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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영화 <조제, 호랑이, 물고기들>, <연애의 목적>

* 이 글은 원래 10월29일 토요일 올렸던 것인데, <연애의 목적> 마지막 부분에 대해서 대충 쓰고 말아버린 감이 있어 10월30일 일요일 다시 씀. 정성이다.

 

 

'이처럼 어린 여자가 이처럼 의연하게 사랑의 오고 감을 응시하는 영화를 본 적이 있던가. 사랑의 환상과 현실의 냉정함 사이에서 그 아픔을 자신만의 언어로 풀어내던 소녀. 사랑이 떠난 후, 휠체어를 타고 그녀는 홀로 길을 나선다. 그 슬픈 뒷모습에서 세상을 향해 또 한 걸음 내딛은 여인을 본다. 그 순간, 사랑보다도 빛나던 순간.'

 

한겨레신문에 어느 평론가가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자기가 본 최고의 쿨한 멜로영화로 꼽으며 쓴 평.


 

이 평이 실렸던 기사는, <너는 내 운명>하고 <사랑니>같은 멜로영화가 다시 유행이라고 하면서, 멜로 영화를 '쿨한 멜로'와 '징한 멜로'로 나누자면, <너는 내 운명>은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류의 '징한 멜로'이고, <사랑니>는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류의 '쿨한 멜로'라는 얘길 썼다. 그러면서 어느 평론가와 어느 소설가의 각각 '쿨한 멜로'옹호론과 '징한 멜로'옹호론을 덧붙여 놓았었다.

나는, 이것이 나의 개인적 취향의 문제인지, 개별 영화의 내용이나 재미의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징한 멜로'보다는 '쿨한 멜로'에 한 표다. '징한 멜로'영화는 나를 잘 설득하지 못한다.

가슴에 악마가 얼음심지를 박아놓았는지, 사랑하는 사이로 설정된 두 사람이 등장할 때 마다, '쟤네 이제 끝나나보다'라는 생각부터 하고 본다. 절절이 사랑한다는 설정이 계속이어질 때마다 나는 번번히 그 근거를 찾으며, 잘 이해하지 못 한다.

(그런데 <굳세어라 금순이>의 구재희의 사랑은 그토록 가슴절절하게 봤으니, 이것은 나의 영화관람자세와 드라마관람자세의 차이인가????)  저 신문 기사에서도 소설가의 '징한 멜로'옹호론은 나에게 설득력 빵이었다.

 

쓰고보니 이것은 실제로 나의 '애정관'과 연관이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애정관이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식이라는 소리는 아니다. 사랑이란 그 과정에 있다는 생각이다. 감정에의 응시.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성찰. 무엇인지 끝까지 알지 못해도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

끝없는 질문.

 

한겨레에 평을 올린 평론가만큼 나도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 재미있었다. 내가 본 최고의 멜로영화 탑 화이브 안에 꼽겠다. 사랑영화는, 내 애정관에 맞는 사랑영화는 결국 자기얘기로 돌아올 수 밖에 없다. 생선을 굽는 조제의 의연한 얼굴. 식탁에 놓을 생선접시를 향해 뻗어올린 조제의 의연한 팔. '그 순간, 사랑보다도 빛나던 순간.'

 

일본어 영화를 볼때마다 그 익숙하지 않은 인토네이션에, 배우들이 지금 연기를 잘 하고 있는 건지, 좀 느끼하거나 오바인건지 아리송하며 불편하곤 하는데, 이번에도 그랬다.

특히 남자주인공이 너무 이쁘게 생겨서 싫었다.  저렇게 잘생긴 남자애가 애인이라면 금새 토라져, 흥, 나 장애인애인 안할거야,하고 삐칠까봐 영화보는 내내 조마조마했다. (이쁘장한 남자애는 잘 삐친다는 선입견?)

 

반면 <연애의 목적>.

그냥 호감가고 좋으면 같이 자는 거지, 쿨하게. 사랑이란 감정은 어차피 3개월짜리인데 사랑은 왜 따져. 라며 추근대는 남자. 여기에서 이 영화는, '사랑은 할인쿠폰이라는' 쿨한멜로처럼 보였다.

 

때로는 '너를 진심으로 사랑해' 보다 '너 졸라 맛있다'라는 말이 더 정확한 사랑의 고백일 수 있다. 나도 니가 졸라 맛있어,하고 맞붙는 사랑에 무슨 걸림돌이 있겠는가.

 

둘은 그래서 불같은, 뜨거운, 멋진 사랑이 될 수 있었다. 이제부터 결국 감독이 원했던 건 징한멜로였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사랑이 할인쿠폰같은 세상에서 이런 징한 사랑이 있단다,라고 감독은 말하고 싶었던 거다. 애타게 부르짖는 남자 목소리의 '우리의 불같은 사랑' 어쩌구란 노래는 노골적으로 반복된다.

