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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우정1-현실과 이상, 그 괴리를 좁힌 동지

사랑과 우정1-현실과 이상, 그 괴리를 좁힌 동지

 

“‘일기일회(一期一會)’란 말이 있소. 인생에 만남이란 단 한번밖에 없다는 뜻이오. (중략) 그래서 우리는 그 만남을 소중히 간직하고 가꾸어나가야 하는 것이오. 행복한 만남은 부르지 않아도 스스로 찾아오며, 밀어낼수록 더욱 다가온다는 누군가의 말이 기억나오. (중략) 행복한 만남은 아름다운 추억을 남기고, 아름다운 추억은 그 만남을 잊지 않고 기리게 해주오.”(정수일, 우보천리)

 

김남주와 정수일 선생의 많은 공통점 중 하나가 옥중편지가 책으로 출간된 것이다. “편지란 워낙 사적이고 어딘가 은밀한 데가 있기 마련이어서 외부로 드러나기를 꺼려하고 쑥스러워하는”, “편지란 제때에 소식을 알리거나 용건을 적어 보내는 글로서 공개하지 않는 것이 상례인데”라고 하면서 그들은 편지를 공개했다.

 

나는 행복한 만남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기고 그를 잊지 않고 기리기 위해 공개한다. 그들도 나의 심정을 이해해줄 것이라 생각한다.

 

93년이니, 20년전 그러니까 그와 나는 지구를 손바닥에 올려놓았던 20대였다. 그는 노조위원장, 나는 노동단체 상근자. 여성중심인 전자산업의 구조조정, 그 싸움에 우리는 함께했다.

 

당시 여성사업장과 전자산업은 산업구조조정이 한창이었다. 7~80년대 저임금 여성, 전자산업이 남성 중공업으로 재편이 한창이었다. 즉, 전자산업 자본가는 새로운 이윤창출을 위해 현재의 회사를 폐업하거나 새로운 제품 또는 업종으로 전환하는 시기 였다.

 

노동자는 하루 아침에 대책도 없이 실업자로, 자본가는 더 많은 이윤을 찾아 떠나는 시기였다.

 

그는 노조위원장으로 투쟁을 조직하고, 나는 제3자(당시 제3자 개입금지법이 존재)로 그 투쟁에 필요한 모든 것을 찾아내 제공하고 방향을 함께 고민하는 가장 가까운 동지였다.

 

그와 호흡이 잘 맞은 것은 행운이었다. 물론 그 행운은 그의 노력과 나의 노력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행운은 흔치않다.

 

다만, 막판에 입장이 갈린다. 내 기억으로는 합의시점에서 나는 더 밀고나가자는 입장이었고 그는 여기서 끝내자는 입장으로 어긋났다. 이 입장차이를 확인하면서 그는 이 편지를 나에게 보낸 것으로 생각한다.

 

당시 나를 지지하는 동지들은 그를 심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나 역시 그러했다. 하지만 난 그에 대한 신뢰는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기 입장을 나에게 숨김없이 밝혔다. 그는 나를 동지로 생각한 것이다. 입장이 달라 서로 다른 행보를 해야할 때, 솔직해지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는 강요하거나 자기 변명을 하지 않았다. 자기 생각을 이야기했고, 나의 생각을 들었으며 결국 나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냈다.

 

지금도 기억하는 것은 당시 그와 토론과정에서 내가 깨닫고 이후 활동과정에서 유의했던 것이 하나있다. 그것은 ‘위원장’이라는 입장에서 사고해야 한다는 교훈이다. 이후 나는 지속적으로 위원장들과 이러한 사업이 연속이었다. 그런점에서 그는 나의 스승이었다.

 

그의 사랑과 우정만큼 지금껏 나의 생각을 이야기못했다. 늦었지만 이렇게 그에게 감사와 애정표현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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