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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09/26
    추석 중 생각(3)
    이유
  2. 2007/09/20
    반했어, 규민그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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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7/09/08
    디즈니 인어공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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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7/09/02
    홍은택 <아메리카 자전거 여행>(2)
    이유

추석 중 생각

마지막 밥 숟갈을 입에 넣기도 전에 규민, "놀아, 놀아".

저 소리에 내 간이 뻘겋게 부푸는 것 같다.

나도 밥 숟갈 내려놓고서 내가 하고 싶은 것 하고 싶단 말이다.

일단 몸을 길게 늘어놓는 것.

그리고 옆구리에 재미있는 것을 끼고.

이 상태 유지하기를 약 5분 넘기지 못하는 신세 어언 육년 째이다보니, 옆구리에 국어사전을 끼고 있어도 그것은 아주 훌륭한 '재미있는 것'이 된다. 그러니까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라는 말이 맞다. 공부하기 싫다는 애들 데려다 애 키우라고 시켜야한다. 한 달은 커녕 하루만 온종일 해도 아마 공부하겠다고 도망갈 것이다.

사실 나는 국어사전이나 영어사전, 사전 보기를 좋아하는 편이어서, 원래 사전은 나에게 재미있는 것이다. 갑자기 얘기가 사전으로 넘어가려고 한다. 원래 하려던 얘기가 긴데, 다시 규민이로 넘어가야한다.

 

규민이가 놀아, 놀아,하는데 엄마가 즉각 적극 오케이를 보이지 않으면 다시 없는 떼를 보여준다.

역시 엄마가 가장 만만한 존재인 것이다. 내가 그토록 엄마를 당하게 하더니, 딸한테 당한다.

나는 좀 강하게 나가야겠다고 생각한다.

내 의사를 분명하게, 단호하게 밝히는 것이다.

 

그랬더니 엊그제부터 규민이가 하는 말이 있다.

"그럼 엄마, 나랑 안 살겠다는 거야? 나랑 살지마."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분명히 이번 부부싸움으로 인한 것이다.

그 스트레스, 불안감, 정신적 고통이 아이 마음에 또아리를 틀고있는 것이다.

나는 강하게, 내 의사, 분명단호..다 잊고 아이를 덥석 안는다.

규민아, 미안해, 엄마가 미안해. 엄마가 잘못 했구나, 우리 규민이한테.

 

애 앞에서 부부싸움을 하면 안된다는 것은 상식이 아니라 본능으로 아는 것이다.

나도 어렸을 때 엄마아빠 싸움을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던가.

아, 나도, 나도...

 

그런데 나는 아이 앞에서 멀쩡한(혹은 멀쩡을 가장한) 얼굴을 하고 기다렸다가 애가 없을 때, 애가 자고 난 후에 남편이랑 부부싸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렇게 해보려고 시도,노력했으나, 어차피 다 찌그러진 얼굴하고 말은 거칠고 그동안 아이에게 괜한 짜증을 부리고 화장실에 들어가서 훌찌럭거리고 이거나 저거나 싶다. 그냥 솔직하게 나의 감정을 이야기하고 또 솔직한 이야기를 듣고, 그렇게 '대화'를 나눠야지,하고 이야기를 시작하다가 그러고보니 싸우고 있는 중이 되는 것이다. 사실은 정말 싸우는 것이 아니라 대화인데, 단지 격한 대화인 것인데, 그치만 아이에겐, 그걸 받아들일 만한 감정의 폭이 안된 아이에겐 엄마아빠가 또 싸우는 것이다.

 

아이에게 무척이나 미안하지만, 덮어두고 묻어두고 사는 것 보다 괴로운 것 괴롭다 말하고 아닌 거 아니다 말하고 사는 게 낫지않겠나, 바로 그것을 아이도 자라면 이해하지 않겠나,하는 마음이, 사실 나에게 있다. 내가 우리 엄마아빠 싸움에 그토록 괴로워했지만, 결국 그 부부의 싸움의 의미를 이해했듯이.

규민이 언젠가 엄마와 여자의 연대감을 갖게되면, 그때 정말 솔직하게 규민과도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마음이, 사실 나에게 있다.

 

그런데 엊그제 규민의 그 말 앞에서 완전 두 무릎 다 꿇고 미안하고 잘못했구나,를 되뇌이면서, 내가 엄마아빠의 싸움을 부부싸움으로 이해하게된 시점 그 이전을 다시 떠올려보는데.....이런 게 떠올랐다.

