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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새벽'의 마지막 공연 실황 중에서

1993년 새벽의 마지막 공연이었던 "러시아에 관한 명상"에 실린 노래다. 후손들에게...

 

작곡자 이름이 기억이 안난다. 전화 한통화면 알아낼 수 있겠지만 모른 채로 놔두려한다. 그게 좋을 것 같아서다. 작사는 김정환 시, 노래는 윤선애다.

 

난 이 곡을 급격히 몰락하고 있는 민중운동, 이제가지 새벽이 해왔던 모든 시도들에 대한 새벽의 '애도'로 꼽는다. 물론 브레이트 시에 붙인 노래 '후손들에게'와 함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스스로 해산했다. 아무도 지켜보지 않았고 그래서 그들에게는 후손들이 없다.

 

 

nuovo라는 분이 bob.jinbo.net에 "윤선애씨 어디 계세요"라는 타이틀의 비라이센스(?) 음반을 올려 준 덕에 딱 10년만에 이 노래를 듣게 되었다. 그 분에게 정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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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 관한 명상" 중 '사랑'


사랑 그것은
다만 우리가 마침내
둘이 되어
고단한 우리들의 앞날을 본다는 것

사랑 그것은
다만 우리가 마침내
미래를 두 눈으로 바라볼 뿐
주인은 너희들(후손들)이라는 걸 받아들이는 것

더 나아가
눈물 흐린 시야를 보탤 줄 안다는 것
살아 있는 동안 영원 불멸한 생애를 불태우고



무엇이 또 일어서는가
그러나 일어서는 것은
이미 살아있는 수천의 미래일 뿐



그래 생애는
흔적으로 남는 것이 아닌 것
그것은 눈물 혹은 기쁨일 뿐
일어서는 것은 오로지 세상 뿐




무엇이 또 일어서는가
그러나 일어서는 것은
이미 살아있는 수천의 미래일 뿐


이룩된 것이 보다 찬란히 일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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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의의 혹은 취중결론 | 최원

비극의 의의는 어떤 혁명적 시도들의 실패의 장렬함을 보여줌으로써 이후 세대들이 유사한 길을 걷도록 촉구하는 데 있지 않다. 또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이전 실패의 원인들을 과학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성공에의 보증을 이후 시도들 속에서 조금이라도 증가시킬 것을 촉구하는 데 있지도 않다.

내가 이해하기에, 비극의 의의는 혁명을 원하는 그 모든 동일자의 법칙(혹은 확신)은 예기치 못한 타자의 법칙(혹은 확신)으로 말미암아 필연적으로 실패할 것이며, 따라서 그 모든 혁명적 시도들은 항상-아직 '유한한 것'으로 남을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만드는 데 있다.

다시 말해서 비극의 의의는 혁명적 시도 속에서 필연적으로 자신이 빠져들 그 모든 '확신'에도 불구하고, 왜 동일자가, 혁명의 주체가, 여전히 타자를 향해, 심지어 자신의 적을 향해, 스스로를 열어내는 운동을 행할 필요가 있는지를 보여주는 데 있다.

비극을 실패에 대한 찬양으로 이해하거나 혹은 (결국은 마찬가지 이야기겠지만) 끝내 도래하여 그 모든 실패들을 '보상(redeem)'해줄 성공에의 촉구로 이해하는 것은 모두 종말론적이고 결단론적인 비극 이해일 뿐이다. 하이데거와 벤야민이 공유했던 이 위험한 코드를 반복하지 말 것.

혁명은 '목표'가 아니라 '정세'일 뿐이라는 점, 우리는 혁명을 목표로 삼는 것이 아니라, 정세로서의 혁명 속에서 수행하거나 수행할 수 없는 다수의 곤란한 목표들을 가지고 있을 뿐이라는 점을 볼 것. 그리고 혁명 속에서 수행하거나 할 수 없는 다수의 목표들이 문제인만큼, 혁명은 여전히 어떤 '정치'가 가능해야할 공간으로 남아있어야 한다는 점을 이해할 것. 만일 혁명이라는 정세가 정치가 불가능해지는 정세로 둔갑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혁명이 아니며 가장 끔찍한 결과를 야기할 수도 있다는 점을 이해할 것. 혁명 속에서 무엇이 정치를 가능하게 만드는가, 혁명 속에서 정치를 가능하게 만드는 또 다른 정치는 어떤 것인가를 사고할 것.

"우리에겐 반역해야할 이유가 있다." "그러나 인식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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룰라, 좌파 집권 프로젝트 안정화 미명 하에 국회의원 매수 | 조세 꼬레아 레이치

