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규라는 작가를 잘 알지 못한다.

다만 보기 드물게 드꺼운 책의 두께와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 표지로 나와 있다는 이유가 책 선택의 이유였다.

종종 책을 고르고 읽을때 참 이상한 기준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할때가 있는데.

이번이 그런 경우인것 같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벨라스케스의 또다른 작품 왕녀 마그라리타라는 작품을 보고 작곡가 모리스라벨이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라는 것을 작곡 했다고 한다.

이 곡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라는 친절한 설명이 덧붙어 있다.

지금은 인터넷에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라는 곡을 듣으며 이 글을 쓰고 있다.

 

연애 소설이라고 말할수도 있겠지만

단순한 사랑 얘기는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를 움직이는 것은 무엇인가? 작가는 사람들의 부끄러움과 부러움이라고 한다.

다른 이들의 삶을 부러워 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는

그래서 더 많은 돈, 스펙을 갖길 원하고

더 많은 명성을 얻길

더 아름다워지길 바란다고 말한다.

이러한 부러움과 부끄러움은 사람들로 하여금 '나'와 '자신'은 있어도

'자아'는 없는 그런 삶을 살게 한다고.....

 

빛나도록 아름다워보이는 이들은 사실은 스스로가 빛이 난다기 보다는

부러움과 부끄러움으로 바라보는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갖는 빛이 모여서 사랑받기 때문에 아름다운 사람들은 그토록 빛이 나 보인다고..

 

그럼에도 자아를 잃게 하는 세상에서

'사랑' 또 다른걸 꿈꾸게 하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상상력.

사랑하는 사람을 현실의 그것과는 다르게 보게하는 상상력.

 

보는 순간 몸이 얼어붙을 것 같이 못생긴 한 여성과

그녀를 사랑하게 된 한 남성.

그리고 이 둘 사이에서 마치 중재자처럼, 혹은 조언자처럼 등장하는 요한.

 

'내가 못생겼어도 날 사랑햇을까요?'라는 아내의 물음에서 책을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작가는

질문을 받고 10년의 시간이 흐른뒤

 

못생긴 얼굴에, 비정규직이고, 가난한 집에는 돌봐야 할 부모가 있고

특별한 능력도 없는 여성이

 

자신을 인정하고 사랑하게 되는 과정을 그린다.

 

못생겼다는 이유로 주변의 비웃음과 동정을 받아야 했던 여성

단 한번도 사랑이란걸 꿈꾸지 못했던 여성은 삶에 대한 기대도 희망도 없었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살아가야 하는, 그래야 상처받지 않는 그런 인생이었다.

그녀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줄 한 사람을 만나고

결국 자기 스스로 일어설 힘을 얻게 된다.

그러다 이러저러한 우여곡절끝에 그 남자와 헤어지고...

한 십년의 시간이 흐른뒤 다시 재회한다는 마무리까지는 너무나 평범한 결론이지 않았을까 생각됐는데.

 

9회말 투아웃 상황에서 결론은 두가지의 길로 뻗어 나간다.

 

그러니까 완전히 다른 두가지의 결말이 나란히 붙어 있다. 

 

하나는 주인공 남자의 시선에서 그려진 해피엔딩(여차여차 헤어진 그녀와 다시 만나 행복했데요~)

그리고 다른 하나는 요한과 그녀의 시선에서 보는 세 사람의 사랑과 삶....

 

두가지다 맘에 드는 결론이다.

결론은 혹시라도 읽고 싶은 사람들에게 민폐가 되지 않기 위해 슬쩍 넘어간다.

 

작가가 결론과 덧붙여 쓴 작가의 말은 참으로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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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서로의 빛을 서로를 위해 쓰시기바랍니다. 지금 곁에 있는 당신의 누군가를 위해, 당신의 손길이 닿을 수도 있고... 그 손길을 기다리고 있을 누군가를 위해, 말입니다. 그리고 서로의 빛을 밝혀가시기 바람지다. 결국 이세계는 당신과 나의 <상상력>에 불과한 것이고, 우리싀 상상에 따라 우리를 불편하게 해온 모든 진리는 언젠가 곧 시시한 것으로 전락할 거라 저는 믿습니다.'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더는 부끄러워 하지 않고

부끄러워 하지 않는

당신 <자신>의 얼굴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저는 그것이

우리의, 아름다운 얼굴이라고 생각합니다.

