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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남자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아주 자상하고 세련된 말투. 당장 만나보고싶은 욕구를 느끼게 하는. 연이어 다른 편지를 건네받았다. 조잡하게 프린트된 꽃무늬의 작은 수첩이었다. 

편지가 아니라 개인 수첩같았다.

수첩을 열었더니, 내가 아는 이름들이 적혀있다. 내가 아는 이 사람들을 공유하고 있는 다른 사람의 사생활 기록 수첩. 내용을 보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것이 아주 유치했다. 누구누구와 ****(강남의 나이트클럽이름이라고 생각하였음)에 감, 이것 밖에 없었다. 그게 매일 매일 적혀있었다. 이런 사람 만나보지 않아도 뻔하다,란 생각을 하면서도 이 수첩을 나에게 보낸 이가 내가 지금 짐작하고 있는 그 사람이 맞는지 확인하려고 나는 수첩의 맨 마지막 페이지까지 공들여 넘겼다.

맨마지막에는 핸드폰 전화번호가 하나 적혀있고 그 옆에 원래의 이름이 볼펜으로 죽죽 덧그어진 후 전혀 알지 못하는 이름 하나가 적혀있었다. 볼펜으로 죽죽 그어진 속의 원래 이름을 살짝만 보고, 내가 짐작하고있었던 그 이름이 맞군, 대번에 확신하고 수첩을 접었다.

수첩을 접을 땐 어느새 이 남자를 빨리 만나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있었다.

편지도 아니고, 특별히 나에 관한 내용이 있는 것도 아닌, 이 코딱지만큼 정도 가치의 수첩을 나에게 보낸 이유는 그가 당장 나를 만나야하기 때문이라는 걸 직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얼른 그 핸드폰전화번호를 눌렀다. 그랬더니, 몇십년만에 듣는 목소리가 나왔다. 누구라고 상대가 밝히지도 않았으나 나는 대번에 알아들었다. 그녀는 몹시도 짜증난다는 투로, 그 남자의 전화번호가 아니라 이것은 자기의 전화번호라고 대꾸했으며, 그에 대해서 자기가 아는 바는 없다고 했다. 자기가 들은 것은 사람들이 그가 (이 부분에서 나는 깜짝 놀랐는데) 자살했다고 하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과외에 가야했다.(절박한 순간에 꼭 과외에 가야하는 이 구성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이런 제기랄,하고 화를 잔뜩 내면서 과외에 갔다. 수학문제를 많이도 풀었다. 무슨 문제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풀었는지는 전혀 알 수 없으나, 약간의 짜릿한 쾌감이 손끝에서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 전화를 받았던 사람들이 무대에 서있는 양 일렬로 죽 서있었고, 스무명이 넘어보이는 할머니들이 관중인 양 맞은편에 둥그란 대형으로 앉아있었다. 할머니들은 그 남자의 실종에 대해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이 할머니들이 그 남자의 실종신고를 했던 최초의 사람들인 것 같았다. 할머니들의 중구난방 증언에 이어 나의 증언 순서가 돌아왔다. 나는 입을 떼었다. "그 남자와 저는 고등학교 때 잠시 사귀었었습니다. 잠시 뿐이었고, 고등학교 졸업 후엔 거의 연락이 없었습니다. 꼽자면 한 서너번 정도 만난 것도 같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졸업한지 이십년(이 부분에서 할머니들이 티뷔 토크쇼 방청객들마냥 '오오~' '와~' '우우~'하는 괴성을 내었다)이 거의 다 되어가는데, 서너번 보았으니 거의 보지 못했던 셈입니다." 내 옆에 앉아있던 남자는 형사라고 하는데, 가래침을 연달아 뱉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역겨워 말을 못 잇고 있었으나, 내가 갖고있는 그의 수첩이 큰 단서가 될거라는 예감에 심장이 크게 쿵쿵 뛰고 있었다. 그러나 모두들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마음이 급했다. 할머니들은 어느새 하나 둘씩 방청석을 떠나고 있었고, 형사들은 오히려 나를 설득하려는 표정으로 나에게 다가왔다(이 부분은 참으로 전형적이다). 나를 후랑스 레스토랑으로 데려갔다. 그들이 나에게 무얼 사주려한다기보다는 내가 가야한다고 했던 것 같다.

 

나는 여기저기 테이블에 남겨있는 음식들을 죽 돌아본 후 디저트 메뉴를 하나 골랐는데, 그 돈이 있을까,하고 가방 주머니 속을 뒤져보니 후랑스 후랑 동전이 잔뜩 들어있었다.

내 옆에 어느 남자는 지금 미국에서 포르노배우로 활약하고 있는 강수지(그는 '보라빛'이라고 불렀다)에 대해 얘기했다. 그녀는 성전환수술을 받아 남자의 성기를 몸에 달고 영화에 출연 중이라고 했다.

 

할머니들이 인상적이어서 할머니들에 대해 적어두려고 했었는데, 지금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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