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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2005/08/09

아놀드 쇤베르크의 12음기법과 한스 아이슬러의 수정12음계 음악 | 이경분

아놀드 쇤베르크의 12음기법과 한스 아이슬러의 수정12음계 음악

이 경 분

* 출처 : 민족음악 18호 http://web.donga.ac.kr/swcho/


1. 서 론

쇤베르크(Arnold Schönberg)의 음악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실제로 어렵다. 왜 그의 음악이 그리고 특히 12음계음악이 어려운지에 대해 아도르노(T.W.Adorno)외에도 많은 쇤베르크 제자들이 글을 써 왔다.
쇤베르크 음악의 난이도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그 이유를 서술할 수 있겠으나 아주 간단하게 표현한다면 그의 음악이 무척 추상적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쇤베르크의 제자 아이슬러는 스승이 “엄청난 상상력과 추상력의 소유자이라 여행의 기술에 대해 너무나도 완벽하게 이야기하므로 여행을 가더라도 스승에게 그곳의 관광엽서를 보내고 싶은 생각마저 들지 않는다”며 쇤베르크의 능력을 반농담조로 얘기한 적이 있다.
이러한 쇤베르크 음악의 추상성은 그의 기본적인 음악관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 즉 그는 “음악에서의 정직함”(Redlichkeit in der Musik) 또는 책임성을 중요하게 여기며 작곡과정 중 아무런 이유와 논리적 필연성없이 어떤 음들을 나열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그는 한 번 표현된 “음악적 사고”(musikalischer Gedanke)는 다시 반복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반복을 통해 익숙한 것에서 기쁨을 찾고 확인하는 청중의 욕구를 배려하기 보다 음악의 진실성과 “예술가 자신의 내적 감정에만 충실”하였으므로 그의 음악이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또한 화려하나 내용이 없는 장식과 반복으로 무성하던 음악적 허식을 지양하고 필요한 만큼만 그리고 본질적인 것만을 작곡하는 “음악의 경제성”을 강조하였다.
예술은 능력(Können)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필요성 즉 당위성(Müssen)에서 출발한다고 한 그의 말은 여러 면에서 의미심장하다. 바로 이처럼 본질적인 것에 전념하는 음악관을 가진 쇤베르크가 12음계법을 발견하여 20세기 음악의 새로운 기반을 세우게 되었으며 음악사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던 것도 결코 우연이라 할 수 없다. 그는 19세기 말부터 자유무조음악 (Freitonalität)이 점차 진전됨에 따라 지난 250년간의 음악체계를 지배하던 조성체계(Tonalität)가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기에 이에 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음악체계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던 것이다.
이러한 음악적 진보 즉 “미래지향적 음악”을 대표하는 쇤베르크는 당시의 청중이나 비평가로부터는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였으나 뛰어난 교수법과 가르침에 대한 정열로 훌륭한 음악가를 많이 배출해 내었다. 그는 자신의 천부적이고 철저한 음악관과 확실한 음악기술로 제자들에게 거의 절대적인 권위를 누렸었다.
그러나 그의 제자 중에 알반 베르크(Alban Berg)와 안톤 베베른(Anton von Webern)과 같은 수준에서 재능을 인정받았던 한스 아이슬러는 스승의 음악에 대한 한계를 느끼고 이를 입밖에 낼 수 있었던 용기를 가졌었다. 스승을 존경하면서도 비판할 수 있는 객관성과 또한 “누구를 위해 내가 음악을 쓰는가”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으로 아이슬러는 “사회참여음악”(Engagierte Musik)이라는 스승과는 또 다른 음악사적 불모지를 개척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음악과 인접분야, 음악과 사회, 음악과 정치 등 음악을 바라보는 넓은 시야를 터놓은 아이슬러의 업적은 그가 살았던 역사적 시간과 공간을 떠나서 누구든지 음악을 보다 폭넓게 이해하려는 사람에게 관심을 불러 일으킨다.
이 글에서는 우선 쇤베르크의 12음 기법에 대해 알아보고 이 독보적인 스승의 음악적 권위에 나름대로 비판적인 견해를 가지고 독립적인 음악적 언어를 만들어가고자 노력한 아이슬러의 수정된 12음계 음악을 비교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어려운 예술음악을 - 수준의 손상없이 -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음악으로 만들고자 한 아이슬러의 시도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가능성을 시사하는지 아울러 생각해 보고자 한다.



2. 본 론

2.1. 쇤베르크의 12음 기법
쇤베르크가 1921년 12음 기법을 발견했을 때에는 이미 많은 작곡가들이 꼭 12음계라는 이름을 빌리지 않더라도 이 기법과 비슷한 방법으로 작곡을 시도했었다. 그 한 예를 들면, 러시아계 음악의 영향을 받았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에리히 이토 칸(Erich Itor Kahn 1900-1950)은 4음․5음․9음들의 집합을 12음기법의 형태로, 즉 전회형(Umkehrung)․역행형(Krebs)․역전회형(Krebsumkehrung) 등으로 사용하다가 12음기법에 도달하였다고 한다. 칸이 프랑크푸르트 라디오 방송국에서 쇤베르크의 12음계 피아노곡을 초연한 적이 있었는데 그의 연주를 들은 쇤베르크는 연주의 명료함과 작품 이해의 깊이에 최대의 찬사를 보냈었다.
그리고 마티아스 하우어(Mathias Hauer 1883-1959)는 쇤베르크보다 이삼년 먼저인 1919년에 12음 기법을 이론적으로 발전시켰다. 그러나 그가 이 기법으로 작곡한 음악은 템포변형(Agogik)이나 강약법을 사용하지 않아 긴장감이 없는 정체된 것이어서 음악계에 큰 관심을 모으지 못했다. 또 최근 새로운 연구에 따르면 쇤베르크와 알반 베르크에게 사사한 프리츠 하인리히 클라인(Fritz Heinrich Klein 1892-1977)이 1921년 “기계”(Die Maschine)라는 음악에서 12음을 사용해서 작곡했다 한다. 이 연구는 쇤베르크가 어쩌면 클라인에게서 무의식적으로나마 12음 기법의 아이디어를 받았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세운다.
일반적으로 쇤베르크를 이 기법의 창시자로 보는 이유는 비로소 그의 12음계 음악이 단순히 수학적인 차원을 넘어 미학적인 그리고 예술적인 성숙도를 보여 주었을 뿐 아니라 음악사적인 당위성을 논리적으로 주장하여 음악사적으로 획기적인 사건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쇤베르크는 자신의 12음 기법을 “12개의 서로 연관된 음만을 사용한 작곡방법”(Methode der Komposition mit zwölf nur aufeinander bezogenen Tönen)이라고 명명했는데 그 기본원칙에 대해 잠시 정리해 보자.
첫째, 12음 기본음렬 자체는 작곡을 위한 전제이지 작곡자체도 아니며 음악테마도 아닌 추상적인 것이다. 4가지 형태, 즉 원형(Original)․전회형․역행형․역전회형으로 명명되는 이 기본음렬은 음들간의 관계(Beziehung)를 조정하므로 12음이 어떤 방향으로(바로․거꾸로․반사형 등으로) 사용되던지 또 12가지 이조(Transposition)의 가능성 중 어떤 음높이에서(Tonstufe) 시작하던지 상관이 없다. 이 4가지 형태가 곧 하나의 음악적인 공간을 형성한다.
둘째, 쇤베르크의 12음 기법은 이미 앞서 언급했듯이 중심음(tonales Zentrum)의 해체를 전제로 한다. 기존의 조성음악에서는 모든 음들이 중심음에 대해 기능적으로 종속되어 음들이 서로 다른 비중을 차지했었다. 그러나 12음 기법에서는 중심음이 없으므로 모든 음들이 평등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셋째, 그러므로 12음계 음악에서 12음이 모두 소개되기 전에 어떤 한 특정음이 반복되는 것을 가능한 피하도록 되어 있다. 왜냐하면 반복을 통해 한 특정음이 다른 음에 비해 더 큰 비중을 받게 되며 이렇게 “강조된 음은 기본음이나 중심음으로 암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넷째, 조성체계의 화음은 기능적 역할에 충실하였으므로 불협화음은 해소 (Auflösung)되는 것을 원칙으로 해왔었다. 12음기법에서는 기능화음이 유명무실하게 되고 불협화음은 해소되어야 할 필연성을 가지지 않게 되어 자유롭게 사용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쇤베르크는 “불협화음의 해방”(Emanzipation der Dissonanzen)이라 칭하는데, 이미 그의 자유무조 시기의 음악에서도 불협화음은 해소되지 않고 사용되었었다. 이제 “바그너 식의 불협화음의 준비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식의 불협화음 해소를 더 이상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고 쇤베르크는 기술한다. 12음 기법은 이러한 현상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며 정당화한다. 그리고 장단조의 삼화음(Dreiklang)과 같은 협화음의 사용은 이전의 조성음악을 연상하게 하므로 이런 화음의 부분적인 사용마저 경고하였다.
쇤베르크가 12음 기법을 발전시킨 첫 시기에는 이처럼 조성음악과 관련된 모든 음악적 요소를 지양하는데 주력하였다. 그러나 후기의 쇤베르크는 12음 기법의 원칙에 얽매이지 않고 “나폴레옹에의 송가”(Ode to Napoleon fuer Sprecher, Klavier und Streichquartett op.41)에서처럼 12음계 음악이 E♭장조 삼화음으로 끝나도록 작곡하기도 했음을 참고로 밝혀둔다.

2.2. 아이슬러의 수정 12음계 음악
쇤베르크는 수업시간에 학생들과 항상 바하나 베토벤과 같은 고전의 위대한 작곡가의 작품을 분석하고 연구했다 한다. 늘 자신의 작품으로 학생들에게 수업을 했던 힌데미트(Paul Hindemith)와는 달리 그는 자신의 작품을 전혀 다루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제자들이 스승의 새 작품에 관심을 가지고 혼자 연구하거나 기회 있을 때마다 스승과 토론을 하게되며 그 영향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쇤베르크의 애제자였던 아이슬러는 피아노 소나타 2번(Klaviersonate Nr.2 op.6)을 12음기법으로 작곡하였는데 여기에서 쇤베르크의 영향을 충분히 찾아 볼 수 있다. 또 이 작품에서 아이슬러가 스승의 12음 기법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의 견해를 이미 가졌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러나 1926년 이러한 예술음악에 대한 회의로 스승과 결별하면서 12음기법과도 멀어졌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후 1920년대 젊은 음악가들은 기존의 낭만주의적 예술관과 예술지상주의적인 태도를 거부하면서 음악의 사회화(Sozialisierung der Musik)를 부르짖었는데 아이슬러는 이러한 경향의 선두에 선 음악가에 속했다. 그러므로 예술의 대중화나 “음악의 민주화”(Demokratisierung der Musik)에 관심이 없던 스승을 떠나 자신의 독립적인 음악관과 이것에 부합하는 새로운 음악에 맞는 새 청중을 찾아 나섰다. 그가 찾아낸 새 청중은 바로 노동자들이었는데 이들에게는 쇤베르크의 12음 기법으로 작곡한 음악이 이해되기 힘들 뿐 아니라 필요도 없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이슬러는 이 시기에 12음 기법을 사용하는 대신 주로 교회선법(Kirchentonarten)을 응용해 노동자들을 위한 음악 및 실용음악을 작곡했다.
그러나 1933년 독일의 나찌정당이 정권을 잡게 되자 유대인인 스승과 제자는 나찌의 원수로 낙인이 찍혀 독일을 떠나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망명생활은 아이슬러에게 자신의 음악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새로이 고심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망명생활을 시작한지 이삼년이 지나자 그는 그동안 소홀히 했던 12음계 음악을 다시 작곡하기 시작했다. 무엇이 아이슬러로 하여금 이런 결정을 하도록 하였을까?
독일의 노동운동과 단절된 외국에서는 노동운동보다는 히틀러 정권의 붕괴를 위해 투쟁하는 일에 더 주력하게 됨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를 위해서는 노동자에 국한하지 않고 망명한 지식인․문인․음악인을 막론하고 넓은 지반의 모든 저항세력을 모아야 했다. 그러므로 이제 아이슬러에게는 노동음악보다는 문화적 지식층에게도 호감을 줄 수 있는 정치성을 띤 예술음악을 작곡하는 일이 더 급선무였었다. 이러한 “민중전선”(Volksfront)이라는 정치적 변화는 망명 전 바이마르시대(Weimarer Republik)에는 생각지도 못했을 변화를 그의 음악에 가져왔다.
우선 아이슬러는 나찌정부의 문화정책에서 자신의 새로운 음악적 시도에 결정적인 중요한 관찰을 하게 된다. 즉 현대음악이 그 중 특히 쇤베르크의 음악이 나찌들에게는 불필요할 뿐 아니라 그들의 정치․문화적 목적에 위험하기까지 한 것으로 배척당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쇤베르크의 음악이 나찌들의 수난에서 파멸의 위기에 처하게 된 이유를 바로 허식과 거짓을 모르는 쇤베르크 음악의 진실성 때문이라고 아이슬러는 이해했다. 게다가 쇤베르크의 음악은 그 난이도 때문에 대중으로부터 격리되어 그 생명력이 어차피 약해져 있었으므로 어떤 적극적인 노력없이는 스스로 소멸해 버릴 것이라는 우려도 컸던 것이다.
진실성이라는 장점을 살리고 어렵다는 단점을 교정한다면 쇤베르크의 음악을 대중을 위한 음악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 새로운 사회, 즉 사회주의체제에 적합한 새로운 음악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고 아이슬러는 굳게 믿었다. 1936년 아이슬러는 이렇게 서술한다.
“12음 기법은 필연적으로 이렇게 고도로 복잡한 작곡법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이 기법으로 단순하면서도 대중에게도 유용한 음악스타일을 만들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러한 질문으로 “쇤베르크 음악의 내용을 그 기법과 분리시키고 표현(Expression)과 기술(Technik)을 따로 떼어놓는” 작업을 시도하였는데 1934년부터 1940년까지 그가 작곡한 12음계 음악을 보면 어린이를 위한 노래와 피아노 곡 뿐만 아니라 칸타타․교향곡․가곡(Klavierlieder)․영화음악 등 다양한 쟝르에 다양한 수준의 곡들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지금까지 주로 기악곡에만 선호되던 12음 기법을 성악곡에 집중적으로 사용하였는데 이는 매우 주목할 일이다. “12음 기법은 기악곡 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음악연주에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을 때 비로소 미래가 있다. (...) 그리고 우선 질문해 보아야 할 것은 이 기법으로 오늘날 현대 작곡가들이 자신의 특별한 과제를 해결해 낼 수 있는지의 여부이다. 음악이 형식적으로 뿐만 아니라 내용적으로 진보적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중의 하나가 곧 새로운 성악스타일(Vokalstil)을 창출해 내는 것이라고 본다.”
1937년 아이슬러가 브레히트(Bertolt Brecht)가 망명생활을 하던 덴마크에 6개월이상 거주하면서 12음 기법으로 10여곡의 실내악 칸타타(Kammerkantate)와 “독일 교향곡”(Deutsche Sinfonie) 그리고 “레닌 레퀴엠”(Lenin Requiem) 등 집중적으로 성악곡을 작곡했는데 여기에는 새로운 12음계 성악스타일(zwölftönige Vokalstil)을 개발하려고 하는 아이슬러의 실험정신이 잘 나타나 있다. 이 곡들은 모두 정치적인 내용을 담은 가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는 음악의 진실성과 진보성을 정치적인 진보성과 접목시키고자는 그의 의도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면 아이슬러는 이러한 성악곡에서는 12음 기법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쇤베르크의 원칙과의 차이점은 어디에 있는가?
첫째, 쇤베르크의 이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불협화음의 해방이 아이슬러에게서는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하고 있다. 쇤베르크는 조성(Tonalitaet)을 협화음과 일치시켜 불협화음과는 정반대되는 개념으로 이해한데 비해 아이슬러는 조성과 협화음을 분리하였다. 즉 조성을 가지면서도 불협화음이 강한 음악이 가능하며, 반대로 협화음적으로 들리는 음악이 반드시 조성을 가져야 하는 필연성이 없다는 논리이다. 즉 기존의 조성은 회피하되 협화음의 사용을 제한하지 말자는 의도이다. 그러므로 아이슬러의 12음계 음악은 불협화음보다 협화음을 더 선호하기 때문에 중심음이 없다는 것 외에는 청중이 듣기에 조성음악과 큰 차이가 없는 듯한 효과를 가진다. 이러한 효과를 위해 아이슬러는 12음 기본음렬을 전통적인 3화음의 구성이 가능하도록 배열한다. 즉 “도깨비칸타타”(Gottseibeiuns-Kantate)의 기본음렬은 다음과 같다.


