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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불법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들

  • 등록일
    2005/04/25 15:46
  • 수정일
    2005/04/25 15:46
어머니 죽음에도 돈을 벌어야 했던 어느 이주노동자의 이야기 최백순 기자 redsqure@dreamwiz.com 1998년 나는 방글라데시의 다카 국제공항에서 가족들의 슬픈 배웅을 받으며 브로커와 함께 서울에 가기 위해 먼저 홍콩으로 출발했다. 비자가 없는 빈 여권을 들고 그렇게까지 멀리 가보기는 처음이었다. 내 가족은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열한 명의 형제로 이루어져 있다. 신장이 안 좋으신 어머니는 곧 수술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해서 가족을 부양하고 어머니를 수술시켜 드리고 싶었지만, 막상 졸업을 하고 보니 마땅한 일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한국 돈으로 10만 원 정도의 월급을 받을 수 있는 회사에 취직을 하자니, 그 돈으로는 수술은커녕 한 달에 30만 원이 들어가는 정기적인 치료조차 불가능했다. 한국행을 결심한 이유 이런 상황 속에서 나는 브로커를 통해 한국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비용은 약 700만 원. 브로커는 처음에 나를 홍콩으로 보냈다. 우리는 홍콩에서 일주일을 체제한 후 한국으로 들어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브로커가 사정이 여의치 않다며 나를 먼저 중국으로 보냈다. 그 후 약 3개월 동안 나는 탁구공처럼 홍콩과 중국을 10번 정도 오가게 되었다. 이러는 동안 돈은 다 떨어지고 전화도 제대로 걸지 못하며 하루에 한 끼만 먹는 날이 계속 이어졌다. 3개월 후에 돌아온 브로커는 이제 한국에 갈 수 있게 되었다며 마치 비즈니스맨처럼 나에게 양복을 사 입혔다. 그리고 우리는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하지만 서류가 가짜라는 것이 그만 들통이 나고 말았다. 몇 명의 덩치 좋은 출입국 직원들이 나를 위협하며 출국 관련 서류에 서명하라고 다그쳤다. 결국 서명을 하게 된 나는 김포공항에 있는 보호소에서 며칠을 고생하다 방글라데시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렇게 한국행은 어이없는 실패로 끝났지만 브로커에게 준 돈을 다시 돌려받지는 못했다. 한 달 후에 다시 다른 브로커를 통해 한국행을 감행했다. 이번에는 중국에서 했던 고생이 무색하리만큼 너무도 쉽게 출입국 절차를 통과할 수 있었다. 그 방글라데시 브로커와 몇몇 출입국 관리 직원들 사이에 커넥션이 있었기 때문에 쉽게 통과되었는 걸 나중에 알게 됐다. 한국에 들어온 후 내 생활은 거의 노예의 생활과 다름없었다. 하루에 12시간 야간과 주간을 바꿔가면서 일한 월급이 식비 합쳐서 65만 원. 너무나 힘들었지만 아픈 어머니를 생각하면 그만둘 수가 없었다. 그런데 6 개월 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되었다. 어머니가 그만 돌아가셨다. 슬 픔을 견딜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당장에라도 방글라데시에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한국에 오기 위해 빌렸던 돈을 갚기 위해, 또다른 가족들의 생계를 생각해서 어쩔 수 없이 눌러앉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술만 마시면 그때의 고통과 슬픔이 밀려들어 와 내 자신을 주체하기가 힘들다. 이렇게 한국에 와서 생활한 지 5년. 그 동안 못사는 나라의 외국인으로 차별을 온 몸으로 받으면서도 “차별”이라 이름붙일 수 없었던 것들에 대해, 더 이상 눈치 보지 말고 좀더 솔직히 그리고 좀더 과감히 이야기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 이 글을 쓴다. “저 사람은 미국인이 아니고 외국인이야” 한국은 못 사는 아시아의 나라에서 온 나에게 그리 친절하지 않았다. 얼굴이 검고 한국말을 잘 하지 못한다며 무시하고 차별하는 것은 그래도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없는 것이 나에게는 가장 힘들었다. 예를 들어, 한 달에 한번 회식을 갖게 되면 어김없이 삼겹살집을 가게 되는데, 한국인 사장과 동료들은 이슬람 문화에서 자란 나에게 돼지고기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돼지고기가 피를 맑게 해준다며 마구 강권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돼지고기를 다른 고기라고 속여서 나에게 먹였다. 돼지고기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눈물이 찔끔 나도록 한참 토한 적도 있었다. 한국말을 전혀 몰랐기 때문에 당한 수모도 많았다. 대부분의 다른 이주노동자들도 그러하듯, 한국말을 배우는 것은 낯선 언어에 대한 동경이라기보다 살아남기 위한 일종의 몸부림이었다. 