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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외로움

아기들은 지금 잘 자고 있을까?

휑한 옆자리 때문에 잠을 설치지는 않았을까?

부산영화제에 왔다. 밤 11시에 탄 기차는 4시에 구포역 도착.

첫차를 기다려 해운대에 와서 인디라운지가 열리는 8시 30분까지 뭘할까 고민하다 pc방에 와있다.

pc방에는 처음 와 보는 것같다, 라고 생각을 했지만

너무 오랜만에 와봐서 그렇지 예전에도 와봤던 것같다.

하늘만 있던 시기에 남편과 말다툼을 하다가

"내가 없어져봐야 내 빈 자리를 알지" 하고 집을 나왔는데 갈 데가 없어서 피씨방에 갔었다.

옆자리 아저씨한테 사용법을 물었는데 모두 술기운 짙은 남자들 뿐이라 그냥 집에 들어가서 잤다.

조용히 들어가서 자고 싶었으나 남편이 문을 잠그고 자고 있어서 문을 두드리며

1시간도 못 버틴 나의 한심함과 문까지 걸어잠그고 코~ 잘자는 남편에 대한 '이런 고얀..'

생각들 때문에 다시 싸움을 이어가야하나 잠깐 생각했으나

좀 추웠던가 그래서 조용히  잠이 들었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부산행이었는데 생각보다 담담하고 뭘 해야할지 모르겠다.

야간열차에 대한 로망이 있었으나 로망과는 거리가 먼 풍경 속에 있었고

'정'과 맥주를 마시긴 했으나 잠깐 선반에 얹어둔 맥주가

기차의 덜컹거림 때문에 엎어져서 바닥에 쏟아졌고

뒷자리 중년 부부들이 냄새 많이 난다고 투덜거려서 휴지로 바닥을 닦으면서 생각. '뭐냐 이건'

부산에 가있는 동안 앵두가 잘지내려나...걱정하다가

매일매일 앵두에게 말했다.

"엄마가 부산에 가서 공부하고 올 테니까 아빠랑 언니랑 오빠랑 잘 지내고 있어. "

그럼 같이가 같이가 같이가 같이가 를 무한반복하면서 어떤 말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엄마가 부산가서 맛있는 거 많이 사올께. 뭐 먹고싶어?" 하면 얼른

마이쭈, 우유, 사탕, 과자, 까까, 마이쭈, 우유, 사탕, 과자.... 뭐 또 그렇게 무한반복.

그래도 그렇게 먹고 싶은 것을 이야기할 때에는 행복한 표정.

오늘은 또 같은 대화를 반복하다가 "엄마가 맛있는 거 많이 사올께. 뭐 사올까?" 했더니

"치마"를 사달라고 했다. 하루하루 늘어나는 말이 참 신기하다.

 

추석에 오빠집 가서 노는 틈틈이 소설을 보았는데 김연수의 이상문학상 수상소감이 인상적이었다.

처음으로 장편소설 연재를 시작하면서 그가 느꼈다던 외로움. 하지만 따뜻한 외로움.

그게 어떤 건지 나도 조금은 알 것같았다.

"누구도 나 대신 글을 써주지 않는다"

고층아파트의 꼭대기 층에서 새벽에 글을 쓰다 거리를 내려보며 느꼈다던 그 따뜻한 외로움.

2000년, 첫 작업을 할 때 밤마다 나는 혼자 깨어있었다.

모두가 돌아간 사무실에서 홀로 앉아 편집을 했었다.

붙지 않는 그림들, 쌓았다 싶으면 와르르 무너지는 이야기들을 쳐다보며 한숨을 쉬다 시계를 보면

바늘은 3시에도 가있고 4시에도 가있었다.

모두가 돕고 싶어하지만 누구도 돕지 못했다.

의견을 내줄수는 있지만 "누구도 나 대신" 편집을 해주지 않는다.

외로웠지만 싫지 않은 시간들. 그래서 따뜻한 외로움.

 

이제 이 부산여행이 끝나면 나는 다시 그 따뜻한 외로움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가장 중요한 장면, 가장 중요한 순간에 소리가 안 들어갔다.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애써 위로했다. "살릴 수 있을거야"

소리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구하며 결코 살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안 후에도

나는 애써 그 사실을 외면하려 했었다.

그러다 어느 날, '정'과 술을 마시다 울었다. 이제는 없어진 어린이집.

항상 기록하고 있었던 나를 믿었기때문에 다른 촬영자는 없었던 그날.

나는 그분들 모두의 믿음을 저버린 것이다.

그 분들께는 말씀도 못 드렸다. 아이들과 이모의 마지막 졸업식.

내 주인공들의 이별 장면에 소리는 없다.

 

술의 힘을 빌려 눈물을 주룩주룩 쏟으며 생각했다.

소리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내게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절차라고.

그리고 애초의 내 구성안은 잊어야한다고.

이 눈물은 그것들을 떠나보내는 의식이라고.

다음날부터 거짓말처럼 말짱해졌으나 한동안 작업에 손을 대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긴 시간이다.

그리고 며칠 전 수요일, 선배의 강의를 듣다가 쓸 수 없는 고요한 이별 장면을 떠올렸다.

내가 돌아가야 할 시간은 바로 그런 곳이다.

돌아보면 아픔인 시간들을 몇 번이고 반복해야만 하는.

없어져버린 소리를 붙들고 더이상 울어봤자 변하는 건 아무 것도 없는.

시간의 기록들과 오직 홀로 대면하는 시간.

 

따뜻한 외로움.

그 시간으로 걸어들어가기 위해

지금 이시간을 충실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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