<악보1>


쇤베르크는 “기존의 조성음악을 연상하게 하는 화음”의 사용이 조성음악에 익숙해져 있는 청중들에게 “잘못된 기대감”을 유발시킬 수 있다고 경고하였으나 아이슬러는 쉽게 이해될 수 있는 12음계 음악을 만들기 위해서 이 점을 고려하지 않았다. “레닌 레퀴엠”에서는 조성음악(c-단조 행진곡)을 12음계 음악의 중간에 삽입하여 서로 전제조건이 상반되는 음악의 결합을 시도하기까지 했다.
둘째, 쇤베르크의 원칙에서는 12음 기본음렬이 모두 소개되기 전에 한 음이 반복되는 것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지만 아이슬러의 12음계 음악에서는 거의 예외없이 특정음이 반복된다.

<악보2> “망명칸타타”(Kantate im Exil) 첫부분




게다가 “한 동지의 죽음을 기리는 칸타타”(Kantate auf den Tod eines Genossen)에서는 12음 기본음렬 자체에 한 음이 반복되어 12음이 아닌 11음으로 되어 있다.

<악보3>“한 동지의 죽음을 기리는 칸타타”의 12음 기본음렬

d-f-c-as-g-h-es-fis-b-d-cis-a


여기에서 첫음 d가 10번째 음에서 반복됨에 따라 e음이 생략되었다. 그러므로 d음의 반복을 통해 9번째 음 b와 e가 형성하게 되는 증4도|감5도(Tritonus)를 피한 셈이 된다. 증4도를 피함으로 노릴 수 있는 음악적 효과는 칸타타의 가사내용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논문의 일관성을 위해서 여기서는 설명을 생략한다.
셋째, 쇤베르크의 12음 기본형(Grundgestalt)은 추상적인 의미를 지니는 데 반해 아이슬러는 12음계 음악의 구체화를 꾀하였다. 쇤베르크의 경우 12음의 나열은 추상적인 음정의 구조를 의미한다. 간단한 예를 들면 h-f-g 라는 음의 나열은 증4도음과 장2도음을 표기할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의 가능성을 쓴 것이다. 즉 여기에는 이 음정을 이조(Transposition)하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슬러는 12음 기본형의 이조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만약 이조나 음의 생략(Tonauslassung) 또는 음의 도착(Permutation)을 사용할 경우도 유연한 멜로디의 구성을 위하거나 협화음적인 형성을 위해서이다.

<악보4> 수용소 칸타타(Zuchthauskantate)의 기본음렬(마디 84-90)
원형: d-h-g-e-fis-a-b-c-des-es-f-as
역행형: as-f-es-des-c-b-a-fis-e-g-h-d





그리고 또 12음 기본음렬을 곡의 테마와 동일하게 사용함으로써 12음계 음악의 구체화를 꾀하였다. 그러므로 항상 12음 기본음렬을 숨기려고 애쓰던 쇤베르크의 음악에서와는 달리 아이슬러의 12음 기본음렬은 곡의 서두에 스스로를 아주 잘 드러내므로 쉽게 찾아낼 수 있다.

<악보5>“농부의 칸타타”(Bauernkantate) 첫 부분



아이슬러는 정치적인 내용의 가사를 담은 소박하며 말하는 듯한 멜로디로 청중에게 감정의 흥분이나 정화보다 곰곰히 생각하게 하는 성악곡을 개발하였다. 이와 같이 아이슬러는 이해되기 쉽고 구체적인 12음계 음악을 위해 물신적이거나 교조적인 태도없이 필요에 따라 수정하고 변형시켰다. 그에게는 12음 기법도 역사적인 산물이기 때문에 사회적인 조건에 따라 그 의미도 축소될 수 있으며 또 반대로 증대할 수 있는 변화를 내포한다. 이러한 실용적인 태도는 12음 기법을 음악재료의 최대로 발전한 형태로 보기 때문에 하나의 완성된 “닫힌 체계”로 이해하는 아도르노의 음악철학적인 관점과는 큰 대조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1926년 스승을 떠난 아이슬러가 12음기법을 쓰지 않고 자유무조적으로 연가곡 “신문조각에서”(Zeitungsausschnitte op.11)를 작곡하였을 때 아도르노는 “음악이 쉽게 이해되도록 하기 위해 음악재료가 현재 성취한 최고의 수준을 사용하지 않고 이미 지나온 전 단계로 되돌아가는 것은 위험하다”라고 자신의 관점을 피력한 바 있다. 12음 기법에 대한 아도르노의 물신적인 태도에 대해 “변증법적 유물론(dialektischen Materialismus)을 변증법적 신비주의(dialektischen Mystizismus)로 착각”하였다고 아이슬러가 비판한 적이 있음을 참고로 언급한다.


3. 결 론

아이슬러의 수정 12음계 음악은 위에서 이미 자세히 서술한 것처럼 주관적이고 추상적인 쇤베르크의 12음 기법이 어떻게 탈 주관화 (Entsubjektivierung)되며 구체화될 수 있는 지, 또 이 기법의 사용으로 어떻게 정치적 내용을 포용할 수 있는 저항음악이 가능한지를 보여주는 한 예이다. 그러나 이런 실험을 통해 아이슬러가 쇤베르크의 음악사적 의미를 부인하고자 한 것은 결코 아님을 밝혀둔다. 오히려 그는 쇤베르크가 서양의 “현대음악사에서 가장 가치있고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게다가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당면한 목적에 바로 사용될 수 없으나 역사적으로 중대한 의미를 가지듯이 쇤베르크도 이와 비슷한 경우이다”라고 물리학에서 상대성 원리를 발견한 아인슈타인의 업적에 비교하기까지 했다.
그러므로 아이슬러의 시도는 스승이 “독일음악이 앞으로 100년동안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음을 보장하는” 것으로 예언했던 12음 기법을 나름대로 존속시키기 위한 노력이었다. 아이슬러의 이러한 시도가 성공하였는지 실패하였는지에 대해 질문할 수가 있겠다. 1937년 겨울 프라하의 현대음악연주회(Vereinigung für zeitgenössische Musik, "Manes"가 개최함)에서 그의 실내악 칸타타 4곡이 연주되었는데 청중들로부터 대대적인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러나 청중들이 대부분 독일 망명인이었고 나찌정부에 저항하는 체코의 지식인들로 구성되어 이러한 성공을 보편화하기는 힘들다. 또한 제2차 대전 후 동독에서는 쇤베르크와 12음계 음악에 대한 비판으로 아이슬러의 12음계 음악이 거의 연주가 되지 못하였고, 서독에서는 아이슬러 음악의 정치성에 대한 거부반응으로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고 하여 실패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작품이 씌어진지 60년이라는 시간은 아직 성공의 여부를 판단하기에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요한 세바스챤 바하의 작품이 제대로 평가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는지 생각해 보라! 그러므로 별로 승산이 없는 성공여부를 따지기 보다 새로운 상황에 대처한 아이슬러의 예술적 자세를 요약해 보고 오늘 우리의 음악적 상황과 연결해서 생각해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하겠다.
첫째, 아이슬러는 음악을 역사적인 산물로 보았고, 아름다움의 개념도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이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작곡가로서 이를 작곡행위에 실천하였다. 즉 새로운 상황에 대처할 때마다 새로운 음악적 해결점을 찾고자 고심하였던 것이다. 20년대 후반에는 당시 활발했던 노동운동의 발전을 위해 노동음악에 전념했었고, 유럽에서의 망명시기에는 나찌정권의 패망을 위해 수정 12음계 음악이라는 예술의 힘으로 투쟁하였었다. 또 미국에서의 망명생활이 깊어 갈 즈음에는 12음기법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았다. 미국의 거대한 문화산업이라는 배경과 음악적 환경이 유럽과는 판이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아이슬러의 음악적 변화는 한 번 옳다고 판단하고 찾아낸 해결책에 만족하지 않고 다시 회의해 보는 자기 비판적인 자세를 보여준다. 동독에서 세상을 떠나기 몇 개월 전 1962년 7월에 아이슬러는 그가 일생동안 추구했던 예술적 입장마저 번복하는 발언을 하였다.

“예술의 새로운 기능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예술은 원래의 제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것은 오늘날 아직도 낮은 수준의 형태인 재미, 즐거움 그리고 심심풀이로 나타나고 있다. 물론 이로써 나와 브레히트가 고수했던 입장을 회수하게 됨을 인정한다.(...) 우리가 이론적으로 제자리 걸음을 하지 않으려면 역사의 변증법을 통찰하여 지금까지 가졌던 우리의 모든 입장을 회의할 줄 아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새로운 미래에 우리 스스로를 해체 (또는 용해)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이것은 고통스러운 과정이지만 그러나 유익한 것이다.”

