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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느낀 운동

  • 등록일
    2005/04/26 01:53
  • 수정일
    2005/04/26 01:53
내가 속한 공간에 들어가 철학의 유의미성에 대한 이야기를 화두로 던진 글을 읽었다. 그리고 나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 의미에 있어서 나를 되돌아 보건만 그 의미들은 똑같은 맥락이라 보여진다. 학습을 하자 투쟁을 조직하자 그리고 올바른 판단을 위한 내공을 쌓자 정도의 맥락으로 밖에 비쳐지지 않는다.(사회구성체 논쟁에 대한 재조직들의 논의의 장의 해체는 운동에 있어서 다양성을 봉쇄하고 양에서 질로 전화하는 운동의 발전을 저해하게 하였다. 이 복원이야 말로 맑스-레닌철학의 복원보다 중요한 지점이라 생각을 가져본다. 그렇고 지금 무덤속에 뭍혀진 혁명철학이 무덤에서 나오기엔 우리 현실에 대한 진단 또한 필요한 것 같다. 맑스인가 맑스-레닌인가에 대한 지난한 논쟁 또한 필요하다. 난 후자이지만...) 언제부터이가 나에게 있어 이론은 이론이라는 범위를 넘어 차별 그리고 선을 긋기 위한 수단으로 밖에 작용하지 않음을 발견하였다. 내 깐에는 활동이라 말했지만 경험이라는 피상 그리고 많은 선배들이 이야기한 무용담에 지나지 않는 낮은 인식수준을 갖고 살아가는 이로서 부끄러움이라 할 수 있지만 이론이라는 잣대 그리고 멀게만 느껴지고 일목요연하게 쓰여진 문구를 정형이라 제시하는 사람들..... 그러나 난 그들이 갖고 있는 것에 대한 탐독과 욕망이라 느껴진다. 현상을 찾기위한 방법으로서의 읽기... 실천적 투쟁을 조직하기 위한 쓰기라는 것에 대한 난 조금 다른 느낌을 갖고 있다. 아니 부정아닌 부정을 갖고 있다. 토론이 사라진 지금 읽기와 쓰기의 형태는 어떠해야 하는가? 다름이 아니라 방향을 설정하기 위한 지난한 사투임에도 불구하고, 냉철한 철학적 이해를 요구한다. 그런데 철학이라는 범위가 무엇인가? 종교라는 틀에서 있어서 시작한 루터의 사회개악론이라는 중세서양철학의 재구성으로서 출발점 그리고 확장된 데카르트의 범위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존재론 출발 그리고 칼빈을 비롯한 무수한 종교철학자들에 의해 쓰여진 종교철학론 등 이 철학의 태생을 떠나 사회적 함의라는 부분에 대한 많은 것들에 대한 관찰과 시선의 합일점에 대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철학이라는 범위는 시대를 관철하는 냉철한 이성이라는 잣대로 규정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철학은 종교철학의 바탕을 둔 철학을 외피한 자본의 이데올로기임을 잘 알것이다. 실천철학을 넘어 혁명철학을 탐독하는 이에게 있어서는 이 이해도는 다른 범주로 넘어가겠지만... 막연한 철학적 탐독을 강요하기 보단 한국사회는 사회학적 맥락에 더 큰 착목지점을 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전과 다르게 한국사회에 대한 규정성을 두지 못하는 현실... 규정성이라 함은 자본에 대한 단계적 상황에 대한 일차적 정치경제학적 접근을 통한 변증법적 해석의 시도인데... 이 해석보다는 현 상황에 대한 대립점이 주요한 착목지점으로 설정되고 논의되는 것이 못내 안타깝게 느껴진다. 글을 쓴다는 것은 제갈량이 유비에게 출사표에서 던진 실천의 의지에 대한 반영임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수식어를 비롯한 이해를 위한 객관이라는 명제가 필요하다. 간결 명료하지도 않다. 나에게 있어서 만큼은 원효가 중국 유학을 떠났을때 공동묘지에서 맛나게 먹었던 해골에 고인 물의 맛을 탐독하여 느낀 나무아비타불이라는 해탈의 절대경지의 필요성을 느낀다. 민중에서 부타의 복음을 전하고자 하였던 한 종교철학자 원효의 모습... 그 당시 선종이 지배하던 시기 원효는 아마 유학파도 아니었지만 배타적 종교체제에서 그나마 민중사관 속에 실천종교학을 갈구하였다 판단된다. 