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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05/07
    만만한 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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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5/05/07
    OpenCourseWare MIT 강의자료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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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5/05/05
    옛 운동권은 모두 좌파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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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5/05/05
    자유주의 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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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5/04/28
    나이 선후배 계급놀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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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5/04/26
    백인도 유색인종, 아니면 투명인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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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만한 대중?

제임스 페트라스(James Petras)가 참세상에 보내 글 을 보다 보니 재미있는 구절이 하나 있다: 경제적 군사적 제국의 지도자들은 삶을 파괴하는 제국에 반대하는 것보다, 교황의 죽음과 마이클 잭슨의 아동성추행 재판, 월마트에서 쇼핑하고 깃발 흔들기에 관심있는 ‘대중’에게 공포를 느끼지 않는다. 교황의 죽음은 전세계 대중매체를 도배하다시피 하며 대중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한국은 덜하지만 미국의 대중매체들은 마이클 잭슨의 재판을 거의 매일 대대적으로 보도한다. 의제설정은 철저히 대중의 손에서 벗어나 있다. 식량이 남으면 공급초과로 세계 곡물가격이 떨어지고 다국적 식량회사의 이윤이 하락되기에 초과생산된 식량을 바다에 버리는 야만적 행위는 대중매체에 잘 나오지 않는다. 일년에 천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는다는 피맺힌 이야기도 잘 나오지 않는다. 1970년대 <자본주의 미국의 학교 교육: Schooling in Capitalist America> 이라는 책에서 주장된 내용은 여전히 유효하다. 자본주의 사회 학교는 여전히 자본주의 체제 순응형 인간을 양산하는 기능을 담당한다는. 북녘에서 김일성 김정일 체제 순응형 인간을 만들어 내듯. 자본주의나 스탈린주의(공산주의나 사회주의로 알려진) 체제하에서 주도권을 쥔 계급은 항상 수적으로 소수다. 수적으로 대다수인 사람들을 통제하긴 위한 방법은 수천년에 걸쳐 축적된 통치방법이 그대로 쓰인다. 세련되지 못한 방법은 공갈,협박,법을 이용한 탄압,암살,폭행 등이 있고 세련된 방법은 교육과 대중매체를 통한 통치계급의 이데올로기 확산, 생산수단이 없는 노동자들에 대한 고용불안 조성 및 노예적 노동 유도 (여기서 일하면 그나마 입에 풀칠 하지만 직장 없으면 굶어죽는다는 논리) 등이 있겠다. 이렇게 세련되거나 세련되지 못한 여러 방법을 통해 대중은 만만해진다. 만만해지길 거부하는 사람은 큰 결심을 강요받는다. 직장에서 쫓겨날 수도 있고, 부당해고된 뒤 재판을 걸면 재판이 이리저리 늦춰져 몇 년 걸릴 동안 글자그대로 쪽박 찰 수도 있고, 찍혀서 직장도 못 얻을 수 있고, 강의석의 종교자유 투쟁 돕다가 목사직, 교사직 반납할 수 밖에 없었던 유상태 전 목사처럼 어느날 갑자기 거리에서 리아카 행상을 해야만 되는 상황을 맞을 수도 있다 (계급투쟁은 고사하고 이렇게 자유주의 투쟁에도 생존권을 걸어야 한다). 오늘도 대중들은 누구나 다 만만해질 것 인가 아니면 거부할 것인가 하는 선택을 해야 한다. 만만해 지는 것이 오늘 하루 살기엔 사실 편한 길이라는 걸 대중은 안다. 내일은 모른다. 오늘 하루 편하기 위해 그냥 만만해 지기로 한다. 만만하길 거부하면 오늘 하루 살기가 힘들다. 통치자들은 이걸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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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enCourseWare MIT 강의자료 사이트

* 김명래님의 [교육은 누구에게나 접근가능해야 한다.: 대학강의를 인터넷 동영상으로 무상제공] 에 관련된 글.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개념을 가지고 만들지 않았지만 지식을 일반대중에게 별 조건없이 공개한다는 점에서 좀 유사한 프로젝트가 하나 있다. 몇년전 MIT 학부, 대학원 강의 자료를 인터넷에 공개한다는 프로젝트가 발표됐다. MIT OpenCourseWare 로 이름지어진 이 프로젝트를 오늘 다시 가보니 많은 과목 자료가 올라와 있다. 모든 학과, 모든 과목이 올라온 것은 아니지만 문과, 이과 골고루 볼만한 강의 자료들이 꽤 된다. 별도 등록절차도 필요없고 그냥 원하는 과목 자료 제한없이 볼 수 있다. 대학 강의자료는 구글 검색을 하면 여기저기서 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한군데에 정리해 놓고 무료로 공개시킨 사이트는 많지 않다. 단순히 강의자료만 올려놓은 것이기에 담당교수나 수강학생들과 토론을 할 수 없는 제한은 있으나 강의자료의 공개라는 점에서 의미있는 일이다. 트래백 건 김명래님의 글 의견처럼 강의내용을 동영상으로 인터넷에 올려놓으면 참 좋을 것 같다. 서버 용량이라든가 동영상 제작의 어려움 때문에 힘들다면 MIT처럼 강의자료라도 올려놓으면 좋겠다. 지식은 나눌수록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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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운동권은 모두 좌파였나?