룰라, 좌파 집권 프로젝트 안정화 미명 하에 국회의원 매수 조세 꼬레아 레이치 출처 : 참세상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inter_column&id=10&page=1 브라질노동당(PTB) 대표 로베르투 제퍼슨Alberto Jefferson의 [룰라 정부 및 노동자당 부정부패에 대한] 폭로는 1992년 예산에 대한 의회 국정감사 이래 가장 큰 스캔들을 일으키고 있다. (브라질 대통령 페르난두 콜로르 데 멜루는 여러 번의 부정 스캔들로 1992년에 탄핵됐다. 노동자당(PT)은 이 때 대통령 탄핵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었다.) 이번 사태는 룰라 정부가 직면한 최대 위기이며, 룰라 정부의 전 민간 국무총리이자 오른팔이었던 조세 디르세우Jose Dirceu는 첫 희생자로서 6월 16일 사퇴를 해야만 했다. 우정사업 관련 부정부패 혐의를 받은 제퍼슨은 몇몇이 제기하길 ‘디르세우가 제퍼슨을 범죄화하기 위한 음모’에 맞대응했다. 그는 6월 6일 폴하데상파울루 Folha de Sao Paulo [브라질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그리고 6월 14일 브라질 하원 윤리위원회에서의 진술에서 또 다시 한 번 노동자당 총무 데루비우 소아레스 Delubio Soares가 매달 3만 헤알(12,500달러)을 당대표들을 통해 자유당 및 민중당 의원들에게 줬다고 폭로했다.(자유당 및 민중당 의원은 하원 총 564석 중 100석 넘게 차지한다.) 또한 총무가 야당 지지에서 여당 지지로 입장을 바꾸는 모든 국회의원에게 백만 헤알(40만 달러)의 ‘상금’을 지급했다고 제퍼슨은 밝혔다. (매수를 쉽게 당하는 몇몇 우익정당들은 실제로 정부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브라질노동당 대표는 또한 노동자당이 2천만 헤알 상당의 ‘정치 계약’의 일환으로 4백만 헤알을 자신을 통해 브라질노동당에 줬으며, 이런 계약에는 노동자당 대표 조세 제노이누 Jose Genoino가 직접 개입되어 있다고 말했다. 기자인 도라 크레이머 Dora Kramer는 6월 15일자 오에스타두데상파울루 O Estado de Sao Paulo에 ‘비밀은 없다’는 칼럼을 통해 로베르투 제퍼슨의 윤리위원회 진술이 “국무총리 조세 디르세우에게 치명타를 가했으며, 노동자당 지도부를 심각히 훼손시켰고 국회 전체를 진흙탕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들은 모두 같은 손에 의해 상처를 입었다. … 그는 국회의원들을 지목하면서 이들이 모두 불법 선거 자금 체계의 공범이었다는 혐의를 씌웠다. … 그는 이런 수평적 선거 자금 체계[여러 정당에 선거 자금 지급]가 얼마나 확산되어 있는지를, 이것이 얼마나 당연시 여겨지는 지를 폭로했다. 그는 의회 감사위원회가 특정 감사 대상자를 책망하거나 사면해주기 위해 거래를 한다고 밝혔다. 대통령궁과 의회 내 여당지지자들 간 관계를 노출시켰고, 이 모든 것이 권력을 사고 파는 행위의 일환이라고 말했다.” 부정부패 혐의로 이미 고통스러워하고 있으며 지난 몇 달 사이에 지지율 하락을 직면하고 있는 룰라 정부는 사상 최대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이는 또한 노동자당 역사상 최대 위기로 이어지고 있으며, 노동자당에 대한 정치적 신뢰는 추락하고 있다. 디르세우의 사퇴는 노동자당 내 균형을 망가뜨렸다. 그의 사퇴가 한편으로는 룰라가 정부 내 “썩은 일부”를 제거함으로써 (디르세우는 이미 일년 전 그의 핵심 자문 중 한 명인 왈도미루 디니즈 Waldomiro Diniz가 개입된 스캔들로 심각한 상처를 입은 바 있다.) 협소한 자기이해에만 복무하는 부패한 부분을 도려내는 것이라면, 다른 한편으로는 팔로치 Palocci와 구시켄 Gushiken과 같이 大금융자본과 연계가 가장 깊고 브라질사회민주당(PSDB)과 거래하는 데 가장 유리한 자들의 입지를 강화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정부와 노동자당이 약화되다 정부와 노동자당의 위기는 룰라 행정부가 신자유주의에 대한 지지, 이로부터 촉발된 논란과 노동자당의 방어적 태도와 맞물려 있다. 이런 복합적인 위기는 우익에게 유리한 지형 속에서 펼쳐지고 있다. 이번 사태는 새로운 정치를 향한 매개로서의 노동자당의 도덕적 유산, 신뢰와 정당성을 완전히 붕괴시키고 있다. 여태까지는 [노동자당에 대한 비판이] 기존의 낡은 경제 정책을 지속한다는 데 국한됐었다. 이제 비판은 모든 일반 시민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제기되고 있다 - 즉, 국회의원의 매수와 부정부패. 모든 사람이 룰라 정부의 성격과 한계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이런 위기 때문에 정부는 재정장관 팔로치의 ‘연임’에 더욱 강력히 집착하고 있다. 팔로치는 룰라 행정부의 ‘안정’을 위한 ‘돛’으로 간주되며, 룰라의 약화를 가장 잘 이용할 수 있는 브라질사회민주당은 팔로치가 정부에 남아있길 기대하고 있다. 브라질사회민주당은 2006년 10월 선거까지 정부를 최대한 약화시켜 놓으려 하고 있다. 즉, 제도와 ‘체제’ 자체의 정당성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룰라 정부의 지지율이 하락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자유전선당(PFL)과 연계가 있는 전통 우익만이 룰라 대통령을 탄핵해야 한다고 위협(그러나 명확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하고 있다. 그리고 제퍼슨과 기타 혐의 제기자들은 자신들의 혐의로부터 룰라를 조심스럽게 면제해주고 있다. 이 사태는 룰라 정부와 노동자당을 향하고 있는 장기적 갈등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무엇이 어떻게 되든 룰라 정부는 약화될 것이며 우편향할 것이며, 팔로치의 입지와 그의 신자유주의 노선은 강화될 것이다. 디르세우가 제거된 상태에서 팔로치는 대통령 중심의 정치지도부 내 경쟁자가 더 이상 없는 상태이다. 그리고 룰라는 자신의 임기 막판에 이르러 브라질사회민주당의 인질이 될 가능성도 있다. ‘정치적 흥정’에서 ‘뇌물’로 많은 분석가들이 강조했듯이, 페르난두 엔리케 카르도수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계속 추진하기 위해서는 의회 내 연정과 부패한 우익 정부기관에 기반한 기존의 통치방법 또한 유지해야 한다. 룰라는 대중으로부터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반민중적 경제 정책과 단절을 꾀해야 하는데, 만약 대중으로부터 지지가 없다면 그는 그 300여명의 정치장사꾼들 - 가능한 최고 가격으로 집권자들에게 자신을 팔아넘길 준비가 상항 되어 있는 상당수의 국회의원들, 브라질 정치의 풍토병적 부정부패에 책임이 있는 바로 그 자들 - 과 손을 잡지 않을 수 없다. ‘투까노 tucano’[브라질민주사회당의 별칭]들이 카르도수가 집권한 8년 동안 여당을 이루면서 사유화와 거시경제적 규제를 통해 금융자본의 이해관계에 노골적으로 복무하는 ‘도매’ 식의 합법적 부정부패에 기반 했다면, 룰라 정부는 좌파의 집권 프로젝트를 안정화한다는 미명 하에 개별 국회의원을 매수하는 ‘소매’ 식 전통으로 되돌아갔다고 할 수 있다. 정부 내에서 벌어진 이와 같은 정치적 흥정 또는 ‘주고받기’는 조세 디르세우가 조정한 것이다. 그러나 또한 대통령궁에 종속된 노동자당 일부도 개입했다. 노동자당 사무총장 실비우 페레이라 Silvio Pereira가 정부 및 국가기관 25,000개 직위를 팔아넘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만천하가 아는 바이다. 바로 그래서 대중여론은 정부 및 노동자당의 입장을 지지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제퍼슨의 혐의가 사실이든 그렇지 않든, 정부와 노동자당이 그 동안 매우 노골적으로 국회의원들을 매수해왔기 때문에 이런 사태가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이다. 정부 및 국가기관에의 채용을 대가로 지지를 확보하려는 거래들, 정당을 바꿔치기하는 ‘유연한’ 국회의원들, 내지는 팔로치가 룰라 정부에게 전략적 중요성을 가진 투표 바로 전날 국회 내 특별히 협조적인 의원들이 제출한 법개정안을 지원하기 위해 뿌린 자금 - 이 모든 것은 노동자당이 부정부패한 엘리트들의 행각이라 강력히 비난한 바로 그러한 것들이다. 그리고 신문들은 이 모든 것을 보도했다. 실용주의의 쓴맛 “월별 뇌물”은 - 실제로 존재한다면 (존재했다는 말이 국회 내에서 많이 돌고 있긴 하다) - 정부로 하여금 이런 과정[매수와 지지자 확보 등]을 더욱 쉽고 저렴하게 밟아나갈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정치적 전환을 추진하는 방법으로는 매우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러나 친정부적인 노동자당이 완전한 실용주의 노선으로 자신을 전락시킨 것을 감안하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사실 이런 실용주의는 2002년 이전부터 브라질 좌파 일부의 정치적 문화를 형성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당 상당부분이 룰라에 대한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여러 지방자치단체에서 노동자당 주류 지도부가 애초 원칙을 점차 상실해가고 있고, 원칙을 상실해가는 자는 공수표를 돌릴 이유가 없으리라. 그래서 제퍼슨이 제기한 혐의로부터, 또는 의회 감사(우체국을 통한 ‘월별 뇌물’에 대해 이미 감사가 진행 중이다)로부터 어떠한 결과가 나오든, 상처는 가해질 대로 가해졌다. 정부(그리고 정부에 대한 노동자당의 종속)에 실망하고 있는 브라질 피선거권 대중에게 [부정부패에 대한] 혐의는 룰라 식 통치방법이 어떠한 대가를 요구하는지, 그리고 노동자당의 행동이 어떻게 다른 정당 수준으로 떨어졌는지에 조명을 비쳐줬다. 지금 노동자당과 정부의 목표는 당의 이미지가 양호했던 이전 시절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상처가 더욱 확대되지 않도록 하고 그 상처가 룰라 정부를 영원히 무덤 속에서 밀어넣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현재 상황에서는 정부와 어색하기 짝이 없는 정부 지지자들, 또는 노동자당에 대한 새로운 혐의가 제기되면 혐의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십상이다. 연방경찰은 노동자당 당원들이 개입된 아마존 밀림 벌채 계획을 밝혔다. 마르타 수플리시 Marta Suplicy가 시장으로 있을 당시 상파울루 야당 당원들을 흡수시키려 했다는 혐의도 드러나고 있다. 시의회에서도 ‘월별 뇌물’ 체계가 있었던 것이다. 로베르투 제퍼슨은 정부에게 영향을 끼칠 또 다른 혐의를 들고 나왔다. 예를 들어, 실비우 페레이라가 야간 항공우편 서비스 수수료 과잉청구로 이득을 얻고 있다는 혐의 등이다. 진실이든 아니든 모든 새로운 혐의는 이전의 것에 더해져 노동자당의 좌파적 정체성을 파괴하는 데 일조하고 있으며, 이에 노동자당은 다른 이기주의적 정당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웅덩이에 내던지고 있다. 룰라와 노동자당 지도부는 자신들이 심은 씨앗의 열매를 맛보고 있는 것이다. 위기를 관리하기 위기에 대처하는 데 있어 정부 일각에서는 모든 책임을 노동자당에 지우려 하고 있다. 당 지도부는 여전히 조세 디르세우의 통제 하에 있다. 제노이누를 제외하고, 노동자당 내 혐의를 받고 있는 사람은 모두 디르세우와 연계가 있다. 그러나 지난 6월 8일 노동자당 전국집행위원회는 혐의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델루비우에게 나름대로 타당한 직위해제 처분을 가했다. 무능력한 지도부 관료들은 피혐의자들을 비호하면서 델루비우가 단지 당의 결정 사항을 이행하고 있었을 뿐이라고 항변했다. 그 이후 기자회견에서 처참하게도 델루비우는 제노이누가 지시한대로 자신은 단지 심부름꾼이었을 뿐이라는 인상을 심으려 노력했다. 압력을 받고 있는 대통령은 개입된 모든 이들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다 - 즉, 룰라가 너무 약화되면 재선을 노릴 수 없게 되고 그렇게 되면 2006년에 팔로치가 그를 승계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당이 책임을 져야 하며 사람들의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친정부 좌파 - ‘민주적 사회주의 Socialist Democracy(DS)’와 ‘좌파연합 Left Articulation' 주류 지도부 - 는 델루비우를 비호하기 위해 당 관료들과 디르세우의 계략 뒤에 줄을 서고 있으며, 동시에 정부의 경제 정책에 대해 약한 목소리로 비판하고 있다. 이들은 현재의 위기가 가져오고 있는 파장을 간파하고 있지 못하다. 타르시시우 짐머만 Tarcisio Zimmerman, 올란두 데스콘시 Orlando Desconsi, 호아웅 그랑다웅 Joao Grandao 등 의회 내 민주적 사회주의 의원들, 그리고 몇몇 좌파연합 의원들은 애초에 우정사업 관련 혐의에 대한 감사를 실시하라는 요구를 지지하지도 않았다. 감사가 로베르투 제퍼슨이 혐의를 제기하기도 전에 이미 승인이 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 좌파들이 정부에 참여하면서 거기에 순응하고 있다는 사실은 점점 더 명백해지고 있으며, 그렇게 됨으로써 이들 좌파는 상당한 정치적 전략을 필요로 하는 상황에서 자유롭게 운신할 수 없게 되었다. 좌파 블록 : “숨길 것도 없고, 잃을 것도 없다” 보다 진지한 좌파는 위기가 폭발하기 전부터 이미 혐의에 대한 완전한 조사가 이루어질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들의 구호 중 하나는 “숨길 것이 없는 자는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였다. 노동자당 좌파블럭 소속 의원 12명은 우정사업 관련 부정부패 혐의에 대한 감사를 애초부터 요구했고, 이들은 이제 노동자당 상원의원 일부와 연계를 맺기 시작했다. 감사에 반대를 했던 노동자당 의원들은 자신들의 입장이 비판을 받자 바로 그 다음 주에 입장을 바꿨다. ‘월별 뇌물’ 혐의에 대해서도 좌파블럭 -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반대해온 노동자당 좌파 일부로 형성된 - 은 같은 입장을 취했다. 정부와 노동자당에 악영향을 미치더라도 제기된 혐의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져야 하며, 책임자는 처벌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시민사회의 민주세력들이 개입해야 하기 때문에 이 의원들은 전국주교회의와 브라질변호사모임의 지원을 호소하고 있다. 좌파블럭은 또한 정부 및 노동자당의 부패한 행동, 룰라 및 팔로치의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 그리고 이에 대한 여당의 지원이 갖는 연관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시장을 통치하는 자는 거리[대중]의 지지를 받을 수 없는 노릇이다. 경제정책 방향선회에 대한 요구는 부정부패에 대한 효과적인 투쟁과 불가분의 관계를 이룬다. 광범위한 재편 이번 위기는 디르세우 식 정치 그리고 고수하기도 어려운 실용주의 노선을 따르는 친정부 노동자당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있다. 이는 여전히 좌파적 노선을 유지하고 있는 층위, 정부의 연정과 낡은 정책이 미친 영향을 간파하고 있는 층위 내에서 비판적인 노동자당 좌파가 보다 넓은 지지를 확보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준다. 최근 에두아르두 수플리시 Eduardo Suplicy와 크리스토반 부아르케 Cristovam Buarque, 프레이 베투 Frei Betto와 같은 상원의원들은 정부와 노동자당이 취하고 있는 방향에 대한 불만족을 표명했다. 그러나 좌파를 다른 방향으로 이끌기 위한 싸움은 심지어 좌파블럭 중 민중사회주의행동 Popular Socialist Action (APS)파도 제안하듯 노동자당 내에 예의바르게 개입하거나, 새로운 지도부 선거에 개입하는 것으로는 불가능하다. 실제로 노동자당 내부 지도부 선거는 의회 내 분쟁 때문에 완전히 무시되고 있다. 다른 한편, 친정부 좌파가 엘로이사 엘레나 Heloisa Helena의 사회주의와자유당(P-Sol) 주위에 구축한 ‘정치적 완충지대’는 더 이상 지속하기 힘든 상태에 처해있다. 이 정당은 2006년 선거를 대비해 법적 등록 절차를 거칠 참이다.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등록될 가능성이 크다.) 사회주의와 자유당은 소속 의원들의 최근 선언에서 볼 수 있듯이 비종파적 태도로 노동자당 좌파와 연대를 하는 등 현재 위기에 긍정적으로 대응했다. 무엇이 어떻게 되던 간에, 엘로이사 엘리나는 2006년 선거에서 핵심 인물이며, 대통령 후보로 출마할 가능성이 있다. 마지막으로 노동자당 좌파는 정부나 당이 방향선회할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 그리고 노동자당의 이미지에 가해진 손상을 회복할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서 중장기적 계획을 세울 필요가 있다. 룰라는 브라질사회민주당의 중앙정부 복귀를 준비하고 있는 듯하다. 이제 ‘2안’의 가능성을 타진해볼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좌파블럭은 현재 놓여 있는 선택 중 가장 이득이 될 만한 방안을 찾고 공동행동을 해야 한다. 향후 몇 주 동안 브라질 좌파 지형에 대한 포괄적인 재편을 향한 거대한 움직임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상파울루, 2005년 6월 16일) [번역] 전소희 - wto반대국민행동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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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임경구 기자의 고언(苦言)