둘째, 그리고 이때 비판의 잣대는 음악내적인 것이라기 보다 음악외적인 것, 즉 사회적 정치적 변화가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음악외적 동기는 -새로운 12음계 성악스타일을 창출하기 위한 노력처럼- 다시 음악 내적인 문제와 밀착되어 유기적인 관계로 발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아이슬러의 작품은 예술가의 사회참여가 항상 작품의 질을 저하시킨다는 일반적인 견해에 의의를 제기한다.
셋째, 어려운 12음 기법으로도 쉽고 투명하게 작곡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그의 행위에는 작곡가로서의 큰 용기가 필요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는 능력없는 작곡가로 오인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실제 예를 들자면, 아이슬러가 젊은 연주가들에게 12음 기법을 쉽게 소개하자는 교육적인 목적으로 현악삼중주 “Präludium und Fuge über B-A-C-H”(op.46) 작품을 기법설명과 함께 출판한 적이 있었다. 프랑크 마르탱(Frank Martin)과 같은 작곡가는 12음 기법을 이런 식으로 단순하게 다루는 것을 혹평하였었다. 아이슬러의 의도보다도 (예술지상주의자들이 말하는) 소위 음악내적인 “수준”(즉 남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더 중요한 작곡가들에겐 이해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잊어서는 안될 것은 어려운 것을 이해하기 쉽게 만들려 하자면 작곡가에게 더 많은 상상력과 능력이 요구된다는 점이다.
오늘날 우리 한국의 음악적 상황은 아이슬러가 살았던 문화적 시기와 배경이 전혀 다르므로 우리의 음악적 문제와 과제 그리고 그 해결점도 다른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스승의 음악을 독립적이며 주체적으로 발전시키고 새 길을 모색하는 아이슬러의 음악적 태도는 오늘날 “서구”라는 절대적 기준에 얽매이고 있는 우리의 상황을 되돌아보게 한다. 음악과 음악에 대한 이해도 서양인에게 전수받은 그대로 모방하고 실행하는 것을 음악적 최고의 가치나 미덕으로 생각하는 우리의 현실이 아닌가! 이러한 뿌리깊이 잠재한 “식민지적” 음악풍토는 얼마나 많은 문제점을 야기시키고 시켜왔던가! 물론 이런 문제들이 단순히 음악분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사회전반의 문제점과 얽혀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아이슬러가 가졌던 용기와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는 자기 비판적인 자세로 임한다면 ‘정신적으로 마비되어 있는 우리 음악계’에 활기를 불러 일으킬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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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uel Gervink: Alban Bergs kompositorische Annäherung an die Zwölftontechnik. In: Musiktheorie 1998, Nr.1, S. 55-74.
Wassily Kandinsky: On the Spiritual in Art. ed. Hilla Rebay, New York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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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ael Menke: Expressionismus in der Musik, Arnold Schönbergs "Erwartung". In: 낭만음악 제8권 4호 1996년, 135-168쪽.
Nathan Notorwicz: Wir reden hier nicht von Napoleon. Wir reden von Ihnen! Gespräche mit Hanns Eisler und Gerhart Eisler. Berlin 1971.
Willi Reich: Arnold Schönberg oder Der konservative Revolutionär. München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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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란: 현대음악 작곡법 (번역: David Cope, "New Music Composition") 세광출판사 1994.
이건용: 소음을 내자. 낭만음악 제8권 3호 1996년, 2-5쪽.
이경분: 한스 아이슬러와 영화음악. 음악과 민족 1998년 제 16호, 253-277쪽.
최윤정: 쇤베르크와 표현주의의 위기 (번역: Alan Lessem, "Schoenberg and The Crisis of Expressionism"). 낭만음악 1996년 3호 (통권31호), 149-1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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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Albrecht Betz: Musik einer Zeit, die sich eben bildet. Münschen 1976, S.32.
2) Nathan Notorwicz: Wir reden hier nicht von Napoleon. Wir reden von Ihnen! Gespräche mit Hanns Eisler und Gerhart Eisler. Berlin 1971, S. 28.
3) Arnold Schönberg: Komposition mit zwölf Tönen. In: Stil und Gedanke. Hg. v. Ivan Vojtech, Frankfurt a. M. 1995, S.112. 쇤베르크는 가령 15분간의 음악재료를 반복을 거듭해서 1시간 이상으로 부풀리는 행위를 사기라며 가차없이 비판했다.
4) Michael Menke: Expressionismus in der Musik, Arnold Schönbergs "Erwartung". In: 낭만음악 제8권 4호 1996년, 136쪽과 154쪽 참조.
5) 아이슬러에 따르면 쇤베르크는 원칙적으로 그에게는 청중이 필요 없으나 텅 빈 연주장에서 연주하면 소리가 좋게 나지 않으므로 청중이 있는 것이 더 낫다라고 말했다 한다.
6) Arnold Schönberg: Harmonielehre. Wien 1922, S. 325.
7) Arbold Schönberg: Komposition mit zwölf Tönen, In: Stil und Gedanke, S.106.
8) Wassily Kandinsky: On the Spiritual in Art. ed. Hilla Rebay, New York 1946, p.36.
9) 쇤베르크의 처남이자 스승이었던 쩨믈린스키 (Alexander Zemlinsky)는 아이슬러를 “쇤베르크의 제자들 중 유일하게 독자적인 머리”를 가졌다고 했다. (Albrecht Dümling: Hanns Eisler und Arnold Schönberg. In: Hanns Eisler der Zeitgenosse, Leipzig 1997, S. 34. 또 이경분: 한스 아이슬러와 영화음악. 음악과 민족 1998년 제 16호, 254-255쪽 참고)
10) 프랑스혁명 이래 정치성을 띤 사회참여음악이 있긴 했으나 예술적 관심의 대상에서 제외되어 왔었다. 쇤베르크에게서 음악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철저한 훈련을 받고 이론가로서도 뛰어난 아이슬러가 비로소 사회참여음악을 예술적으로 무시 못하는 분야로 체계를 세웠다. 그러므로 음악을 현실과 관련해서 생각하는 음악가라면 (헨쩨, 논노, 림, 괘벨스등) 누구든지 아이슬러를 연구하게 된다.
11) Juan Allende-Blin: Erich Itor Kahn. Musik-Konzepte Nr 85, München 1994, S. 88.
12) Alfred Baumgartner (Hg.): Propyläen Welt der Musik. Ein Lexikon in 5 Bänden, Bd.2, Berlin und Frankfurt a.M. 1989, S.603.
13) Christian Baier: "Ich hätte noch soviel im Kopf". Zum Prioritätenstreit zwischen Schönberg, Hauer und Fritz Heinrich Klein. In: Neue Zeitschrift für Musik 1999, Nr. 3, S. 34-39.
14) 쇤베르크 스스로 사심없이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1919년인가 1920년에 베르크가 내게 클라인이 작곡한 것을 가지고 왔다. 내 기억으로 그것이 >음악기계<라는 제목이었는데 12음을 사용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음악으로서 큰 인상을 주지 못했으므로 나는 별 관심이 없었다. 아마도 내 자신의 (음악적) 시도가 어떻게 발전하게 될지 그 당시 알지 못 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12음으로 작곡한 것을 보았다는 사실조차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Christian Baier: "Ich hätte noch soviel im Kopf", S. 35)
15) Manuel Gervink: Alban Bergs kompositorische Annäherung an die Zwölftontechnik. In: Musiktheorie 1998, Nr.1, S. 55 참조. 또 다른 이유로 1911년 저서 “화성학”(Harmonielehre)을 출판 한 이후 쇤베르크는 음악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론가로 인정을 받았으며 뛰어난 교수법으로 탁월한 제자들을 많이 배출하여 하우어와는 달리 그의 영향력이 컸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16) 쇤베르크는 12음기본형을 오히려 “음악적 사고”로 이해했다. (Carl Dahlhaus: Variationen für Orchester op. 31, München 1968, 6쪽 참조. 또 Manuel Gervink: Alban Bergs kompositorische Annäherung an die Zwölftontechnik, in: Musiktheorie 1998 Nr. 1, 57쪽 참조)
17) 김순란: 현대음악 작곡법 (번역: David Cope, "New Music Composition") 세광출판사 1994, 32쪽 참조.
18) Arnold Schönberg: Komposition mit zwölf Tönen, S. 110.
19) Arnold Schönberg: Komposition mit zwölf Tönen, S.111.
20) Arnold Schönberg: Komposition mit zwölf Tönen, S. 107.
21) Arnold Schönberg: Komposition mit zwölf Tönen, S. 107.
22) Michael Mäkelmann: Schönberg und das Judentum. Der Komponist und sein religiöses, nationales und politisches Selbstverständnis nach 1921. Hamburg 1984, S.469
23) Christoph Keller: Das Klaviermusik Hanns Eislers. In: Melos 1992, 29쪽 참조. 이 작품은 변주의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이미 여기에서 아이슬러는 테마와 변주의 관계를 뚜렷하게 하기 위해 망명시기의 수정 12음계 음악에서처럼 이조의 가능성을 제한하고 있다. 
24) 이경분: 한스 아이슬러와 영화음악. 음악과 민족 제16호, 1998 부산, 254-255쪽 참조.
25) 이러한 진보적인 젊은 음악가로는 쿠르트 바일(Kurt Weill), 파울 힌데미트(Paul Hindemith), 블라디미어 포겔(Vladimir Vogel), 에른스트 츄레넥(Ernst Krenek), 슈테판 볼페(Stephan Wolpe), 헤르만 세르현(Hermann Scherchen) 등을 들 수 있다.
26) “연대가”(Solidaritätslied), “붉은 결혼식”(Der rote Wedding), “비밀스런 행진”(Der heimliche Aufmarsch) 등은 아이슬러의 대표적인 정치적 노동가에 속하며 라디오음악 “시대의 속도”(Tempo der Zeit)와 무대음악 “베를린의 상인”(Der Kaufmann von Berlin: Walter Mehring작품임)이나 “조치”(Die Massnahme: Brecht작품임), 그리고 영화음악 “무인국”(Niemandsland: Victor Trivas감독), “쿨레 밤페”(Kuhle Wampe: Slatan Dudow감독)” 등이 실용음악의 예에 속한다. 
27) 쇤베르크는 1933년 미국 보스턴으로 망명한다. 아이슬러는 1933년부터 1937년말까지 유럽에서 문화 기획자로 예술적 행위를 하다 1938년 초에 미국으로 망명한다.
28) 민중전선운동은 이전의 “통일전선”(Einheitsfront) 운동을 수정한 것인데 1935년부터 독일 망명인들 뿐 아니라 프랑스정부나 외국지식인으로부터 호응을 받기 시작하였다. 아이슬러와 달리 브레히트는 민중노선에 반기를 들었다.
29) Hanns Eisler: Musik und Musikpolitik im faschistischen Deutschland. In: Musik und Politik 1918-1948, S. 348-350.
30) Hanns Eisler und Ernst Bloch: Avantgarde-Kunst und Volksfront. In: Musik und Politik 1918-1948, S. 398.
31) 아이슬러는 쇤베르크가 자본주의 음악의 대표로 비판되어 전혀 수용되지 않던 동독에서도 쇤베르크 음악중 조성체계로 작곡된 곡들은 노동자들을 위해 항상 연주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즉 땅에 평화를(Friede auf Erden), 구레의 노래(Gurrelieder), d단조 현악사중주(Streichquartett d-moll), 올림바단조 현악사중주, 콜 니드러(Kol Nidre), 오르간을 위한 토카타와 푸가 d단조(Toccata und Fuge für Orgel d-moll), 실내악 E장조(Kammermusik E-Dur)등을 이에 속하는 곡들로 칭했다.
32) Hanns Eisler: Vorbemerkung des Autors. In: Musik und Politik, 1918-1948, S. 378.
33) Hanns Eisler: Ueber Schoenberg. In: Musik und Politik, 273쪽.
34) Hanns Eisler: Die Konsonanzbehandlung in der Zwölftontechnik. In: Musik und Politik 1918-1948, 389쪽.
35) 이경분: 한스아이슬러와 영화음악, 257-258쪽 참조.
36) 이 시기에 아이슬러의 “레닌 레퀴엠“과 브레히트의 서술 ”제스츄어 음악에 대하여 (Über gestische Musik)"이 서로 간접적으로 미친 영향에 관해서 다음 논문 참조 바람. (Kyung-Boon Lee: Gestische Musik bei Brecht. In: The Brecht-Yearbook, Nr. 24, Madison|USA 1999, S. 209-226)
37) 알반 베르크도 협화음적 12음 기본음렬을 “바이올린협주곡 (Violinkonzert)"에서 시도하였다.
38) Arnold Schönberg: Komposition mit zwölf Tönen, S. 111.
39) 아도르노에 따르면 베르크도 쇤베르크처럼 12음 기법의 사용을 가능한 한 쉽게 알아내지 않도록 했다고 한다. “12음 기법의 사용이 드러나면 날수록 12음계 음악의 질은 좋지 않다. 마치 풀칠한 냄새가 나듯이.” 라고 베르크는 자주 얘기했다 한다. (Theodor W. Adorno und  Ernst Krenek: Briefwechsel. Frankfurt a. M. 1974, 53쪽)
40) Theodor W. Adorno: Philosophie der neuen Musik, Gesammelte Schriften Bd.12, 67-69쪽.
41) Theodor W. Adorno: Eisler. Zeitungsausschnitte. Für Gesang und Klavier, op.11. In: Theodor W. Adorno, Gesammelte Schriften 18 (Musikalische Schriften V), Frankfurt a.M. 1984, 527쪽.
42) Hanns Eisler: Zur Krise der bürgerlichen Musik (1932). In: Musik und Politik 1918-1948, S.188.
43) Hanns Eisler: Ueber Schoenberg. In: Musik und Politik, S. 273.
44) Hanns Eisler: Ueber Schoenberg. In: Musik und Politik, S. 273.
45) Willi Reich: Arnold Schönberg oder Der konservative Revolutionär. München 1974, S. 139.
46) Ernst Bloch: Eislers "Kantaten" in Prag. In: Wer war Hanns Eisler? Auffassungen aus sechs Jahrzehnten, hg. von Manfred Grabs, Berlin 1983, S. 102.
47) Hanns Eisler: Fragen Sie mehr über Brecht. S, 238-239.
48) 칼 달하우스가 이러한 의견을 주장하는 대표적 음악학자이다. Carl Dahlhaus: Thesen über engagierte Musik. In: Otto Kolleritsch (Hg.), Musik zwischen Engagement und Kunst. Studien zur Wertforschung, H.3, Graz 1972, S. 7-19 참고.
49) Hanns Eisler: Die Konsonanzbehandlung in der Zwölftontechnik. In: Musik und Politik 1918-1948, S. 389-390.
50) 여기서 식민지적이란  서구음악을 모방하기에 급급하여 그 한계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비판없이 수용하는 자세를 말한다.
51) 이건용: 소음을 내자. 낭만음악 제8권 3호 1996년, 2-5쪽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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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엘리어트 가디너의 베토벤 교향곡 레코딩 연주노트

존 엘리어트 가디너의 베토벤 교향곡 레코딩 연주노트

글 : 존 엘리어트 가디너
번역 : 전상헌


[역주]
아래에 소개해드릴 글은 1994년에 발매된 존 엘리어트 가디너의 베토벤 교향곡 전집 레코딩에 대한 가디너 자신의 해설을 번역한 것입니다. 기존에 이 해설을 번역한 것을 국내 라이센스 전집과 [객석] 94년 9월호에서 볼 수 있었지만, 이 두 번역에는 몇가지 문제점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둘 중 하나는 명백한 표절입니다. 그리고 번역을 하면서 빠뜨린 부분들이 너무나 많고, 결정적으로 아예 잘못 번역된 곳도 몇 군데 있습니다.

예컨대, "Sempre l'istesso tempo"라는 지시는 제 9번 교향곡의 마지막 악장에 나오는 "행진곡 풍으로"(Alla Marcia) 도막의 템포 문제와 관련하여 아주 중요한 단서임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번역문에는 빠져 있습니다. 또한, 서양에서는 베토벤의 제 5번 교향곡을 '운명'이라고 부르는 예가 사실상 거의 없는데도 불구하고, 'take Destiny'라는 말을 '운명 교향곡을 연주하다'라는 뜻으로 해석한 것은 명백한 오역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예는 몇가지 더 있는데, 이런 것을 바로 잡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어 새로 번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번역을 다시 하면서 기존의 번역을 참고한 경우도 있어서, 그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난 번역이라고 말할 수 없겠지만, 되도록이면 제 방식으로 표현할려고 노력했습니다.

존 엘리어트 가디너의 베토벤 교향곡 연주에는 최신의 연구 성과들이 집대성되어 있습니다. 가디너는 그 중에서 특히 중요하고 흥미로운 것들 몇가지를 말해주고 있는데, 가디너의 음반이 아니더라도 베토벤의 교향곡을 감상하시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럼 재미있게 읽어주시기를 부탁 드리면서 글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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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베토벤의 교향곡들을 음악 혁명의 궁극적인 표상으로 생각하곤 하지만, 여러가지 측면에서 볼 때 그의 교향곡들은 그 시대의 산물이다. 이것들은 19세기 중반의 폭발적인 발전, 특히 베를리오즈와 슈만의 선구적인 교향적 작품들을 예견하기도 하며, 동시에 과거를 되돌아 보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하이든과 모차르트, 또 한편으로는 케루비니나 고세크, 메윌과 같은 프랑스 혁명기 작곡가들이 없었다면, 베토벤의 교향곡들은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지 못했으리라는 데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

베토벤의 초기 교향곡들, 특히 제 2번을 보면 여기에는 모차르트의 정신이 스며들어 있다는 확실한 느낌을 받게 된다. 마지막 악장의 두번째 마디에 나오는 갑작스러운 옥타브 자리바꿈을 보라. 이것은 모차르트의 [하프너] 교향곡의 시작부분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와 같은 느낌은 [영웅]에서 훨씬 더 강하게 느낄 수 있는데, 여기에는 선율, 리듬, 그리고 심지어는 화성의 모습까지도 모차르트에게서 직접 가져온 것이 대단히 많다. 주요 주제가 모차르트의 제 39번 교향곡의 첫부분에서 빌려온 것일 뿐만 아니라, 첫악장(280-83마디)에서 A-C-E-F로 화음을 차곡차곡 쌓아 올려 만들어내는 괴로울 정도로 날카로운 불협화음처럼, 전형적으로 베토벤 풍이라고 생각되는 것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여러분은 "이것이야말로 전적으로 베토벤 고유의 창작임이 분명하다. 그 어떤 누구도 이렇게 해내지 못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모차르트의 같은 E-flat장조 교향곡 K.543의 도입부를 보면, 거의 동일한 화음이 중첩되어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지만(19마디), 여기서는 모차르트의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어서 베토벤의 [영웅]에서와 같은 금속성의 날카로운 소리가 없을 따름이다.

나는 바로 이것이 결정적인 단서라고 생각한다. 베토벤이 오케스트라 음향에 대하여 가졌던 개념―듣는 이를 즉각 사로잡고, 심지어는 기묘하기까지 한―과, 교향곡 형태에 대하여 가졌던 개념이야말로 의심할 여지 없이 그만의 것인 것이다. 베토벤이 다른 작곡가들이 썼던 것을 가져다 쓰고, 그들의 리듬형, 그들의 모티프와 화성을 출발점으로 삼았어도, 이 재료들을 다루는 베토벤의 방식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가령 베토벤은 조각조각 나눈 멜로디를, 목관악기들을 사용하여 마치 대화를 하는 것처럼 거의 끊임없이 이어지도록 만들었는데, 여기에는 그 전의 다른 작곡가들에게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재치와 거의 만화경과도 같은 성격이 들어 있는 것이다.

연주자들 뿐만 아니라 듣는 이들에게도 베토벤의 요구는 매정하기 짝이 없다. 연주자가 실수하기 쉽다는 가능성이라든가 테크닉의 어려움 따위는 베토벤에게는 전혀 관심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다른 작곡가들에게서는 대수롭지 않게 보이는 것들일지라도 이것이 베토벤에게서는, 테크닉적으로 아주 골치 아프고 연주자를 극도로 지치게 할 곡에서조차도, 베토벤의 음악 안에 있는 엄청난 에너지와 휴머니티에 의하여 아주 깊은 음악적 내용을 갖게 된다. 또한, 그 속에는 숭고한 정서까지 담겨있어서 음악가들과 해석자들로 하여금 테크닉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음악의 혼 속으로 '빠져 들게' 만드는 것이다.

물론 베토벤의 교향곡들, 특히 제 7번이 가지고 있는 흥분과 힘을 재현해내는 데에 있어서 기량이 뛰어난 근대 교향악단만한 악단은 없다. 그러나 당대의 악기를 쓰게 될 경우에는 추가적으로 명료함을 얻게 된다는 이점이 있다. 각각의 악기에는 '고유의 무게'(specific gravity)가 실리게 되어 베토벤이 짜놓은 옷감을 이루는 씨줄과 날줄들 한 가닥 한 가닥이 모두 동시에, 그리고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특히 리듬의 윤곽을 아주 날카롭고 선명하게 그려내고, 부점리듬을 2박자로 망가뜨리지 않고 연주할 때 더욱 그렇다. 제 1악장의 제시부에서 우리는 자기 음역의 가장 높은 곳에서 노니는 호른을 들을 수가 있고, 팀파니가 전곡의 리듬에 에너지를 불어넣으며 오케스트라 전체를 앞으로 밀고 나가는 것을 보게 된다. 이때 목관과 금관, 그리고 필사적으로 활을 움직이는 현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멋지고도 다채로운 음의 빛깔이 펼쳐진다.

나는 베토벤을 연주할 때 당대의 악기를 사용하는 것이 우리가 그의 교향곡에서 '더 많은 것'을 듣는 데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그의 천재성 안에 내재한 혁명적 측면을 부각시켜 준다고 믿는다. 반면에, 후대의 악기들은 19세기에 변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음악을 무디게 하는 특성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훨씬 후기의 음악적 표현양식에 적합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근대 악기로 유창한 테크닉과 풍부한 음량을 얻는 대신에 그에 대한 대가를 치뤄야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베토벤 시대의 악기들은, 악기들마다 아주 독특한 소리와 개성을 가지고 있어서, 베토벤이 했던 사고의 맥락을 근대의 악기들보다 더 쉽게, 그리고 더 직접적으로 전달해 준다(내게는 그렇게 보인다). 풍부함을 잃는 대신에, 그만큼 투명성과 설득력을 얻는 것이다.

베토벤이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다룬 악기가 하나 있다면 그것은 케틀-드럼(kettle-drum)일 것이다. 베토벤 시대의 케틀-드럼은 오늘날 대부분의 근대 교향악단에서 쓰이는 플라스틱 가죽을 씌운 보통의 페달 팀파니와는 아주 달랐다. 크기도 더 작고 소가죽을 씌워서 아주 다른 종류의 소리(sonority)를 뿜어내며, 다소 '낭랑한' 소리를 가지고 있는 근대의 팀파니보다 더 다양한 억양과 색깔을 표현할 수 있다.