나, 엄마아빠 싸움 보면서 이런 생각했었었다.

엄마가 좀 참지. 앗, 엄마, 거기서 그런 말 하지 말고 그냥 알았다고 하고 참지. 앗, 엄마, 그냥 말하지 말라니까.....

엄마 아빠 중에 누가 옳다,라는 생각을 갖기 이전에 나는 그냥 싸움이 싫었고, 그 싫은 싸움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 빨리 종료하기 위해, 마음 속으로 엄마가 조용히 참기를 바랐던 것이었다. 우리 아빠는 가끔 엄마를 때렸다. 물론 무엇보다 엄마가 맞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아빠 성질 돋우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지만, 일단 무조건 엄마가 그냥 다 넘어가주기를 바라는 것이었던 것이다.

꽤 나이먹도록 자랐을 때까지(기억으론 중학생때까지) 이런 생각을 하였었는데, 가령, 엄마가 외출하여 친구들을 만날 수 있다고는 생각하면서도, 엄마가 저녁밥먹는 시간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아빠가 뭐라 하지 않았는데도, 내가 엄마친구들집으로 전화를 돌렸고, 버스정류장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목에 나가 기다렸다. 빨리 안오고 뭐해,하면서......

 

나의 어린 시절을 되짚으며, 여자가 사람으로 자라는 것은, 남자로 자라는 것이란 생각을 했었었다.

(사람=남자인 것을... 당연하지,라고 써놓고보니, 슬프다.)

그리고 진짜 여자가 되는 것은 고통과 관련있는 일이었다.

(월경이니, 섹스니, 출산으로 읽는 사람은 바보)

이후로도 여자로 사는 것은 참 어렵다.

(그래서 훼미니즘은 가장 성찰적이다,라고 내가 하는 얘기가 아님)

 

내 딸 역시 그런 과정을 밟을 수 있다는 생각은 다시, 낯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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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했어, 규민그림

 

 

 

 

반했어, 반했어. 규민그림.

 

저 벌들 좀 봐. 저 소녀의 행복한 미소를 봐.

 

지금의 나도 못 그릴 그림이야.

 

그런데, 문득, 나도 여섯살 무렵엔 말이지, 내가 그린 그림에 도취되었던 시절이 있었단 기억.

(물론 그림을 잘 그린다는 것과 자기가 그린 그림에 도취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지만.)

나도 매일 그림을 그려대며 내가 그린 그림에 빠져있었는데 말이지.

언제부터 난 그림을 못 그린단 생각으로 빠져버린걸까.

 

한국에서 초등학교를 보낸 사람들은 1~2%만 빼고 죄다 성인미술치료코스를 필수 이수해야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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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 인어공주

인어공주는 다리를 얻기 위해 마녀를 찾아간다. 마녀는 그녀의 목소리를 대신 받고 다리를 만들어준다.

하지만 사흘 안에 왕자와 사랑에 빠져 키스를 하지 않으면 마녀의 하녀가 되어야한다는 계약서를 써야한다.

인어공주는 왕자를 만나 사랑을 시작한다. 한적한 보트놀이에서 키스할 뻔도 했지만 보트가 뒤집히는 바람에(마녀 신하들의 계략으로) 실패했다. 사흘째 되는 날 왕자는 어찌된 일인지 느닷없이 등장한 바넷사란 여자랑 결혼을 발표한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바넷사는 마녀가 변신한 것이었다. 인어공주를 후원하는 동물친구들의 도움으로 바넷사는 봉변을 당하고 인어공주는 그 와중에 목소리를 되찾는다. 그리고 왕자랑 키스를 했지만 막 해가 진 뒤였다. 결국 계약에 의해 인어공주는 마녀의 하녀가 되지만, 인어공주의 아버지(용왕님?)가 그것은 차마 가슴이 아파 자신이 대신 마녀의 하인이 된다. 마녀는 용왕의 강력한 마법 덕분으로 거대한 힘을 얻지만 왕자가 사랑의 힘으로 용기를 내어 배를 몰아서 마녀의 심장을 뚫는다. 용왕님은 기뻐하며 딸에게 다리를 주고 둘의 결혼을 허락한다.

 

규민이가 반짝이와 분홍치마와 뾰족구두 세계에 입문한 후, 거기에는 온갖 그 이쁜것들과 함께 왕자와 가슴 떨리는 로맨스까지 누리고 있는 공주라는 존재가 있었다.

공주는 규민이의 꿈이다.

이 다음에 크면 나도 공주가 될 수 있을까....