------------------------------------------------------------------------------------------------------------------------------------------

 

부끄러워 하지 않고

부러워 하지 않고

온전히 나 자신으로,

사랑이 없는 생활이 아니라

사랑이 있는 삶을 살고 싶다.

 

 

 

 

4대강 공사장이 빗물이 확 휩쓸려 버렸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을 갖고 있는 비오는 금요일, 토요일에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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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17 11:56 2010/07/17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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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간의 긴긴 영상 마무리 작업 시다역할을 마치고

한달만에 전주 집에 갔다.

집에 간길에 머리 빠마도 하고 나의 유일한 취미인 서점에서 책보기에 돌입

물론 30분이라는 짧은 시간밖엔 없었지만

미리 봐 두었던 신경숙의 신간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 소리가 울리고를 거침없이 집었다.

 

분신한 언니를 지켜 봐야 했던 그녀의 동생 미루와 그의 친구명서

엄마의 죽음에서 해어나오지 못해 상처입은 정윤과 그의 친구 단.

 

짧게 소개해 보자면

이렇게 네 젊은이들이 주인공

 

여차여차하여 네명이 서로 친구가 되고

쌍둥이 처럼 붙어 다녔던 단과 미루가 각각 세상을 떠나게 된다.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

민주화 운동이 한참이던 그 시절 그 때쯤이 배경인듯한 소설 속에서

인물들은 열기로 가득찬 광장을 뛰어 다니고

죽음을 목격하고 또 그들 스스로가 죽기도 하면서

그 시간들을 건너온다.

 

죽음이라는 키워드는 소설속에서 사회적인 이야기를 하는 듯 하다.

정윤의 엄마만 제외하고

단과 미루 그리고 미루 언니의 죽음은

그들이 죽음이라는 것을 선택하기까지의 과정과 그 배경은

결코 그 개인들의 선택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무겁다.

 

어느날

학생운동을 하던 애인이 실종되자 그를 찾아 나섰다가 결국 사람은 찾지 못하고 자신의 몸에 불을 붙여 세상에 호소했던 미루의 언니

그리고 그 언니의 죽음을 목격했던 동생은 오래된 자괴감으로 결국 아무것도 먹지 않은채 죽어가고

 

사회에 적응해 보겠다며 군에 입대한 단은

경계근무를 서던 중 자신의 총에서 나온 총알이 몸에 박혀 죽게 된다.

 

이 죽음들을 이야기 하면서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그러면서도 '언젠가'라는 말을 남기며

좌절이 아닌 긍정과 희망을 말하고 싶었다고 하는데.

 

그 언젠가라는 말은 참으로 요원하다.

 

언젠가  세상이 바뀌겠지

언젠가 사람이 바뀌겠지

하는 말은

 

희망과 긍정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 도래하지 않을 수도 있는 언젠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무모한 일일 수 있다.

 

그렇기에 언젠가는 그냥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치열함 속에서

그야말로 언젠가 오는 것이겠지... 생각해 본다.

 

이런 의미라면

작가가 말한 비극이 아닌 희망으로 한발짝 더 가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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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04 21:14 2010/06/04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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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세아스와니

from 읽고 생각하기 2010/03/19 21:43

아세아스와니 영상을 제작중이다.

1989년 이리수출자유지역에 있던 일본계 회사인 아세아 스와니

어느날 갑자기 팩스 한장으로 폐업을 통보하고 노동자들은 거리로 내몰린다.

하지만 외자기업이라는 이유로 한국정부와 관계기관들은 나몰라라...

회사를 다니면 야간학교를 다닐 수 있다는 말에 공장에 취직한 십대 후반 이십대 초반의 어린 노동자들이었다.

모두가 생계에 도움을 주어야 하는 가난한 빈농 혹은 노동자의 자녀들.

봄이면 스와니 공순이 손이 제일 밉다는 말을 실감해야 했던 그 노동자들.

 

결국 일본으로 간 다섯명의 노동자들. 

우여곡절 말도 통하지 않는 일본에서

법을 지켜야 한다는 일본 활동가들의 말에 울분을 삭혀야 했던 그들.

그러나 생존권이 달린 문제였기에 그들은 법을 어기고 바리케이트를 넘었다.

 

한국에 남은 노동자들은 눈을 녹여 라면을 끓이며 눈물을 함께 먹고있었다.

조여오는 시간 속에서 갑작스러운 교통사고

통역을 도와주던 재일 코리안 김희원씨는 의식불명상태에 빠지고

 

4명의 여성노동자중 한명은 골반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는다.