이것은 베토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제 9번 교향곡에서 팀파니를 독주 악기처럼 취급하여 사실상 작품의 모티프까지 포함하도록 했다는 점은 놀라운 것이다. 스케르초 악장에서 "ritmo di tre battute"(1마디를 1박으로 하여 3박자로)라는 지시어로 시작하는 부분에 경이적인 패시지가 있다. 여기서는 어느 정도 멘델스존을 연상시키는 e단조의 아홉 마디가 목관에 의해 연주되고, 그 뒤에 이어지는 a단조의 아홉 마디에서는 딸림 7화음으로 끝날 때까지 모두 '여리게'(piano) 연주되다가, 갑자기 팀파니가 '강하게'(forte) 옥타브로 도약한다. 이때 F장조로 끼어든 팀파니에 의해 목관 파트는 갑작스럽게 d단조로 바뀌게 된다. 즉, 베토벤은 여기서 팀파니를 전조(modulation)의 수단으로 사용했던 것인데, 이것은 그 전에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 했던 것이다.

또한, 이 패시지에서 베토벤이 자필원고의 팀파니 음표 위에 실제로 기입했던 것이 악센트(accent)가 아니라 '점점 여리게'(diminuendo)였다는 사실은 매혹적인 것이다. 그 효과는 경이적이다. 이것은 단순히 음량을 줄여 센 소리에서 여린 소리로 옮겨갔다는 말로 끝낼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는 작품 전체의 원근법적인 구도 속에서 소리를 후퇴시켰다는 데에 주목해야 한다. 마치 음원이 실제로 멀어져 가는 것처럼 들리게 되는데, 이는 음악적 담화에 엄청나게 극적인 묘미를 더해준다. 어쩌면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인데, 이는 조너선 델 마(Jonathan Del Mar)나 클라이브 브라운(Clive Brown)과 같은 학자들이 최근의 연구에서 보여준 바와 같이, 이 명작들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지평을 열어준 것이었다. 연주자들이 가장 유명한 이 교향곡들을 연주할 때 흔히 사용하는 텍스트가, 자필악보에 나타나 있는 베토벤의 최초 의도와도 일치하지 않고, 베토벤이 손수 수정한 초판본에서 알 수 있는 그의 궁극적인 의도와도 일치하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은 거의 믿겨지지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이 레코딩에서 이 점을 바로 잡으려 했다.

이제 베토벤 교향곡 해석가들에게 있어서 템포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다. 베토벤의 대화록이나 동시대인들이 남긴 글들을 보면, 베토벤은 당시의 연주가들이 자신의 지시를 따를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 매우 회의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맬첼(Maelzel)의 메트로놈 발명을 환영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베토벤의 메트로놈이 부정확했는지 아닌지에 대한 문제는 별도로 하더라도, 베토벤이 생각했던 빠르기는 대규모 오케스트라가 잔향이 많은 홀에서 연주하기에는(정상적으로 말해서) 너무 빨랐다. 베토벤이 요구했던 것에 비해 너무 큰 악단이 연주를 하면 빠르기가 느려졌는데, 이것이 그의 고민거리였다는 증거가 있다. 베토벤은 60명 정도로 구성된 오케스트라에서 나오는 가늘고 경제적인 소리를 선호했는데, 이 레코딩에서 우리도 이 정도의 규모로 연주했다. 또한, 베토벤은 자신의 음악에 이르는 길이 음악가들에게 힘겹고 고달픈 길이기를 '원했다'. 연주가들을 한계의 영역으로까지 밀고 가는 것은 그가 추구했던 미학적 목적의 일부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 예로, 엄청난 에너지와 넘치는 환상, 그리고 눈부시게 빛나는 광채를 가지고 있는 제 8번 교향곡의 마지막 악장을 살펴보자. 여기서 셋잇단 8분음표들을 빠른 속도로 아주 정확하게 연주하는 것은, 근대 악기로 연주하든지 아니면 당대의 악기로 연주하든지 간에 모두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당대의 악기를 사용할 경우에는 악기들 간의 충돌이 없어지고, 근대 교향악단에서는 나타나기 쉬운 소리(sonority)의 체증이 사라진다는 커다란 이점이 있다. 셋잇단음 리듬들 하나하나의 아티큘레이션을 확실하게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패시지는 연주가 가능한 한계의 끄트머리에 있는 것이지만, 그것이야말로 바로 베토벤이 추구한 것이며, 나는 이러한 경우에 베토벤이 지시한 빠르기를 그대로 따르지 않는 것은 연주자로서의 책임을 게을리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보기에 여기서 메트로놈 지시를 과거의 해석가들의 잘못을 바로잡는 만병통치약으로서가 아니라, 전체적인 음악적 표현의 부산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점이다.

제 9번 교향곡의 마지막 악장에서 'Alla Marcia'(행진곡 풍으로) 악절을 보자. 이 부분은 두가지 요인 때문에 그동안 잘못 해석되어져 왔다. 무엇보다도 베토벤이 조카 카를에게 이 부분의 템포를 받아적게 했을 때 잘못 옮겨졌다는 것이 이제는 분명하다. 그러나 잘못된 것은 메트로놈 빠르기였던 것이 아니라, 빠르기를 재는 시간의 '단위'가 잘못된 것이었다. 베토벤은 "6/8박자, 84"라고 말했지만, 카를은 이것을 "한마디에 점 4분음표로 두 박"이라고 해석했던 듯하다. 그러나 베토벤이 의도했던 것은, '한마디 전체'(즉, 점 2분음표 한개)를 1분에 84의 빠르기로 연주하는 것이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이러한 해석은 'Allegro energico' 악절과 완전히 맞아 떨어진다. 여기서 합창이 다시 들어올 때("Seid umschlungen Millionen..." 악절 이후)도 역시 84의 빠르기로 지시되어 있다. (베토벤은 여기에 "Sempre l'istesso tempo"(항상 이전과 같은 속도로)라고 지시해 놓았지만 이 지시는 보통 무시된다.) 이것은 또한 그 당시의 프랑스 군대 행진곡의 표준적인 빠르기와도 일치한다

무엇보다도 제 9번의 'Alla Marcia' 악절에서는, 18세기 후반에 터키 양식의 음악에서 자주 쓰이던 낯선 타악기들을 동반한, 난폭한 터키 군대의 음악을 들을 수 있는데, 이것은 글루크의 오페라 "메카의 순례자"(1764)에 처음 나타나며, 그 다음에는 모차르트의 "후궁으로부터의 유괴"(1782)에, 그리고 베토벤의 초기 음악 몇편에서도 들을 수 있다. 베토벤은 이 악기들을 사용하여 군대가 다가오는 것을 연상하게끔 했는데, 그 효과는 놀랄 만큼 새로운 것이었다. 여기서 테너는 도시의 저편, 그리고 세계의 저편에서 일어나는 흥분되는 소식을 전하러 오는 전령인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것은 푸가토가 이어지는데, 이 푸가토의 막대한 에너지는 베토벤의 작품 중에서도 "대 푸가"(op.133)나 "장엄미사"(op.123)에서 "Dona Nobis"의 마지막 악절만이 이에 필적할 수 있는 것이다.

베토벤의 교향곡들은 제각기 모두 하나의 작은 드라마들이며, 한편 한편이 모두 철학적 메세지를 가지고 있다. 때로는 이 메세지는 정치적 차원의 것이기도 하다. 가령 제 5번 교향곡에서는 프랑스 혁명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전면에 드러나 있는데, 여기서 작곡자는 프랑스 혁명의 주제와 행진곡, 그리고 심지어는 음악의 서브텍스트를 이루는 시까지 빌려 쓰고 있다. 가장 놀라운 것 중 하나는, 케루비니의 "팡테옹 찬가"를 인용한 것으로 보이는 제 1악장이다. 이 찬가의 텍스트는 다음과 같다.

Sur votre cercueil heroique,
Nous jurons tous le fer en main,
De mourir pour la Republique
Et pour les droits du genre humain.

당신의 영웅적인 죽음 앞에서
우리는 손에 칼을 들고 맹세하노라
공화국을 위해서
인권을 위해서 목숨을 걸겠노라

여기서 "Nous jurons tous .... le fer en main"의 대담한 리듬은 교향곡 전체의 주요 모티프 주제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 '혁명과 낭만의 오케스트라'는 어느 정도는 파리 음악원 연주단(Societe des Concerts du Consevatoire)을 모델로 삼고 있다. 이 연주 단체는 1828년에 하베네크(Habeneck)가 설립한 파리 음악원(Paris Conservatoire)의 명예 연주자들과 교수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였다. 이 오케스트라는 몇가지 것들을 성취해냈는데, 우선 베토벤을 사실상 이들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연주하였다. 이들은 베토벤의 교향곡을 아주 치밀하게 연주했는데, 이것은 베토벤 생전의 다른 연주 단체들과는 아주 다른 것이었다. 이들은 처음으로 통일된 보잉(bowing)을 도입하였고, 악보를 아주 정확하게 재현하였다. 그들은 전형적인 프랑스식으로 해석하여 음악의 운명을 결정지었고, 미래의 음악 세계를 제시해주었다. 이들의 연주를 들었던 베를리오즈, 리스트, 바그너를 비롯한 수많은 음악가들이 받았던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다. 우리의 오케스트라, '혁명과 낭만의 오케스트라'는 바로 베토벤의 '혁명성'과 '낭만성'을 재현하기 위해서 1989년에(아직은 이 이름이 공식적인 것이 아니었지만) 베토벤의 "장엄미사" op.123의 레코딩과 함께 탄생했다.

지휘자로서 자신의 '존재 이유'(raison d'etre)에 대하여 생각할 때 베토벤의 아홉개의 교향곡 전곡보다 더 중요하고 더 핵심적인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들과 친해지고 이들을 이해하는 것은 모든 지휘자에게 매력적인 도전이다. 베토벤의 음악의 진가를 정당하게 평가하기 위해서, 전체적으로 그리고 개별적으로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들을 정말로 얻기 위해서 자신들의 삶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그래서 음악을 위해 기꺼이 단두대 위에 목을 올려놓을 준비가 되어 있는 헌신적인 음악가들과 함께 레코딩하게 되었다는 것은, 탐험을 위한 공동 항해에 참여한 한 구성원으로서 자랑스러운 일이다. 이 모험을 앞두고 느끼는 흥분을 가라앉힐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이 불굴의 사나이, 그의 위대한 창조물, 그리고 우리가 가는 길에 그가 놓아둔 엄청난 기술적, 음악적 역경들 앞에서 느끼게 될 경외심을 덜어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베토벤 전문가 오토 클렘페러(Otto Klemperer)가 여러해 전에 했던 말이 내게 중요하게 다가온다(약간은 아이러니이다). "지휘자에게 있어서 베토벤의 교향곡을 연주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없다. 왜냐하면 그가 음악을 작곡한 이후로 악기도 달라졌고, 연주회장도 그때보다 더 커졌기 때문이다. 베토벤을 근대화해서는 안된다."

아멘, 나도 이 말에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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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의 새노래(Nueva Cancion Chilena) 운동: 궤적과 그 의미 | 이성형

출처 : http://latindream.new21.org/music/nuevacancion.htm

 

 

칠레의 새노래(Nueva Cancion Chilena) 운동: 궤적과 그 의미
 

 

이성형교수(서울대 국제지역원)

 

I. 서론
II. 칠레 새노래 운동의 특색
III. 칠레 새노래 운동의 역사적 궤적
IV. 세 그룹의 사례
1. 낄라빠윤(Quilapayun)
2. 인띠-이이마니(Inti-Illimani)
3. 야뿌(Illapu)
V. 결론

 

 

I. 서론

 

1960년대에 라틴아메리카에 시작된 새노래(nuevo cancion) 운동에서 칠레 사례만큼 돋보이는 예도 드물다. 물론 쿠바의 누에바 뜨로바(nueva trova) 운동이나 페루의 와이노(huayno) 붐, 그리고 브라질의 새로운 음악 운동이 모두 대륙의 새로운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기는 하지만, 칠레의 노래운동은 다른 무엇보다 1960년대의 격화되기 시작했던 사회적 갈등, '인민연합'(Unidad Popular, 1970-73)의 승리와 좌절, 망명과 재민주화 과정을 겪었던 정치사의 굴곡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사회과학도의 관심을 끈다. 이 글은 칠레의 새노래 운동의 역사적 궤적을 정치사회학적 관심에서 살펴보고, 그 변화상을 현대 칠레의 사회사 속에서 조망해보려는 시도이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민족음악학이나 음악학적 논의는 가급적 삼가겠다. 이 분야에 별 지식이 없는 필자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고, 또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논의에 큰 부담을 주지 않을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글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제2장에서는 칠레 새노래운동의 몇 가지 특징을 음미하면서 다른 나라의 새노래운동들과 어떤 차이가 있는 지 살펴본다. 제3장에서는 칠레 새노래 운동의 발전과정을 세 단계로 나누어 단계별 특징을 살펴본다. 제4장에서는 매우 많은 음악가들과 그룹을 양산한 새노래 운동의 복잡성 때문에 이 글에서는 인민연합 시절부터 오늘날까지 활동을 하고 있는 대표적인 세 그룹을 택해 그들의 음악 활동과 노래의 내용을 음미하도록 하겠다. 필자가 택한 세 그룹은 모두 칠레를 대표하는 최고의 그룹들로, 군정의 박해로 망명 생활을 한 경험이 있다. 그런 와중에서 그들의 음악은 다른 대륙의 사람들과도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스스로 변모해갔고 다양한 음악적 실험을 거쳤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러한 음악적 변모는 마치 인민연합을 구성한 좌익 세력들이 유럽 망명 시절을 거치면서, 유럽 사회민주주적 가치를 내면화한 점과도 매우 흡사하다. 제4장에서는 이러한 음악의 변전이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 지 살펴보면서 이 글을 마무리하겠다.

 


II. 칠레의 새노래 운동의 특색

 

칠레의 새노래 운동은 다른 나라들에서 볼 수 있는, '민족적-민중적 것'(lo nacional-popular)을 표현하는 문화운동의 파고로 뒤늦게 개화한 것이지만, 중남미 그 어느 나라보다 가장 큰 봉오리를 맺은 것이기도 하다. 중남미 제국이 독립을 쟁취한 뒤 혼란을 겪고 난 뒤 형성된 과두제 헤게모니(1870-1930) 아래 민족통합의 표현은 항상 유럽적 이데올로기로 민중을 배제하는 엘리주의적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인디오는 말할 것도 없고, 민중 대부분은 유럽의 인종주의적 이념의 여파로 항상 他者로 그려졌다. 유럽이민이 장려되었고, 피부색을 좀 더 희게 만드려는 백화(blanqueo)가 일반대중의 정서로 자리잡았기에, 메스띠소나 인디오, 물라또와 흑인들은 민족통합의 범위에서 항상 배제되었다.

과두제의 헤게모니는 대체로 1910년 멕시코 혁명부터 1929년 공황에 이르는 기간을 통해 붕괴되었다. 공황과 그 여파로 등장한 민중주의 체제 아래 만들어진 새로운 '민족적-민중적' 담화는 나라마다 차이는 있지만 새로운 문화운동을 촉발시켰다. 먼저 20세기 최초의 사회혁명을 겪은 멕시코에서는 '혁명벽화' 운동이 일어났고, 메스띠소가 '우주적 인종'으로 그려졌다. 인디오들도 최소한 혁명벽화에서는 대접을 받았다. 또 혁명기에 유행한 "아델리따"(Adelita)나 "캐러빈 30-30 소총"(Con mi 30-30), "병사의 이별"(Adios de un soldado) 등과 같은 꼬리도나 북부 비야군의 활약을 그린 혁명 꼬리도들이 새롭게 탄생한 멕시코 국민의 정체성을 그렸고, 혁명 이후에도 많이 보급되었다. 또 혁명의 과실인 사회개혁과 반외세 투쟁을 담은 꼬리도(corrido)가 신문을 대신하여 1930-40년대에 농촌에 정치교육의 차원에서 보급되기도 했다.

