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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아이가 말을 하기 시작하여 아이와 대화가 가능해진 후, 그러니까 아이의 실체가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내가 조금씩 발견할 수 있었던 그 실체라는 것을 한 문장으로 하자면, 아이는 참말로 완벽한 존재라는 것이었다.

 

이루 말 할 수 없이 상투적이라 이미 너덜너덜하게 닳아빠져 그 의미조차 너절해진 느낌의, '아이는 어른의 스승이다'란 명제도, '아이는 천사와 같이 순수하다'란 명제도, 그래서 참인 것이었다.

 

이것은 섬뜩한 발견이었다.

 

나는, 아이를 싫어한다는 편으로 남고자 끈질기게 애쓰며 살아왔었는데(아이를 낳고 키우는 엄마된 주제에도. 딱히 어떤 아이가 싫어서라기 보다는 꾸역꾸역 태어나는 인간들이 싫은 것이었음) 두 손 들어 완패를 선언할 수 밖에 없었다. 내 앞에 육화하신 부처, 예수, 성인을 두고 감히 내가 뭐라고 그 존재를 '싫다, 좋다' 한단 말인가.

 

 

이 발견의 근거가 되는 상황 상황들을 하나하나 여기에 옮기기는 어려우니 요약정리하자면, 아이는 내가 풀어놓는 인간관, 인생관, 세상관 등에 대해서 내가 몸으로 실천하고 있는 것과 내가 입으로만 떠들어대는 것을 정확하게 꿰뚫어보았다. (그 판단력은 어디서 나오는가. 천상으로부터 내려진 솔로몬의 왕관을 숨기고 있는 것은 아닐테고, 사실 그것은 다름아닌 아이의 '백지와 거울'이란 특성 때문이다. 외부를 고스란히 (그리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고스란히 내비추고 있는 특성.) 그리고 그 괴리를 자기 몸으로 고민한다. 해답을 찾으며 타협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오오.

 

이러니 아이 앞에서 나라는 인간이 얼마나 초라해지겠는가.

나의 일거수일투족, 일사일언이 진실인 것인가,하는 검증은, 이 나이에 새삼 나를 초라하게 만들었다.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참으로 섬뜩한 발견이었다.

 

 

언젠가부터, 아이가 짜증을 부리고 떼를 피우면, 미안해, 미안해, 엄마가 잘못했구나, 엄마가 몰랐구나,라는 말이 나왔다. 백만번 사과를 해도 미안해. 그러다가도 나는 역시 범인이라, 어른이랍시고, 떽 혼을 낸다. 홍수나는데 저수지에 또랑내어 논에 물대고 있는 꼴이라지. 누가 누구를 혼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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