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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신문 보고 울고, 오늘 책 보다 기절

뭐야, 세상에, 어제 신문 보다가 기가 막혀 울음.

마흔 된 여자가 딸 죽이고 자기도 죽으려다가 딸이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바람에 다 실패하고 말았다고.

이영표가 일부러 먼 길 돌아 드리블 연습하며 가슴에 품는다는 대한민국이 이런 나라다.

자칫해서 주변으로 빠지면 되돌아 살아올 길 없는 황천길 되는 나라.

마흔몇살이라는 민씨 그녀, 대학도 다녔던 엘리트에, 왠만큼 사는 집 자식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오토바이에 한 번 치였던 것이 시각장애인으로 빠지는 삐걱이었고, 서른 즈음에 연애했다가 임신했을 때 낙태하지 않고 애 낳은 것이 미혼모로 빠지는 삐걱이었다.

내가 그녀가 아니될 것이란 보장이 어디있는가.

배 아프지 않는 약이라며 애에게 수면제 먹일 때 어미 심정이 어떠했을까.

딸은 보호소로 보내지고, 어미는 정신치료원으로 보내졌다고 한다.

물론 그녀의 해발 5만 피트의 상처를 치료하려면 정신치료원이든 어디든 가서 쉬어야겠지만, 정작 정신치료원에 보내져서 정신치료 좀 받아야할 사람들이 멀쩡히 돌아다니며 정치입네, 나랏일하네하고 있는 데 정말 멀미가 난다.

 

 

그리고 바로 하루 지나고 오늘은 책을 보다가 심폐를 찌르는 곳곳의 문장들 때문에 기절함.

 

아이리스 머독의 <잘려진 머리>, 왜 이리 재밌는 거야. 진작 볼걸. 마틴 때문에 웃겨죽겠네.

오늘의 숱한 명명문장들 중 하나:

누군가를 잃는다는 것은 그 사람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사람됨이 밖으로 흘러나와 형성된 모든 것을 함께 잃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하여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되는 경우, 우리는 그렇게나 많은 것들, 그림들, 시들, 노래들, 장소들도 함께 잃게되는 것이다.  단테, 아비뇽, 셰익스피어의 노래, 콘웰의 바다, 그 방이 그대로 안토니어였다.

 

흠, 이것을 보고 문득 얼마전에 보았던 영화 <이터널 썬샤인 오브 스폿리스 마인드>가 생각남.

이 영화, 짐 캐리와 케이트 윈슬렛 두 배우 덕분에, 그리고 (올모여사가 지적했던) '날고 뛰어봤자 운명의 짝은 돌고도는 윤회의 동일자'란 사랑에 대한 냉소(난 영화보다 여사의 이 표현이 더 좋았던듯)적 자세를 감상하는 맛이 나쁘지 않았으나, 찝찝하게 뒷통수에 남은 것, 바로 기억의 말소에 대한 부분.

대상에 대한 기억을 지운다고 그게 그렇게 말끔하게 되나. 대상과 관련된 일기, 사건, 장소, 타인과의 대화 등등은 어떡할건가. 그것까지 지워버리면 남은 기억은 너덜너덜해져있을텐데.

<메멘토>도 그렇고, 나는 기억을 소재로 하는 영화는 어쩐지 대충 그렇다고 치고 넘어가자는 것 같아 보고나면 좀 민망하다.

 

그래서 야심차게 <이터널 썬샤인> 비디오를 빌려본 후 괜히 머쓱해져서 영화 보기가 쭉쭉 이어지지 못하고 있음. 아무래도 나에게 있어 영화는 막을 내린 듯. <청연>, <그대는 내 운명>, <사랑니> 등등 보고싶어 좀이 쑤시던 것들이 언제 그랬냐 싶게 맹맹하다. 이것도 청춘의 막이 내리고 중년의 막이 오름의 한 증상인지 싶다.

 

하여간에 민씨 모녀만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하다.

그녀들을 위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뭐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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