 <기자의 눈> X파일-연정 '음모론'의 고리, 정부여당이 끊어야
 
  2005-08-11 오후 3:04:41      
  
 
  대개의 경우 '음모론'의 등장은 파행의 전주곡이었다. 음모론의 공통된 뼈대는 여권이 야당을 죽이기 위해 무언가 일을 꾸몄다는 의심에서 출발한다. 물론 정부여당은 '진정성'을 강조하며 부인한다. 꼬인 실타래처럼 얽혀가다가 푸닥거리인 양 한번쯤 대충돌이 발생한다. 그 뒤엔 죽도 밥도 안되고 앙금만 남긴 채 다음 장으로 넘어간다.
 
  그 고질적인 수순을 우리는 지난해 '4대입법' 논란에서 봤다. 청와대와 여당은 '진정성'을 무기로 밀어붙였다. 한나라당은 국가보안법과 과거사법 등이 보수세력을 죽이기 위한 기획의 산물이라며 '결사항전' 했다. 형식적 결과는 국회 파행이었고, 내용 상의 결과는 '누더기' 과거사법 탄생과 국보법 표류이었다.
 
  다시 등장한 불안한 징후 '음모론'
 
  지금의 정국도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다. 양대 쟁점인 안기부 X파일과 연정론 뒤에 음모론이 등장한 게 어쩐지 불안하다.
 
  X파일 '음모론'은 최초 한나라당에서 제기됐다. 왜 유독 특정 재벌과 특정 정치세력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내용만 나오느냐는 의심이었다. 국가정보원의 '국민의 정부시절 불법도청' 공개 이후엔 민주당발(發) 음모론이 가세했다. 'DJ 죽이기'를 위한 모종의 기획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급기야 사안의 성격상 전혀 관련이 없을 듯한 연정론과도 맥이 얽혔다. 노 대통령이 X파일-불법도청 파문을 등에 업고 DJ와 결별해 한나라당과 대연정을 추진하려는 게 아니냐는 것이었다. 가뜩이나 노 대통령의 연정 제안이 정계 개편을 위한 포석이라는 의구심을 받아온 터라 이런 시나리오는 그럴싸해 보이는 측면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DJ를 버려서 우리가 얻을 게 뭐냐"는 여권의 정치공학적 반박 또한 일리가 있어 보인다.
 
  호사가들의 술안주용으로 제격인 이런 논쟁은 꼬인 정국의 실마리를 푸는 데는 하등 도움이 안된다. X파일 문제가 불법 도청 문제로, 음모론으로 계속 초점을 이동해가면서 거대권력 간의 유착이라는 본령에서는 한참 멀어졌다. 여기에 여권 내부에서조차 조율되지 않은 연정론은 가뜩이나 어수선한 정국에 '논쟁을 위한 논쟁거리'만 양산하고 있다.
 
  이런 상태에선 9월 정기국회가 갈등 해소의 장이 아닌, 확산의 장이 될 공산이 크다. 특검법-특별법 줄다리기를 둘러싼 미시적 논쟁이 화두가 될 것이 뻔하고, 각 당의 '저격수'들은 장끼를 뽐내듯 근거 모를 폭로전을 수행할 것이다. 언론은 따라 가고 국민은 현혹되는 쳇바퀴도 예정된 수순이다.
 
  연정론, 이제는 접을 때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까. 우선은 X파일과 연정론이라는 양대 현안을 독립된 사안으로 제자리에 위치시켜 놓는 것이 시급하다. 그렇게 하고 나서 두 사안을 얽어매고 있는 '음모론'을 야당이 거두면 일은 쉽다. 청와대와 열린우리당의 요구도 그런 것이다. 하지만 이는 혹여 있을지 모를 '정치적 의도'를 모른 척 하라는 주문에 불과해 야당에겐 설득력이 미치지 못한다. 더욱이 상대가 믿어주지 않는데도 결백만을 거듭 강조하는 것은 더 큰 음모론으로 비화될 수도 있다.
 
  하기에 해결의 주체는 청와대와 여당이 맡는 게 옳다. 음모론이 배양되는 토양 자체를 없애는 것이다. 결자해지의 의미에서 이미 수명을 다한 듯한 연정론을 여권이 스스로 폐기처분하는 결단이 하나의 지름길이 될 수 있다. 적어도 연정이 실현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청와대와 여당이 인식하고 있다면 비생산적인 논란을 매듭 지을 시점으로는 지금이 적기라는 얘기다. 더 큰 목적이라는 선거제도 개편은 자연스런 논의 절차를 따라가면 된다. 야당이 당장 테이블에 나오지 않는다고 삿대질을 해선 될 일도 안 된다.
 
  그럼에도 여권은 연정론을 포기할 의향이 전혀 없어 보인다. 노 대통령은 8일 기자간담회에서 "도청 정국과 연정 문제는 무관하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무관하다"는 말보다는 향후에도 연정론을 지속적으로 거론하겠다는 뜻에 무게가 실렸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다음날 국무위원들 앞에서 노 대통령은 "그동안 우리가 만든 사고의 틀과 가치관 등 너무 경직된 틀 내에서만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에서 크게 한번 뛰어넘어 새로운 정치를 창조적으로 해보자는 진실한 의미에서 제안한 것"이라고 연정 제안의 정당성을 거듭 강조했다.
 
  이같은 수석 당원의 '메시지'는 열린우리당에도 여파를 미쳤다. 문희상 의장은 9일 "(한나라당과의) 연정 가능성이 지금 당장은 없다"고 대연정 포기를 암시하면서도 이번에는 물꼬를 돌려 "대연정이 안되면 소연정은 가능하다. 이는 민주당, 민주노동당과는 가능하다는 얘기"라고 말했다. 어떤 식으로건 연정론을 이어가야 한다는 사명감으로까지 비쳐졌다.
 
  하지만 이는 최근 유시민 상임중앙위원이 "소연정은 국회운영에는 다소 힘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선거제도 개선을 통한 한국의 정치 발전에는 합당한 대안이 아니다"고 말한 것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노 대통령의 의중을 잘 읽기로 소문난 두 지도급 인사들의 말조차 엇갈릴 정도로 연정론이 종잡을 수 없이 표류하고 있다는 증거다. 청와대든 우리당이든 이쯤에서 논란의 악순환을 종결시켜야 할 필요성은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은가.
 
  정부여당, 집권의 책임을 잊지 말아야
 
  또 한가지. 불법도청 문제와 관련한 야당의 음모론에 꼬박꼬박 정면 대응하는 청와대와 여당의 자세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가 전혀 없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한나라당을 향해 "석고대죄해도 부족한 정당이 국정원 개혁을 가열차게 추진한 대통령을 향해서 음모를 제기하는 것이 정치적 도리인가 생각할 때 기가 막히고 어처구니가 없다"고 말한 조기숙 청와대 홍보수석의 울분 토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입원을 두고 "민주당이 왜 그렇게 흥분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김만수 대변인의 냉소는 어떤 결과를 초래했나.
 
