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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자 운동과 계급, 자본

* 이 글은 김규항님의 [박경석] 글에서 소수자 운동과 계급에 관련된 글입니다.
[소수자 생각 1] 들뢰즈(Deleuze)와 가타리(Guattari)는 소수자(minority)란 숫적(number)으로 적은 사람들이 아니라 힘 관계에서 약자인 사람들이라 정의한다. 한국의 장애인들 처럼 숫적으로나 힘 관계에서 약자인 소수자들이 대부분이기에 흔히 소수자는 숫적으로 적은 사람들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만델라가 감옥에 있던 시절 남아프리카의 소수자는 숫적으로 절대 다수였던 흑인이었다. 숫적으로는 많았으나 백인정부의 인종차별 정책에 의해 힘 관계에서 약자의 위치였다. 전세계 노동자들도 소수자들이다. 숫적으로는 압도적으로 많지만 자본과의 역학 관계에서 약자의 위치에 서기 때문이다. 채용비리 등으로 이른바 부패노조가 욕먹는 이유는 약자의 입장을 대변해야 할 이들이 자신들의 힘을 이용해 부당한 이득을 취하기 때문이다.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을 위해 싸워야 하는 이유도 이런 힘의 관계에서 가장 약할 수 밖에 없는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연대해야하기 때문이다. 자기들만의 이익을 위해 비정규직과의 연대를 거부하는 정규직 노조는 소수자운동을 할 자격이 없다. [소수자 생각 2] 계급과 분리된 소수자 운동의 비극은 이른바 선진국(고도 자본화 국가)의 중상층 페미니즘 운동과 미국의 라이스 국무장관으로 상징된다. 페미니즘 운동이 일정한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투표, 직업선택, 차별임금, 가정폭력, 한국의 호주제 문제 등에서 여성이 받았던 차별이 너무 명백히도 부당했기 때문이다. 고도 자본화 국가에서의 중상층 페미니즘은 어느 정도 여성차별이 없어지자 그 동력을 잃고 만다. 싸울 목적이 거의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보 페미니즘 운동가들은 싸움을 멈추지 않고 있다. 바로 이른바 제3세계(저 자본화 국가) 여성들이 겪고 있는 부당한 대우 때문이다. 이들이 저자본화 국가에서 여성들이 맞닥뜨리는 사회적 문제는 결국 국가들 사이의 계급 문제, 국내에서의 계급 및 성차별 문제다. 힘 관계에서 지구상에서 가장 약자일 수 밖에 없는 저자본화 국가들의 여성 문제는 결국 자본 문제, 지구 자원 및 지적 재산권의 독과점 문제 등의 주제를 벗어나 논의되기 힘들다. 그러나 고도 자본화 국가 중상층 페미니즘은 이런 문제를 회피하고 싶어한다. 관심을 보여봤자 저자본화 국가 여성들이 불쌍하다며 연민하며 약간의 모금 내지 경제적 지원 하는 정도다. 그거라도 하면 괜찮은 축에 속한다. 선진국 중상층 페미니스트들의 경제적 이해관계는 근본적으로 저자본화 국가 여성들과 대립된다. 그래서 그들의 운동은 명백히 한계가 보인다. 얼마전 호주제 폐지 소식에 만세를 부르던 인물 중에 이계경 한나라당 의원이 보였다. 호주제 폐지 정말 잘 한 일이다. 이계경 의원도 거기에 많은 노력을 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계경 페미니스트의 한계는 바로 거기까지다. 한나라당에서 무슨 자본의 문제, 계급의 문제를 논하겠는가. 바다 건너 미국의 라이스 국무장관은 소수자인 흑인이라도 열심히 노력하면 이렇게 성공할 수 있다는 상징이다. 킹 목사가 바랬던 세상, 흑인 아이와 백인 아이가 손잡고 사는 세상, 그 세상이 조금 오긴 왔는데 그 모양이 이상하다. 백인 아이였던 부시와 흑인 아이였던 라이스가 손잡고 정답게 이라크를 침공하고 아이티를 유린하고 베네수엘라를 위협한다. 제국의 깃발 아래 흑백이 모여 하는 짓이 정말 가관이다. 이것이 미국 흑인 소수자 인권 운동이 바랬던 것인가? 자국의 이익을 위해 흑백이 손잡고 힘 약한 나라의 힘 약한 민중들을 죽이고 그들의 삶을 어지럽게 하는 게 미국 흑인 소수자 운동의 목적이었는가? 그 어떤 소수자 운동도 일정 목표를 이뤘다고 해서 끝난 게 아니다. 목표 달성 후에 더 약한 위치의 소수자들을 외면하는 소수자 운동은 진정한 소수자 운동이라 부르기 힘들다. 가장 약한 위치에 있는 소수자들 문제를 어찌 자본 문제, 계급 문제와 분리할 수 있겠는가. <앞의 트랙백을 잘못 날렸네요 (리눅스 이렇게 생겼어요).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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