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현대차 비정규직노조 '일백일간의 기록'

  • 등록일
    2005/04/25 15:48
  • 수정일
    2005/04/25 15:48
현대차 비정규직노조 '일백일간의 기록' 89명 해고, 116명 고소, 멈추지 않는 백화점식 노동탄압 최백순 기자 redsqure@dreamwiz.com (양준석 울산노동자신문 대표) 전 세계의 내로라하는 기업들을 제치고 세계 6위 자동차 생산업체로 발돋움한 현대자동차. 머나먼 꿈처럼 여겨지던 GT-5(Global Top 5) 달성이 어느덧 눈앞에서 어른거린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현대자동차 안엔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요구하며 절규하는 노동자들이 있다.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불법파견 판정에 따른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지금 투쟁중이다. 거대한 공장의 규모에 비해, 투쟁에 나선 노동자들의 수는 아직 많지 않다. 그러나 이들의 투쟁은 마치 군사정권의 온갖 탄압을 견뎌 내면서 마침내 87년 대투쟁의 물길을 터냈던 1970~80년대의 선도적인 노동자 투쟁들을 연상시키고 있다. 불법파견 판정받은 현대자동차의 비정규직 노동자들 지난해 말 노동부는 울산·아산·전주 등 현대자동차의 국내 생산공장 세 곳에 있는 127개 사내하청 업체에 대해 ‘도급을 위장한 불법파견’으로 판정했다. 제조업 직접생산 공정엔 파견 노동자를 사용할 수 없도록 되어 있음에도, 현대자동차가 이들 사내하청 업체들을 통해 대규모의 불법파견을 저질러 왔다는 것이다. 해당 업체에 소속된 노동자 수는 무려 1만 여명이었다. 사실상 원청업체인 현대차로부터 업무지시를 받으며, 정규직과 섞여 일하는 불법파견 노동자들. 이들은 마땅히 정규직으로 고용되었어야 하지만 현대자동차의 불법적 인력운영으로 인해 비정규직이 된 사람들이다. 현재까지 불법파견 판정을 받은 비정규직은 직접생산 공정에서 일하는 전체 비정규직의 80% 정도에 해당한다. 사내하청 가운데 이른바 1차 하청이 전원 불법파견 판정을 받은 상태고, 사외 협력업체의 하도급이라는 계약형식을 가진 이른바 2·3차 하청 노동자 2천여 명도 불법파견 추가 진정을 추진하고 있다. 그럼 현대자동차의 비정규직 비율과 규모는 얼마나 될까? 현대자동차의 정규직 종업원 5만여 명 가운데 직접생산 공정에서 일하는 ‘생산직’은 2만 4천~5천명 수준이다. 결국 현대자동차를 직접 생산하는 노동자 가운데 대략 30% 정도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인 셈이다. 직접생산 공정 외 식당·경비 등 간접지원 업무에 종사하는 인원까지 포함하면, 현대자동차의 사내 비정규직 규모는 1만 5천여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은 평균임금 기준으로 동일근속 정규직의 60% 수준이다. 정규직의 생산직 평균과 비교하면 45% 정도밖에 안 된다. 기본 시급은 법정 최저임금을 약간 웃도는 정도다. 이조차도 비정규직노조가 설립된 2003년 이후 2년간 다소나마 개선된 결과다. 그 이전에는 법정 최저임금에 턱걸이하거나 심지어 그조차 못 받는 경우도 있었다. 정규직이 쫓겨난 자리에 비정규직 투입 IMF 이전에도 현대자동차에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 규모가 그렇게 크지 않았고, 또한 정규직과 차별이 심하지도 않았다. 현대자동차에 지금처럼 비정규직(사내하청) 노동자가 대규모로 투입된 것은 2000년 6월 정규직 노사간에 ‘완전고용합의서’라는 이름 아래 사내하청 투입을 합의하면서부터다. IMF를 맞아 일시적인 내수판매 부진으로 적자를 내게 되자, 현대자동차는 1997~98년에 걸쳐 1만 명 이상의 노동자들을 길거리로 내쫓는다. 당시 4천여 명으로 추산되던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소리 소문 없이 먼저 쫓겨났고, 정리해고의 실제 적용을 둘러싼 총노동과 총자본의 대리전이었던 1998년의 고용조정 사태를 겪으면서 8천여 명이 희망(?)퇴직과 정리해고로 쫓겨났다. 2000년에 접어들어 내수판매가 급격히 호전되자 현대자동차는 생산직 노동자들을 다시 충원하기로 했다. 