  한나라당에선 국회 정보위 소집 문제를 두고 "청와대가 여당과 국정원에 대한 완벽한 통제 권한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청와대 대변인이 언급할 성질이 아니었다"는 반발을 낳았고, 민주당에선 "민주당을 쪼개고 파괴하려는 기조에 대해서는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리는 차원의 저항을 한 것"이라는 불만이 즉각 튀어나왔다.
 
  물론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기에 야당의 정략적 접근법도 혼란을 가중시키는 중요한 원인이다. 하지만 국정을 책임진 정부여당과 야당의 책임을 동일한 잣대로 재단할 수는 없는 일이다.
 
  노무현 정부 출범 초기, '아름다운 재단' 박원순 상임이사는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정부여당은 접시를 깨고 야당은 독을 깼다고 하더라도 정부여당이 더 큰 비판을 받아야 한다. 권력을 잡고 있는 책임이 크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시민단체가 형식적 균형주의에 맞춰 독을 깬 사람도 꿀밤 한 대, 접시 깬 사람도 꿀밤 한 대 식이었다"고 불만을 토로한 데 대한 충고였다.
 
  최근 메가톤급 두 가지 사안을 마주하며 야당과 핑퐁게임 하듯 독설을 주고받는 청와대와 여당의 인식은 여전히 "왜 우리만 가지고 그러느냐"는 2년 전 그 언저리를 맴돌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먼저 결단할 것 결단하고 정리할 것 정리해 정국의 가닥이 좀 선명하게 드러나게 만들어주었으면 한다. 그게 여권이 할 일이다.
 
  노파심에서 하는 얘기지만, 청와대와 여당이 애당초 음모론이 계속 생산되는 지금과 같은 모호한 상황을 즐기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면 그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그런 것이었다면 필자로선 "지금까지 잘못 말씀드렸다"고 사과하며 지금까지의 얘기를 다 취소하는 수밖에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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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금자씨 : 박찬욱의 의도는 성공했는가? 아니 그의 의도란 무엇이었는가? | 장진범

어제 장농이랑 냉장고를 함께 옮긴 사람들과 이 영화를 봤다. 예고편을 보고서 이 영화 정말 봐야겠다 생각한 건 처음이었다. 오동진의 극찬도 한몫 했다. 게다가 정성일 팬카페 사람들의 논쟁도 나를 자극했다. 어쨌든 영화를 봤다(이건 얼마만이더라?).

 

흔히 그의 영화를 '복수 3부작'의 맥락에 위치짓곤 한다. 이런 호칭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복수'가 중요한 소재인 건 분명하다. 어디선가 박찬욱은 그렇게 말했다(혹은 그렇게 말한 것 같다). 복수는 사회적으로 금기시된 것이므로 흥미로운 예술적 소재가 될 수 있다고. 그의 예술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고 나 역시 이런 관점에 점점 더 이끌리고 있다.

 

복수가 언제부터 금기가 되었는지 잘 모른다. 다만 결정적 일보를 내딛은 것은 헤겔이라 들었다. 이른바 '인정투쟁'(특히 예나시기의 헤겔이라고 한다) 이란 복수라는 사적 정념을 정치라는 공적 실천으로 '지양'해 낸 것이다. 복수 대신 '재판'이란 개념이 들어오는데 이때 재판의 목적은 공동체의 복구다. 물론 '범죄자'를 공동체에서 배제하는 식이 아니라 그에게 '시민권' 핵심적으로 ('변호'라는 형태로) '발언권'을 줘 재판이 기존 공동체를 '반성'하는 정치적 계기가 되도록 재판 자체가 전환되어야 한다. 이로부터 나오는 헤겔의 놀라운 명제:

'범죄자는 자기 자신의 처벌을 의지해야 한다.' 이는 재판의 反-복수적, 민주적 개조와 같은 말이다.

 

하지만 재판 더 넓게 말해 국가를 통한 공적 '인정'이 오작동하면, 적대나 갈등이 정치적으로 해결되지 않으면, 복수는 항상-다시 되돌아온다. 좀더 냉소적으로 말하면 많은(아마 지금까지 모든) 국가들은 복수를 은밀히 조장해 왔다. 적대와 갈등을 중재하지 못하는 무능력 그로 인한 정당성의 침식을 이들의 사적 해결인 복수, 거기에 동반되는 잔혹한 폭력에 대한 '예방적 대항폭력'이라는 경찰적 정당성으로 보충해 왔기 때문이다. 국가의 타락은 개인의 타락으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국가의 더한 타락으로 이어진다. 폭력의 악순환.

 

바로 이 지점에서 예술의 윤리적 역할이 있을 것이다. 금기시되지만 어떤 식으로든 실재하는 상황/행위를 극(특히 비극)의 형태로 체험케 함으로써 갈등과 '책임'(respons(e)iblity)을 숙고하게 해 준다는 점에서. 고대부터 현대까지 예술이 이른바 '(재)주체화'의 특권적 계기

로 인정받는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또한 반민주적 결국 경찰적 국가(시민을 준-범죄자로 취급하는) 의 토대를 아주 근원적인 지점에서 해체할 수 있는 행위가 예술인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복수 3부작' 역시 이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듯 하다. '복수는 나의 것'은 계급적대가 정치적으로 해결되지 못하고 모든 사람이 상대방을 원수로, 자신을 보복자로 상상할 때 이 세상 위에서 벌어지는 지옥의 실천을 그린다. 그런 의미에서 '복수는 나의 것'은 복수를 하려는 모든 사람들 에 대한 경고로 읽힌다. 노동자들에게, '나 너 착한 거 안다', 그렇지만 그러면 안 된다... 부르주아들에게, 복수의 수레바퀴가 돌기 전에 뭔가를 해라...

 

'올드보이'에서 그려지는 것은 다른 식의 지옥이다. 그것은 푸코적인 의미에서 '지배'의 상황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행하려고 시도하고 있는 분석들은 본질적으로 권력관계들을 대상으로 한다. 나는 이를 지배(domination)의 상태와는 다른 어떤 것으로 이해한다 (…) 한 개인 혹은 한 사회적 그룹이 권력관계들의 장을 가로막고 그것들을 유동성 없고 고정된 것으로 만들며 운동의 모든 가역성(reversibility)을 피하는 데에 이를 때 (…) 우리는 지배의 상태라고 부를 수 있는 것과 대면한다. 이러한 상태 안에서 자유의 실천들은 존재하지 않거나 일방적으로만 존재하거나 극단적으로 한정되고 제한된다는 것이 분명하다..."
- 푸코, '자유의 실천으로서 자아에의 배려' 中

알다시피 이우진은 오대수의 운명을 완전히 장악하여 어떠한 저항도 할 수 없게 만들고

저 끔찍한 바퀴로부터 빠져나오는 대가로 스스로의 파괴를 치르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그런 '지배'를 실행한다. '私刑'을 집행하는 감옥에서부터 정신을 장악하는 최면술, (최면술은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차라리 지배의 어떤 극단을 상징하는 것 같다) 그리고 물론 그 모두를 감당할 수 있는 경제력에 이르는 저 까마득한 권력의 비대칭성의 지옥. 홉스가 말한 '베헤모스'(내전/자연상태)와 '리바이어던'(극단적 사회상태)은 둘다 지옥이다.

 

'친절한 금자씨'가 그리는 지옥은 어떤 것인가? 내가 인상적이었던 점은 행위자들('보복자들')의 위치가 극히 자의적이고 유동적이라는 사실이다. 전편에서 서로를 죽이고자 했던 류와 동진은 이제 사이좋게 유괴를 기도한다. 오대수의 최면술사는 그에게 식탁에서 개처럼 강간당한다. 이우진은 유괴/살해당한 원모의 자리에 가 있고 이금자는 백선생처럼 입이 틀어막힌다. 그녀의 방은 오대수가 갇혔던 감옥이 되고 그녀의 딸과 양부모는 독가스에 취한다. 한편 '통일의 꽃' 임수경은 장기수를 가둔 감옥의 간수가 되어 있고 '혁명운동'에 사용하려 했을 '법-구경' 총은 사적 복수의 도구가 되고, 그리고 또...

 

그리고 그 중심에는 물론 폐교의 '私刑'이 있다. 그것은 백선생에게 가장 잔혹한 복수이자

(자신에 대한 死刑/私刑 논의를 무력히 듣고 있을 수 밖에 없다니!) 이 순환에서 벗어나기 위해 박찬욱이 설치한 장면이기도 하다. 그는 스스로 이렇게 말한다:

"모범적인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끔찍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래야 효과가 있다. 그걸 통해서 원론적인 교훈을 절실하고 뼈저리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같다. 관객을 한 방향으로 몰고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백 선생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의 문제에서 점점 더 우스꽝스럽게 갔고, 그리고 이제부터는 유족이 더 잔인하게 느껴지도록 했다. 무방비상태의 인물을 놓고 벌이는 그들의 행동을 보는 금자는 구경꾼이 된다. 복수를 막 수행하려는 사람, 오랜 세월 준비해서 이제 막 잡아놓고 죽일 수 있는 그 단계에서 금자는 이 모든 복수극의 구경꾼, 관객이 되는 거다. 그제야 금자는 어떤 깨달음을 얻는 거다. 금자가 직접 복수를 수행했다면 좀 달랐을 거다. 내가 했을 법한 걸 남이 하는 걸 지켜볼 때 이 모든 것이 다 그릇되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다. 고지식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금자씨가 그 과정을 거쳐서 뭔가 자책하고 괴로워하는 제스처가 바로 두부 모양의 케이크를 먹으려고 할 때다. 금자는 독자적인 방식으로 자기 구원을 갈망하는 인물이다. 전도사가 제시한 두부가 아니라, 자기 손으로 만든 두부 케이크를 먹는다는 거다."