브라질에서는 유럽주의적 인종주의 관념을 문화적으로 극복하려는 트로피깔리스따들이 민중주의 체제 아래 새로운 지적 헤게모니를 행사했다. 질베르뚜 프레이리(Gilberto Freyre)는 <주인과 노예>란 책에서 '인종민주주의'(racial democracy)가 지배하는 브라질의 우수성을 그렸고, 빌라-로보스(Villa-Lobos)는 그것을 음악에다, 조르지 아마두(Jorge Amado)는 그것을 소설에다 그려 넣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페론 정부가 들어서고 난 뒤 민속음악을 복원하고 보급하는 신음악운동의 바람이 크게 불었다. 정도와 시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이러한 정체성 찾기 운동은 중남미 전역을 휩쓸었다. 이들은 모두 과거 과두제 헤게모니를 대체하는 새로운 문화혁명을 꿈꾸었던 것이다.

그러나 칠레에서는 다소 달랐다. 보수적 공화제가 안정화된 정치체제 덕분에 역설적으로 대륙 차원에서 일고 있는 변화의 바람이 칠레에서는 거대한 사회적 변동으로 연결되지 못했다. 열악한 생활환경을 개선하려는 요구투쟁으로 노동자들의 시위가 조직되고, 조합이 정치화되는 경로를 걸었지만, 멕시코나 브라질에서 볼 수 있는 거대한 문화적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라틴아메리카 대륙에서 유일하게 '반파시즘 인민전선' 정부(아기레 세르다 정부)를 탄생시켰지만, 민중주의 문화운동은 칠레를 그냥 스쳐 지나갔을 뿐이다. 대신 이 과정에서 계급정당이 발달하여 민주적 선거로 권력을 교대하는 선거정치가 활성화되는 매우 독특한 정치체제를 갖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칠레의 민족적 민중적 문화는 늦게 개화되지만 민중주의 정권을 경험한 다른 나라들보다 계급정치가 발달한 까닭으로 훨씬 급진적인 면모를 갖게되는 특징을 갖는다.

 

1. 뒤늦은 개화, 급진적 표현, 세계 속의 유랑

'칠레의 새노래'(nueva cancion chilena)가 "칠레인들이 하는 노래"(Becerra 1978: 97)라 한다면, 이 노래는 칠레인들의 삶의 궤적을 반영한다. 과두제에 대항하는 새로운 문화적 비전으로서 새노래 운동은 1960년대 프레이 기민당(1964-70) 정부 시절부터 시작되었고, 인민연합 정부(1971-73) 시절에 이르러서는 상업적 음악과 견줄만큼 유행했다. 이 시기의 새노래 운동은 급진적 개혁을 꿈꾸며 집권한 아옌데 정부의 유토피아적 열망을 담고 있으며, 아울러 당시 유행했던 제3세계주의적, 반제국주의적 경향을 반영하고 있다.

인민연합의 천일간 유토피아가 쿠데타로 실패하자, 민중의 열망을 담은 이 노래들은 곧 군정의 금압으로 망명과 저항의 노래로 발전했으며, 민주화의 염원을 바라는 사람들의 새로운 상징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 결과 칠레의 노래는 탄압 속에서 세계 유랑의 길을 거치면서 세계로 퍼졌고, 훨씬 풍요로운 음악성을 지닌 채 재민주화 국면에 칠레로 다시 돌아왔다. 물론 칠레 국내의 새노래 운동도 다양한 방향으로 갈래를 뻗어가며 나름대로 발전했다. 칠레의 새노래 운동이 미친 파장은 그런 점에서 그 어떤 나라들의 노래운동 경험보다 컸으며, 아울러 원하지 않는 세계화의 길을 걸으면서 음악적으로도 훨씬 풍요롭게 발전했다.

 

2. 지리적 경계와 일치하지 않는 음악운동

칠레의 새노래 운동의 경계는 칠레 국경 안쪽이 아니다. 애초에 그것의 자양분은 비올레따 빠라나 마르고뜨의 노력에 의해 발굴된 칠레의 민속음악와 민중시(poesia popular)에서 취했지만, 안데스를 공유하는 볼리비아와 페루의 멜로디와 악기, 긴 국경선을 공유하는 아르헨티나의 음악, 멀리는 베네수엘라, 쿠바의 멜로디와 악기와도 대화하고 관계한다. 그런 점에서 칠레의 안데스 산맥이 칠레 음악의 경계는 아니다(Becerra 1978: 98). 다루는 주제도 칠레의 아름다운 자연, 사회투쟁, 공동체 보전의 욕구 뿐만 아니라 쿠바 나 라틴아메리카와의 연대, 나아가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Anti-Vietnam)에까지 확대되며, 망명 이후에는 엠네스티 인터내셔날과 보조를 맞추며 국제인권 문제까지 노래한다("Mande Mandela"). 그러나 그 노래를 부르고 연주하는 사람들은 칠레 사람들인 까닭에 칠레의 새노래인 것이다.

 

3. 안데스 전통음악의 현대화

칠레의 새노래 운동의 초기 단계는 칠레의 농촌 지역에 채보한 민중시나 마뿌체 인디언 음악에서 출발했고, 이는 나중에 안데스 고원의 인디오 음악과 악기들이 유입되면서 매우 흥미로운 실험을 거쳤다. 안데스 악기(께냐, 따르까, 삼뽀냐, 시꾸, 차랑고, 다양한 타악기 등)가 칠레 새노래 운동에서 차지한 의미는 그 역사적 배경을 이해한다면 매우 의미심장하다. 사실 안데스 민속악기들은 스페인 사람들이 정복했을 당시부터 악마의 소리를 내는 도구라고 취급되어 교회나 식민당국에서는 때마다 불태워 없앴다. 1614년 리마의 대주교는"악마의 장난이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께나를 포함한 모든 인디오 악기들을 불태워버리라고 명했다. 언제나 지배자는 민중의 기억을 말살시키려 한다. 그러기에 이 '불태워진 기억'(la memoire brulee)(Galeano 1997: 2)을 복원하는 일은 그만큼 상징성을 얻게되는 것이다. 피노체트의 칠레도 민중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안데스 악기를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민주화 투쟁에서 안데스 악기와 그 연주는 이제 정치적 의미까지 띄게 되었다.

이 글에서 살펴볼 세 그룹 모두 안데스 악기를 새노래 운동에 접목시켜 독특한 음향효과를 내었고, 때때로 다른 지역의 악기와 결합하여 새로운 음악을 실험하였다는 점에서, 실험정신이 강한 인디헤니스따(indigenista) 음악가들이라고 부를 만하다. 이들은 과두제가 강요한 민족주의 전통과 그 문화에서 벗어나는 길이 인데헤니스모와 결합한 민족적- 민중적 문화 프로젝트라고 생각했다. 칠레에서 '전통의 인벤션'과 잡종화(hybridization)는 바로 이러한 이념적 뿌리를 가지고 있다.

잊혀진 민중의 기억을 상징하는 칠레의 민속음악은 다양한 그룹의 작곡자와 연주자의 손을 거쳐 현대적 감각에 맞게끔 편곡 또는 작곡되기도 했고, 고급음악의 장르와 결합되는 실험을 거치기도 했다. 기악연주에서도 안데스의 악기는 중남미 여타 지역의 악기들과 함께 연주되어 독특한 음향효과를 연출하며, 때때로 전자 음향기기와 함께 연주되어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이 들어도 매우 친숙한 소리인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칠레의 새노래 운동은 전통적 음악의 현대화를 통해 일구어낸 민족적-민중적 문화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만 하다.

 

4. 노래만은 아닌 새노래 운동

중남미 다른 나라의 새노래 운동은 누에바 뜨로바, 와이노 등에서 보듯이 대체로 깐또(canto)의 성격을 띠며, 텍스트를 중심으로 발전해왔다. 물론 민속악기나 기악합주가 부가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항상 깐또에 예속적인 지위를 차지한다. 반면 칠레의 새노래 운동은 무엇보다 깐또이자, 동시에 기악곡의 특성이 강하다(Padilla 1985: 49). 이 글에서 살펴볼 낄라빠윤, 인띠-이이마니, 아뿌 그룹의 경우 음반곡의 1/3이 기악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야뿌 그룹의 경우는 기악곡 모음집 음반도 볼 수 있다(De sueno y esperanza). 인띠나 야뿌와 같은 그룹은 거의 30여종이나 되는 다양한 안데스 악기에 더하여 여타 중남미 제국의 민속악기, 그리고 현대적 음향기기를 혼합하여 연주한다. 노래를 부르는 깐딴떼는 동시에 4-5 개의 악기를 능숙히 다루는 연주자이기도 하다.

언어나 시어만큼 기악연주가 중요한 새노래 운동의 이러한 특성 때문에 음악원이나 음악대학에서 전문적인 고급음악(musica culta) 훈련을 받은 인적 자원이 수혈되었고, 또 고급음악을 전공한 음악도들도 이 운동에 뛰어들기도 했다(대표적 그룹이 Barroco Andino이다). 그 결과 노래나 기악곡 뿐만 아니라 민중 칸타타(cantata popular), 안데스 미사(misa andina) 등 매우 풍부한 양식들이 발전하였다.

칠레의 새노래 운동 그룹들은 민속음악과 악기를 바탕으로 항상 진지한 태도로 다양한 실험을 시도하였기에, 사회적 격변과 더불어 격해지기 쉬운 정치음악이 팜플렛 음악으로 퇴락하는 것도 막을 수 있었고, 또 지난 30년간 지속적으로 음악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칠레만큼 민중음악과 고급음악이 활발한 대화를 나눈 경우도 별로 없다. 이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빠블로 네루다와 가브리엘라 미스뜨랄의 시를 노래로 들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고전 음악(예컨대 바로크 음악에서 차이코프스키나 프로코피에프에 이르는 다양하다)이나 미사곡을 안데스 악기도 재해석한 음악을 들을 수도 있으며, 칠레 민중의 투쟁사를 칸타타 양식으로 서사화한 노래도 들을 수 있다.

 


III. 칠레 새노래 운동의 역사적 궤적

 

칠레의 새노래 운동은 프레이 기민당 정권의 개혁 노력과 그 좌절에서 출발한다. 당시 케네디 행정부는 '진보를 위한 동맹'이란 프로그램을 매개로 쿠바 혁명이후 달아오르기 시작한 라틴아메리카 대륙에서 칠레 프레이 정권을 선택하여 새로운 개혁 모델로 삼았다. 이런 기회를 잡은 프레이 기민당 정부는 과거 보수당의 헤게모니 아래 양극화의 길을 걷던 정치지형에서 급진화되어가던 사회세력들을 '자유 속의 혁명'이란 슬로건 아래 포섭하고자 노력했다. 프레이 정부는 중도통합론의 입장에서 농지개혁과 '구리의 칠레화'란 제한된 사회개혁의 열망과 민족주의적 욕구를 표출하였지만, 당시 급진화의 길을 걷던 민중의 사회개혁 요구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 것이었다. 아옌데 정부의 출범은 더욱 심화된 양극화 가운데 우익의 분열을 기회로 얻은 좌익연합의 승리였다.

비록 프레이 행정부의 실험이 실패했다고 하지만, 칠레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프레이 행정부가 취한 농지개혁은 실제로 농촌 사회에 큰 변화를 주었다. 농업노동자들의 조직화는 크게 진척되었고, 지주과두세력들에게도 일정한 타격이 주어졌다. 이러한 가운데 급변하는 농촌의 상황에 대한 관심이 커졌고, 민속음악과 인디오 문화를 발굴하고 그것을 보전하려는 민속주의자들의 활동도 활발해졌다. 더구나 '구리의 칠레화'는 비록 보상후 국유화한다는 계획에 따라 진행되었지만, 이제까지 아나꼰다와 케네코트와 같은 미국계 자본이 지배하던 칠레 구리산업을 자국이 통제하려는 의지를 보였다는 점에서 당시 중도파 정치세력이 지닌 민족주의적 감정을 잘 보여주었다. 농지개혁과 구리산업의 칠레화는 바로 중간계급은 물론 하층계급의 정치적 열망까지 자극하였고, 보수과두제가 지배하는 칠레와는 '다른 칠레'(El otro Chile)를 건설하려는 욕구를 더욱 강렬하게 부추겼다. 새로운 노래운동이란 문화혁명은 이렇게 '자유 속의 혁명'이란 부드러운 단계에서 시작했던 것이다.

 

1. 신민속음악에서 사회비판적 음악으로: 초기

비올레따 빠라, 마르고뜨 로욜라는 이 시점에서 민속음악과 민중문화를 발굴하고 재현하여 이제까지 이 부분에 관심을 지니지 않았던 산띠아고의 중간계층에게 문화적인 충격을 주었다. 우리는 이 단계를 새노래 운동에서 '빠라의 단계'라고 명명할 수 있다. 이단계는 '민속'의 새로운 발견 내지 '인벤션'이란 최초의 과정을 거치고, 노동자 대중들에게 사회변혁의 의지를 담은 투쟁적 비전이 과잉분출하는 단계로 이행하는 과도적 계기까지 포함한다.

1917년 치얀 부근의 산 까를로스에서 탄생한 빠라(1917-67)는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정규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다. 동생과 여기저기 노래를 부르면서 의식을 해결해야 했던 빠라는 나중에 그의 재능을 범상하지 않음을 알게 된 큰 오빠 니까노르 빠라의 후원으로 본격적으로 음악적 삶에 눈을 뜨게 된다. 이후 칠레 농촌을 다니면서 민중가요의 채집과 작곡에 힘을 쓰면서, 칠레 민중가요의 뿌리를 농민들의 기억 속에 보존되어 있는 민속음악과 민중시가(poesia popular)에서 찾는다.

당시 산띠아고에서 유행하던 음악의 주류는 꾸에까(cueca) 아니면 또나다(tonada)였다. 라디오를 통해 미국 대중음악이 유행하면서 칠레국민의 음악적 정체성은 심하게 흔들렸다. 보수적 과두제 사회가 유행시킨 칠레 음악은 '우아소와 치나'((huasos y chinas)풍으로 부르는, 농촌 현실과 맞지 않는 아름다운 전원생활을 묘사한 노래들이었다. 이들 노래는 농촌 축제나 국가독립기념 축제 때 불려지곤 했다. 칠레의 중간계급은 단조로운 과거 음악에서 탈피하여 빠라가 라디오에서 들려주는 '새로운 민속음악'(el 'neofolklore')에 흥분했다. 곧 신민속음악은 조용하면서도 공격적이지 않아 곧 중간계급이 열광적으로 수용한 문화적 상품이 되었고(Carrasco 1985: 35, 39), 마르고뜨 로욜라나 엑또르 빠베스/가브리엘라 삐사로 부부(주로 칠로에섬의 민속 발굴에 힘을 쏟음)의 노력도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제 모두 '진정한 칠레'(Chile autentico)가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중간계급이 수용한 민속음악은 점차 칠레 사회의 양극화된 정치 현실에서 새로운 사회비판의 정서와 결합하면서 새로운 형태로 발전한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빠라의 후반기 음악 활동, 빅또르 하라, 빠트리시오 만, 롤란도 알라르꼰, 앙헬 빠라, 띠또 페르난데스 등의 노래 활동도 이 이행기적 단계에다 위치시킬 수 있다(이 이행기가 연대기적 시간으로는 인민연합 시대와 겹치나, 필자는 노래 정신과 내용을 기준으로 갈랐다). 이들의 노래 주제도 사회정의(Parra: "La carta," "Run run se fue pal' Norte" etc. Jara: "El derecho de vivir en paz," "Plegaria a un labrador," "Ni chicha ni limona"), 민족주의적 정서(Patricio Manns: "Arriba en la cordillera"), 역사적 투쟁, 라틴아메리카 연대(Rolando Alarcon: "Si somos americanos") 등 사회적 주제로 이동하였음을 볼 수 있다.

빠라는 농민의 삶, 칠레의 자연을 다룬 민속음악을 노래하다가, 점차 사회적 불평등, 정치적 탄압을 비판하는 노래(La Carta)나, 중남미의 연대를 강조하는 노래(Los puelos americanos)를 부른다. 이 시점에서 연극감독이었던 빅또르 하라도 이러한 조류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는 빠라보다 좀 더 늦게 음악을 시작했기에, 민속음악의 단계는 짧고 대신 사회비판과 새로운 사회의 비전을 노래하는 이행기적 단계가 긴 편이다. 이제 새노래 운동은 좀 더 강렬한 톤으로 사회비판, 새로운 시대를 향한 열망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음악의 인적 자원도, 표현 방식도 다양화되기 시작했다. 하라는 바로 이러한 과도기의 중심인물이었다.

