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아름 감독의 <영아>는 두 번 보면 좋을 영화다. 장례식장에서 군대 이야기를 하는 한 무리의 남성들 사이에서 주인공 완무는 겉돈다. 좌향좌 우향우를 몰라서 고문관 역할을 했다는 한 친구의 이야기를 모두들 즐기며 듣고 있지만 완무는 뭔가를 엎지르고 당황한 채 빠져 나온다. 다른 이의 곤란함을 술자리의 안주거리로 삼는 그 상황을 완무는 피하고 싶어하는 것같다. 전화로 누군가에게 택시비를 빌리려다가 포기한 완무가 조의금 함에서 봉투 하나를 몰래 꺼낼 때,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이 남자의 인생이 그다지 순조롭지 못하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영아가 나타난다. 영아의 장례식장에서 영아를 만난 완무는, 그러나 놀라지 않는다. 영화는 그런 식으로 판타지를 그려내지만 현실의 편린이 곳곳에 박혀있어서 슬프다.
털모자에 마스크를 쓴 영아는 완무에게 음료수를 내밀었다가 거절당한 손을 쑥스러워하며 말한다.
“나 이거 옮는 병 아니야.”
이어지는 대화들 속에서 고교동창이었던 두 사람의 달라진 삶의 여정이 조금씩 드러난다. 졸업과 동시에 영아는 공장으로, 완무는 대학으로 서로 다른 길을 선택한다. 둘은 함께 공부하던 교실에 앉아 고교시절을 회상하고 취업준비를 하는 완무의 고시원방에서 현재를 공유하기도 한다. 영아는 마치 꽃상여가 고인의 장소들을 차근차근 밟아가듯이 그렇게 자신의 장소를 방문하고 완무는 그녀와 동행한다.
시공간을 오가며 펼쳐지는 두 사람의 대화 속에서 언뜻언뜻 드러나는 현실의 편린들은 영아의 사연을 짐작하게 한다. 방진복. 부직포 마스크. 반도체공장. <영아>는 바로 삼성 반도체 백혈병을 다룬 영화였고 영아는 희생자 중 한 사람이었던 거다.
“꽃이 질 때쯤 되면 최고의 향이 나거든. 사람도 똑같애. 사람은 나이가 먹을수록, 늙을수록 사람 냄새가 나는 거야. 근데 사람 냄새라고는 요만큼도 없어. 자기 회사에서 사람들이 죽는데도 나 몰라라 하고 있잖아.” ―만화<사람냄새> 중 황상기 씨의 말
6년 전, 고 황유미 씨의 죽음으로 반도체 공장 노동자들의 산업재해는 세상에 크게 알려졌다. 제보된 건수는 200건이 넘고 사망한 노동자는 80명에 육박한다. 삼성 관련 공장에서 사망한 노동자만 69명인데도 삼성은 여전히 모른 척 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황상기 씨는 딸의 병을 개인적인 질병으로 치부하고, 언론 보도와 산재 처리를 막은 삼성과 기나긴 싸움을 하고 있다. 황상기 씨를 비롯한 삼성 백혈병 피해자 가족들의 기나긴 노력에 힘입어 이들의 사연은 만화로, 단편 극영화로, 다큐멘터리로, 그리고 장편극영화로 만들어지고 있다. 최아름 감독은 만화 <사람냄새>에서 영감을 받아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만화가 발병 노동자에 대한 삼성의 ‘사람 냄새’ 안 나는 대응방식을 폭로했다면 영화는 방진복 안에 갇혀 있던 노동자가 살았던, 그리고 살고 싶었던 ‘사람의 이야기’를 만나게 해준다.
학창시절에 연모의 대상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완무 앞에서 영아는 모자를 벗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러나 완무가 모자를 벗기자 길고 탐스런 머리카락이 나타나고 영아는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그 미소가 보는 이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걸음마를 뗄 쯤 가족들과 외식을 하고 싶다는 영아의 소망은, 지극히 평범한 그 소망은 이루지 못한 채 흩어져버렸고 이제 누구도 영아의 미소를 더 이상 볼 수 없다. 그래서 영아의 삶과 죽음과 그리고 이루지 못한 소망을 따라가던 완무가 영아의 모자를 푹 눌러쓴 채 “미안하다.”고, “잘 모르겠지만 미안하다.”고 고백할 때, 그의 뺨 위로 한줄기 눈물이 흐를 때, 영아의 시간을 함께 따라왔던 우리들 또한 미안해진다. 완무의 사과는 거대 자본의 강력함 앞에서 무기력했고 그 매정함 앞에서 무심했던 우리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사회와 사람의 상처를 대면하게 만드는 일, 그 아픔을 함께 나누는 일, 독립영화의 본분이다. 그 본분에 충실한 독립영화 <영아>. <영아>는 서울독립영화제 인디피크닉2013 상영작으로 현재 전국순회상영중이다.
문의 02)362―9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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