 

그러므로 이 장면은 그의 복수연작 안에서 일종의 '사라지는 매개자'(vanishing mediator) 역할을 논다. 가장 잔혹한 폭력이자 절대악의 확실한 '폐제'이면서 보복자 자체의 해체의 시작이다. 적어도 의도는 그랬을 것이다. 문제는 원하는 효과를 거뒀느냐다. 여기서 박찬욱은 블랙코미디 기법을 전면화하면서 그의 말대로 하자면 '우습다라는 기조로 가다가도

웃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식으로 주저하게 되고, 또 나중에는 웃은 게 조금 미안하게도 되는 그런 상태' 를 도모한다. 내가 볼 때 이는 통찰력있는 선택이다. 왜냐하면 그는 잔혹이 反-희극이 아니라 희극이라는 점, 또한 거기에 모종의 '향락'이 있다는 점을 파악하고 희극 자체를 분할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런 장면을 보면서 웃는 자신 안의 잔혹과 관객을 대면시키면서 어떤 섬뜩함과 불편함을 끌어내려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박찬욱은 세간의 평가보다 훨씬 순진하거나 아니면 희대의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순진하다는 것은, 관객들이, 금자씨와 달리, 정말로 즐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희대의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위의 사실 곧 이 변증법적 전환의 실패를 뻔히 알고 있고 스스로 이 실패를 즐기면서도 정반대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알 수 있는 도리는 없다.

다만 오늘날 우리가 상상보다 훨씬 더 잔혹할지 모른다는 것, 잔혹한 '부정의 부정'을 경유해 구원으로 가는 숭고한 '부정신학'이 극히 도착적일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보면 난 '복수는 나의 것'이 더 윤리적인 것 같다. 자신은 없지만 이 점에선 정성일 선생과 좀 의견이 다르다)

 

마지막 장면에서  난 두 가지 점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금자와 제니라는 '모녀' 관계가 성립됐다는 점. 이는 '복수는 나의 것'에서는 실패했고 '올드보이'에서는 양자 간의 책임의 비대칭성을 전제로 구성된 '부녀' 관계와는 사뭇 다르다. 어떻게 보면 '친절한 금자씨'의 결론이 다르게 난 것은 그녀의 딸이 딸로서 살아있었고 엄마의 얘기를 (미도와 달리) 다 들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또 하나는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받아먹으려는 사람들의 '혀'였다. 우리에게 혀와 입은 무엇일까. 낭시 식으로 말하자면 '노출'(ex-posure)이란 무엇일까.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거다.

 

 

친절한 금자씨 2 : 박찬욱의 의도는 성공했는가? 아니 그의 의도란 무엇이었는가?

 

 

앞서의 글에서 인용했듯 박찬욱은, 특히 '사형' 장면에 관한 자신의 의도를 이렇게 밝혔다:

"모범적인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끔찍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래야 효과가 있다. 그걸 통해서 원론적인 교훈을 절실하고 뼈저리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같다. 관객을 한 방향으로 몰고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백 선생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의 문제에서 점점 더 우스꽝스럽게 갔고, 그리고 이제부터는 유족이 더 잔인하게 느껴지도록 했다. 무방비상태의 인물을 놓고 벌이는 그들의 행동을 보는 금자는 구경꾼이 된다. 복수를 막 수행하려는 사람, 오랜 세월 준비해서 이제 막 잡아놓고 죽일 수 있는 그 단계에서 금자는 이 모든 복수극의 구경꾼, 관객이 되는 거다. 그제야 금자는 어떤 깨달음을 얻는 거다. 금자가 직접 복수를 수행했다면 좀 달랐을 거다. 내가 했을 법한 걸 남이 하는 걸 지켜볼 때 이 모든 것이 다 그릇되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다. 고지식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금자씨가 그 과정을 거쳐서 뭔가 자책하고 괴로워하는 제스처가 바로 두부 모양의 케이크를 먹으려고 할 때다. 금자는 독자적인 방식으로 자기 구원을 갈망하는 인물이다. 전도사가 제시한 두부가 아니라, 자기 손으로 만든 두부 케이크를 먹는다는 거다."

 

구조주의 이후 우리가 배운 것은 저자의 의도를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 혹은 같은 말이지만 저자조차 어찌할 수 없는 장면의 물질성에 유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저번에는 박찬욱 스스로의 진술 인용으로 대체한 이 장면에 대한 분석이야말로 이 영화를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이 될 것이다.

 

우선 제기할 수 있는 것은 박찬욱이 의도한 것과는 달리 (적어도 나에게는) 이 장면의 시작이 전혀 '전환'으로 느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영화를 보기 전에 스포일러를 접했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영화가 얼마 진행된 이후부터 난 백선생이 틀림없이 연쇄살인범일 거라고 믿게 됐기 때문이다.

 

이는 백선생이 '절대악'으로 그려진 사정과 관련될 것이다. 아마 백선생이 금자의 아이를 데리고 살인현장에 나타난 그 끔찍한 장면에서부터 이는 거의 목적론적인 귀결이었다. 어쨌거나 백선생이 절대악으로 그려졌기 때문에 사형 장면은 전환으로 느껴지지 않았을 뿐더러 프로이트적 의미에서 '원-장면'(primal scene)이 된다. (박찬욱이 이 영화가 '동화'라고 말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모든 동화는 '옛날옛적에'('Once upon a time')으로 시작하고 현존 사회의 '기원'을 설명하는 역할을 한다) 아무런 금기 없이 향락을 즐기는 난폭한 아버지를 '폐제'하고 아들 간의 공모를 통해 금기/법, 따라서 '사회'를 정초하는 바로 그 장면 말이다. 박찬욱은 이 장면을 본 관객들이 유족들의 잔혹(또한 우스꽝스러움)을, 혹은 그 장면을 보고 웃는 스스로의 잔혹을 느끼길 바랬다고 말했다. 물론 그런 효과가 없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잔혹이 향락(과 그것의 전염)을 동반한다는 점을 박찬욱이 정말 몰랐을까? 더구나 절대악을 폐제하는 게 문제라면, 그 잔혹에는 모종의 정당화가 부여되지 않는가?

 

모든 잔혹은 잔혹을 부를 뿐이라고 '복수는 나의 것'에서 말했을 때 그는 적어도 이렇지 않았다. 물론 이 점은 바뀌지 않았다고, 잔혹은 잔혹을 부를 뿐이며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는 사람은 이 순환에서 한발 벗어나 있는 '관찰자' 금자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금자는 어떤 의미에서 외부자/관찰자인가? 가장 모범적인 '리바이어던'으로서가 아닐까? 백선생을 죽인 후 누설을 걱정하는 유족들 앞에서 금자가 던진 협박을 생각해 보라. 감독의 의도야 어땠던 간에 바로 그 말 때문에 금자의 '유령성'은 '초-자아'의 그것으로 사후결정된다.

그녀는 '악/향락의 민주화'를 행했고 거기서 나오는 죄책감에 기반해 사회상태를 만들었으며 너무나 친절하게도 이 사회상태의 보증자가 되기를 자청했다. 그녀가 이미 죽은 백선생에게 쏘아대는 총알은 실제로는 유족들에게 던지는 경고일 것이다.

 

이렇게 보면 '친절한 금자씨'는 '올드보이' 와 놀라울 정도로 대칭적이다. 이우진은 오대수에게, 이금자는 유족에게 '금기'를 범하게 했고 양편 모두에서 그/녀들의 상대방은 '혀'가 잘린다. 하지만 오대수는 무의식적으로 금기를 범했고 자기 스스로 혀를 잘라낸다. '오이디푸스' 왕이 그랬던 것처럼. 이 때문에 오대수는 영웅이 되고 이우진은 파멸한다. 하지만 유족은 (금자의 유혹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의식적으로 금기를 범했고 혀를 자르는 것은 금자(禁者!)다. 유족은 가련하고 추한 존재가 되며(계좌번호는 압권이다!) 금자는 '이드'의 사악함과 '자아'의 나약함 모두에 절망하는 '초-자아적' 영웅이 된다. 여기서 '칼의 노래'에서 김훈이 그리는 이순신이 떠오르는 것은 나 뿐일까...?

 

그러므로 이금자는 성공한 이우진이다. 이때 자식의 존재 여부는 중요한 차이점이다. 지난 번 글에서는 금자와 제니의 관계에 관해 다소 긍정적인 뉘앙스를 남겼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전혀 아니다. 금자는 오대수가 아니라 이우진이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오대수와 미도의 관계는 여전히 문제적이다. 오대수는 오이디푸스지만 미도는 안티고네가 아니기 때문이다) 제니는 초-자아적 영웅을 정당화해 주는 존재다. 먼 옛날 '조상'께서 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어떤 고뇌를 겪었는지 대대손손 전해주는 동화적이고 신화적인 '나레이터'다. (따라서 이는 '낯설게 하기'하고는 거의 관계가 없을 것 같다) 이렇게 보면 마지막 장면의 '혀'는 아주 의미심장하다. 유족들의 혀는 잘리었고 이 히/스토리를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혀는 금자의 딸만이 가지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금자가 처음부터 '친절한 금자씨'였던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극단적 폭력과 잔혹을 단순히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이 문제가 될 때 특히 오대수처럼 개인적으로가 아니라 집단적으로 그렇게 해야 할 때 박찬욱의 대답은 실망스럽게도 홉스적인 것이었다. '공각기동대' 같은, 외양적으로는 '포스트모던'한 영화가 결국 로크적인 해결책('의식')으로 회귀했던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이번 영화에서 박찬욱의 실패는 그가 너무 친절하려 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역시 나는 '복수는 나의 것'의 박찬욱이 제일 맘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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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자씨가 여성관객에게 어필하는 것 | 김윤은미

금자씨가 여성관객에게 어필하는 것
     
영화 <친절한 금자씨>

김윤은미 기자
2005-08-01 21:03:50


<기사를 보고 영화를 보면 재미가 덜할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개봉 전부터 관객들의 호기심을 사로잡더니, 개봉 후에도 수많은 평들이 쏟아지고 있는 영화 <친절한 금자씨>. 이 영화는 대작에 기대하기 쉬운 기승전결로 꽉 짜인 플롯을 피하고 인물들의 소개장면과 에피소드 나열로 사건을 이어나간다. 블랙코미디적인 유머와 정확한 비유를 사용해 만든 장면과 에피소드가 이 영화가 갖춘 미덕인 듯싶다. 영화는 복수를 하는 금자씨와 그녀 주위인물들의 면면을 다면체처럼 잘게 부수어서 조합함으로써 상당한 여운을 남긴다.

