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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래 <제스쳐 라이프>

지금 막,은 아니고 약 두어시간 전 다 읽었다.

사실 이 소설을 읽을 생각은 아니었다. 일단 작가 이름이 좀 후져보이고.

책 표지 날개에 쓰인 작가양력에는 그가 한때 월가에서 증권맨으로 일했다고 했는데, 딱 증권맨의 이름 같지 않은가(내가 그렇다고 증권맨을 폄훼하는 것이냐,한다면, 사실 그렇다). 이 번 책에는 다행히 붙어있지 않지만, 데뷔작 <영원한 이방인>의 표지 날개에는 작가사진까지 붙어있는데, 그 사진 또한 영락없는 증권맨의 얼굴이었다.

이 바쁜 세상에 증권맨이 쓴 책까지 볼 여유는 없지.

 

그래서 볼 생각이 없었는데, 듣도보도 못한 제목의 책 <영원한 이방인>을 어느날 갑자기 들고다니더니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작가의 또 다른 책 <제스쳐 라이프>를 연이어 사고, 결국은 이 책이 최근에 읽은 책 중 가장 훌륭한 것이었다는 둥의 소릴 하는 전모작가 때문에 호기심이 슬쩍 일어 한 번 보자 하고 책을 들었다가 1,2권을 3일 만에 후루룩 끝내 버리게 되고 말았다(1,2 권이라지만 사실 짧다). 아, 전직 증권맨, 생긴 것도 증권맨, 이름도 증권맨인 사람의 이토록 고요하고 슬픈 소설이라니!

 

그 전모작가의 짧은 독후감을 다시 보았다. 역시 작가는 다르다. 내가 얼레발설레발 떠드는 것보다 낫겠다. 옮기자면,

 

영원한 이방인은 사실 데뷔작이라서 그런지 무척 매력이 있지만 문체는 어딘가 안정되어 있지 않은 인상이었는데, 이번 작품은 아예 거대한 심해로 그걸 가라앉혀 놓았다. 감정의 조절, 특히 감정의 절제는 소설에서는 무척 중요하다. 그는 이 작품에서 커다란 감정의 비

누방울을 만들어놓고 끝까지 그걸 줄타기하듯 터뜨리지 않았다.  (나라면 단번에 터뜨린 뒤에, 너무 슬퍼서 할 수 없었어......지랄을 할 것이다.)

 

 알려진대로 이 소설은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이야기다. 나는 그 문제에 대해 꽤 관심을 가지고 있다. 단, 여성의 굴절된 삶이라는 면 보다는 야만의 세기인 20세기, 그 얼굴에 난 잔인한 흉터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즉, 역사적인 맥락을 늘 떠올린다.

 

 그도 이 소설을 쓰려고 마음먹었을 때는,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었을까'하는 충격이 그 출발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사람들은 잊을 수 있을까, 하는 것도 역시 중요한 맥락이었을 것이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아우슈비츠에서 사람들이 산처럼 쌓여 죽어갔는데도 어떻게 사람들은 그 위에 햄버거 가게를 세우고 맛있게 먹을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일 것이다. 어쨌든, 20세기가 폭력과 혁명세기, 혹은 야만과 광기의 세기였다면 21세기는 틀림없이 망각의 세기, 단절의 세기가 될 것이다. 안 그런가, 여러분?

 

 난 최근에 읽은 소설 중에 이 소설을 가장 훌륭한 작품이라 꼽고 싶다. 시간 나면 한번 읽어보시길..

 

<제스쳐 라이프>를 내려놓고 서둘러 <영원한 이방인>을 들었더니, 이 全작가가 그건 당신한텐 좀 별루일 수 있겠는데, 했다. 그래서 그냥 내려놨다. 내 귀는 참 얇기도 하지. 진짜 얇다.

 

나의 개인적 소견을 살짝 보태자면, 어느 작가는 데뷔 기념 인터뷰에서 <영원한 이방인>이 자기로 하여금 소설을 쓰게 해준 고마운 소설이라고 하였었는데, <제스쳐 라이프>를 읽고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알 것도 같았다. 나도 소설을 쓸 수 있을 것도 같은 기분이 들었다. 천둥이 치는 하늘에 동시에 무지개가 걸리는 행운이 나에게 찾아와 나도 데뷔 기념 인터뷰 비스무리 한 걸 혹이라도 할 수 있게 된다면, 나도 그때 <제스쳐 라이프>를 두고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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