸을 해방하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이 사라질 때 삶을 지속함은 지옥이다. 이처럼 사도 바울로가 새 땅이라고 말한 것을 지옥이라 부르는데, 이는 루시퍼라는 말의 의미를 바꾼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육체가 영혼을 십자가에 못 박고 따라서 이 십자가에 못 박는 자-즉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는다. 해결책은 최후의 심판이다. 이 심판에서 출발해 감각성은 지옥의 토대가 되고 천국은 감각성의 영역에서 빠져 나와 천사의 합창에 참여하는, 거세된 천상적 육체에 바탕해 세워진다. 부활은 지옥으로 가는 자들에게만 일어난다.
천국은 영원한 평화이다. 지옥은 감작적인 매혹과 혐오의 혼합으로 나타난다. 중세적 지옥 개념에는 부정적인 감각성, 즉 갈증, 고통, 배고픔 등만 나타난다. 중세 말, 특히 16, 17세기에는 흔히 지옥을 감각적인 충족의 자리로 여겼다. 당시 농촌적인 분위기 속에서 용병들의 지옥에 대한 상상력을 폈다. 지옥은 용병들이 만취해 노름을 하고 매춘에 빠져 악담을 내뱉으면서 영구히 지내는 자리다. 용병들의 지옥은 커다란 사창가다. 바로 이 지옥은 또한 농촌의 전설에서 용병들의 천국으로 나타난다. 용병들의 천국과 지옥을 똑같은 것으로 보고 항상 거치른 감각성에 토대해 이에 대한 상상력을 편다.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아우에르바흐 지하주점의 장면도 이러한 상상력을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반유토피아적 그리스도교는 맑스가 추상적 인간의 종교라고 부른 것이다. 추상적 영혼을 위해 인간의 몸을 파괴하는 그리스고교이다. 토마스 아켐피스는 자연 침해, 정욕-그에게는 쾌락-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에 대해 말한다. 이렇듯 육체의 폭력적 파괴가 바로 반유토피아적 주체의 본질이다. 이 본질에서 출발할 때 해방된 몸을 ‘유물론적’ 표상, 또는 지옥으로 향해 가는 유토피아로 해석한다. 그리고 영성은 육체적 필요이라는 압박에서 빠져나오는 길로 해석한다. 인간은 단지 빵만으로 살 수 없는데, 반유토피아적 관점에서 인간은 이제 빵 대신에 강복으로 살아간다. 이런 식으로 성찬례 자체를 십자가에 못 박음을 기념하는 의미로 바꾼다. 왜냐하면 빵이 살로, 포도주가 피로 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체의 빵이 필요나 쾌락이 없는 영생의 천상적 몸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성체는 필요를 충족하거나 쾌락을 느끼기 위해 쓰이지 않는 빵이다.
이렇듯 육체와 그 감각성 파괴는 육체에 대한 경시로 이어진다. 즉 영혼을 위해 육체를 희생한다. 이것에 바탕해 가난에 대한 독특한 관점을 형성한다. 가난한 사람은 영원에 아주 가깝기 때문에 가난은 거룩하다. 필요를 덜 충족시키거나 덜 향유할수록 천사의 몸을 갖는 천상적 삶에 더 가까워진다. 여기서 가난에 대한 낭만적 관점, 그리고 금욕자에 대한 낭만적 관점이 나온다. 여기서 금욕자는 가장 자유로운 인간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금욕이나 가난으로 이야기할 수 없다. 그래서 가난에 대한 낭만적 관점에 토대해 권력층의 소비개념, 즉 생활양식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권력층의 소비는 필요 충족이나 삶의 쾌락과 연관이 없다. 반유토피아적 관점은 인간의 몸을 멸시하고 이해나 괘락의 세계와 무관한 영원한 가치들을 중히 여긴다. 이 가치들은 영원한 천상적 몸의 천상적 가치들이다. 그러나 이 가치들은 현세의 육체적 삶 안에 현존해야 한다. 즉 현세 안에서 몸을 취해야 한다. 이 영원한 가치들은 사회 전체에 이 가치들을 부과하는 자들의 소비양식과 생활양식 안에 나타난다. 즉 영원한 가치들은 이 가치들을 보유하는 자들의 생활양식 안에 육화하고 그들의 소비는 이 가치들을 구체화하는 방식이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맑스는 자본가의 소비를 자본을 대표하는 자의 지출이라고 말했다. 이는 자본가의 대표가 아니라 자본의 대표가 행하는 지출을 의미한다. 자본 물신의 지출은 자본가의 소비에서 표현된다. 자본은 이 소비를 통해 현존한다. 자본가는 자본을 위해 소비하지 자신을 위해 소비하지 않는다. 사회교리는 비록 무이식적일지라도 이와 같은 의미에서 곧잘 소유주의 ‘품위 있는 삶’에 대해 이야기 한다. 이것은 소유의 정식으로서의 소비이고, 갈수록 필요의 만족으로부터 멀어지고 영원한 가치의 향기로 바뀌는 소비다. 그런데 이러한 영원한 가치를 대표하는 또 다른 직업이 있다. 칠레의 아옌테 정부에서 의사들은 정부가 국가의 경제적 가능성에 그들의 소득을 맞추도록 요청했을 때 자기 직업이 갖는 고도의 품위에 따른 수입을 보장받아야 한다고 항의했다.