단 값싸고 언제든 내쫓을 수 있는 비정규직(사내하청)을 원한 회사는 노조를 교묘하게 유혹한다. “(정규직) 조합원의 고용을 보장할 테니, 부족한 인원을 사내하청으로 투입하는 데 합의해 달라. 사내하청이 들어오면 정규직 고용보장의 방패막이 될 것이다.” 1998년의 대접전에서 결국 정리해고를 수용함으로써 패배의 상처를 깊게 안은 노조는 회사의 달콤한 유혹을 거부하지 못한다. 노동자 계급의 대의를 저버린 ‘합의서’를 움켜쥔 회사는 무차별적으로 사내하청을 현장 곳곳에 투입했다. 그리고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현재 규모의 비정규직(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생산 현장 곳곳에 자리 잡게 되었다. 정규직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 임금, 작업복·안전화 같은 것들에마저 적용되는 온갖 차별, 산재는 엄두도 못 내고 월차 한번 마음 놓고 쓰지 못하는 억압, 심지어 수시로 욕설과 반말이 횡행하는 비인간적 대우. 게다가 정규직 노동자들과 완전히 섞여 일하면서도 상대적으로 힘들고 어려운 공정을 떠맡느라 겪어야 하는 노동강도에서의 차별···. 정규직이 쫓겨난 자리에 투입된 현대자동차 비정규직의 처지는, 왜 총자본이 1990년대 후반에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를 법제화하기 위해 그렇게 총공세를 펼치고 ‘난리 블루스’를 떨었는지 설명해 주는 또 하나의 훌륭한 교범이었다. 노조 설립에서 불법파견 판정까지 - 당당하게 살아남은 비정규직 노조 2003년 3월 현대자동차 아산공장의 비정규직(사내하청) 노동자 송성훈씨가 소속 업체 관리자로부터 아킬레스건을 절단당하는 ‘식칼 테러’를 당한다. 업체 규정대로 5일 전 월차사용 신청을 했으나 거부당하자 항의를 했다가 관리자에게 심하게 얻어맞고 병원에 입원했는데, 이를 ‘비정규직 주제에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반항’이라고 느낀 관리자가 깡패 두 사람을 데리고 병실을 찾아와 식칼로 아킬레스건을 세 번이나 그어버린 것이다. ‘식칼테러’의 충격은, 최소한의 인간적 대우조차 받지 못한 채 3년여의 세월 동안 그저 숨죽이고 살아가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마침내 떨쳐 일어서게 만들었다. 아산공장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곧바로 파업에 들어갔고, 당황한 현대자동차는 해당 업체 계약해지 및 소속 노동자 전원의 신규업체 고용승계를 약속했다. 일주일 후 아산공장 노동자들은 ‘금속노조 현자아산사내하청지회’라는 이름으로 노조를 설립했다. 아산공장의 사건들은 현대자동차의 주력 생산거점인 울산공장에도 바로 영향을 미쳤다. 한 달 후 울산공장에서도 ‘비정규직투쟁위원회’(비투위)가 공개적으로 설립되고, 다시 두 달 후인 7월초 ‘현대자동차비정규직노동조합’이라는 이름으로 노조가 설립되었다. 전주공장에서도 지난해 2004년 5월 ‘하청노동자연대투쟁위원회’를 설립한데 이어 지난 2월엔 ‘금속노조 현자전주사내하청지회’라는 이름으로 노조를 설립했다. 이로써 울산·아산·전주 등 현대자동차의 국내 생산공장 세 곳 모두에서 비정규직 노조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비정규직 노조의 운명은 너무나 고달팠다. 기본적으로 현대자동차가 비정규직 노조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가운데, 해고와 구속을 비롯한 무수한 탄압을 십자포화로 쏟아 부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수동성과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함에 따라 그 결집력이 아직 미약했다. 정규직 노조의 지원과·연대가 없지는 않았으나 한계 또한 분명했다. 비정규직 노조의 하루하루는 그야말로 생존을 둘러싼 투쟁의 연속이었다. 그 러나 비정규직 노조는 쉽사리 무너지지 않았다. 온갖 탄압과 악조건들을 과감하고 끈질긴 투쟁들로 돌파하면서 당당하게 살아남았다. 그렇게 1년을 넘어서면서 이젠 의미 있는 성과와 승리들을 하나씩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지난해 7월에는 정규직 노조의 임금투쟁이 종결된 이후 비정규직 노조가 독자파업과 철탑농성 끝에 이른바 2·3차 하청 노동자들에 대한 ‘사내하청 처우개선’ 동일 적용을 쟁취해 냈다. 