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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대학교 때 뜬금없이 동네 피아노 학원에 등록한 적이 있었다.

피아노치기를 그만두고 만 십년이 훨씬 지난 뒤였다.

 

나는, 내가 음악과 미술에는 젬병,이라고 낙인 찍고 살아왔었다.

미술은 정말 쪽팔릴 정도로 못했고, 음악은, 사실 음악은 내가 생각하기에 그렇게 못 한 것도 아닌데, 시험 공부 하기싫어 그냥 시험봤더니 필기시험이 40점대(두개 중 하나도 못 맞힘, 이렇게 음악상식이 없다는 것 자체가 꽝이라는 증건가...)이고 나니, 실기시험을 아무리 잘 봐도 이미 바닥 점수로 결판이 난 것이었단 말이다. 그리고 노래를 내가 그렇게 못 하나? 내가 듣기에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암튼 나는 '듣는' 음악과 '보는' 미술에 나의 인생을 한정하고 살아왔었다. (사실 이것도 그렇게 풍부하고 심오하게 즐기는 편도 아니다. 오히려 얄팍하고 경박하고 단순하고 무식한 편이지.) 그래도 뭐 살기 불편하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때때로, 대학교 때 뜬금없이 동네 피아노 학원에 오만원 들고가 등록해야만 했던 때와 같은 그런 순간이 오곤 했다는 것이다.

 

이럴 때 나의 인생은 참으로 가난했다.

나는 악기 하나 제대로 다룰 줄 모르고, 무언가 떠올랐다고 오선지에 끄적거려볼 줄 모르고(무언가 떠올라서 흥얼거린 적은 있었지.), 붓을 들고 색을 골라 펼쳐 보일 줄 몰랐다.

 

그러나 오만원 들고 등록한 동네피아노 학원에서는 내가 생전 듣도보도 못한 것을 요구했다(물구나무서고 피아노치기 같은 걸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즐기기 전에 질려버리고 학원에 가지 않았더니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또 그로부터 거짓말처럼 만 십년이 훨씬 더 지났다.

 

올해는, 기타치기를 한해소망목록으로 올린 해였다.

때때로 터지던 갈망이, 이제 별로 시간이 남지 않았다(그게 젊음이던, 인생이던)는 조바심 때문인지 시시각각 터졌다. 아니, 그것은 시간이 별로 남지않았다는 조바심 떄문이 아니라, 나의 인생이, 혹은 누구나의 인생이든 인생이란 것 자체가 사실은 원래부터 유희가 원천근거이기 떄문이라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말하기 쪽팔리게 나는 한 번도 기타 배울 생각을 하지 못하고 살았다.

이것도 내가 스스로에게, 직접하는 음악/미술의 문외한으로 낙인찍은 불행한 결과 중의 하나일 것이다.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를 직접 연주하며 부르려고,하고 이유를 댔더니, 전수찬이 그거 치려면 꼬박꼬박 매일매일 연습해서 3년은 쳐야된다고 말했다. 이미 넌 글렀다는 뉘앙스였다. 어쩌면 난 평생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를 칠 수 없을지도 모른다(이렇게 생각하니 순간 서글프네).

 

하여간에 본격적으로 '하는'음악의 원년으로 삼은 올해, 단지 의식적인 한해소망으로서가 아니라, 인생을 다시 잡아보려는, 잘못된 부분을 수정해보려는 인생 전환점에서의 오묘한 무의식의 힘처럼 나는 피아노를 다시 치게 됐다.

 

국민학교 담임은 원래 노래반주를 풍금으로 하지않은가. 풍금도 없는 가난한 학교에는 강당에 조율되지 않은 오래된 영창피아노와 누가 퇴직금으로 기증한 디지털피아노가 한 대 씩 두대 있는데, 강제적인 음악연수를 시작하게 되면서 이 두 대의 피아노를 만져보게 된 것이다.

 

이미 밝혔듯 이것은 강제적인 것이었다. 나는 늦은 퇴근을 될 수 있으면 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음악연수 선생님은 일주일에 딱 한 번 오셔서 선생님 전부에게 레슨을 해주시기 떄문에 나같은 신임은 당연히 끄트머리 순서를 받아 퇴근이 무지하게 늦어질 수 밖에 없었다. 더더군다나 끄트머리에 레슨을 받으면 피곤해질대로 피곤해진 음악선생님은 딸랑 5분짜리 레슨만 해주었고 이걸 받으려고 한달에 5만원을 내야한다는 것도 억울했고 하여간에 나의 자발적인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그런데, 피아노 건반에 손가락을 대고부터 이야기가 달라졌다.

손가락은 내 머리가 잊고 있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는지 피아노 건반과 감동적인 해후를 하였다.

자리만 차지하는 애물단지라고 욕을 먹다가 결혼식에서 최종민과 유영이의 애무를 끝으로 내 곁에서 사라진 나의 낡은 영창피아노, 이거 2학년떄 올백 맞은 기념으로 사주신 거였는데, 그 피아노가 어찌나 그리운지 내가 발등을 찍는다. 도로 찾아올 수 없을까.

디지털 피아노는 정말 사고 싶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싸니까 디지털 피아노를 살 수 밖에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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