* 간장 오타맨...님의 [눈물 훔치는 날들을 지나보내며....] 에 관련된 글.
사실 필자는 이게 궁금하다. 저 뉴라이트들은 이른바 '권력 386'들, 그리고 정치권 뿐 아니라 각계의 중추적 위치에서 활약하고 있다는 386들이 그들의 '좌파 사상'을 현실에 구현하고 있다고 정말 믿는 것일까. 필자는 이른바 386들이 현재 좌파이기는커녕 과거에도 좌파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80년대가 좌파가 되기엔 너무 바쁜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일주일에 2∼3회에 이르는 교내시위나 거리시위, 조직활동 등으로 독재정권에 저항하는데도 너무 바빠서 20여 년 후까지 고이 간직할 좌파 사상 따위는 제대로 학습하지도 못했다. 또 술은 얼마나 먹어댔던가. 물론 속성으로 번역된 소련의 맑스레닌주의 교과서들이 유행하고, 어떤 이들은 북한 방송을 녹취해서 읽어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세상엔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 두 계급 밖에 없다'는 레닌의 '명언'을 외우고 다닌다고 해서 볼셰비키가 될 수는 없는 법이다. 원문: 사상 투쟁하자는 '486 뉴라이트':'80년대'의 사상투쟁을 다시 벌이자고? - 말 이종태 기자 필자는 다른 글에서 "386들이 현재 좌파이기는커녕 과거에도 좌파는 아니었다"며 그 이유로 "80년대가 좌파가 되기엔 너무 바쁜 시절이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사실 좌파가 된다는 것은 윤리적 결단 이외에도 인문학, 경제학, 철학 등에 대한 밀도 높은 학습을 포괄하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1980년대의 학생들은 조직 활동과 시위준비만으로도 너무 바빴다. 20여년이 흐른 2000년대 초반, 권력의 심장부에 '침투'해서 은밀히 추진할 '좌파혁명 장기 프로젝트' 따위를 마련할 여유도 능력도 없었다는 이야기다. 유감스런 일이지만 '386'은 장미십자단이 될 수 없는 집단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 당선 이후 본격적으로 권력에 진출한 386들이 실제로(!) 이뤄낸 것은 좌파적 변혁이 아니라 '우파 혁명'(신지호 자유주의연대 대표가 이제야 비로소 주장하고 있는) 혹은 '자유주의 혁명'이었던 것이다. 원문: 한국의 '자유주의 우파 혁명'과 뉴라이트: 뉴라이트보다 뉴레프트가 필요하다 - 말 이종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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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 학자

학자로서 장수하려면 자유주의 학자만큼 좋은 것이 없다. 보수 학계의 이야기도 집어 넣고 진보 학계의 이야기도 귀기울인다. 공정성이란 이름 하에 보수, 진보 담론을 균형있게 분석한다. 보수 학자들한테서는 비록 [진보적]이긴 하지만 보수 이야기를 아는 균형있는 학자 대우를 받고 진보 학자들한테서는 비록 [보수적]이긴 하지만 진보 이야기도 넣어줄 수 있는 학자 대접을 받는다. 그리고 끊임없는 분석의 세계에서 안주한다. 문제점을 제기하고, 싸우고, 때론 일인 시위도 하고 길거리에 나서는 일은 일부 현실 실천형 진보 학자 몫이다. 그 문제점이 어떤 결론을 맺으면 자유주의 학자는 젊잖게 분석의 펜을 든다. 그러나 한가지 그들이 못하는 것이 있다. 그들은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그저 끊임없이 주석과 해석을 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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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선후배 계급놀이