이런 식으로 고도의 영원한 가치들을 사회에 부과하는 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육체의 경시는 반드시 높은 수준의 소비와 생활양식이라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 생활양식은 경제적 가능성, 즉 다른 사람들의 필요 충족과 무관하게 결정된다. 그들의 소비는 영원한, 따라서 신성한 가치들의 향기이다. 그들 자신조차 이 소비를 거부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품위 있는 삶’을 살도록 강요받기 때문이다. 소비하는 자는 그들이 아니다. 영원한 가치들이 그들을 통해 소비하고 구체화된다. 따라서 그들의 소비는 영성적이다. 여기서 두 가지 형태의 가난이 나타나다. 즉 영원한 가치들을 대표하는 자의 지출로서의 소비로 이끄는 내적 무욕의 가난과 물질적 가난이 있다. 이 둘 다 천상적 몸의 영원성을 행해 나아간다. 물질적 가난은 부정적인 형태로 나아가고 무욕에 의한 가난은 긍정적인 형태로 다가간다. 이처럼 진정으로 가난한 사람은 무욕으로 가난한 사람이다. 즉 자유 의지로 가난한 사람이다. 따라서 진정으로 가난한 사람은 부자이다.
이런 식으로 주체를 이해하면 비인간적 현상으로서의 가난이 설 자리는 없다. 가난은 사실상 인간 파괴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하나의 이상처럼 나타난다. 이와 함께 육체의 파괴가 하나의 이상, 토마스 아켐피스에 따르면 지상낙원으로 바뀐다. 이와 달리 물질적 삶, 그리고 필요 충족에서 나오는 이상들은 이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하 위험으로 전락한다. 영원한 가치들을 대표하는 자의 지출로서의 소비를 옹호하는 자들은 자기 자신이 ‘인간적 존엄성’의 진정한 옹호자임을 느끼고 따라서 ‘필요로 하는 자들’의 물질주의에 양보할 하들의 이유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공개적으로는 이기주의를 옹호하지 않고 영원한 가치들을 옹호한다. 그러기 때문에 필요로 하는 자들의 물질주의에 어떤 것도 양보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필요로 하는 자들의 물질주의에 대항하는 것은 영원한 가치를 대표하는 자들의 소비와 생활양식을 옹호함을 뜻한다. 자신의 생활양식을 옹호하는 것이 이상주의이다. 따라서 가진 게 별로 없는 자들은 물질주의라는 축에 위치하고 많이 가진 자들은 이상주의라는 축에 자리한다.
이런 식으로 인간 파괴에 바탕 하는 생활양식이 출현한다. 따라서 육욕의 생활양식에 대해 사도 바울로가 제기한 문제가 다시 나타난다. 바울로에게 있어 이 생활양식은 신앙에 반하는 생활양식이고, 몸이 죽음을 지향할 때 생겨난다. 이것은 몸의 파괴를 위해 살아가는 생활양식이고 따라서 육욕의 생활양식이다. 바울로는 이 육욕의 삶을 비도덕적인 삶으로 보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도덕적 삶으로 간주한다. 다만 이 도덕은 죽음의 도덕이고 삶의 도덕과 대립하는 것이다. 육욕의 삶은 죄의 삶이고 고유한 규칙을 갖는 죽음의 왕국에서 죄로서 살아감이다. 신앙의 삶과 비교할 때 육욕의 삶은 반(反)세계를 이루고 죽음의 도덕을 구성한다.
반유토피아적 주체는 그 죽음의 도덕으로 살아가는 주체이다. 죽음이 그 주체 안에서 거주하고 있고 다른 사람에게도 죽음을 안겨준다. 이 죽음의 도덕은 삶의 도덕의 원리인 이웃사랑을 거구로 뒤집은 것이다. 국가의 경제적 가능성에 거슬러 자신의 직업이 갖는 고도의 품격에 따라 소비하는 자는 경제적 죽음을 가져온다. 그리고 이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의 죽음을 가져온다.
반유토피아적 주체의 관점에서 볼 때 영원한 가치들을 사회적으로 나르는 자들의 생활양식을 비판함은 단순히 양적 소득분배의 문제가 아니다. 영원한 가치들을 공격하는 것이다. 다라서 이들은 소득에서 자신의 몫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가치들을 옹호한다. 이런 식으로 이들은 이 가치들을 적극적으로 옹호해야 한다. 따라서 경제적 죽음과 더불어 영원한 가치들을 공격하는 자들에 대한 폭력적 죽음이 나타난다. 이렇듯 영원한 가치들을 폭력적으로 옹호하는 역사적 시점에서 영원한 가치들을 나르는 자들은 스스로 ‘그리스도 왕의 전사’로 자처한다. 이것은 몸의 파괴를 물리적으로 수행함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반유토피아적 주체의 육욕적 삶은 또 다른 새로운 차원을 갖는다. 이 차원은 육신의 파괴, 즉 인간적 삶의 악화를 즐기는 것이다. 삶을 즐길 수 없기 때문에 죽음을 즐긴다. 반유토피아적 주체의 육욕적 주신제의 은밀한 자리는 고문실이다. 거기서 자연 침해가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감각적 반(反)세계에 대적하는 것이기 때문에 주로 성도착적이고 인간 존재를 침해하는 고문을 한다. 다른 사람의 삶에서 파생될 수 있는 모든 감각적 향유를 이제 전도된 방식으로 다른 사람의 죽음에서 끄집어낸다. 죽음을 사는 이러한 생활양식에서 대체하는 것은 향유가 아니라 전적으로 삶의 향유임을 알 수 있다. 또 다시 반세계, 즉 죽음의 왕국을 향유하는 것으로서 나타난다.

- '물신, 죽음의 이데올로기적 무기'중에서, 프란츠 힌켈리메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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