 

신데렐라, 백설공주,오로라공주(나는 처음으로 이 이름을 알았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 이름이라는데 이거 진짜일까, 아니면 디즈니에서 만들었나.왕자이름은 필립이란다. 디즈니에서 지어낸 게 분명해.), 엘리..뭐더라 인어공주이름도 있는데(이것도 디즈니에서 만든 것 같음. 왕자이름은 에릭이라함.) 자스민 공주(알라딘과 요술램프에 나오는 공주, 이것도 디즈니에서 만든 거 같아.) 미녀와 야수의 벨 공주. 이 여섯 공주는 우리집에서 맨날 같이 산다.

 

처음에 규민이가 공주에 흥분하기 시작했을 때는, '공주'라는 것이 싫었다.

실제로 규민이는 공주놀이에서 왕자님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외로 꼬며, 나쁜 놈 앞에서는 그대로 쓰러지거나 도망치면서 왕자에게 도움을 청하는 연기를 했다. 왕자한테 도와달라고 외칠 때도 큰소리로 외치지도 않는다. 왕...자...님...하면서 쓰러진다.

 

나는 푸르미공주라는 이야기를 지었다. 푸르미공주는 머리카락도 아주 길고, 아름답고 보석도 많고 아름다운 분홍드레스가 치렁치렁하고 뾰족유리구두를 가졌는데 요정들과 함께 칼싸움 놀이를 좋아하여서 맨날 칼싸움놀이를 하다가 왕자가 나쁜 놈의 공격을 당하자 나쁜놈을 혼내준다고....(여전히 한계가 많다.-.-;;;)

규민이는 푸르미공주를 좋아했지만, 푸르미는 오래가지 못했다.

무엇보다 푸르미는 자기가 힘겹게 상상을 해야하는 것이다.

그런데 디즈니는 요정의 마법지팡이처럼 공주들을 눈 앞에 내놓았으니.

 

 

인어공주 디즈니 만화영화를 극장에서 봤다,사실, 나는,데이트하면서.

알라딘과 자스민공주도 그랬다,사실.

그러고보니 미녀와 야수도 봤다,왠일이니.

 

인어공주 볼 때, 원작을 바꾸어서 저렇게 만든 것을 만화적 위트라고 생각했었다.

보트에서 키스하려고 했다가 뒤집혀서 못 하는 것 등. 그리고 대대적인 해피엔딩.

원작과 어떻게 다른 것이 어떠한지에 대한 생각 전혀 없었음. 원래 원작이 위대하면 자질구레한 아류가 등장하기 마련.. 한번 웃고넘어가는 이런것도 있지...뭐 대충 이런 생각.

 

그런데 여섯살 아이가 인어공주의 원작을 잘 알기도 전에 디즈니판 인어공주를 본다는 것은(만화도 아니고 책으로) ...

 

내가 어렸을 때 인어공주를 책으로 보았을때, 그 때 마녀는 이렇게 무조건 무찌르고 타도해야하는 나쁜편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녀의 문제가 아니었다.  어린 마음에도 그것은 인어공주가 '금기시 된 것을 탐하기' 때문이었다. 금기된 것을 탐할 때의 그 위험, 그럼에도 결국 저지르고 말게되는 강한 유혹. 마녀는 그것의 은밀한 중계자다. 음침한 종말을 암시하는. 무서워도 거부할 수 없는..... 그래서 자라면서 공주 캐릭터 보다 마녀 캐릭터에 더 호감을 갖게 되나봐. 그런 사람들이 디즈니의 마녀캐릭터를 만드는 것인가보다. 디즈니의 마녀 캐릭터도 공주만큼 호감은 준다. 매력의 근간은 다 사라지고 이미지만 남아서 그렇지.

아무튼지간에 무엇보다 인어공주의 백미는 마지막 비극. 왕자의 가슴을 언니들의 머리카락을 팔아 얻은 칼로 찌르느냐, 마느냐. 내가 죽는냐, 널 죽이느냐. 거기에서 왕자의 가슴을 찔렀다고 해도 좋았을 것 같다. 왕자의 피는 그의 침대에 낭자하고 인어공주는 그 피가, 이제는 저주할 다리를 물들이는 것을 바라본다고 해도 나는 인어공주를 이해할 것이다. 그직전에 가슴은 이미 터질만큼 뛰었다. 죽이든 죽든 어떤 결말에도 카타르시스를 느낄 것이었다.