정규직 노조가 “회사의 완강한 반대로 불가능하다”며 포기했던 목표를 독자 투쟁으로 달성해 낸 것이다. 곧 이어 5공장에서 비정규직 노조 무력화를 노린 정리해고가 단행되자 안기호 위원장의 “정말로 목숨을 걸었던” 38일 단식을 비롯한 두 달여의 투쟁을 통해 복직을 쟁취해 내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1년여에 걸친 치밀한 준비와 대응 끝에 “현대자동차 사내하청은 불법파견”이라는 노동부의 판정을 끌어냄으로써 비정규직 대중의 움츠린 가슴에 자신감과 확신을 불어넣으며 바야흐로 비정규직 투쟁을 본격적인 대중적 투쟁으로 발전시켜 나갈 유력한 발판을 마련해 냈다. 현대차 앞에서 무력한 노동부 지난해 9월부터 12월 16일까지 세 차례에 걸쳐 127개 업체 1만여 명에 대한 불법파견 판정을 받아낸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1월 중하순에 총력투쟁을 펼치기로 계획한다. 어렵사리 불법파견 판정을 얻어냈지만, 자칫하면 제대로 쟁점화도 되지 않은 채 묻혀버릴 조짐이 농후해졌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불법파견 판정을 내린 노동부가 현대자동차에게 불법파견 시정 지시를 내리면서 정규직화 및 직접고용을 명시하지 않음으로써 도망갈 출구를 열어주었다. 노동부는 그동안 금호타이어 등에 대해 불법파견 판정을 내릴 때 ‘원청이 직접고용하도록’ 명시적인 시정지시를 해 왔다. 또한 ‘2년 이상 파견노동자로 일하면 원청에 직접 고용된 것으로 자동간주’하는 파견법상 조항이 불법파견에도 적용된다는 게 노동부의 공식적인 유권해석이다. 전후 사정을 놓고 볼 때, 노동부가 현대자동차의 경우에만 정규직화 및 직접고용을 명시하지 않은 것은 고의적인 누락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불법해소를 위한 개선계획서를 제출하라”는 노동부의 두루뭉실한 지시를 받은 현대자동차는 공정재배치를 통해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작업 혼재’를 해소함으로써 불법을 해소하겠다는, 이른바 ‘진성도급 전환’을 핵심으로 하는 개선계획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무려 1만 명의 사내하청 노동자들, 마땅히 정규직이 되어야 했으나 현대자동차의 불법행위로 비정규직이 되어버린, 그러나 노동부라는 국가기관의 불법파견 판정으로 사실상 정규직으로서의 법적 지위를 획득한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정규직화 내지 직접고용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현대자동차가 제출한 개선계획서는 실현가능성이 전혀 없는 방안이었다. 이 계획서에 따르면 정규직 또한 대대적인 공정 재배치를 감수해야 하는데, 이는 정규직 노조와 조합원들의 동의 없이는 전혀 이루어질 수 없거니와 결코 동의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진성도급 전환이 ‘실현가능성 제로’라는 사실을 현대자동차도 잘 알고 있다는 점이다. 애초에 노동부의 불법파견 판정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대법원의 확정 판결이 나야 받아들이겠다는 게 현대자동차의 공공연한 입장이다. 이른바 ‘개선계획서’는 노동부의 시정 지시에 대응하는 요식절차로 아무렇게나 끄적거린, 어떤 진정성도 없이 국가기관을 기망하는 문서일 뿐인 것이다. 그러나 엉터리 개선계획서를 받아든 노동부는 현대자동차를 불법파견 혐의로 동부경찰서에 고발하는 것으로 자신의 할 일을 마무리 지어 버렸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그조차도 형식적인 고발장만 제출했다가 두 달이 지나서야 겨우 관련 자료를 경찰에 제출한 것이 ‘노동기본권실현 국회의원연구모임’ 소속 단병호·조승수·김영주 의원 등이 3월 14일 발표한 진상조사 결과에서 밝혀졌다.) 도대체 고발 이외에 노동부가 할 수 있는 일이 왜 없다는 것인가? 간단한 방법으로, 불법 판정을 무시한 채 불법행위를 지속하고 있는 현대자동차의 경영진을 구속 수사해 달라고 검찰에 품신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게 아니라 간단하게 가능한 일도 일부러 안하고 있는 것이다. 