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예술 맞다

 

호치랑님의 [김홍석 마초예술가의 국제갤러리 & 창녀 찾기 퍼포먼스] 에 관련된 글.

 

 

말걸기가 세상에 말을 걸지 않은 지가 참으로 오래도 되었나 보다. 이렇게 시끄러운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한참 후에나 알게 되었다.


 

호치랑님의 위 글에 "사람을 그 자리에서 완전히 소외시킨, 왕따시킨 행위를 예술이라는 말로 과연 표현해야 될까"라는 문구가 있다. 이러한 생각은 글의 여러 곳에서 반복된다. 호치랑님이 쓴 이 문구의 가장 주요한 뜻은 "예술 한답시고 그 따위 짓 하지 말라"로 이해했다. 이 뜻은 받아들일 수 있으므로 말걸기가 위 글에 대한 다른 견해를 말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다만, 위 문구가 김홍석이 자신의 작품을 전시하는 갤러리에서 행한 오프닝 퍼포먼스가 '예술'이 아니라는 뜻도 가진 듯하여, 이 때문에 예술, 도덕, 아름다움, 그리고 '아트 월드(Art World-전문가 집단, 카르텔)'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이 생겼다.

 

 

사람들은 대체로 예술이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름답지 못한 것은 예술로 인정하지 않기도 한다. 또한 예술은 통념을 거스르기도 한다는 걸 알면서도 '악의적'이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한다. 어느 정도 도덕적 관념을 지니고 있다고 여긴다. 도덕적이지 않은 것이 아름답게 보이기는 어렵다. 그래서 아름답지 않거나 악의적이면 예술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도덕과 아름다움의 관계는 복잡하다. 사람들은 이 둘이 항상 함께 있다고 보지는 않지만 깊은 관련이 있다고 여긴다. 아름답지만 도덕적이지 못하거나 도덕적이지만 아름답지 못한 사물, 상황, 행위를 당연히 구별하지만 이 둘이 제대로 결합이 되면 '예술적'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경향.

 

역사적으로 인류의 예술은 아름다움을 지녀왔다. 하지만 아름다움을 위한 예술의 역사는 짧다. 예술은 언제나 목적이 있었는데 아름다움이 궁극의 목적인 적은 예술의 역사에 비하면 짧다. 아름다움이 예술의 궁극적 목적이라는 이해는 근대 서양의 산물이었고 이 관념이 (최소한) 한국 대중이 예술을 이해하는 근간인 것은 분명하다. 이 관념은 아름답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 범위에 있다는 것도 포함한다.

 

그러나 현대 예술의 목적은, 특히 아트 월드의 목적은 '남이 못하는 것 하기'에 가깝다. 이른바 작가의 창조성은 이것으로 발휘된다. 작가들은 "저걸 어떻게 했지?", "저런 생각을 어떻게 했지?"하는 감탄을 노린다. 심지어는 남들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아무도 하지 않는 너무 평범한 것을 수행한다. 이것이 아트 월드의 예술이자 이 시대의 예술이다. 인정하든 안 하든 말이다.

 

아트 월드는 작가, 비평가, 기획자, 컬렉터들의 세계이다. 이들이 사실상 무엇이 '예술 작품'인지를 결정한다. 대중들은 아름다움과 도덕적 허용에 관심을 두는 사이에 아트 월드는 (이것들을 완전히 무시하지는 않지만) 다른 데에 관심을 쏟는다(그 중 하나는 돈이겠지만 여기서는 제껴두자). 즉, '남들 못하는 것 하기.'

 

그러다 보니 극악한 도전정신이 발휘되어 도덕, 인권도 가차없이 파괴하는 심성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한편, 시대와 사회마다 인간에 대한 예의의 기준을 갖고 있고 이 중에는 부당한 기준도 있다. 예술은 이에 도전해서 그 부당한 기준을 철폐하는 데에 일조하기도 한다. 결국 역사적으로 볼 때나 현대의 상황에서 볼 때 예술 작품이 지닌 가치관은 도덕적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예술 작품, 예술 행위를 평가할 때 도덕, 특히 도덕적인 아름다움을 핵심 기준으로 삼으면 혼란에 빠진다. 이게 예술인지 아닌지 구별부터 해야 할 상황이 생기는 것이다.

 

 

말걸기는 김홍석의 포퍼먼스가 예술 행위라고 받아들인다. 김홍석은 아트 월드의 일원인 미대교수이다. 얼마나 영향력 있는 구성원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정도 이력이면 만만치 않은 사람일 것이다. 김홍석이 아트 월드의 일원이기 때문만은 아니지만 그의 이번 퍼포먼스가 예술 행위일 수밖에 없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가 아트 월드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김홍석의 이번 퍼포먼스는 대단히 비도덕적이다. 사람들의 상식은 이렇다. 나쁜 짓을 비판하거나 비난할 때 그 똑같은 짓을 하면 도덕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돈의 신(神)이 창궐하는 시대에 사람들이 '창녀'를 찾아서 낙인 찍는 행위를 비판하기 위해 '창녀 낙인 찍기'를 돈으로 유혹하는 건 도덕적으로 용인될 수 없다. 이게 상식이다.

 

그런데 김홍석이 이걸 몰랐을까? 이것이 도덕적으로 용인될 수 없는 행위라는 통념과 상식을 파괴하기 위해서 '예술적 행위', 퍼포먼스를 한 것이다. 퍼포먼스에 참여하게 되는 관람자의 비도적적 행위와 이를 부추긴 자신이 비도덕적 행위, 그 두겹의 모순을 보이는 꽤 수준 있는 예술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김홍석은 당연히 비난을 예상했을 것이고(그 크기나 범위는 예상치 못했을 수도 있다) 그것도 자신이 행한 예술의 일환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김홍석이 끝까지 이 비도덕적인 행위가 예술임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 그 보다 그 행위가 이 시대에는 예술일 수밖에 없는 객관적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 김홍석은 대학교수이고 자신의 작품 전시가 열리고 있는 유명 갤러리에서 행한 퍼포먼스라는 데에 있다. 만약 대학교수도 아닌 김홍석이 돈을 왕창 후원 받아서 룸살롱이 즐비한 유흥가에 가서 이 퍼포먼스를 했다면 예술이 되었을까? 김홍석이 비도덕적인 예술을 갤러리에서 보였다는 건, 한편으로는 그에게 '안전망'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결국 말걸기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예술 작품이란 게 도덕적이거나 도덕적인 아름다음을 지녔을 것이란 관념을 버리면 예술의 세계가 더 잘 보이게 된다. 그래서 비도덕적인, 반인권적인 예술 작품이나 예술 행위를 한 작가를 더 집요하게 도덕적으로 심판할 수 있다.

 

사람들이 "예술 같지도 않은 엉터리 예술 하지 말라"고 얘기하면 작가는 "예술인데"라고 당당하게 도덕적 비난을 피해가려 것이다. 예술도 비도덕적일 수 있고 따라서 그 예술을 행한 작가가 마땅히 져야 할 응분의 대가를 지도록 하려면 예술에 대한 통념을 버릴 필요가 있다.

 

"네가 한 게 예술 맞아. 근데 예술도 책임을 져야 하거든."

 

말걸기는 이게 아트 월드의 오만함을 흔들기 위한 기본적인 태도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