아직도 풀리지 않는 궁금증이 하나 있다. 김하늘: 1988년 3월 31일 생 이보람: 1988년 12월 31일 생 박가람: 1989년 3월 31일 생 같은 동네에 사는 세 사람이 같은 고등학교에 다닌다. 김하늘과 이보람은 2학년 친구이고, 박가람은 두 사람의 1학년 후배이다. 단지 한 학년 낮다는 이유로 박가람은 두 선배를 깍듯이 모시고 존대말을 쓴다. 가만히 보면 아주 불합리하다. 김하늘과 이보람은 9개월 차이인데 친구이고 이보람과 박가람은 3개월 차이인데 하늘과 땅같은 선후배 사이다. 일종의 계급놀이다. 이들이 졸업하면 상황은 더 복잡해진다. 직장에 다니게 되면 나이가 훨씬 적은 직장 선배도 만날 수 있고 거꾸로 나이가 훨씬 많은 직장 후배도 있을 수 있다. 군대나 대학에 가게 되면 비슷한 일이 있을 수 있다. 언제부턴가 이런 나이 놀이, 선후배 놀이가 싫증났다. 단순히 생물학적 나이가 많다고 선배 대접받는 일이 부담스러워 졌고 나이가 적다고 아랫것 취급당하는 일도 뭐해 졌다. 나이가 많거나 어리거나 가리지 않고 존대말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가끔 나이 어린 사람들이 자꾸 말을 "까라고" 한다. 말을 안 "까면" 친근해지기 힘들다고 한다. 만나자마자 내 나이가 적거나 나이가 같으니 말 "까겠다"고 하는 사람도 종종 있다. 아주 친해지면 선후배 가릴것 없이 서로가 말을 편하게 하고 지낸다. 그 친근점에 도달하기 까지, 서로가 별 다를 바 없는 사람이라는 감정을 나누기 전까지는 계급 놀이는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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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도 유색인종, 아니면 투명인간?

흔히 아무 생각없이 쓰는 말 중의 하나가 유색인종이라는 말이다. 구글에서 people of color (유색인종), students of color (유색인종 학생), women of color (유색인종 여성) 찾아보면 그 쓰임이 엄청나다. 촘스키(Chomsky) 같은 진보 지식인도 수많은 진보 매체도 (한국, 영어권 모두) 이 말을 그냥 쓴다. 곰곰히 생각해보자. 그럼 유색인종과 대비되는 말은 무엇인가? 그래, 그거, 바로 무색인종! 투명인간이다! 그러나 레슬리 로만(Leslie Roman)이 말했듯이 "흰색은 색깔이다!" ("What is a color!") 아이들 크레파스통을 보더라도 흰색은 색깔이다. 사전을 보더라도 흰색은 색으로 분류된다. 그렇다. 백인종도 유색인종이다! 흔히 백인이라고 불리는 인종도 피부색을 자세히 보면 흰색이 아니다. 흰색보다는 옅은 베이지 색에 가깝고 백인들 사이에서도 피부 농도는 천차만별이다. 그래서 코카시안(Caucasian)이 적당할 듯 한데 워낙 말의 관습이라는게 강하다. 3대 인종이라 하는 코카시안, 아시안(Asian), 아프리칸(African) 인종 구분에 정확히 들어맞지 않는 사람들이나 여러 인종의 모습을 지닌 사람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 미국흑인(Afro-American) 보더라도 완전히 아프리카 계통의 피부를 지닌 사람은 많지 않다. 백인, 아메리카 원주민, 아시안과 결합하면서 피부색이 옅은 미국흑인이 늘어나고 있다. 타이거 우즈(Tiger Woods)같이 스스로를 아프리칸-아시안-미국인(Afro-Asian-American)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인종에 민감해진 것은 단순히 피부색으로 사람을 식별하고자 하는 시각적 이유가 아니다. 시각적 식별 목적 이외에 왜 굳이 피부색을 말해야 되는가? 그건 인종이란 테두리로 얽힌 차별과 권력의 문제 때문이다. 한국 영어학원에서 코케시안 원어민 강사에게 그렇지 않은 원어민 강사(아프리칸 및 아시안 계통 북미 출신 강사 등)보다 더 좋은 대우를 해 주는 것 (오로지 피부색 이유로). 한국 영어학원 수강생들이 코케시안 원어민 강사를 더 선호하는 것 (오로지 피부색 이유로). 한국 출입국관리소에서 피부색 짙은 동남아시아 출신 이주노동자들은 철저히 통제하면서 관광비자로 취업하고 있는 코케시안 원어민 영어강사는 별로 통제하지 않는 것. 대충 인종을 피부색 농도에 따라 4등급 (코케시안 -> 한국/일본/중국출신 아시안 -> 동남 아시안 -> 아프리칸) 해 놓고 사는 관습이 무서운 거다. 참고: Roman, Leslie G. (1993). White is a color!: White defensiveness, postmodernism, and antiracist pedagogy," (pp. 279 - 378). In Cameron McCarthy and Warren Chrichlow (Eds.), Race, identity, and representation. New York, NY, USA: Routledge. 기사원문 * 이 글은 간장 오타맨...님의 [우리를 '불법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들] 에 관련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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