관객의 몰입 방해하며 복수 정당화

<친절한 금자씨>의 전반부는 가볍고 경쾌하다. 어린이 유괴 및 살인사건으로 감옥에서 13년을 살아온 금자씨는 출옥 후 백선생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 감옥에서 알게 된 여자동료들을 찾아간다. 방북으로 유명한 임수경씨의 조언을 얻었다고도 하는데, 감옥의 여성 인물들은 상당한 관찰력을 바탕으로 하여 만들어졌다. 남편과 동반으로 은행 강도를 저지르다 감옥에 들어온 여자, 불륜을 저지른 남편과 상대 여자를 죽여서 고기를 먹어버렸다는 여자, 출옥 후 감옥에서 배운 기술을 이용해 남자의 목을 들고 있는 여자 조각을 주문 제작하는 여자도 있다. 그녀는 고운 목소리로 “여자 손님들이 좋아해”라고 말한다.

<올드보이>에 비해 <친절한 금자씨>는 여성관객에게 어필하는 면들을 상당히 많이 가지고 있다. 여성들이 독하게 마음을 먹고 합심해서 금자씨의 복수를 돕는다는 설정도 그러하다. 자칫 지나치게 잔인하다는 느낌을 줄 수 있는 면면들임에도, 어이없을 정도로 진지한 나레이션과 빠른 전개, 코믹한 설정들이 영화에 깊이 몰입할 수 없도록 방해한다.

특히 금자 역을 맡은 이영애의 하얗고 맑은 얼굴과 천사 같은 미소는, 생과 사를 넘나드는 심각한 장면에서 느닷없이 등장해 상당히 큰 효과를 발휘한다. 금자씨의 얼굴에서 빛이 나오도록 하는 화면 처리나, 신장을 기증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들은 대로 웃으면서 욕을 지껄이는 장면 등이 그것이다. 감옥에서 동료를 성적으로 착취하는, ‘마녀’라 불리는 여자에게 착한 얼굴로 밥을 먹이면서 락스를 뿌려대는 장면은 압권이다.

심각한 상황에서도 웃지 않을 수 없게 만들지만, 웃음의 말미에 씁쓸함을 집어넣는 블랙코미디를 운용하는 캐릭터. 금자씨의 캐릭터는 새로운 여성 캐릭터를 원한 관객이라면 환영할 만한 매력적인 구석이 있다. 출옥 후 착하게 살라고 말하는 목사가 내미는 두부를 “너나 잘하세요”하며 무표정하게 엎어버리는 장면이나, 연하의 남성과 성관계를 가진 후 담배를 피우는 장면 등은 관습적인 이미지들을 패러디 해 웃음을 전달하면서도 그 자체로 멋지다.

영화에서 복수가 진행되는 후반부는 전반부의 경쾌함에서 돌변해 심각하게 진행된다. ‘여성’과 ‘복수극’의 조합에서 특별한 화학작용을 기대하는 관객이라면 만족할 듯싶다. 여성복수극은 자칫 여성이 복수 임무를 대행하는 수준에 머무를 수 있는데 <친절한 금자씨>는 그렇지 않다.

복수의 대상 백선생의 캐릭터는 일반적인 ‘마초 아저씨’다. 어렵게 자신을 찾아온 금자씨에게 백선생은 목욕한 후 가슴 털을 그대로 드러낸 채 문을 열어준다. 그는 밥을 먹다가 식탁에 부인을 눕히고 섹스를 한 후 다시 밥을 먹는 동물적인 인간이자, 죽기 직전의 상황에서도 “모든 인간은 완벽하지 않아요”하고 서슴없이 변명할 줄 아는 인간이다. 위악적이다 싶을 정도로 선명한 백선생의 면모는, 여성의 경험에서 종합되는 남성의 불쾌한 면모들이 조합된 듯하다.

복수의 윤리보단 현실의 부조리 드러내

‘복수 3부작’이라는 박찬욱 감독의 표명, 영화 곳곳에서 ‘속죄’를 외치는 이영애의 대사 등으로 인해 복수의 윤리학 등 철학적인 수준에서 영화를 읽어내려는 시도들이 많다. 하지만 이 영화가 플롯 상에서 던지는 속죄에 대한 고민은 그다지 깊지 않다. 우선 금자씨는 매우 손쉽게 자신의 복수를 달성한다. ‘악인’ 백선생은 관객들에게 윤리적 고민을 던져주기에는 고민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악하다. 금자씨의 정의감이나 백선생의 악함은 관객에게 고뇌를 던져주기보다는 순간적인 충격을 전달하는 장치에 가깝다.

백선생을 처벌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애거사 크리스티의 <오리엔탈 특급 살인사건>을 떠올릴 수 있다. 소설에서는 어린애를 유괴해서 돈을 뜯고 다녔던 악인 카세티를, 피해자의 부모와 친지들이 공동으로 살해한다. 카세티는 악인인 데다가 경찰에 넘겨도 처벌 받기 어려운 상황이다. 카세티에게 복수한 이들은 교양 있고 선량한 시민들이자 버젓하게 사회적 위치를 갖춘 인물들이다. 이들의 복수는 소설 속에서 정당한 것으로 인정된다.

<친절한 금자씨>에서의 복수는 그보다 한 발 더 나아간 수위에서 정당성을 확보하려 한다. 백선생을 경찰에 넘길 수도 있었지만 이들은 법에 대한 환멸과 증오심 때문에 자신들이 직접 처리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이들의 복수는 정의감보다는 삶의 부조리함이 느껴지는 페이소스를 풍긴다. 억지로 돈을 벌어서 자식을 백선생의 영어학원에 보냈다며 한 여자가 억울함을 호소하자, 또 다른 여자가 조용하게 “그런 사연 없는 부모가 어디 있나”라고 대답하는 장면이 그 예다.

감옥 속 여성 캐릭터들처럼, 사람들의 삶에서 관찰되는 현실의 부조리한 측면들이 이 복수의 면면에도 붙어있다. 그래서 복수가 끝나고 나서도 사람들의 표정은 그다지 후련하지 않다. 이들이 생각해 낸 것은 백선생의 돈을 빨리 나누어달라고 계좌를 적어주는 것인데, 그 순간 천사가 지나가는 듯 엄숙한 침묵이 흐른다. 마치 악에 대한 복수, 자식에 대한 사랑 같은 숭고함과, 복수에 대한 책임 회피 같은 비루함이 삶 속에 공존하고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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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과 간디'에 관한 짧은 노트 | 장진범

'레닌과 간디'라는 짧은 발표문은 그동안 발리바르 작업의 연장선에 있으면서 동시에 그 요체를 단숨에 드러낸다. 바로 '대중운동'이 그것이다.

 

사실 대중운동은 고유한 '개념'으로 여겨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당장 나부터 그렇다. 아마도 '대중'(좀더 정확히 말하면 '대중들') 을 사고할 수 있게 해 주는 이론들이 없었기 때문이리라. 이와 관련해 언급된 스피노자의 경우, 이 문제와 직결된 그의 정서론은 아직까지 영어로도 적당한 책을 찾기 힘드니 제대로 된 접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프로이트의 경우, '비판적' 독해를 통해 재구성해야 하는데 프로이트 자체를 잘 모르는 우리들에게 얼마나 힘든 일인가...

 

그렇더라도 문제가 무엇인지가 분명해지면 시행착오를 거쳐서라도 어떻게든 도모해볼 수 있을 거다. '레닌과 간디'는 그런 점에서 무척 중요한 글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이해하는 한에서(불어로 읽었기 때문에...) 발리바르는 레닌과 간디를 시빌리테의 정치 안에서 구별되는 계기로 파악한다. 레닌의 경우 핵심은 대중운동에 힘입어 극단적 폭력을 정치(가 가능한) 공간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를 집약하는 것이 바로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라는 슬로건이다. 이는 간디에게서 발견할 수 없는 점이며 혹은 차라리 간디(의 정치)를 가능케 한 것은 레닌(의 정치)다. 하지만 레닌은 '내전'의 문제를 알맞게 다루지 못한다. 알다시피 레닌의 내전론은 'PT 독재'로서 '국가를 통한 국가의 소멸', 'PT(의) 독재'(곧 BG에 대한 독재)의 'PT(에 대한) 독재'로의 도착 이라는 난문에 부닥친다. 레닌에게서 이에 대한 사고가 없었던 건 아니며 불리한 정세의 과잉결정을 무시할 수도 없다. 그렇기는 하지만, 몇몇 천재적이지만 일시적인 예외를 제외하고는, 마르크스주의 안에서 '국가 소멸의 조건의 생산'은 알맞게 사고되지 못했다. 대개의 경우 '내전' 혹은 차라리 '계급투쟁'의 문제를 군사적인 방식으로 이해해 혁명적 폭력과 타협적 비폭력으로 양극화됐다.