비정규직들이 현대자동차 생산라인을 멈추다 이처럼 ‘알맹이 빠진 시정 지시 → 엉터리 개선계획서 제출 → 형식적 고발로 사태 종결’의 짜고 치는 듯한 수순이 전개되는 가운데, 1월 12일 현대자동차가 제출한 세 번째 마지막 개선계획서마저 이전과 마찬가지로 ‘말도 안되는’ 내용으로 일관하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정규직 노조가 준비부족을 이유로 당장은 공동투쟁에 나설 수 없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더 이상 정규직 노조의 준비완료를 기다리고 있을 수 없었다. 결국 울산의 비정규직 노조는 1월 20일부터 잔업거부를 포함한 생산타격 투쟁에 돌입하기로 했다. 비정규직 스스로의 강력한 투쟁으로 불법파견 문제를 최대한 쟁점화 시켜야만, 불법파견 판정 이후에도 아무런 변화가 없는 답답한 현실에 그나마 숨통이 트일 것이라는 절박함이었다. 1월 20일로 예정된 비정규직 노조의 잔업거부 투쟁이 다가오자 현대자동차와 사내하청 업체들은 미리부터 대체인력 투입을 준비했다. 특히 5공장 도장부의 경우 비정규직 노조가 상당한 조직력을 확보하여 라인을 완전 정지시킬 게 분명해 보이자, 원하청 사측은 14일부터 예비 대체인력을 생산라인에 투입하기 시작했다. 15일 대체인력 철수를 요구하는 1시간 작업거부 투쟁으로 예비 대체인력을 철수시키고 나자, 사측은 이를 주도한 정영미 비정규직 노조 대의원을 17일자로 해고했다. 20일이 미처 오기도 전에 비정규직 노조와 현대자동차 사이의 긴장이 가파르게 치솟아 오른 것이다. 18일 오전 8시 주간조 출근과 동시에 비정규직 노조는 “불법파견 정규직화! 불법대체인력 철수! 비정규직 노조 인정!” 등을 요구하며 5공장에서 전격적으로 파업투쟁에 돌입했다. 도장부 및 의장부 비정규직 120여명의 탈의실 점거농성으로 시작된 파업은 곧바로 5공장 전체를 정지시켰다. 투싼과 테라칸을 생산하는 5공장 라인이 주간조 내내 완전히 정지하자, 오후 3시 정규직 노동자들이 조기 퇴근했다. 5공장의 전격 파업 돌입에 발맞추어 비정규직 노조는 20일부터 시작하려던 잔업거부 투쟁을 18일 전격 단행했다. 1·2·3공장에서 600여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잔업거부에 동참했다. 사측은 비정규직의 생산타격 투쟁을 봉쇄하려고 대체인력 투입을 준비하였으나, 오히려 그로 인해 예정보다 이틀이나 빨리 확실하게 라인이 서 버린 것이다. 대체인력 투입 방관한 정규직 노조 5공장의 탈의실 점거 옥쇄파업이 지속되는 가운데, 1·2·3공장의 잔업거부 투쟁은 1월 20일과 21일에도 이어졌다. 그러나 사측의 총체적인 반격으로 잔업거부 참가자가 눈에 띄게 줄어들면서 더 이상 잔업거부를 지속해 나가는 것이 불가능한 상태에 내몰렸다. 정규직 노조 집행부는 대체인력 투입을 저지하라는 형식적인 지침을 내렸지만, 실제로는 대체인력의 대다수인 1개월짜리 한시계약자를 대체인력 유형에서 제외함으로써 사실상 대체인력 투입을 방관한다. 집행부의 방관적 태도에도 불구하고 상당수의 정규직 활동가들이 육탄돌격을 불사하며 대체인력 투입 저지 투쟁에 나섰지만, 집행부의 방관과 사측의 해고 위협이라는 악조건 속에서 그 기세를 지속해 내지 못했다. 다른 사업부의 잔업거부 투쟁이 동력 소진으로 사실상 종결되면서, 1월 21일에 이르러 5공장 파업대오는 급격히 고립에 빠져들었다. 자신감을 회복한 사측은 21일 비정규직 노조의 본관 앞 집회 때 경비대를 동원하여 군홧발로 머리를 짓이기는 잔인한 폭력을 행사한다. 경비대의 폭력을 앞세운 현대자동차의 힘에 눌려 비정규직 노조의 투쟁이 압살당할 위기에 처해 있던 22일, 최남선 조합원이 현자노조 사무실 내에서 분신을 시도한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단결”과 “원하청 노조의 공동투쟁”을 호소하면서. 다행히 목숨은 건지게 되었지만, 비정규직 조합원의 분신 시도는 사측을 움찔하게 만들었고 사측의 공세는 잠시 주춤한다. 그러나 분신 시도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투쟁전선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자 1월말에 이르러 사측의 공세가 다시 시작되었다. 2월 8일부터 시작되는 설 연휴를 앞두고 노조 간부 및 5공장 농성자 전원에 대한 해고 절차 진행, 116명 고소고발, 퇴거단행 가처분 신청, 손해배상 소송 제기 등 전방위적인 공세에 나선 것이다. 