이 과도기의 음악, 특히 빠라나 하라의 음악에서 보이는 카톨릭적 성향에서 우리는 종교와 정치, 음악과 정치가 아무런 파열음 없이 혼효되어 있는 중남미 사회의 특징도 읽을 수 있다. 기민당의 좌익세력이 당을 깨고(Izquierda Cristiano, MAPU) 인민연합 쪽으로 붙는 것도 전혀 새로울 것이 없었고, 사회비판과 종교는 노래 속에서도 그런대로 융화할 수 있었다. 이 시기의 새노래 운동은 아직 개화된 계급정치를 반영하기 보다는 휴머니즘 전통에서 출발하여 인간적 삶을 막는 사회적 속박에 대해 저항하는 성격을 띠었다. 이러한 전통은 이후 다음 세대 음악가들에게 큰 귀감으로 남게 되고, 오랜 여행일정을 거치고 난 후에도 여전히 새로운 출발점이자 종착점으로 자리매김을 받게 된다. 이 단계의 음악은 아무리 제3세계 연대를 부르짖고, 인간적 사회적 구원을 갈망해도, 계급운동의 문화적 매개체로 보이기 보다는 하라의 노래 "노동자에 바치는 기도"("Plegaria a un labrador")에서 보듯이 인간적 삶을 열망하는 구도의 행위로 이해된다.

 

2. 인민연합의 단계: 절정기

196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대학가의 청년층은 쿠바혁명이후의 새로운 사회 분위기에 편성하여 사회에 대한 보다 급진적인 대안을 추구한다. 아울러 기민당의 개혁정치가 보수파와 좌익 모두에게 실망을 안겨 주면서 좌초하자, 이들의 정치적 지향은 좀 더 급진적인 변화의 프로그램으로 '사회주의 칠레'를 부르짖는 인민연합으로 이동하였다. 우리가 살펴볼 낄라빠윤, 인티 이이마니, 야뿌는 모두 좌익 정치단체와 관련있는 젊은이들이 만든 음악 그룹이다. 이들이 담당하는 누에바 깐시온은 이제 직접적으로 노동자, 농민 등 하층민을 포괄하는 좌익 정치의 표현이자, "완전히 다른 칠레"(un Chile bien diferente)를 추구하는 노래운동이었다.

이 단계의 노래운동은 당시 고양된 사회 정치 운동의 파고에 맞추어 대단히 정치화되었다. 이제 가사는 반제국주의 투쟁(낄라빠윤 그룹의 음반 Anti-Vietnam)이나 사회변혁에의 의지가 분출하는 대담한 내용을 담았고, 리듬 역시 박동이 넘치며 현란한 색조를 띠었다. 서정적 깐또보다는 서사적 투쟁사를 그린 깐또가 가사 내용을 지배했고, 서사적 투쟁사의 가사에는 은유법보다는 직설법을 원용한 '지배/착취', '지배/종속'의 이분법이나 '주인/노예' 또는 '빠트론/뻬온' 등의 대항적 패러다임이 지배했다.

이들에게 사회변혁은 노래에 담긴 열망의 차원이 아니라, 임박하고 가능한 현실세계의 과제였던 것이다. 쿠바혁명을 경험한 1960년대를 산 혁명적 낭만주의 세대에게 사회주의는 하나의 가능한 현실태였지, 미래의 유토피아는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노래운동은 당연히 정치적 선전의 무기로, 대중계몽과 각성의 도구로 인식되었다. 그런 점에서 이 시기 새노래는 "민중을 위한" 노래였지 "민중의" 노래는 아니었다.

대학개혁운동의 성과로 나타난 산띠아고 카톨릭 대학의 커뮤니케이션 센터의 주최로 제1회 칠레 새노래 운동 페스티발이 열려(제1회 대상곡은 빅또르 하라의 "Plegaria a un labrador"), 새노래 운동은 널리 보급되었고, 나아가 수많은 음악도들이 이 운동에 뛰어들었다. 1973년 9월 쿠데타로 중단될 때까지 이 페스티발에서 수많은 젊은이들, 노동자들, 빈민들이 새노래 운동에 열광했다.

 

3. 군부독재와 재민주화 단계: 원숙기

군부독재가 출범하게 됨에 따라 새노래 운동은 된 서리를 맞게 된다. 이제 좌익단체와 관련된 음악활동을 하던 사람들은 모두 추방되거나(Quilapayun, Inti-Illimani), 강제수용소에서 구금상태(Angel Parra)로 있거나, 빅또르 하라처럼 처참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군정은 이에 그치지 않고 새노래 운동을 음악적으로 표현했던 안데스 지방의 민속악기들을 이제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제 많은 음악 그룹들은 외국 망명의 길을 택해 자신의 음악을 표현하던가 아니면 침묵을 택해야 했다. 군정은 문화정책의 면에서도 근본을 정초하는 체제 변형(trasformismo fundacional)을 추구했다. 이제 칠레의 새노래 운동은 일시적으로 큰 후퇴를 경험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 칠레의 새노래 운동은 변화된 조건에서 새로운 발전의 계기를 맞이하게 된다. 첫째, 먼저 외국에 어쩔 수 없이 망명해야 했던 낄라빠윤이나 인티-이이마니를 통해 칠레의 새노래 운동이 세계 오대륙 민중들에게 전파되는 의도치 않은 결과를 낳았다. 특히 칠레 반독재 운동을 지원했던 유럽 사회민주주의 세력들에게 새노래 운동은 민주주의, 연대, 인권을 고양하는 매개체로 받아들여졌고, 이들의 음반은 유럽, 미국, 일본을 중심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나중에 국내의 음악활동을 문제삼아 귀국을 거부당해 망명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야뿌 그룹도 세계 음악 애호가들로부터 찬사를 받았고, 그만큼 칠레 음악의 세계화에 큰 기여를 했다.

둘째, 독재정권의 민속 악기 금압령으로, 민속 악기의 사용 자체가 정치적 의미를 띠게 되자, 교회와 같은 인권 보호처에서 미사를 볼 때 민속악기를 사용하는 등 새로운 형태의 저항이 생겨났다. 칠레 교회는 군정의 인권탄압에 줄곧 저항하면서 구속자나 반정부 인사들의 보호처가 되었기에, 여기서 기타와 안데스 악기로 교회음악을 연주한다는 것은 곧 바로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상징적 의미를 띠었다. 이 부분에서 가장 기여를 한 그룹이바로 바로꼬 안디노이다.

바로꼬 안디노(Barroco Andino) 그룹은 군정이 수립된 이듬해에 하이메 소또가 주도하여 결성되었다. 이들은 안데스 악기로 결성된 기악연주로 유럽의 바로크 음악을 연주하며, 이 연주에 정치적 의미를 가미시켰다. 처음에는 교회에서, 나아가서 점차 공공장소에서 젊은이들에게 빠라와 하라의 사랑의 노래를, 정치적 반대가 고조될 무렵에는 정치적 가요를 불러 전파시켰다(Rodriguez 1986: 104). 안데스 악기, 사랑의 노래도 절망과 테러가 지배하는 분위기에서는 정치적 의미를 띠게 되는 것이다. 이로서 새노래 운동의 전통은 반독재 저항운동의 상징으로 다시 설 수 있었다. 물론 망명간 그룹들의 새로운 노래도 끊임없이 유입되었다. 새노래 부르기는 이제 정치적 행동의 의미를 띠게 된 것이다.

이 시기 새노래 운동의 텍스트는 군정의 검열과 억압을 피해야했기에, 단순하면서도 시적인 운율로 변했으며, 은유적인 기법이 가미되었다. 군정기를 '밤'이나 '겨울'로, 민주화를 '아침'을 기다리는 여정으로 묘사한 일상생활을 담은 메시지가 바로 그것이다. 이와 더불어 텍스트보다는 악기의 효과음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이 많이 원용된 것도 바로 군정의 눈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루이스 알베르또 발디비아(Luis Alberto Valdivia)가 노래한 "겨울이 오면"(Cuando llega el invierno)의 가사는 이런 은유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Garcia 1990: 198).

 

Cuando llega el invierno/ tus manos buscan las mias.
Cuando llega el invierno/ se endurece la vida... ...
Quedese, companero,/ ya pasa el temporal,
cuando se aclare el cielo
volveremos a volar.

겨울이 오면/ 당신의 손은 내 손을 그립니다.
겨울이 오면/ 삶은 굳어져버리지요.
동지여, 가만 계셔요,/ 이 시간은 이미 지나가고 있어요.
하늘이 밝아올 때/ 우리들은 다시 날거예요.

 

피노체트 독재정권 아래 암묵적인 저항의 메시지로, 민주화 투쟁의 은유적 표현으로 변신하는 세 번째 단계는, 현재 민주화 시대를 맞이하여 새로운 변신을 모색하고 있다. 이제 이들은 더 이상 낭만적 유토피적 열망을 분출하지 않는다. 망명간 음악 그룹들도 모두 돌아왔고, 이들은 그동안 그리웠던 조국 산천에 대한 애정이나 사랑과 같은 인간적 주제에 탐닉한다. 안데스의 멜로디와 악기들은 여전히 이들 음악의 출발점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유토피아의 꿈이 상실된 신자유주의의 소비사회 속에서 그래도 관조적 자세로나마 저항의 몸짓을 표현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이제껏 그랬듯이 세태에 영합하는 것은 새노래 운동의 정신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에 대한 성찰적 태도는 훨씬 진지해졌고, 바깥을 향한 토로(grito)보다는 내면을 진솔하게 바라보며(mirada) 어루만지는 그런 쪽으로 새노래를 계속 부른다. 빅또르 하라가 노래했다. "용감한 노래는 항상 새로운 노래"라고.

   

 

IV. 세 그룹의 사례

 

1. 낄라빠윤 그룹

칠레 새노래 운동의 제2 세대에서 가장 정치화된 노래를 부른 그룹을 들라면 단연 낄라빠윤을 들 수 있다. 낄라빠윤(Quilapayun)은 마뿌체어로 "세 명의 털보"란 뜻이다. 이들은 모두 공청(Juventud Comunista) 출신의 대학생들로 196?년에 그룹을 결성했다. 철학교수인 에두아르도 까라스꼬가 예술감독을 맡아 많은 곡을 작곡했고, 오늘날까지도 이들의 음악활동을 지도한다. 검은 색의 와이셔츠, 바지, 뽄초(노동자 의상)를 입은 이 그룹은 당시 중간계급을 대상으로 음악을 연주하던 그룹들이 상용하던 솜브레로는 착용하지 않는 등 의상에서도 새로운 변화를 일으켰다. 검은 색조는 바로 저항과 침착함을 상징한다고 하는데, 필자가 보기에는 이들이 부르는 힘차고 강하나, 한없이 침착한 다성음악적 화음의 색감과도 통하는 것 같다.

이들도 인띠나 야뿌처럼 안데스 민속음악(와이노, 야라비 등)을 복원하고 재해석하는 데 많은 힘을 기울였지만, 다른 그룹과 확연히 구별되는 차이점은 정치적 노래(cancion politica)를 많이 불렀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들이 부른 정치적 노래의 내용은 주로 민중의 투쟁사를 담은 역사적 기억에 대한 것이 많기 때문에, 팜플렛/선전 음악으로서도 그 깊이를 잃지 않고 있다. 이들의 노래들이 과도하게 정치화되었다고 해도 그 생명이 짧지 않은 것은, 그것이 주로 집단의 역사적 기억을 회복하여 '역사적이고 현실적인 칠레'(Chile real y historico)를 그리는데 일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도 이 그룹의 활동을 주로 인민연합 시절에 부른 노래를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낄라빠윤이 의도한 것은 우아소풍으로 부르는 목가적 농촌의 칠레나, 독립국경일 축제 때 부르는 아름다운 조국을 그린 '환상적 칠레'(Chile imaginario)를 벗어나, 그야말로 칠레 민중이 겪은 '역사적 칠레'를 복원하고자 하였다. 역사적 칠레는 바로 민중이 삶을 영위했던 칠레이고, 그것은 바로 민중의 투쟁으로 점철된 역사에 대한 기록이다.

제국주의와 보수적 과두세력에 대항한 민족주의자이자 자유주의자였던 발마세다 대통령에 대한 노래("Cueca de Balmaceda"), 산타 마리아 데 이끼께 학살 사건을 기념하여 뻬소아가 작곡한 칠레 광부들의 저항가("Canto a la Pampa")를 부르는 이들의 목소리는 가진 자의 칠레가 만들어낸 공식 교과서에서 '타자'로 취급된 자들을 부활시키는 제의처럼 느껴진다. 1970년 이들은 인띠-이이마니 그룹에 속해 있던 루이스 아드비스가 작곡하여 헌정한 "칸타타 산따 마리아 데 이끼께"를 불러 새노래 운동의 발전에 새로운 획을 그었다. 인디오 음악과 민속, 그리고 민중의 투쟁사가 결합된 이 새로운 민중 칸타타의 형식이야말로 칠레의 새노래 운동이 통기타 노래에 끝나지 않고, 새로운 내용과 형식을 추구하는 그야말로 새로운 노래라는 점을 새삼 일깨워 주었다.

광산 노동자들의 고통을 노래한 17 세기 콜롬비아의 노래("A la mina no voy")나 빠트론의 착취와 뻬온의 고통을 그린 노래("Patron"), 외국인 지배를 거부하는 노래("Basta ya!" "Tio Caiman"), 그리고 구리산업의 국유화를 기념하는 노래("Nuestro cobre")도 역사에서 배제된 자들을 복원하려는 시도로 여기서는 주로 착취-피착취-거부, 지배-종속-저항의 드라마가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과거 역사상에 대한 복원은 새로운 칠레를 그리는 밑그림이 된다. 이들은 민중의 노력이 응집되어 만들어진 "성벽"("La muralla")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추구하는데 우리는 여기서 이들이 추구하는 정치적 계몽의 기획이 '개방적 민족주의'임을 알게 된다. 즉 나쁜 외세는 성문에서 막아내고, 좋은 것은 선별적으로 받아들이는 민족주의적 기획을 통해 새로운 칠레를 건설하고자 한다. 이러한 칠레를 건설하는데는 민중의 단합을 엮어내는 진군가가 필수적이다(El pueblo unido jamas sera vencido).

이들은 또 20세기 각국의 저항가요들을 중남미에 소개하는데 힘을 썼고(Las canciones de rebelde),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연대의식을 고양하는 노래도 다수 불렀다.

그러나 망명시기 동안에 과거 인민연합 시절의 음악활동을 반성하며 완전히 방향을 전환하였다. 물론 피노체트 군정을 비판하는 노래("La batea")나 연대가 등을 다수 부르기도 했지만, 1980 년대 중반 이후로는 주로 칸타타 작업에 매달려 왔다. 칠레 작곡가 구스따보 베세라와 함께 작업한 America, 시몬 볼리바르를 주제로 작곡가 우레고 살라스와 작업한 칸타타, 그리고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주제로 작곡한 10분 짜리 곡, 나아가 우이도브로(Huidobro)의 시를 음악적으로 표현하는 작업 등이 그것이다.

 

2. 인띠-이이마니 그룹

께추아어로 "이이마니山의 태양"이란 뜻을 지닌 이 그룹은, 1966년에 대학개혁 운동으로 큰 소요를 겪었던 국립기술대(Universidad Technica de Estado) 대학생들이 결성하여 1967년에 공식적으로 출범하였다. 이들의 작업은 주로 민속음악의 재해석이나 사회비판 조의 노래 부르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나, 낄라빠윤 그룹보다는 덜 정치적이고, 보컬보다는 현란한 기악 편성이 특징적이다. 또 낄라빠윤이 다성적 화음에 골몰한다면 이들은 齊唱(unisono)이나 이중창의 화성을 선호한다. 전자가 강하고 힘찬 느낌을 준다면, 후자는 섬세하고 아름다운 느낌을 준다(Padilla 1985a: 48).