그러나 결말에, 최홍이 학원강사 유림을 다시 만나는 순간부터 확 깼다.

앗, 저것은....

저것은 무엇인가.

 

최홍은, 유림에게 있어 이제 그녀 자신이 '손발을 잘라버리고 그의 아내도 죽여버리고 죄없는 애새끼까지 죽여버리고 싶'던 그 가해자가 되었으면서, 유림 앞에 다시 나타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까지 한껏 감정이입했던 주인공의 새 사랑이기에?

더구나 한 번 당했던 피해자였으니 동종 범죄에 있어서는 면책특권을 주자는?

(강간당한 여자들은 강간하면서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는 새로운 논리?)

(나 이제 잘자,하는 최홍의 대사는, 순간 이 영화가 호러영화였나 싶게, 소름이 좍 끼쳤다.)

여관 앞에 쌓인 첫 눈을 처음 밟았다며, 우리 관계는 이렇게 깨끗하게 새 시작이야,라는 넉살좋은 표정을 짓고 '사랑이란 이름으로' 모든 걸 덮어버린다는 그 투는, 오히려 이 영화의 최고의 순정이었던 최홍을 더럽히는 결과이다.

 

영화는 공들여 최홍을 사랑의 유일한, 따라서 빛나는 실천자로 만들어왔다(<클로저>의 나탈리 포트만같은, 조제같은, 내가 좋아하는 <멘>의 숀 영같은). 사랑이 무엇인지 묻기를 포기하지 않고 사랑을 실천하려하는, 그럼으로써 막 움트는 사랑의 감정과 그것에 기대고 싶은 자기가 있었으나,  그것이 설혹 후에 진짜 사랑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할지라도 서슴없이 포기되는 사랑은 단호히 부정하는, 정직하게 실천하는 용기있고 아름다운 그녀.

이렇게 고귀한 캐릭터를 애써 만들어놓고는 팔짱을 끼며 배시시 싸구려 웃음을 흘리게 만드는 건 무언가.

사랑의 고갱이에 애써 다다라 놓고는 똥을 한 바가지 퍼 싸지르고 이게 사랑이야,하는 꼴이다.

 

사실, 똥 한 바가지 퍼 싸지르는 게 필남필부의 사랑일지도 모른다. 고갱이 같은 사랑을 실천하는 빛나는 실천자는 천사 밖에 없는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궁색맞고 저열하지만 모두가 끄덕이는 우리의 냄새나는 사랑, 그것을 영화는 이야기하려 했던 것인가.

그러나 그것이기에는, 감독은 홍상수도 아니고,

더구나 최홍을 음해하는 인터넷때문에 꼭지가 돌아 애들을 패대는 이유림과 당시 아무것도 모르고 이유림이 좋아하는 닭강정 도시락을 싸서 둘만의 아지트에서 행복하게 님을 기다리는 최홍의 교차편집이 사건의 절정에서 숨막히게 펼쳐지며, 이 천상의 연인들에의 연민을 최대한으로 호소했던 감독이, 막판에 인간의 너절한 사랑을 난데없이 메인주제로 떠올렸을 리는 없을 것 같다.

 

영화는 거기서 끝나야했다. 이유림이 경찰차에 태워지고(왠 경찰차? 여자의 '저 남자가 성추행한거에요.'란 말 한 마디에 경찰차 오는 나라였던가, 여기가? 그렇게 되면 좋겠지만, 학교홈페이지가 야동익명게시판 같은 모양새나, 경찰차 출동이나 좀 오바다, 감독이.), 최홍은 설겆이를 하다가 설겆이통에서 불어터진 닭강정을 보며 오열하고, 약혼자와의 대화, 좋아하는 남자가 있어, 잤어? 그럼.하고 끝. 딱 거기가 좋았는데. 마지막 강혜정의 표정도.

 

 

<연애의 목적>이란 제목은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게 더 어울렸었을...

하여간에 박해일은 여전 멋졌음.

특히, 그 부분, 최홍이 무단결근하자 집으로 다짜고짜 찾아가 창문을 간신히 여는 장면.

창문이 신통찮게 열리자, 차에서 거울을 떼어와 창문에 대고 이리저리 비추며 "아, 저기 있네. 거기 그러고 있으면 못 찾을 줄 알았지?"하는 그 장면. 으하하.


 

 

 

술은 왜 그렇게 많이 마시는거야? 저렇게 술을 막 퍼먹어본 것이 정말 오래전 일 같다.

그렇게 마구 퍼마시고 필름도 확 끊기고 그래보고 싶었다. (저 사진봐라, 정말 맛있겠지.)

(그러나 숙취는 여전히 무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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