그러나 김희원의 가족들은 그의 상태를 그녀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혹시라도 투쟁이 위축될까 우려가 됐다고 한다.

 

그렇게 생사를 건너는 투쟁 속에서 일본 노동자들은 점점 더 많이 모이게 되고

일본에선 유례없이 많은 노동자들이 참여한 집회가 열린다.

결국 80일동안의 투쟁을 통해 1억 3천만원이라는 당시에는 상당히 큰 돈이었을 돈을 받는다.

퇴직금, 생계대책금, 학자금등을 포함한...

그렇게

자신들의 투쟁이 돈으로 평가되서 자존심도 상했지만

또다시 생계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돈을 받아들고

누구는 전노협 사수대로

누구는 전노협 상근자로

누구는 또다시  미싱사로

누구는 또다시 재단사로

그렇게 흩어졌다가

결혼을 하고

생계를 위해 취직을 하고

평범한 노동자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이 되었다.

그렇게 20년의 세월이 흐르고

 

철없기도 했고

용감하기도 했던 그 젊은 청소년, 혹은 청년들은

아줌마 아저씨가 되서 다시 만난다.

 

그동안 하지 못한말

운동을 끝까지 하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

함께 자리를 지키지 못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는 말

도대체 뭐가 미안한지.

 

20년간을 끌어온 그 마음의 빚을 이야기 한다. 

 

한국에선 수없이 많은 민주노조의 역사속에서

한페이지 혹은 한줄로 기록될 이 투쟁의 역사.

 

그러나

그 속에 있는 한사람 한사람의 삶은

인생 전체가 달라지기도 했고

마음에 빚을 진체 살아오기도 했다.

 

그리고

이 투쟁의 역사는

한국에선 수많은 민주노조 운동의 일부분이지만

일본에선 전무후무한 한일 연대운동으로 기억되며

20년을 이어져온 전북-오사카 노동자 교류로 연결된다.

 

 

많은 사람들의 인생이 뒤바뀌는 속에서

민주노조라는 것이 건설되었는데.

떠난 사람들이 남은 사람들에게 미안해 해야 할만큼

남은 자들은 그만큼의 몫을 해내고 있는가?

그들은 20년전 일들을 기억하며

마음아파 하는데.

정작 남은 자들은 20년전 일에 관심이나 있었을까?

 

이제와서야 알아차리는 나 자신이 부끄럽기도 하고

진심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새삼 느끼기도 한다.

한편으론 나에겐 내 인생을 바꿀만한 일이 무엇이었는지 되돌아 보게 한다.

그리고 그 때의 처음처럼 그 마음이 얼마나 변했는지도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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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19 21:43 2010/03/19 21:43

취미생활을 위해 서점에 들렸다.

오랜만에 좋아하던 작가의 신간이 나와 한권 사들고 군산행 버스에 몸을 싣는다.

 

한강의 바람이 분다, 가라

아주 아주 어두운

사방을 검은색 페인트로 칠해 빛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그런 방에 홀로 앉아 있는 느낌이다.

마음 깊은 곳까지 훓고 내려가는 그 어두운 말들을 읽고 또 읽으면서

홀로 앉아 있을 그런 작은 공간을 생각해 본다.

 

누구에게나 그런 작은 공간 하나쯤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나와 너를 잊고

세상의 모든 관계들을 잊고

나 스스로의 존재까지도 잊을 수 있는 그런 작은 공간.

그런 조용한 침묵이 필요할 때가 있다.

항상 일이 많고 바쁠때 그런 일탈을 꿈꾼다.

아직 한번도 그런적은 없지만 요즘은 자꾸만 그렇게 작은 공간속으로 들어가고 싶다.

 

우주와 지구와 그리고 나라는 존재가 어떻게 이어져 있는지 보여주는 부분은 너무나 인상적이었는데. 

우리들이 보는 별들은 모두가 과거에 빛났던 별들이라고.

그래서 우리는 현재를 살지만 과거가 항상 존재하는 그런 삶 이라고

삶의 시간과 공간들이 모두 이어져 있다는 것.

무한한 것 같지만 결국은 모두다 이어져 있는 하나의 점과 같은....

무-혼란-생성-소멸이 끝없이 반복되는 그런 무한의 세계/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함께 공존하는 그런 세계

 

이런 생각을 할때마다 가끔은

아둥바둥 하고 있는 모든 일들이 무력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또 다시 가고 또 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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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09 23:26 2010/03/09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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