이 같은 최악의 고립 상황 속에서도 5공장 비정규직 농성단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패기와 자신감을 높여갔다. 파업농성이 2주를 넘어가며 대오가 다소 줄어들긴 했지만 농성단의 기세는 결코 꺾일 줄을 몰랐다. 사측이 다가오는 설 연휴를 결정적 계기로 보고 총공세를 펼쳤지만, 농성단은 ‘설 연휴 기간 농성장 사수’라는 쉽지 않은 결의를 흔쾌히 끌어냄으로써 사측을 허탈하게 만드는 식이었다. 결국 설 연휴 기간에도 농성투쟁이 지속되는 상황이 되자, 현대자동차는 연휴가 시작되는 8일부터 ‘단전단수’라는 극악한 방법까지 동원한다. 텅 빈 공장, 영하의 날씨. 난방시설도 전기를 이용하도록 되어 있기에, 전기와 물이 끊긴 한겨울의 농성장은 그야말로 정상적으로는 사람이 살 수 없는 그런 곳이었다. 한낮에도 촛불을 켜야 조명이 되는 농성장을 비정규직 농성자들은 ‘박쥐동굴’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박쥐동굴’에서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오기는커녕, 비정규직 농성자들은 더욱 강인한 투사로 단련되고 있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얘기꽃 속에 서로의 살아온 삶들을 나누고, 비정규직으로서의 설움과 희망을 주고받으면서, 그들은 더없이 끈끈한 ‘동지’로 거듭났다. ‘단전단수’라는 최악의 탄압이 오히려 최근 수 년 동안 한국 노동운동에서 볼 수 없었던 최강의 투쟁대오를 만들어 내고 있었던 것이다. ‘박쥐 동굴’ 속에서 태어난 최강의 투쟁대오 설 연휴가 끝나가던 2월 12일 저녁, 비정규직 노조 운영위는 ‘기필코 1만 명 비정규직 대중파업을 성사시켜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을 승리로 이끈다’는 요지로 향후 투쟁방향을 정리한다. 그 정도 탄압을 몰아쳤으니 이제 곧 백기항복을 할 것이라 잔뜩 기대했던 사측은 비정규직 노조와 농성단의 기세를 확인하며 기겁을 한다. 바로 다음날인 13일 비정규직 노조 안기호 위원장은 낮 12시경 농성장에서 식사를 하러 싼타모 식당을 향해 계단을 내려서다가 100여명의 경비대들에게 붙잡혀 건물밖에 대기 중이던 스타렉스 차량에 납치, 5공장 정문에서 동부경찰서 형사들에게 인계된 후 바로 구속되었다. 안기호 위원장은 납치 과정에서 무차별 폭행을 당해 전치 3주의 부상을 입었고, 동행하던 조합원 세 명도 상당한 폭행을 당했다. 그러나 비정규직 노조의 구심인 안기호 위원장을 제거하면 대다수가 초심자인 농성단이 결정적으로 흔들릴 것이라던 사측의 계산마저 빗나가고 말았다. 사실 안기호 위원장은 노조 설립 이후 헌신적인 실천투쟁을 바탕으로 농성단에게는 절대적인 존재였기에, 그의 부재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믿고 의지했던 위원장을 참혹하게 빼앗긴 농성단의 위기의식은 오히려 그들을 더욱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존재로 변화시켜 버렸다. 안기호 위원장을 빼앗기고 며칠이 지나자 농성단은 이전보다 훨씬 더 강력한 투쟁체가 되어 있었다. 2월 18일 물리력을 동원한 강제퇴거를 단행하겠다는 공문이 날라오고, 20일엔 실제로 물리적 침탈이 시도되자, 21일 마침내 30~40대 여성 농성자들이 단식투쟁을 하겠다고 나섰다. 그동안 농성장 안에서도 보호만 받으며 살아왔는데, 아들 같은 20대 남성 농성자들이 당하는 고통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면서. 당황한 사측은 200여명의 관리자·경비대를 동원하여 여성 농성자들의 단식투쟁을 방해하러 나섰다. 속옷과 생리대가 들어있는 가방을 열어 던지고, 여성 농성자들을 지키려던 20대 남성 농성자들을 밀치고 때리며 온갖 폭력을 가했다. 한 남성 농성자의 머리를 벽 모서리에 쥐어박아 피투성이로 만들기도 했다. 웃옷을 벗어던진 여성 농성자의 절규와 실신. 결사적인 투쟁 끝에야 농성자들은 단식투쟁의 공간을 지켜낼 수 있었다. 5공장 비정규직 농성단의 ‘피 흘리는 결사투쟁’은 마침내 상황의 반전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22일 정규직 노조의 윤성근 전 위원장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최소한 평화적인 농성이라도 마음 놓고 할 수 있게 될 때까지 함께 하겠다”며 농성장에 합류한 것을 시작으로, 현장조직과 각 사업부 대의원회·소위원회 등에서 농성장 지지방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2월 25일 마침내 단전단수가 해제되었다. 