처음에 한국어를 몰라 영어로 이야기하면 한국인 사장이나 동료들로부터 엄청난 욕설들이 날아왔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유럽이나 미국, 캐나다 등지에서 온 이주노동자들(미군 혹은 영어교사들)이 영어로 말을 걸어오면 한국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얼굴을 붉히며 수줍어하거나, 영어를 좀 하는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대답해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 한국어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길에서 만난 사람들이 “어, 한국말 잘 하시네요”하면 어깨가 으쓱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5년이 지난 지금은 “한국말 참 잘하시네요”하는 말이 귀찮기 이를 데 없다. 택시를 타건, 지하철을 타건, 시장에서 물건을 사건, 친구와 함께 술을 마시러 가건, 귀에 못이 박히게 듣는 말이 이 말이다. 택시 기사들도 백이면 백 내가 한국인 동료나 친구와 한국말로 대화를 하고 있으면 백미러로 날 힐끔 한번 쳐다보고는 “한국말 참 잘하시네요. 어느 나라에서 오셨어요”하고 묻기 일쑤다. 그러면 나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한국인이에요. 좀 탔죠?” 하고 대답한다. 그만큼 한국은 단일한 언어와 단일한 문화 속에 사로잡혀 있다. 또 한 번은 길을 걸어가는데, 엄마와 걸어가고 있던 한 아이가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엄마, 미국인이야!”하고 소리쳤다. 그러자 아이의 엄마는 “저 사람은 미국인이 아니라 외국인이야”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마치 한국에 사는 사람들의 종류가 한국인, 미국인, 외국인 이렇게 딱 세 가지인 듯이 말이다. ‘우리 한국인’과 ‘불쌍한 그들’ 게다가 한국의 주류 미디어는 이주노동자의 차별을 더욱 심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조·중·동은 말할 것도 없다. 심지어 이주노동자들의 존재에 대해서 호의적이라는 신문과 방송 매체들도 이주노동자를 다루는 방식은 대략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이주노동자를 동정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스갯거리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전자로 대표적인 사례가 MBC의 「아시아, 아시아」나 「느낌표」같은 프로그램이다. 한번은 「아시아, 아시아」에서 가족들과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한 이주노동자에게 가족을 한국으로 초대해서 만나게 해주는 감동적인 장면이 연출된 적이 있다. 시청자들의 눈물샘을 쏙 뽑아내는 이 방송은 비록 많은 이주노동자들을 울리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시청자들 스스로가 불쌍한 ‘그들’에게 ‘우리 한국인’이 무언가를 해주고 있다는 자족감과 우월감을 갖게 하면서 차별의 현실과 시스템을 은폐하고 부인하게끔 유도하는 역할을 한다. 지금은 다소 그 인기가 주춤한 ‘블랑카’ 역시, 한국이 한국 스스로를 코믹하게 비추어보는 거울의 역할로 이주노동자의 존재를 끌어들였을 뿐, 이주노동자의 현실 그 자체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또, 정부와 방송 3사는 이주노동자를 ‘외국인 근로자’로 지칭하길 계속 고집한다. 특히 미등록일 경우, 미등록이 아닌 ‘불법’으로 불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늘 주류 언론에 미등록 이주노동자는 ‘불법 외국인 근로자’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게 된다. 근로자란 단어는 노동자의 노동자성(노동자의 권리)을 어떻게든 탈각시키고 단순히 일하는 책임만을 강조하는 용어로 박정희 시절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고 있다. ‘외국인’이란 말도 ‘한국인이 아니’라는, 다분히 부정적이고 배타적인 용어이다. 반면 ‘이주민’이란, 말 그대로 ‘이동’에 강조를 둔 말이다. ‘이주민’은 한국 밖에서 한국으로 이주 해왔다는 좁은 의미뿐 아니라, 한국 내에서도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주했다는 광의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즉, 예전에 각 지방에서 서울로 돈을 벌기 위해 상경한 대다수의 서울 시민들도 사실은 이 광의의 ‘이주민’에 속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불법’이라는 용어이다. 보통 합법이니 불법이니 하는 말은 특정 행위로 법을 위반했는지 여부를 가리는 말이다. 하지만 ‘불법 외국인 근로자’라는 말에서 ‘불법’은 사람의 존재 자체를 ‘합법이냐 불법이냐’로 규정하기 때문에 ‘미등록’으로 고쳐 불러야 마땅하다. 