이들은 안데스 악기를 대대적으로 사용하여 현란한 기악연주를 가미시킨 점에서 새노래 운동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고, 이러한 점은 야뿌 그룹에게서도 발전적으로 계승된다. 또 팜플렛 음악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칠레 인민연합의 승리 이후 선거운동에 관여한 계기로 많은 정치음악을 녹음하기도 했다("Venceremos," "Cancion del poder popular," "Cueca de la CUT" 등). 그렇지만 이들의 음악적 재능은 정치음악이 아니라 대위법적 화성과 기악을 조화롭게 결합하여 새노래 운동의 차원을 한 단계 높인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인띠는 1971년 Cantos de Autores Chilenos란 음반에서 독특한 자신 고유의 소리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화성과 악기연주를 절묘하게 결합시킨 이들은 칠레의 어떤 그룹보다 먼저 악기와 리듬을 창조적으로 결합하는 데 노력했다. 이 부분은 칠레 새노래 운동에서 가장 독특한 부분인데, 다른 대륙의 새노래 운동은 대체로 '리듬-댄스' 모델로 고착되었기 때문에 칠레만큼 다양한 운율적, 리듬적 형태를 실험할 수 없었다. 반면 칠레의 새노래 운동은 댄스 음악과 관련이 적었기에 새로운 운율과 리듬을 창조하려는 열망을 키워갈 수 있었다(Padilla 1985a: 48). 이 부분에서 우리는 그룹의 음악감독이자 작곡가인 오라시오 살리나스의 역할이 컸음을 지적할 수 있다.

인띠-이이마니나 야뿌의 구성원들은 모두 여러 개의 악기를 잘 다루는 연주자들로 이들이 다루는 음악적 자원, 음색, 주제 모두 다양하다. 깐또와 음악이 등가적 지위를 지닌다는 원칙 아래 이 다양한 자원들은 수백가지로 수천가지로 배합되어 관중들을 현혹시킨다. 솔리스트의 서정적인 레시타티브가 어느 새 다성적 화음으로 바뀌다가, 연이어 유니슨으로 둔갑한다. 물론 현란한 악기음을 동반하면서.

이들은 최초의 음반이 성공하자, 이후 음악의 소재를 안데스 음악이나 칠레 민속음악의 틀을 넘어 중남미 대륙의 다양한 음악에로 눈을 돌렸다. 그런 점에서 일찌감치 코스모폴리타니즘의 길을 걷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이 즐겨 연주하는 악기를 보면 베네수엘라의 꾸아트로, 안데스 지방의 플루트, 아르헨티나의 봄보 레구에로, 멕시코의 기따론, 콜롬비아의 띠쁠레, 고원 지방의 차랑고 등등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망명 기간에 이들은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을 확인하는 노래 작업을 하는 동시에, 말러나 스트라빈스키와 같은 고급음악과의 대화에서 유럽의 전위음악이나 록음악, 그리고 아프리카 음악 등과의 결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실험을 시도했다. 그러나 언제나 출발점과 종착역은 칠레였고, 중남미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1980년대 중반에 이들은 '민중적 실내악' 양식을 만들어 내었는데, 이는 전통적 실내악의 내용과 형식을 대중에게 보다 근접하는 방향으로 민주화하는 실험으로 자리매김할 만하다.

 

3. 야뿌 그룹

야뿌는 께추아어로 "번개불"이란 뜻이다. 번개불은 메소아메리카 인디오들이 태양과 달 다음으로 숭배하는 신이다. 야뿌 그룹은 1971년에 칠레 북부도시 안또파가스따에서 마르께스 형제들이 중심이 되어 공식적으로 출범하였다. 13세부터 20세 사이의 고등학생 내지 대학 초년생들로 결성된 이 그룹의 음악은 어떤 평론가가 평한 것처럼 "용암의 분출"(erupcion volcanica)처럼 자연스럽고, 수월하면서도, 힘차다(Padilla 1985b: 55). 1973년에 첫 음반을 낸 야뿌는 무엇보다. 북부 도시 안또파가스따 출신답게 당시 중부와 남부에 잘 알려져 있지 않던 안데스 민속음악을 산띠아고로, 칠레 전역으로 전파하는데 최대의 공을 세웠다고 말할 있다. 이들은 산띠아고에서 안데스 음악을 '도시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연주하는 사람들과 달리 아주 오래 전부터 익숙한 음악처럼 다룬다(Padilla 1985b: 54).

께냐, 삼뽀냐, 차랑고, 봄보 등 30여종의 악기를 연주하는 이 그룹의 연주에서 우리는 인띠와 마찬가지로 현란한 악기연주와 음역을 넘나드는 노래 솜씨로 새노래 운동의 절정을 보는 듯하다. 이들이 연주하는 기악곡을 들으면 우리는 안데스 산중의 한 자락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De sueno y esperanza). 누가 듣더라도 야뿌의 음악은 낄라빠윤이나 인띠-이이마니보다 기악연주나, 화성적 기교 면에서 한 단계 위로 친다.

이들은 1973년 이후 좁아진 문화적 공간에서도 계속 열심히 노래를 불렀고 1975-77년에 새음반을 내면서 칠레에서 가장 대중적인 음악그룹으로 부상하였다. 그리하여 각종 페스티발이나 텔레비젼, 라디오에 초대를 받아 음악활동을 확대해나가자 곧 군정의 블랙 리스트에 올라 탄압을 받게 된다. 일체의 매체활동을 금지당한 후 야뿌는 노조, 학교, 노동자 거주지, 카톨릭 교회(연대사목회), 실종자 가족 모임, 인권단체 모임 등에서 노래를 부르며 군정을 간접적으로 비판하며 민주화 운동을 측면지원하였다. 야뿌의 음악은 이제 군정에 반대하는 사람을 모으는 은밀한 상징의 구심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이에 따라 군정은 탄압도 보다 노골적으로 변해 갔다.

1978년 유럽 공연에서 호평을 받은 뒤 야뿌 그룹은 1980년에 다시 1년간 세계 공연을 다니나 1981년 군정이 귀국을 거부함으로써 타의로 망명객의 신분이 된다. 이들은 파리를 거쳐 멕시코에 정착하였는데 1988년 귀국할 때까지 7년간 해외에서 음악 활동을 하였다.

야뿌 그룹 역시 유럽과 멕시코에서 망명 생활을 하면서 음악적 지평을 크게 넓혔다. 이들은 안데스 음악의 틀에서 벗어나 아프로페루아노(afroperuano) 음악, 베네수엘라 음악, 영국의 팝 음악에 이르기까지 음악적 표현의 자원을 다양화하였다(Padilla 1985: 55). 그러나 그들 고유의 음색을 잃어버리는 일은 결코 없었다.

야뿌의 노래들은 위 세대와는 달리 내성적 성찰의 성격이 강하다. 직선적 비판보다는 은유적 비판이 주를 이루고, 역사적 기억의 방식도 개인사를 원용하여 보다 은유적으로, 그러나 상황을 더욱 주관적으로 해석하게끔 유도한다. 이들이 주로 활동한 시대가 군정 시대여서 비판의 언어와 문법이 선택적일 수밖에 없었던 데 기인하기도 하지만(Parque la Bandera 귀국공연 음반), 그만큼 역사나 현실에 대한 성찰적 태도가 무르익었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Vuelvo amor...vuelvo vida). 귀국을 기념하는 노래 "Vuelvo para vivir"에서 이들은 다음과 같이 군정 기간에 일어난 일에 대한 망각을 거부하고 '기억의 소중함'를 노래한다. 아울러 이들은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소비사회에서 모든 과거를 잊고자 하는 지식인들의 변절을 비판하고 '배제된 자들'의 현실을 돌볼 것을 따끔하게 충고한다("Ya quisieran por olvido").

Dicen que todo ha cambiado/ lo dicen con pretencion
dudan que la solucion/ sea cambiarlo todo
asi buscan acomodo/ para su future incierto
los que en el pasado, cierto/ jugaron con nuestra suerte
no saldran por inocente/ el dia del juicio justo.
Cuando se el tormento.
 

Yo creo que es un insulto/ creer que el viejo modelo
remendado con buen hilo/ pueda resultar correcto
lo digo por el hambriento/ y tambien por el cesante
por los que han andado errante/ por los desaparecidos
que estan condenados digo/ los remgimenes de muerte.


Tengamos ojos abiertos/ muy atentos los sentidos
ya quisieran por olvido/ enganar nuestros intentos
come aquellos intelectos/ de origen bien conocido
que con un costal de olvido/ predican resignamiento
hay que triste pensamiento/ si al pobre deja de lado.
 

Dicen que todo ha cambiado...J


그들은 모든 것이 변했다고 말하지. 그것도 우쭐대면서
모든 것을 바꾸는 것이 해결책이라는 것을 그들은 의심하지.
그래서 불확신 미래를 위해 타협을 추구하지.
확실히, 과거에 우리들의 운명을 좌지우지했던 사람들은
정의로운 심판의 날에 죄가 없다 하지 못하리.


낡은 모델을 좋은 천으로 짜깁기하는 것이
올바를 것이라고 믿는 것은 나에겐 모욕이예요.
배고픈 사람, 그리고 실업자,
거리를 방황하는 사람, 그리고 비난당했던 실종자들은
그것을 모욕이라고 말하지. 죽음의 체제였다 말하지.


눈을 똑바로 뜹시다. 방향을 잘 주시하면서
그들은 이미 망각하고 싶어하지. 우리들의 바램을 속이면서
잘 알려진 가문 출신의 지식인들처럼.
이들은 망각하는 늑골로 체념을 설교하지.
그 얼마나 슬픈 생각일까
가난한 사람들을 배제한다면.

 

이들이 사용하는 음악의 텍스트는 네루다나 로께 달똔에서부터 칠레의 젊은 시인들의 시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그 내용은 인간의 과거, 현재, 미래를 질문하는 방식으로 인간의 존엄성과 휴머니티를 구가한다. 다루는 주제도 자유, 사랑, 평등과 같은 보편적 가치들이며, 이를 가로막는 장애물들을 비판한다. 이들의 노래는, 거대한 용암처럼 흘러 내리는 네루다의 서사시처럼 웅장하지는 않으나, 그 서사시의 한 자락 한 자락을 연상케한다. 그러면서도 이 시대 칠레와 중남미에 사는 사람들의 환희, 비애, 탄식을 노래하며 우리의 심금을 울린다.

 

 

V. 결론

 

칠레의 새노래 운동은 다른 중남미 제국과 달리 민족적-민중적 의지가 뒤늦게 개화된 하나의 문화혁명으로 출발하여, 혁명적 열정과 결합하여 뜨겁게 타오르다, 이제 온전한 내성적, 성찰적 단계에 접어들었다. 이 비판적 정치시학으로 출발한 이 문화운동은 다른 여타 국가와 마찬가지로 '민속의 인벤션'이란 인디헤니스따 단계를 거쳤지만, 과도하게 정치화되면서 정치적-이데올로기적 비판문법으로 자리를 잡았다. 칠레의 경우 1930년대 이래 다른 중남미 국가들과는 달리 민중주의 운동이 강하지 않았고, 오히려 유럽형의 계급주의 정치가 발달했기에, 인민연합과 같은 선거정치를 통한 사회주의 실험도 있었고, 민중음악 운동도 그 파고의 절정과 파국의 격변을 겪었다. 새노래 운동이 격렬했던 정치의 흐름을 반영했다는 점은 멕시코의 혁명 꼬리도보다 과격한 노래 가사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차이점 이외에도 칠레 새노래 운동이 다른 나라의 음악운동과 달리 끈질긴 생명력과 세계성을 획득한 이유는 안데스 산맥을 끼고 다양한 음악적 전통을 흡수한 점, 그리고 망명을 통해 세계의 시간대와 동시대에 호흡하면서, 폭넓은 잡종화(hybridization)를 경험한 점, 그리고 대중음악/고급음악의 구분을 넘어서 다양한 양식들을 실험한 점 등에서 찾을 수 있다. 현단계 새노래 운동은 원래 쿠데타 이전의 Nueva Cancion 운동과는 달리 Nuevo Canto 운동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그리나 이 음악 운동은 박물관의 박제나 인류학적 주제로 다루는 민속이 되기보다는 끊임없는 실험을 통해 새롭게 변신하여 우리앞에 생경하지 않은 노래말과 음악으로 나타나 그 시대에 알맞은 메시지를 던진다는 점에서 여전히 "용감한 노래"로서 "새로운 노래"의 연속선상에 있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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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무기에 대하여 1,2__평통사 사무국

1. 핵물질에 대하여


핵물질은 핵분열성(Fissile) 물질과 핵원료성 물질(Fertile)의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핵분열성(Fissile) 물질은 저속 중성자를 흡수하면 핵분열을 일으키는 핵종(원자핵의 종류)으로, 핵무기 및 원자로의 핵연료로 사용되며 U233, U235, Pu239, Pu241 등이 있다. 핵원료성(Fertile) 물질은 중성자를 흡수하면 핵분열성 물질로 변환될 수 있는 핵종을 말하며 U238과 Th232(토륨)이 있다.
가장 중요한 핵물질로 우라늄과 플루토늄이 있으며, 우라늄은 U235의 비율에 따라 다음과 같이 분류한다.
- 천연우라늄 : U235가 0.71%, U238이 99.28%로 자연상태로 존재하는 우라늄.
- 농축우라늄 : U235가 0.72% 이상(통상 5%-90% 이상)
- 감손우라늄 : U235가 0.71% 미만(U235가 많이 감손된 상태)

플루토늄은 원자로 내에서 U238이 중성자를 흡수하여 만들어지는 핵종으로 자연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Pu은 독성이 매우 강한 맹독성 방사성 물질이다.
Pu은 Pu239, Pu240, Pu241, Pu242 등 여러개의 동위원소로 구성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Pu239이며, 대체로 Pu239가 차지하는 비율에 따라 플루토늄의 등급이 결정된다.



2. 핵연료 주기란?

우라늄이 광석으로 채굴되어 정련-변환-농축-가공단계를 거쳐 원자로에서 사용된 후 재처리, 재활용 및 고준위 폐기물로 영구처분되기까지의 전 과정을핵연료주기라 한다. 원자력발전소를 중심으로 이전 단계를 선행 핵연료주기, 발전소에서 타고 난 이후 단계를 후행 핵연료주기라고 한다.

정련(Uranium Ore Processing)은 우라늄 원광으로부터 우라늄 성분을 분리해내어 Yellow Cake라는 우라늄 정광을 만드는 작업이다. Yellow Cake는 화학식이 U3O8으로 우라늄 성분이 약 80% 함유되어 있고, 노란색의 분말이다.

변환은 Yellow Cake을 다시 한번 정제하여 핵연료 급의 순도를 갖는 우라늄을 만든 후 이를 다시 우라늄 농축을 위해서 농축에 적합한 형태인 UF6(육불화우라늄)로 만드는 공정이다.

농축은 핵연료로 직접 쓸 수 없는 U238이 대부분(99.28%)인 천연우라늄을 핵연료로 사용하기 위하여 U235의 비율(0.71%)을 높이는 작업을 의미하며, 이렇게 U235의 비율이 높아진 우라늄을 농축우라늄(Enriched U)라 한다. U235의 비율을 높이면 동시에 다른 부분에서는 U235의 비율이 줄어들게 되는데 이렇게 U235의 비율이 0.71% 이하로 줄어든 찌꺼기 우라늄을 감손 우라늄(Depleted U)또는 열화우라늄이라고 한다.

농축의 원리는 U235와 U238의 질량의 차이를 이용하여 두 원소를 분리하는 것으로 기체확산법, 가스원심분리법, 전자장법, 레이저법 등이 있다.

현재 공식적으로 농축시설이 가동되고 있는 국가는 미국, 프랑스(EURODIF), 중국, 독일(URENCO), 네덜란드(URENCO), 영국(URENCO), 일본, 파키스탄, 러시아 등으로 알려져 있다.

EURODIF 시설은 프랑스에 있으나 프랑스, 이태리, 스페인, 벨기에 및 이란의 합작회사며, URENCO는 영국, 네덜란드 및 독일의 합작회사임.
*이 외에도 연구시설이 있거나 연구경험이 있는 국가로는 아르헨티나, 브라질, 이라크, 인도, 남아공, 이스라엘 등이 추가될 수 있으며, 여기에서 남아공과 아르헨티나는 각각 300 및 200KSWU/y 규모의 시설이 있었으나 현재는 폐쇄되었거나 철거되었다.