1 월 21일 다른 사업부들의 잔업거부 투쟁이 동력 소진으로 종결된 이후 한 달이 넘게 지속되었던 최악의 고립 상태를, 5공장 비정규직 농성단은 마침내 돌파해 낸 것이다. 89명 해고, 116명 고소고발, 집회시위금지 가처분, 출입금지 가처분, 퇴거단행 가처분 신청, 손해배상 신청, 위원장 납치 폭행, 단전단수…. 거대한 현대자동차가 백화점식 노동탄압으로 십자포화를 쏟아 부었지만, 5공장 농성단을 비롯한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그것을 뚫고 오히려 강철투사로 거듭난 것이다. 파견법 개악 저지와 불법파견 철폐 투쟁 올해 한국 사회의 최대 이슈가 ‘사회적 양극화’라고들 한다. 그 핵심에 비정규직 문제가 있고, 특히 제조업 전반에 만연해 있는 불법파견 문제가 있다.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불법파견 철폐 투쟁은 한국의 산업구조 및 노동운동에서 현대자동차가 갖는 상징성으로 인해 이미 전국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여기에 4월 처리가 확실시되는 파견법 개악안 저지 투쟁이 결합되면서, 비정규직 문제의 향방을 가르는 큰 갈림길이 될 것으로 보인다. 현대자동차 전체의 원하청 공동투쟁이 큰 그림으로 추진되고 있는 가운데, 고립을 벗어난 5공장 비정규직 농성단은 여전히 활력 있게 투쟁을 이어나가고 있다. 서서히 동력을 회복한 타 사업부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다시 새로운 분출을 준비하고 있다. 4월 불법파견 철폐 투쟁과 파견법 개악 저지 투쟁이 만나는 정점에서, 5공장 농성단을 비롯한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또 어떤 감동스러운 장면을 우리에게 보여줄 것인가? 그들은 아직 소수다. 그리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끝내 소수의 벽을 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그들은 소수의 벽을 넘지 못한 채 패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너무나 평범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저토록 강인한 투사로 일어설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운동 주체의 목적의식적인 노력만으로 이룰 수 있는 일도 결코 아니다. 저 작은 흐름 속에는 거대한 미래가 숨 쉬고 있다. 멀지 않아 지금 그들을 통해 예고되고 있는 새로운 시대는 활짝 열리고야 말 것이다. 5공장 비정규직 농성단의 절반 이상이 20대 청년 노동자다. 개인주의적이기만 한 줄 알았던 지금의 20대, 노조와 파업은 결코 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았던 지금의 20대. 그러나 이번 투쟁을 통해 그들은 단결력과 투쟁력에서 과거 어느 세대보다 강력한 잠재력을 갖고 있음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강한 자율성에 기초하기에 그들의 집단성은 훨씬 생동감이 있다. 인터넷과 멀티미디어를 자유자재로 다루고 풍부한 문화적 감수성과 표현 능력을 갖고 있기에 그들의 투쟁력은 훨씬 다양한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 20대 노동운동의 새로운 가능성 20대 청년들의 잠재적인 가능성이 마그마처럼 꿈틀대는 비정규직의 분노와 결합하면서 한국 노동운동은 조만간 전혀 새로운 거대한 분출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지금 5공장 농성단을 비롯한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불법파견 철폐 투쟁은 그 날이 멀지 않았음을 예고하고 있다. 2005년 04월 24일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