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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드런 오브 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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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를 키우는 일은 온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어준다. 연약하고 순한 아이를 들여다보노라면 내 마음도 덩달아 순해진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귀하게 자랐을 텐데 그런 귀한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고 그들에게 상처 입혔던 내 지나온 시간을 반성한다. 그리고 내 아이의 평안을 위해서라도 나는 내 죄들을 깊이 뉘우친다. 타인에게 상처를 냈던 내 마음의 독이 돌고 돌아 다시 내 아이에게 상처로 돌아올까 봐 두려운 것이다. 몸과 마음과 꿈까지도 지배하는 이 사랑스러운 존재들은 온전히 축복이다. 지금 나는 축복의 시간을 누리고 있다. 아이들이 없는 세상은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칠드런 오브 맨’의 배경은 아이없는 세상이다. 서기 2027년, 지구에는 더 이상 아이들이 태어나지 않는다. 영화는 까만 화면 속 암울한 뉴스로 시작된다. 지구상에서 가장 어린 인물 디에고 리카르도가 18년 4개월 20일 16시간 8분을 살다가 죽었다는 뉴스에 온 인류가 절망한다. 18년 동안 단 한 명의 아이도 태어나지 않았다는 설정은 언뜻 황당하게 들리지만 한편으로는 저출산을 걱정하고 이유없는 불임이 늘어가는 지금의 상황에서 상상할 수도 있는 미래이다. 그래서 영화가 그려내는 현실은 더 공포스럽다.

 

대부분의 SF영화들이 그려내는 미래는 암울하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레플리컨트(복제인간)를 등장시켜 인간본성에 대한 심오한 질문을 던졌던 <블레이드 러너>, 자신을 인간으로 생각하는 사랑스러운 로봇의 이야기 , 정보화의 수준만큼이나 꽉 짜인 감시체제로 주민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마이너리티 리포트>, 우리 영화 <내츄럴 시티>까지 그 모든 영화들은 결코 밝은 미래를 제시하지 않는다. 태양은 빛을 잃어 비는 끝없이 추적추적 내리고 첨단의 도시 이면에는 비주류의 존재들이 비참한 삶을 이어간다. 문명의 혜택을 누리던 주인공들은 갑작스런 사건을 계기로 비주류로 전락하거나 비주류의 삶을 경험할 기회를 갖는다. 이 영화의 주인공 테오도 비슷한 길을 걷는다.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 때문에 사람들의 삶은 황폐해지고 영화의 주 무대인 런던에는 불법이민자들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진다. 정부기관에서 일하는 테오는 이 모든 소란으로부터 자유롭다. 인류의 마지막 아이의 죽음에도 무덤덤하고 개집같은 철망에 갇힌 불법이민자들의 절규도 그에게는 익숙한 출근길 풍경일 뿐이다. 선택된 자들의 안락을 위해 불법이민자들이 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더라도 그건 자신이 상관할 바가 아닌 것이다. 광우병 소가 불타고 하천에는 썩은 물이 흐르는 그 아비규환 가운데에 굳건히 서있는 첨단건물처럼 테오는 자폐적으로 살아갈 뿐이다. 그러나 옛 연인 줄리아 때문에 이 비주류의 세계에 뛰어들게 된다. 줄리아는 ‘불법 이민자들의 인간다운 권리’를 옹호하기 위한 피쉬당의 수장이다. 18년 만에 잉태된 인류의 아이를 위해 줄리아는 테오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얼떨결에 곧 태어날 인류의 아이와 그 엄마인 흑인소녀 키를 맡게 된 테오는 새로운 세계와 만나게 된다.

 

영화가 그려내는 현실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간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지구상에서 가장 어린 인물 디에고 리카르도의 죽음은 애도하면서도 살겠다고, 살아보겠다고 몸부림치는 불법이민자들과는 함께 숨쉬기조차 거부한다. 그 옛날 유태인들을 게토에 가둔 채 최소한의 제한된 생존만을 허락했던 것처럼 2027년의 런던에는 선택된 소수를 위한 청결한 도시와 선택되지 못한 다수를 위한 더러운 슬럼가가 당연한 듯 혼재한다. 권력을 갖지 못한 다수는 자신들의 몸을 무기로 테러를 일삼고 정부는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무차별 학살을 자행한다. 그 어느 것에도 선, 혹은 악이라는 이름표를 함부로 붙일 수 없는 이 절망적인 현실. 그 속에서 인류의 아이는 불법이민자, 천대받고 무시당하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이 힘겨운, 가장 낮은 자의 몸을 통해 세상에 나온다. 2천년 전, 예수가 우리에게 왔던 것처럼 테오가 흑인소녀 키를 만나는 장소 또한 마구간이다. 그 아이를 둘러싼 정부와 피쉬당 사이의 총격전은 가슴 아프게 처참하면서도 눈물 나게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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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가 된 슬럼가에서 정부군과 피셔당원들이 총격전을 벌인다. 이름 없는 난민들은 이유를 모른 채 죽어가고 카메라는 렌즈에 피가 튈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그 죽음을 기록한다. 그리고 어느 한 순간, 모두가 총을 놓은 채 싸움을 멈춘다. 키가 자신의 갓 태어난 아이를 안은 채 걸어가는 그 시간. 퀭한 눈빛의 헐벗고 굶주린 난민들과 두꺼운 군복으로 무장한 군인들은 한 마음이 되어 눈물을 흘리며 기뻐한다. “오오 아기야” 연약하지만 빛나는 아이가 모든 이들을 위로하며 스르르 스쳐지나간다. 그러나 그 뿐이다. 격전지를 빠져나가는 키와 테오의 등 뒤에서 다시 시작되는 총격전은 ‘희망없음’의 낙인이 되어 가혹하게 가슴을 후벼판다.  영화는 애써 희망을 말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쉽지 않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휴먼프로젝트. 그 곳으로 인도한다는 투모로우호의 희미한 등불이 가냘프게 깜박인다.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뿌연 안개. 나뭇잎같은 작은 배에 몸을 실은 채, 노 젓는 이 하나 없이 아기와 엄마는 망망대해에 외롭게 남겨진다. 그리고 등불을 바라본다. 그 등불이 구원이 될 지, 그저 거짓된 희망일 뿐일지, 그건 아무도 모른다.

 

갈림길에 선 채로 끝나버린 영화. 그러나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있다. 지금 우리가 희망을 선택한다면, 존 레논이 노래했던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고 공유할 수 있는’ 그 세계를 꿈꾼다면, 그리고 그것을 위해 지금 우리가 선 자리에서 노력한다면, 영화 속 등불은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질 수 있을 것이다. 끊임없이 현실을 돌아보게 하는 이 영화는 2007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큰 호평을 받았고 2016년 9월 개봉으로 10년 만에 극장에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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