 

 

이런 것들을 죄다 번떡이는 이미지로만 도배한 디즈니의 인어공주는 천박하고 천박하다.

 

어렸을 적에 만화 시작하기 전에 뜨는 디즈니 로고만 봐도 꿈과 희망이 부푸는 줄 알았건만, 아, 정말 싫어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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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은택 <아메리카 자전거 여행>

 

여행기를 읽는 사람들이 과연 있을까, 생각했었는데.

정말 하고 싶은 것은 여행인데, 그 하고 싶은 것을 나는 못 하고 있고, 그 하고 싶은 것을 다른 누군가가 하여서 남긴 글을 어떻게 질투가 나서 읽어,라고 생각했었다.(우리 남편이 보면, 넌 그래서 안돼,라고 하기 딱 좋을 소리다.)

 

 

친구가 홍은택의 <아메리카 자전거 여행>을 빌려준 것은 벌써 2년 전이다.

그녀가 라디오 방송국 작가로 있을 때, 그 방송프로에 홍은택을 초대해서 그남이 쓴 책을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다고 한다. 단단하게 쌔카만 남자였다고 한다. 이 책은 홍은택씨가 작가님에게 직접 주었던 책이었을까. 그렇다면 싸인이 없는데? 암튼 내 친구는 나에게 재미있었다며 홍은택씨에게도 호감이 있다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며 이 책을 빌려주었었다.

그녀는 지금 테레비방송국을 위해서 일한다. 라디오방송이 그녀에게 더 어울릴 것 같다고 느끼는데, 그녀는 한사코 테레비쪽이 더 좋다고 한다. 그게 더 자기가 만든 방송이란 느낌이 든다나 뭐라나. 그여자는 가끔 그렇게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다른 무언가가 자기것이라고 주장한다. 그거야 보통 그럴 수 있는 일이지만, 나는 내친구 그녀가 라디오방송국에 앉아있는 것이 테레비방송국에 앉아있는 것보다 훨씬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아마 나의 방송국에 대한 선입견과 무지 때문이겠지. (이렇게 생각하니 간단한걸.)

 

2년의 기간 동안 내 친구가 책을 찾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집 책꽂이에 이 책은 고대로 꽂혀있었으나,  나는 이 책을 오랫동안 잊었다.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나는 여행기를 읽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은, 홍은택씨가 이 글을 한겨레에 연재하였을 때 보았었었다. 그것도 매주 빼놓지 않고. 그때 이 글이 연재되었던 지면이 18도라는 섹션이었는데, 아마 이 글이 그 섹션 중 가장 휙휙 빨리 읽혔기 때문인지도..

 

이런 경우도 있었긴 하다.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아니 그보다 더 오래전 일인가.

올모가 빠리에 가서 한달을 있으면서 그녀의 블로그에 온라인 여행기를 남겼다. 나는, 이 시간 즈음이면 올라오더라,며 실시간으로 접속하여 읽어대었다.(그녀는 현재 태국에 가있다. 또 한 달 있다 온다. 이번엔 노트북접속이 어려워 피씨방에서 여행기를 올리고 있는데, 암튼 다시 재미있게 보고있다.)

 

여행기는 사실은 재미있는 것인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은 여행인데, 그 하고 싶은 것을 나는 못 하고 있고, 그 하고 싶은 것을 다른 누군가가 하여서 남긴 글이라도 읽으며 대리만족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여행기 읽는 일은 결국 쓸쓸하고 우울해....

 

내가 읽고 있었던 책이 있었다.

가라타니 고진의 <윤리21>을 몇년째 읽고있다. 한 챕터 읽고 몇달간 두었다가 또 한 챕터 읽고.. 이번 방학에 다 읽을라고 했는데.. 그리고, 슈타이너 박사가 쓰신 <일반인간학>을 읽고있고, 김소진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을 띄엄띄엄 읽고 있다. 그리고 또 김형경의 <천개의 공감>을 아직도 읽고 있다.

그런데 이 책들을 다 보기 싫었다.

 

그러다가 눈에 띈 것이 바로 <아메리카 자전거 여행>,  빼어들었더니, 겉표지엔 울창한 나무가 줄줄이 서있는 길을 홍은택씨가 자전거를 타고 있는데 그 나뭇잎들 사이로 햇빛이 들어와 온통 노랗고 초록이고 연두이다.

 

여행기 읽기는 쓸쓸하고 우울한 것인가?

학교에 묶여있고, 돈에 묶여있고, 울 딸래미에게 심정적으로 묶여있고 싶은 나에게 여행기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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