 

간디가 입장하는 곳은 정확히 이 지점이다. 간디의 '사티아그라하'(자구대로 하자면 이는 '진리의 힘'이다) 는 민주주의의 봉기적 전통을 재전유한 것이고 때문에 말의 강한 의미에서 '혁명'에 관한 재정식화다. 문제가 '진리'인 한에서 간디는 어떠한 종류의 '타협'도 인정하지 않는다. 또한 그의 '공민적 불복종'은 아주 강력한 '비합법주의'를 띤다. 발리바르가 그의 작업을 네그리의 '구성권력'과 연결시키는 것은 겉보기와는 다르게 아주 논리적인 것이다. 하지만 간디는 레닌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 곧 '공세적 비폭력'의 '건설적 비폭력'로의 전환

혹은 보다 정확히 말하면 처음부터 후자를 생산하는 전자의 실천을 발명하기 위해 '아힘사'(a-himsa, 비-증오)를 도입한다. '적에 대한 개방'을 통해 스스로의 관점을 전환하는 '대화주의', 대중행동(곧 대항폭력)의 자기제한적 실천, (그리하여 '최종적 전투'라는 관념의 완전한 기각) 그러니까 '혁명 안의 혁명'. 이것이 바로 시빌리테의 간디적 계기다.

 

하지만 간디 역시 완전한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여기서부터는 불어 해석이 안 되서 자의적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는 그가 폭력의 문제를 (레닌과 달리) 추상적 곧 종교적으로 사고했기 때문이다. 대중들의 폭력을 악화시키는 객관적 조건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이를 변혁할 수 있는 정세적 실천을 (아마도 레닌만큼은) 효과적으로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무능력을 (프로이트가 말하는) '지도자에 대한 사랑' 으로 봉합했고 이같은 동일화가 도착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제대로 사고하고 다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레닌과 간디의 대화가 역설하는 것은 폭력의 문제에 구체적으로 접근하자는 것, 계급투쟁('내전')의 문제를 非군사적인 방식으로 곧 정치적인 방식으로 다루자는 것, 그리고 대중운동 및 집단적 주체화에 고유한 '정서적 투여' 또는 '동일화 과정'의 문제를 사고하자는 것이다. 마지막 문제는 아마 레닌과 간디만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스피노자나 (개조된) 정신분석학이 거론되는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적어도 지금 내 생각에 '사회운동'이라는 말보다 '대중운동'이라는 말이 더 알맞은 것 역시 이 문제('대중들')를 정면으로 제기하기 때문이다. 사회운동은 대개 정치운동을 그 대쌍으로 하고 국가에의 포섭을 역사적 사회운동이 타락한 원인으로 본다. 하지만 이는 너무 조야하다. 前레닌적이고 前간디적이다. 레닌과 간디에게 한계가 있었겠지만 그 한계는 위의 진단보다 훨씬 더 생산적이다. 난 사회운동이라는 개념에 반대할 생각이 없다. 다만 사회운동이라는 개념이 지시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으며 우리에게 정말 긴급한 것은 그 문제를 사고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뿐이다. 그것이 바로 '대중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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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친절한 금자씨>의 보수성에 대한 간단한 노트 | 최원

 
* 스포일러 있습니다.

백선생은 내가 보기에 이 영화에서 프로이트적인 의미에서의 원-아버지(archaic father)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것이 맞다면, 마지막에 이루어진 아이들(의 부모들)에 의한 백선생의 집단 처형이 국가에 의해 관리된 비-복수가 아니라 반대로 사적인 복수를 표현하고 있다고 믿는 것은 명백히 자기 자신을 속이는 일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자식들에 의한 원-아버지의 살해는 사회 혹은 공적인 것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설명하는 메커니즘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것에 대한 영화 텍스트 상의 증거로 아이들의 부모들은 처형이 있기 전에 서로 비밀을 누설하지 않을 것에 관한 계약(!)을 맺는데('사적 계약'이란 그 자체로 형용모순에 불과할 뿐이다), 그 계약의 '보증자'로 금자씨가 리바이어던 역할을 자처하고 나선다는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들 아시죠? 누구라도 계약을 위반하면... 더 이상은 이야기 하지 않겠습니다...' (대사는 약간 다를텐데 ..어쨌든...여기서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후, 죽은 백선생을 땅 속에 묻는 장면에서 갑자기 금자가 빼들고 가서 백선생 시신의 머리 부분에 쏴댔던 총이 더 이상 죽이지 않는 총, 이미 살기가 없어진 총, (사적인) 복수의 의미를 박탈당한 복수, 이미 공적인 것이 되어 버린, 따라서 잔인할 것도 없는(물론 이는 분명히 '계약'이라는 내러티브가 가져다주는 환상일테지만, 어쨌든 이미 죽은 자를 쏘는 것이 무엇이 잔인하단 말인가? 여기서 이 영화는 완전한 멜로 드라마 혹은 신파가 된다) 행위의 상징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다.

박찬욱 감독은 인터뷰에서 금자씨는 마지막에 구경꾼 내지 관찰자가 되었으며, 유족들의 백선생 살인행위를 목격하면서 사적인 복수의 잔임함에 대해 반성하게 된다는 식으로 말했었는데, 이것이 감독의 의도였다면, 이는 잘 표현 되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그것은 자기가 무엇을 표현하려고 했는지 감독 스스로 알지 못했다는 것을 고백한 것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러한 박감독의 말은, 금자가 더 이상 살아있는 '개인'이 되지 못하고 "유령"(sic!)처럼 나타나게 된 것은 오히려 그녀가 공적인 자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점, 즉 복수를 조직하고, 복수를 도와주고, 복수를 행하려는 자들 사이의 사소한 갈등들을 해결해주고, 복수의 절차를 마련해주는, 국가가 되었음을 감독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다가 갑자기 지젝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만일 (향유를 모두 독점하는) 포악한 원-아버지라는 이미지야말로, 진정으로 끔찍한 아버지(착한 아버지 혹은 차라리 "친절한" 아버지로서 스스로 향유하길 거부함으로써 자식들의 모든 향유의 가능성마저 앗아가 버리는)를 가리려는 '스크린'에 불과하다면 어떻게 되는가? 포악한 원-아버지야말로 자신의 정신적 외상을 가리기 위한 일종의 '환상구성'에 불과하다면 말이다. 백선생은 이 영화에서 실제로 매우 환상적인 인물로 나타나는데, 그는 단 한 번도 '겁'을 먹지 않는 완전한 비인간/악마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그의 환상으로서의 성격은 그가 제니와 금자 사이의 대화를 감정까지 실어서 리얼하게, 혹은 써리얼(surreal)하게 악마와 같은 솜씨로, 통역할 때 극단적으로 드러난다(관객은 이 장면에서 제니와 금자의 대화 내용 보다는 백선생의 악마성에 빨려들어가게 된다).

어쨌든 이 영화가 보다 더 끔찍한 어떤 것, 혹은 같은 말이지만 보다 더 "친절한" 어떤 것을 시야에서 가리기 위한 환상적인 내러티브(narrative)의 구성에 불과하다면, 이 영화에서 전에 없이 너래이터(narrator)(나중에 제니로 드러나게 되는)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등장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영화는 온전히 상징계에 속하는 영화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상징적인 것으로서의 이야기/(히)스토리의 구성, (제니를 비롯한) 자식들에게 대대로 이어질 전설의 구성...

나는 '복수는 나의 것'이 상상계를 그렸다고 한다면, '올드 보이'는 상징계로의 진입(법의 정초)을 그렸으며, '친절한 금자씨'는 상징계의 작동을 그린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것이 되어 버렸다고, 즉 구성된 상징계를 정당화하고 보존하기 위한 수단으로 예술을 전락시켰다고 본다.

가능한 증거로, '복수는 나의 것'은 아직 상징계에 진입하지 못한 말하지 못하는 자의 이야기이고(벙어리인 주인공의 행위는 여기서 종종 순진하면서 동시에 음탕한 것으로 나타나고--어린아이를 자신의 배에 올리고 앉아 있던 장면이나 자신의 누이의 몸을 닦아주던 장면 등을 보라--, 게다가 그는 부분-대상인 콩팥을 그의 누이에게 선물하려고 하다가 누이를 죽이고 이후 콩팥을 '식인'하는 자로 나타난다), '올드 보이'는 자신의 '말'로 인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고 자신의 혀를 자를 수 밖에 없었던 자(그런데 육체적 혀를 자름으로써 주인공은 진정으로 상징적인, 정신적인 혀를 얻게 될 것이다--오이디푸스가 눈을 찌르고 나서야 세상을 볼 수 있는 혜안을 얻게 되듯이)의 이야기이고, 마지막으로 '친절한 금자씨'에서 금자는 아이들의 부모들이 자신들의 대항폭력(그 자체 범죄와 다를 바 없는)에 대한 비밀을 누설하지 못하게 금지하는 자(금자는 '금지된 자'가 아니라 '금지하는 자'였던 것이다), 즉 '말'을 관리하는 자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남는 것은 제니의 '말', 친절한 금자씨에 의해 표백된(!) 흰 눈을 받아 먹는 제니의 '혀'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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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의 야만 | 진태원 (2003.11.21)

문화비평: 한국사회의 야만

 

2003년 11월 21일   진태원 서울대 이메일 보내기

올해 있었던 여섯 명 노동자의 죽음, 또는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함께 목숨을 끊은 일가족들, 또 수능성적을 비관해 투신한 학생들,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 자살한 두 명의 이주노동자.

이 모든 이들의 죽음은 말의 고전적 의미에서 비극적이다. 레비나스는 이를 간결하게 잘 제시해 주고 있다. “자살 가능성을 통해 존재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끊임없이 비극의 자료가 되어 왔다.” ‘로미오와 줄리엣’ 3막에는 이런 대사가 있다. “모든 게 끝장나도 내겐 아직 죽을 힘이 있어!” 