법을 어긴 사람을 우리는 ‘불법 사람’이라고 하지 않는다. 합법적 결혼에 의하지 않고 태어난 아기를 우리는 ‘불법 아기’라고 부르지 않는다. 또 ‘불법’이라는 말의 문제는 단지 용어문제에서 끝나지 않는다. ‘불법’이란 용어는 출입국관리소가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을 범죄자처럼 단속하고 수감하고 강제출국 시킬 때, 그들의 인권을 침해하고 부정하는 구실로 작용한다. ‘불법 사람’과 인간의 존엄성 작년에 시행된 고용허가제에 따르면 이주노동자가 ‘불법 사람’이 아닌 ‘합법 사람’으로 존재할 수 있는 기간은 최고 3년이다. 그것도 고용주가 1년마다 꼬박꼬박 계약을 갱신해 줘야 하는 조건하에서 그렇다. 또 작업장을 마음대로 이동할 수 있는 자유가 없기 때문에, 임금이 체불되거나, 근로조건이 나빠서 공장을 옮기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순전히 고용주의 입장만을 담고 있는 이런 고용허가제 아래에서 이주노동자가 3년을 ‘합법 사람’으로 남아 있을 확률은 매우 희박하다. 또 법적으로 5년 이상을 합법적으로 체류하게 되면 영주권이 주어지는 제도가 한국에도 있다. 그러나 고용허가제상 3년밖에 체류가 허용되지 않는 이주노동자들에게 영주권이란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다. 그렇다면 한국 정부는 왜 이주노동자를 어쩔 수 없이 ‘불법 사람’으로 만드는 제도와 시스템을 계속 유지하려는 것일까. 그것은 결국 싼 값에 노동자를 쓰고 버리기 위한 전략이다. ‘불법’ 상태에서 그들의 약점을 이용해서 싼 값에 부리는 것뿐만 아니라, 주기적으로 새로운 이주노동자로 물갈이 하면서 임금을 계속 낮은 수준으로 유지하고, 이주노동자들의 단결투쟁과 공동체 형성을 저지하려는 정책의 일환일 것이다. 종종 이런 소릴 듣는다. 3년만 벌어도 고국에 가면 큰돈이 될 텐데 무슨 욕심이 남아 그렇게 차별받으면서 한국에서 일하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이주노동자들은 브로커를 통해 한국에 들어왔다. 적게는 700만~800만 원, 많게는 1500만원 정도의 브로커 비용을 충당하는 데만도 2년 이상이 걸린다. 이런 현실 속에서 빚만 갚고 한국을 떠나기란 쉽지 않다. 정부에서는 불법 브로커들을 없애고 고용허가제 하에 모든 것을 투명하고 공정하게 운영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불법 브로커뿐만 아니라 각 나라의 공식적인 소개 기관조차도 거액의 돈을 받고 이주노동자들을 공급하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정부의 발표는 기만술에 불과하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주류 미디어는, 이주노동자들이 한국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이유로 미등록이주노동자들에 대한 단속 추방에 대해 침묵하거나 지지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주노동자들이 일하는 곳은 한국인들이 기피하는 3D 업종이다. 이주노동자들이 없다면 이미 공장 문을 닫았을 영세 제조업에 그동안 우리들은 묵묵히 일해 왔다. 요즈음은 공장지역 뿐만 아니라 농촌 지역에서도 농사지을 인력이 없어 이주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실정이다. 밑바닥 이주 노동자의 노동 없이 과연 한국 경제가 돌아갈 수 있을지도 정말 의문이다. 결국 이주 노동자들이 한국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빼앗고 있다는 주류 미디어들의 터무니없는 거짓말은 아까도 말했듯, 어떻게든 이주노동자를 사람들의 차별 속에 몰아넣어 그들의 권리와 목소리를 빼앗기 위한 것이다. 차별을 없애기 위한 첫걸음 이러 저러한 미디어의 내용과 표현방식은 둘째치고서라도, 이주노동자들에게는 미디어에 접근하고 참여하는 것 자체가 제한되어 있다. 이주노동자의 현실과 권리를 제대로 알리는 일이 쉽지 않다는 이야기다. 미국인 등 영어를 사용하는 외국인들에게는 AFKN, 케이블 TV, 위성방송, 영어잡지, 신문 등 다양한 미디어들이 열려 있는 반면, 한국에 있는 외국인들의 70~80 퍼센트를 차지하는 45만 이주노동자들에게는 라디오 주파수 하나, TV채널 하나 주어지지 않고 있다. 우리는 자국어로 된 철 지난 잡지를 몇 번이고 반복해 읽어야 할 만큼 매체와 정보에 목말라있다. 이런 전체 이주노동자들의 공통된 상황과 권리를 알리는 목적뿐만 아니라, 97개 나라의 다양한 문화에서 온 다양한 공동체문화를 활성화하는 데 있어서도 소출력 공동체 라디오나 인터넷 미디어 공동체 만들기 같은 이주노동자들의 미디어 참여는 매우 중요하다. 각국의 언어로 된 크고 작은 미디어 활동은 한국의 획일화된 문화에 다양성을 불어넣어줄 수 있는 계기로도 작용할 수 있다. 이주노동자가 한국에 처음 들어온 지 17년. 이제 우리들은 이 사회의 한 부분을 구성하고 있다. 이제 잠깐 왔다 가는 이방인의 존재가 아닌, 이 땅에 한국인들과 살아 숨쉬는 존재로서 한국 정부와 시민들이 우리를 받아들여 주길 간절히 기원한다. 2005년 04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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