핵연료가공은 이산화우라늄(UO2) 분말을 압착 및 소결하여 pellet 형태로 만든 후 이를 피복관에 넣어 연료봉을 제조하고 연료봉을 조립하여 원자로에 장전할 수 있는 연료집합체를 제조하는 공정을 말한다.

핵연료주기 구축이란 우라늄 정련, 변환 및 농축을 포함한 핵연료물질의 생산, 핵연료 가공, 원자로에서의 연소, 원자로에서 타고 난 사용후핵연료의 재처리, 고준위폐기물의 처분 등 핵연료주기의 모든 단계를 자체능력으로 확보 및 운용하는 것으로 자립적인 원자력발전 기술의 보유를 의미한다.

*북한은 '농축' 과정을 제외한 전 핵연료주기를 완성하였고, 한국은 '농축' 및 '재처리' 과정이 없는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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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우석 박사와 언론의 '민족주의' (2004.11.8) | 이선민

작년 미디어 오늘에 실렸던 기사임. -------------

 

 

황우석 박사와 언론의 '민족주의'

[온라인기자칼럼] '배아복제 실험중단' 말뒤집기에 '묵인'

 

이선민 기자 jasmin@mediatoday.co.kr

 

한국 언론에 생명윤리는 보이지 않는다. 지난 2월 황우석 박사의 배아줄기세포 복제 발표 이후, 한국 언론은 생명윤리라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린 듯하다. 한국 언론에는 오로지 기술만능주의와 경제, 국가만 있을 뿐 생명윤리와 인간존재에 대한 성찰은 보이지 않는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일부 언론을 제외한 대다수 언론들은 겉으로는 '사회적 합의'를 말하면서도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내야하는 언론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 지난 10월 말 인간배아복제를 재개하겠다는 황우석 박사의 발표와 이를 다룬 언론보도는 '사회적 합의'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남긴다.

 

황 박사의 말 뒤집기를 묵인한 언론

   
▲ 황우석 박사. ⓒ 연합뉴스
지난 2월 황우석 박사가 세계최초로 배아줄기세포 복제에 성공한 이후, 줄기세포 복제는 한국 사회의 화두로 급부상했다. 그러나 한국 상황은 10월 열렸던 유엔회의에서 인간복제금지협약을 두고 찬반 양론이 대립했듯이 생명윤리를 두고 서로 다른 입장이 맞서고 있다. 그런 와중에 지난 2월 "아직 사회적 합의가 없으므로 배아복제 실험을 중단한다"고 밝혔던 황우석 박사가 10월20일 돌연 배아줄기세포 복제를 선언하고 나섰다.

그런데 놀랍게도 실험중단에 동의를 표시했던 언론이 그가 기존 입장을 별다른 설명없이 뒤집었음에도 아무런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사회적 합의가 없어서 중단됐던 실험이 8개월만에 사회적 합의를 얻은 것일까? 그간의 변화라면 지난 8월 영국 정부가 치료용 의학연구 목적의 인간배아 복제 실험을 세계 최초로 승인한 것이 유일했다. 10월 유엔을 통한 국제적인 합의는 이뤄지지 못했다.

언론이 황 박사가 '사회적 합의'에 대한 약속을 손바닥 뒤집듯이 뒤집은 것을 '지지' 혹은 '방관'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대다수의 언론은 그동안 줄기세포 복제와 관련해, 황 박사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보도한 반면 "논란 속에 재개했다" "파문이 일 것이다" "국제적 논란이 재개될 것이다" 등의 추상적 표현을 통해 생명윤리 지지 입장을 뭉뚱그리는 '면피성' 보도를 해왔기 때문이다.  

 

배아세포 복제는 황 박사의 도덕성 문제?

언론이 줄기세포복제를 찬성한다고 한발 양보하더라도 그가 '난치병 치료목적의 배아복제 연구를 제한적으로 허용하는' 생명윤리안전법이(2005년 1월1일) 시행되기도 전에 배아복제를 하겠다고 나선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 법의 완전성과 별개로(생명윤리 지지자들은 이 법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법 제정과정에서 생명윤리와 배아복제가 오랫동안 논란이 됐다는 것을 감안할 때 그의 연구는 사회적 여론과 법적인 절차마저 무시한 과정상의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도 언론은 시민들과의 약속을 8개월만에 저버린 행위를 묵인했던 것처럼 과정상의 문제 또한 눈감아 주었다.
 
또한 언론은 생명윤리론자들의 입장을 거의 다루지 않으면서도 황 박사의 후원회 소식, 지방자치단체가 주최한 축제의 명예대사로 선정된 일, 모 정치인과의 친소관계 따위의 신변잡기를 상세히 보도하면서 황 박사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각인시켰다.  "그는 적어도 그런 식의 몰염치하고 부정직한 짓을 하지는 않을 사람이다. 독실한 불교신자인 그는 신이 시켜도 인간 복제는 하지 않겠다는 말도 했다"는 한 신문 논설위원의 맹목적이다시피한 애정은 언론이 그에 대해 얼마나 우호적인지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언론의 이런 태도는 독자와 시청자들에게 옮겨갔고, 언젠가부터 이를 '사회적 합의'로 오해하는 풍토가 만들어진 듯 하다. 언론은 '황 박사가 하지 않는다고 하니 염려 말라'면서 감정적인 여론몰이를 하고 있고, 이런 보도가 수없이 반복되면서 배아복제라는 사회적인 문제는 황 박사 개인의 도덕성 문제로 바뀌게 되었다. 

 

황우석 박사와 국가중심적 민족주의에 호응한 언론

그의 '애국적 발언'은 매력적이었고, 언론을 자극시키기 충분했다. 이는 황 박사의 발언을 추적해보면 쉽게 밝혀진다. 그는 2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정부가 허가하지 않을 경우, 해외로 나가서라도 연구를 계속하겠다"고 말하며 언론과 정부를 한차례 긴장시켰다. 이후 그는 "자신의 연구결과가 국가적 차원에서 활용돼야 한다" 등의 발언을 쏟아내며 <황우석교수 세계 각국서 러브콜...본인은 "국내 남겠다"> <"황우석교수 지켜라" / 국내연구 지원 모색 등>의 제목과 함께 언론을 장식하며 일반인들을 감동시켰다.

민족주의적 발언이 호소력을 가진다는 것을 눈치했는지, '애국심'을 자극하는 발언은 배아복제 재개 선언 전후로 더욱 두드러졌다. 

"일부 국가들이 인간배아줄기세포 복제배양을 마치 한국만의 기술이라는 인식을 갖게 되면서 유엔에서 복제 연구를 금지하는 방향으로 분위기가 흐르고 있어 걱정된다."(10월12일 기자회견)

"한두달이 더 늦어지면 다른 나라에서 남성이나 노년층 체세포를 이용한 줄기세포 복제에 먼저 성공을 거둘 수 있다."(10월21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

"최근 영국, 일본 등이 잇따라 배아복제 실험을 허용할 예정인데다 중국 등 기존 연구팀들도 연구에 박차를 가하는 상황 등을 고려해 이같이 결정했다."(10월21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

"과학기술 분야에서도 초강대국인 미국과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국가의 최우선 과제로 적극 추진하고 있는 중국 등 경쟁국들이 맹렬히 따라붙고 있어 잠이 오지 않을 지경이다."(10월23일 기자회견)

"배아복제에 대한 연구성과는 우리만의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기술이자 대한민국 국민의 자산이다."(원숭이 배아복제에 성공한 10월27일 기자회견)

언론은 황 박사의 민족주의에 기초한 애국심 호소에 <"배아복제 기술은 대한민국의 자산"> <황우석, UN 움직였다> 등의 기사로 즉각 화답했다.

일부 신문들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황 교수를 비롯한 연구팀은... 연구 잠정중단의 뜻을 밝혔다. 생명윤리에 대한 사회적 합의의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 가운데 최근 영국 정부가 배아복제 연구를 승인하는 등 다른 나라들의 연구가 활발해지고 있다. 첨단분야에 대한 치열한 국제적 경쟁을 염두에 둘 때 과학자로서 충분히 고려할 수 있는 사안이라고 본다"(경향신문 10월22일자 사설 <배아복제 연구는 계속돼야>)며 '국제경쟁'의 측면에서 그의 입장변화를 감싸고 돌았다.

또 다른 신문은 "이면을 보면, 이것이 생명윤리만의 문제가 아니다. 복제 연구 금지를 주장하는 나라는 거의 모두 생명과학기술이 뒤떨어진 나라"라며 "한 해 3000억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는 줄기세포 치료 시장을 각 나라가 선점하려고, 겉으로는 '생명윤리'라는 이름으로 치열한 물밑 싸움을 벌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분야에서 가장 앞선 기술을 가진 우리나라가 취해야 할 입장은 분명해진다"(조선일보 10월23일 <기자수첩 : 인간배아복제 막는 미국의 속셈>)며 민족주의적 사고를 더욱 자극했다.

혹시 언론은 그가 한국민이기 때문에 그의 실험의 성과와 정당성을 두손 들어 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배아 복제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은 세계 여타 지역이나 나라들과는 다른 듯하다. 배아 복제가 지닌 철학·도덕적 문제보다는 현실적 결과에 더 주목하고 국가적 자존심과 직결된다... 철학적 성찰보다는 국가적 자존심과 '난치병 치료'에 주목하는 우리의 인식은 과연 충분한가?"(세계일보 10월30일자 독일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의 책 소개에서)라는 한 신문의 물음은 황 박사와 국가주의의 결합이 윤리적·사회적 문제를 지워버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어쨌거나 언론의 대대적이고도 우호적인 보도 속에 정부는 2005년 황 교수에게 265억원을 지원할 예정이라고 한다. 누가 뭐래도 그는 이제 명실상부한 '국민과학자'이고, 그를 비판하는 행위는 이제 '국익'을 해치는 행위가 될지도 모른다.

이와 관련해 환경정치를 강의해온 대전대 권혁범 교수(정치학)는 "배아복제는 윤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굉장히 민감한 문제인데 아무런 논의와 성찰 없이 이를 국가 차원에서 지원한다는 것은 문제"라며 "배아복제가 한국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인지 근본적으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권 교수는 "배아복제가 성공을 하더라도 성공의 혜택이 다수의 시민들에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연구자들이나 관련업계 종사자의 이익을 강화하거나 특권층에게만 혜택이 돌아갈 수 있는데, 사회적 합의를 거치지 않고 시민이 낸 세금으로 연구를 지원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모르겠다"고 비판했다.

 

"경제성장 신화에 얽매여 윤리·사회적 문제는 무시"

언론은 국가주의적 호소와 함께 성장제일주의와 과학기술만능주의에 기초해 황 박사의 주장에 설득력을 실어주고 있다.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인간복제에 찬성할 수는 없다. 문제는 치료목적의 연구다. 황 교수도 강조했듯 줄기세포 배양은 지구촌의 죽어가는 수많은 환자들에게는 희망이 아닐 수 없다. 또한 국가적으로 볼 때는 엄청난 생명산업의 효과도 있다"(<생명과학 연구에 힘실어줘야>(문화일보 10월21일자 사설)는 한 신문의 주장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영남대 이승렬 교수(영문학)는 "생명윤리적 관점에서의 문제점, 여성 몸의 상품화, 과학기술의 사회적 절차상의 정당성 확보와 같은 사회적 의미를 차분하게 짚는 태도가 전무하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한국 사회는 수십 년 동안 경제성장이라는 신화에 얽매여 인간배아복제로 인한 사회적·윤리적 문제를 제쳐놓고 있고, 일반 시민들은 자신들의 이익과 관계없이 '몇십 년 뒤 몇 조의 국익이 된다'는 수사에 무방비로 노출되어있다"며 "사회적으로 아무런 합의를 거치지 않았을 뿐더러,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도 않은 것에 대해 전혀 문제를 제기하고 있지 않다"고 비판했다. 

또 언론이 <난치병 길 열렸다> 등의 제목으로 배아복제가 모든 문제의 해결책인 것처럼 과장보도하는 것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를 전했다. 이 교수는 "실제 손상된 조직은 대체될 수 있으나 간과 같은 기관은 대체될 수 없는데 언론은 마치 당장이라도 모든 것이 가능한 것처럼 보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해 황 교수 역시 "지금은 시작에 불과해 임상적용시까지 건너야 할 산이 많아 10년 이후에나 가능할 것으로 본다"고 말한 바 있다.

박병상 생명안전윤리연대 사무국장(풀꽃세상을 위한 모임 대표)은 "대부분의 난치병은 환경오염이나 스트레스 같은 사회적 원인에 의해 생기는데 이를 내버려 둔 채 필요한 장기나 세포를 복제해 갈아끼운다는 발상을 하고 있다"며 "복제연구에 들어가는 천문학적 연구비용을 환경오염을 줄이는 데 투자하면 (상황이) 달라질 것"이라고 꼬집었다.
 
배아복제, 윤리 사회적 성찰과 함께 인문학적 접근 필요

이승렬 교수는 "지난 2월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다수의 외신이 배아복제를 크게 보도했지만 외국 언론들은 황 박사의 공적은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야기하는 철학적 윤리적 사회적 문제를 자세히 다뤘다"며 "그러나 국내 한 보수신문은 황 박사에 대한 뉴욕타임스의 부정적 어조의 평가마저 찬양일변도로 왜곡했다"고 지적했다.

박 사무국장은 "사람의 난자에 체세포 핵을 넣어 인공수정을 시키는 배우줄기 세포 복제는 생명을 도구화시키는 비윤리적 연구인데도 '치료목적의 복제는 찬성하나 인간존엄성을 해치는 인간복제에 찬성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상황을 호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인간복제를 하지 않겠다는 황 박사의 주장과 이를 지지한 언론보도에 대해 "배아복제와 인간복제는 착상 여부에 차이가 있을 뿐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고, 불가능하다고 하지만 실험을 반복하면 가능할 것"이라며 우려했다.

박 사무국장은 연구과정에서의 윤리적 문제점과 연구결과가 가져올 사회적 문제도 심각하다고 말했다. 박 사무국장은 "난자채집과정에서 여성에게 과배란를 유도하기 위한 호르몬 주사를 놓는 것은 여성의 몸을 인위적으로 통제하는 것으로 윤리적 문제가 있고, 이 과정에서 난자가 돈으로 거래될 가능성이 많다"고 말했다. 특히 이런 행위들은 사회적 약자들의 생명을 '착취'하는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철학자이자 변호사인 앤드류 킴브렐 또한 저서인 '휴먼 보디숍'(김영사 펴냄)에서 생물공학의 발전과 인체의 상품화의 문제점을 지적한 바 있다. 킴브렐은 혈액, 장기, 태아, 난자와 정자, 아기, 유전자와 세포의 공공연한 상업적 거래를 예로 들며, 이것이 한 인간에 대한 착취와 인간 존재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 교수는 배아복제 문제와 관련, 윤리적 사회적 접근과 함께 인문학적인 성찰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배아복제는 생명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인간의 삶과 죽음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인문학의 본질적 문제와 맞닿아있는데 이런 것에 대한 고찰이 없다"며 "현대의학은 인간의 삶과 죽음을 분리시키는데 이는 죽음과 삶이 이어졌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생태주의 사고와 맞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언론이 생명공학 기술을 사회적 맥락 속에서 어떻게 자리매김할 지를 진지하게 검토하고, 책임있게 보도해야한다"고 당부했다.

 

입력 : 2004년 11월 08일 21:19:37 / 수정 : 2004년 11월 09일 09:2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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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세상 블러그에 집짓다

오랫 동안 미루어 왔는데, 여기다 집짓고 살기로 했다. 자료도 모아놓고, 생각도 좀 정리하고...

 

참세상 블로그를 최종적으로 선택한 이유...

 

여기는 말이 통하는 사람이 있다. (기술적으로 ^^;)

검색이 된다.

제한이 없다.

복사 붙이기가 잘된다. (원래 블러그가 잘되던가?)

 

그리고....

 

참세상이 잘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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