반면 차마 죽을 용기가 없어, 또는 일종의 본능으로 하루하루 목숨의 끈을 붙잡고 있는 사람들은, 다시 레비나스의 표현을 빌리면, 일종의 ‘그저 있음’의 상태에 놓여있는 이들이다. 지하철 구내 바닥에 깔린 몇 장의 신문지에 얹혀서, 또는 손 시린 쪽방의 바닥에서 차가운 사물성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힘겹게 ‘자기’를 유지해가는 이들에게 삶이란, 무의미한 고통의 나날이리라.

비극적으로 죽음을 선택한 이들과, 사물과 ‘자기’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풍경의 상태로 견뎌가고 있는 이들 중 과연 누가 더 딱한가 따지는 건 그야말로 야만적인 발상일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끔찍하고 야만적인 건 “노동자들이 분신을 문제해결의 수단으로 삼는 시대는 지나갔다”는 한국의 현 대통령의 발언이다. 노무현 정권은 거듭 자신들 정권의 기반은 도덕성에 있음을 강조한 바 있다.

그들에게 이 말은 그들의 政敵들에 대한 자부심의 표현이자, 지지자들에게 보내는 신뢰의 호소일 것이다. 그런데 똑같은 입에서 노동자들의 분신, 죽음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격하시키는 발언이 나온다는 건 자못 충격적이다. 그는 비극에 대한 감식안이 없는 것일까. 아니면 한가하게 비극을 반추하기에는 나라의 사정이 너무 어려운 걸까.  

하지만 어쩌면 그의 두 가지 발언은 사실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일지 모른다. 헤겔이 칸트의 도덕의 추상성을 비판한 이래, 도덕과 윤리는 동의어가 아니라 오히려 동음이의에 가깝다는 걸 우린 알고 있다. 개개인의 도덕적 품성이 아무리 뛰어나고 도덕적 의무를 성실히 수행한다 해도, 그것이 사회적 관계에 대한 고려에서 유리돼 있는 이상, 또는 사회적 관계의 추상을 조건으로 하고 있는 한, 도덕은 순전히 개인적인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다.

따라서 노무현 정권이 자신들 개개인의 도덕적 결백성(이것이 사실인지는 의심스럽지만)을 주장하고 또 이를 스스로 확신하는 한, 자신들의 뜻에 거스르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그만큼 더 비도덕적이고 사익에 골몰한 사람들로 보이리라는 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노동자들의 자살에서 목적 달성을 위한 고도의 계산된 수단을 보고, 국익을 위해 파병을 결심하고 인간사냥과 다름없는 이주노동자들 추방에 골몰하는 야만적인 모습이 나오는 건 실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극우 꼴통’이라고 조롱하는 프랑스 국민전선의 당수 장-마리 르펜은 자신의 노선을 아주 놀랄 만큼 간명하게 제시한 바 있다. “나는 내 딸들을 내 조카딸들보다 더 사랑하고, 내 조카딸들은 내 사촌들보다, 내 사촌들은 내 이웃들보다 더 사랑한다. 정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나는 프랑스인들을 더 사랑하며, 누구도 내가 달리 말하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어찌 보면 지극히 ‘도덕적’이고 ‘인륜적’인 르펜의 이 명제에서 한국의 현대통령의 발언을 떠올리게 되는 건 나만의 착각인가.

한국 사회는 야만사회인가. 이 질문은 뜬금없는 것도, 과장된 수사도 아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한낱 수단으로 격하시키고, 자신의 이익을 타인의 생명 및 안전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대통령을 가진 나라에서 이는 매우 절박한 정치적?윤리적 질문이다.

시민들의 능동적 참여 없이 민주주의는 존재할 수 없고, 민주주의는 지속적인 야만의 퇴치 없이 가능할 수 없다는 건 근대 정치의 핵심 원리다. 따라서 한국사회가 민주주의 사회임을 자부할 수 있으려면 도덕과 국익으로 포장된 야만에 맞선 시민들의 저항과 연대를 보여줘야 할 것이다. 야만이냐 시민문명이냐, 이것이 문제다.   

진태원 / 서울대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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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C 부용산을 아십니까?

PD 연합회 회보 175호   발행일 1999-09-16


 

작성일 : 1999-09-16    

제작기 - KBC <부용산을 아십니까?>
‘부용산’에 배어있는 시대의 아픔김영문 광주방송(KBC) 보도제작국


남도인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오던 구전가요 ‘부용산’이 올해 봄 세상밖으로 드러나면서 이 노래에 대한 관심들이 커졌다. 그동안 ‘부용산’이라는 곡은 목포에서 만들어졌느니, 보성 벌교에서 만들어졌느니를 두고 두 지역간에 원산지(?)를 둘러싼 미묘한 갈등까지 빚어졌다. 그런가하면 이 노래의 탄생설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얘기가 나돌았다. 이 노래의 작사가가 수필가였던 소청 조희관 선생이니, 소설가 박화성 선생이니, 시인이셨던 박기동 선생이니 하는 설이 바로 그것이다. <부용산을 아십니까?>의 제작은 확실히 규명되지 않은 노래의 실체와 벌교와 목포 두 지역의 미묘한 경쟁관계까지 방영할 생각으로 시작됐다.이 노래의 작곡자가 한국전쟁 당시에 월북했고 월북 작곡자라는 이유 때문에 불려지는 것이 금지됐다는 사실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우리의 아픈 상처를 대변해 줄 수 있는 소재라고 느꼈다. 취재가 시작되면서 의문은 한가지씩 벗겨졌다. 목포 항도여중 2회 졸업생인 송수 씨와 항도여중 초대 조희관 교장선생의 유가족들을 순천에서 찾아냈고 작사가인 박기동 시인이 고국을 등지고 호주 시드니에서 연금으로 생활하고 있다는 믿기지 않는 사실을 밝혀냈다. 빨치산 ‘남부군’ 소속이었던 이균동 노인은 본인이 산속에서 그 노래를 작곡했다는 사람을 만났고 그에게서 노래를 배웠다고 비교적 정확하게 노래를 불러줬다. 취재가 어느정도 마무리될 무렵인 6월 7일 벌교를 행해 달리던 취재차량이 빗길에 전복되면서 탑승자 4명이 교통사고를 입었다. 필자는 그 이후 40일을 입원해야했다.“부용산 오리 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사이 사이로 한줄기 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흡사 ‘가고파’를 연상시키는 서정적인 노랫말의 한 대목처럼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가버릴뻔 했던 사선을 넘기면서 프로그램은 제작됐다.취재를 통해 ‘부용산’은 시인이었던 박기동이 1947년 노랫말을 썼고 1948년 목포 항도여중에서 음악교사로 근무하던 안성현 선생이 곡을 붙인 것으로 드러났다.시는 벌교에서 곡은 목포에서 붙여진 것이었다. 1948년 10월 목포 항도여중 예술제에서 1회 졸업생인 배금순이 최초로 불러 그야말로 목포시민들의 심금을 울리면서 빠르게 퍼져나간 것이다. 마침 여순사건이 터지고 벌교와 보성사람들이 빨치산이란 이름으로 산속에 숨고 그들사이에서 이 노래는 고향을 그리는 노래로, 한마디 말없이 쓰러져가는 동료들을 애도하는 마음으로 불리워졌다. 이 노래 발표이후 작곡가 안성현은 1949년 9월 학교에서 의원면직 되고 그 이후의 행방은 묘연하다. 다만 그가 사라지기 전까지 발표됐던 그의 작품들은 아직까지 목포사람들에게 구전되고 있고 김소월 시에 작자 미상으로 전해지던 ‘엄마야 누나야’가 그의 작품이라는 사실이 알려져 당시 작업에서는 사상이나 이념이 전혀 없는 순수음악인으로서의 모습을 느낄 수가 있다. 그런가하면 작사가인 박기동은 이유없이 좌경시인으로 찍혀(?) 해외로 떠나야하는 아픔을 겪었다. 그는 캐나다를 거쳐 지금은 호주에서 12평짜리 난민 아파트에 거주하면서 언제 완성될지도 모를 작품집 발간에 힘쓰고 있다.좌경시인에 월북작곡가의 작품으로 ‘부용산’ 노래는 자연스럽게 금기시된 채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온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50여 년이 흐른 후 노래는 해금됐다. 취재에 들어간지 3개월만인 9월 5일 지역사 제작 프로그램으로서는 드물게 일요일 저녁 7시에 방송이 되면서 시청자들의 반향은 컸다. 노래 한곡의 의미보다는 아직도 채 씻기지 않은 시대의 아픔을 느끼는 많은 이들의 공감의 소리였다.방송직후 그동안 아무에게도 드러내 보이지 않았던 작곡가 안성현 선생의 가족에게서 연락이 왔고 그의 부인이 생존해 광주에 살고 있으며 아직도 그때의 아픔을 삭이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져왔다. 또한 벌교지역 초등학교 교사들을 중심으로 ‘원로교사 박기동 선배님 고국 정착 청원 서명운동’이 펼쳐지고 있다. 이런 사연들을 중심으로 후속 프로그램 제작에 들어갔다.노래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도 중요하지만 그것은 과정일뿐 사람들에 의해 불리워 짐으로써 완성된다. 그러고 보면 ‘부용산’은 이미 51년 전에 완성된 작품이며 남도인의 한의 정서에 녹아흐르면서 전해져 온 것이다.최근에 작사가인 박기동 시인은 이 노래의 2절을 만들어 보내왔다.“그리움 강이되어 내가슴 맴돌아 흐르고, 재를 넘는 석양은 저만치 홀로 섰네. 백합일시 그 향기롭던 너의 꿈은 간데없고, 돌아서지 못한 채 나 외로이 예 서있으니, 부용산 저 멀리엔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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