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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비디오, <빌리지>

비디오 가게 아저씨가 고개를 살레살레하며, 이거 끝이 영 별루던데, 했다.

우디 알렌과 크리스티나 리치의 <애니씽 엘스>(이게 찾아보니 03년도 영화던데, 왜 이제서야?)와 <빌리지> 둘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전수찬이 적극 <빌리지>로 밀고 가는 중이었다. 나는 최대한 재미있는 것으로 골라야했다. 규민이가 7시부터 자는, 이 일 년에 한 번 있을까말까한 행운을 최대한 누려야하므로. 사실 요즘 영화를 너무 드문드문 보아서, 비디오가게 진열대 사이를 걷고 있자니 보고 싶은 영화들이 쏟아져 쌓일 지경이었다. 고민하고 자시고도 없이 <애니씽 엘스>며, <빌리지>며, 케이트 허드슨 주연의 영화며, 전도연의 <인어공주>, 욘사마와 전도연의 <스캔달>, 고날과 몇몇이 좋았다했던 <미치고 싶을 때>, 내가 좋아하는 까뜨린느 브레야의 <횃걸>, 한 번은 왠지 봐주어야할 것 같은 <올드보이>(아직도 안 봄), 사실은 올드보이 보다 더 보고 싶은 <복수는 나의 것>...

 

요즘 나는 '할일강박' 같은 거에 시달리고 있는 듯 하다.

영화도, 즐겁게 보아야할 것을, 보지 못한 것을 숙제화하고 있다.

인생이 숙제천지로 콱 막혀있다.

한의사가 그렇게 살면 안된다고 했는데.

한의사 말이 아니더라도, 이렇게 산들 뭔 부귀영화 입신양명 금의옥식 불굴불멸 왕생극락을 누린다고, 허.

 

비디오가게 아저씨가 고개를 살레살레 저었지만, <빌리지>가 최종낙찰 되었다.

<애니씽 엘스>는 로맨틱 코메디라던데, 일 년에 한 번 있을까말까한 행운으로, 반짝 행복보다는 무언가 진지한, 인생을 성찰하며 진리를 반추하는 기회를 얻고 싶었기 때문에(로멘틱 코메디에 대한 편견).

 

<빌리지>가 그렇다고 인생을 성찰하며 진리를 반추하는 기회를 주었는가 하면, 결과적으로 아니올시다 인데, 하지만 여러가지 곰곰 곱씹게 되었다. 예를 들면, 감독은 기껏 섬세하게 은둔의 모습을 그려놓고서 왜 그들을 우스꽝이로 만들었을까. 공포정치라면  타겟은 다른 데 있지 않은가.

 

감독은 사실 그런 정치적인 것에 대하여는 별 관심이 없었을런지도 모른다. 그가 가지고 있던 관심은 스산한 분위기 만들기, 그러다가 오싹 카메라 움직이기, 갑자기 한 번 짱 놀래키기. <스크림>식으로 말고. 이미 그의 전작 <싸인>에서 연습했던 듯이, 묵직하고 둔중하게. 그래서 어떤 장면은, 장면 자체만으로 아름답고도 공포스럽도록 완벽하여 기억에 남도록.

예를 들면, 치자색 망토를 두른 맹인 처녀가 자신을 위협하는 존재를 감지하고 공포에 싸여 두손을 맹렬히 휘저으며 앞을 살피는 중, 그 바로 뒤 초록잎사귀의 고목이 한 그루 서 있고, 그 고목 에 비껴서 빨간 망토를 두른 살인마가 모자를 푹 눌러쓰고 어깨를 움츠린 채 처녀를 노리며 서있다.  카메라는 가로등 정도의 위치에서 그들을 내려다 보고.

또 예를 들면, 사랑하고 동시에 인생의 스승인 아버지가 어딘가로 이끌어가며 옛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어떤 사건의 등장을 얘기할 것이라고 느낄 즈음 아버지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지 마라."라고 말을 툭 던진다. 그 둘을 뒤에서 얌전히 쫓던 카메라도 갑자기 툭 정지하더니, 이야기를 듣던 딸을 중심으로 두고 반바퀴 주루룩 돌아 그녀 앞에 탁 선다. 그녀의 공포에 휩싸이기 시작하는 표정.

 

그 은둔자들은 거의 완벽한 평화 속에 살고 있었다. 아무도 사회로부터 소외되지 않는다. 저능아(인)이든,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돈 많은 사람도 따로 없고, 권력자도 따로 없다. 대소사를 결정하는 원로회가 있을 뿐이고, 원로회는 모두에게 건의와 질문을 받는다.

작은 마을을 이루고 옹기종기 사는 그들 모습은 어찌 보면 도피와 은둔과 낙원을 꿈꾸는 이들의 청사진인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에겐 기괴한 사건이 발생한다. 주기적으로. 이 사건은 그들을 공포스럽게 하면서 그들을 더욱 단결시켰다. 결국 이 공포정치가 모든 것을 우스꽝스럽게 만들어버리고 마는데, 여기서 더 얘기하는 것은 이 영화를 안 봤는데 앞으로 혹 보게될 사람을 위해서 할 짓이 아니므로 입을 닫으며 하여간에 개인은 집단에 우위한다,는 정치스러운 결론은 이 영화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접기로하고, 도피와 은둔과 낙원을 꿈꾸는 이들의 청사진이 될 수도 있는 작은 마을의 옹기종기는 보다 현명하게 평화를 이루길 바랄 뿐이다.

 

 


 

 

비디오가게 아저씨가 고개를 살레살레 저은 만큼 꽝은 아니었다. 그 아저씨도 도피와 은둔과 낙원을 꿈꾸는 분이시라 결말에 상처받았나.

호와퀸 휘닉스가 나는 리버 휘닉스보다 더 좋던데, 이 영화에서는 너무도 건실한 일등 신랑감으로 나온다. 저 사진에서 그는 드디어 그 무겁고도 섹시한 입술을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열고, "아침에 눈 뜨자마자 네 생각부터 한다고 말해서 무엇하겠어. 하루 종일 너와 함께 있을 생각만 하고 있다고 말해서 무엇하겠어." 라며 사랑 고백을 한다.  어느 여자가 감동받지 않겠는가. 둘은 그 즉시 열렬한 키스를 한다.

 

그런데, 실생활에서 저렇게 과묵한 스타일의 남자는 연애나 결혼이나 다 꽝이다. 저런 가슴 절절한 대사는 곧, "사랑한다고 꼭 말해야 돼? 그거 말해서 무엇하겠어." 가슴 터지는 대사로 바뀔 가능성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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