우리가 왜 변증법을 중요시 하는가? 알튀세르의 경우 변증법의 종말을 마르크스를 위하여를 통하여 선언했지만... 물질의 상호작용을 그렇게 쉽게 제단하기엔... 철학이라는 범위의 그릇은 적다고 본다. 변증법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법칙의 개요는 열열학으로 필역하자면 다름이 아닌 엔탈피... 열손실을 얼마나 줄이고 열효율성 극대화를 위한 방법론의 제시... 열손실을 없애기 위한 다양한 접근적 방법으로서의 엔트로피라 하겠다. 변증법의 정반합... 물질의 상호작용에 의한 양질의 전화법칙 등 다양한 논재... 물질에 대한 객관적 실제에 대한 규명들.... 늘 끊임없는 상호작용에 대한 연속성들을 이야기 하지만 그 난해한 기호학이라는 개념은 쉽고도 어려운 변증법을 노동자 철학에서 멀리 떨어지게 하는 무수한 기호의 수학으로서 대치하게 된다. 단순명료하다 말하기는 어렵지만 학자 풍에 의한 학문으로서의 변증법은 출발하지 않았다 본다. 맑스가 최소한 청년헤겔 주의자에서 벗어난 동기는 인간해방이라는 실천태의 발견이며, 그 발견에 있어서는 산업자본주의라는 영국의 시대상의 반영이라 하겠다. 초기 산업자본주의에 대한 모순점에 대한 발견 그리고 이를 극복하고자 하였던 맑스의 노력이었다. 누구를 지칭하면서 시작하는 시대적 배경... 이 시대적 배경에 등장하는 프루동, 블랑키, 프랑크푸르트학파, 포에르바하, 리카아도 등 다양한 사람들이 내재한다. 그러나 책들은 일목요연하게 그들에 대한 찬송 또는 반정립으로부터 시작하거나 맑스의 개념적 유츌에 대한 자해석으로 이루어진다. 80년대 학습에 있어서도 그렇지만 그 학습에 있어 객관화를 위해 우리는 한국사회를 보기 위한 사회구성체에 대한 지난한 논쟁을 출발시키면 양에서의 질로의 전환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성숙의 단계에 접어들기 전 우리는 어려움이라는 한계에 봉착하고 만다. 우리가 풀어내야 할 고리에 대한 이론의 위기의 등재가 아닌가 생각이 된다. 지금도 무수한 이야기들이 오고간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한 것은 철학의 폐기를 바탕에 둔 이론의 위기를 접하였다. 무엇보다 노동계급에 대한 주체성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 의심을 품고 있는 시기를 지금 맞이하고 있음이 그 반증이 아니겠는가? 이런 시기... 토론과 사상에 대하여 풍요로울 현장은 얼마나 있는가? 사상이 유희로 흐르고 토론이 다름으로 이어지고 있는 현실에서 우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글 잘쓰고 못쓰는 것이 활동의 잣대로 이어지는 현실에서 출본한 자료량이 많은 것이 활동으로 등치되는 시기에서 무엇을 우리는 갈구할 것인가? 이러한 현실이 고착되기 전 우리는 새로움이라는 비장함 보다는 이전 운동에 대한 승계 그리고 발전을 위한 투쟁의 단계를 이제 새롭게 구성하여야 한다. 무용담으로서의 남총련의 투쟁에 대한 회상보다 시청진격투쟁이라는 벅참보다... 이제 본질을 꾀뚤어봐야 한다. 본질은 철학의 힘이요 철학의 생명의 원천이다. 그러나 이러한 원천의 힘이 투쟁의 대오속에서 상쇄되고 있다 개인적 판단을 가져본다. 책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말할 수 있는 광장을 우리는 이제 열어주어야 한다. 광장이라는 정치가 현장으로 깊이 각인될 공간을 마련해주어야 한다. 노동의 소외, 자본의 단계, 실처활동이라는 점이 흐릇한 지금... 투쟁을 전개한다는 것 자체가 모험이지 않고서는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내가 느낀 과거... 과거를 향유하는 문제는 있지만 최소한 선명하였다라 판단된다.(그 판단을 모든 계급에게 환원시킬 것인가? 그 몫이 실천활동가라는 이론가의 몫은 아닌지...)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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