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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후 우리는 무엇이 돼 있을까?

  • 등록일
    2005/04/24 09:05
  • 수정일
    2005/04/24 09:05
[이완기의 여의도통신] 욕망의 정글속에 내던져진 미디어 ****이완기 / 본지 객원칼럼니스트·MBC기술본부장 91년 여름 신영복 선생의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선생은 통혁당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 받고 복역 중,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뇌옥(牢獄)에서 20년 인고의 세월을 보내다가 1988년 가석방으로 자유를 찾았다. 28세에 시작한 인생의 황금기를 닫힌 세월로 보내버린 셈이다. 선생은 교도소 밖의 사람들이 교도소 안의 인간군상에 대해 얼마나 많은 편견을 가지고 있는지,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각이 얼마나 비뚤어져 있는지를 차분하게 풀어 놓았다. 범죄자나 패륜아 등이 모여 있는 교도소는 일반적으로 인간이 살기 힘든 지옥처럼 인식되어 있지만, 치열한 생존경쟁이 없는 감옥 안의 세계가 밖의 세상보다 오히려 덜 야만적이고 더 인간적임을 선생은 긴 세월의 감옥살이를 통해 터득했다고 했다. 12살 된 고아 소녀, 그녀는 어떻게? 14년 전에 필자가 들었던 선생의 이야기들 가운데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예화는 가출한 누이동생을 세상에 버려둔 채 감옥에 갇혀버린, 같은 방의 한 재소자의 이야기다. “지금 어디에 있을까?”, “무엇이 되었을까?”하며 어린 누이를 애타게 그리는 그 재소자는 출소하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누이의 인상착의를 설명하면서 누이의 소식을 전해줄 것을 간절히 부탁한다. 바깥세상에서 막 들어온 신입 죄수나 재범으로 다시 들어온 죄수만 보면, “서울이 많이 변했죠?”라면서 집요하게 누이의 소식을 물어보지만, 돌아오는 것은 공허한 메아리뿐이다. 갇혀 있는 오빠가 어린 누이동생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선생이 그 재소자의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에게 던진 질문은 “천애 고아가 된 12살 소녀가 서울 한 복판에 던져졌을 때, 10년 후 그녀는 무엇이 되어 있을까?”하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우리들의 상상은 공통적으로 불길한 예측에 포박되어 버린다. 마치 집단 최면에 걸린 것처럼 우리는 “십중팔구 ‘거리의 여자’로 전락했을 것”이라는 결론을 너무 쉽게 내려버린다. 그것은 대도시 서울의 본질을 오랜 기간 체득한 관습적 사고 현상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러한 우리의 상상이 거의 대부분 실제상황으로 되어 버린다는 현실이다. 선생의 문제 제기는 거기서 출발한다. 서울이라는 대도시를 인구, 고층빌딩, 자동차 대수, GNP, 각종 경제지수 등으로만 재단할 때, 냉혹하리만치 비인간화된 서울의 중병은 치유되기 어렵다. 선생의 문제 제기는 ‘돈’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고 모든 가치의 기준이 되어 있는 자본 만능의 사회에 직격탄을 던진다. 서울은 사회적 약자에 대해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무신경 사회, 자유는 방임으로 흘러 만인이 투쟁하는 정글사회, 고삐 풀린 자본을 통제 불능에 이르도록 방치한 무기력한 후진사회다. 의지할 곳 없는 고아소녀의 절대 위기를 절대 보장해주지 않는 세상은 선진사회가 아니다.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노숙자의 문제에는 아랑곳없이 소득 2만달러 달성이 더 시급한 사회는 인간적인 세상이 아니다. 인간다운 미디어를 꿈꾸는 것은 불가능할까 각설하고, 다시 미디어로 돌아가 보자. 자본이 만들어 놓은 사생결단의 경기장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우리의 미디어는 10년 후에 무엇이 될까? 게임의 규율도 없고 무소불위의 자본을 통제할만한 견제기구도 없는 대한민국에 내 팽개쳐진 우리의 미디어는 10년 후 어떤 모습이 될까? 보통사람이 평생을 땀 흘려도 모을 수 없는 천문학적인 돈을 인기연예인은 한 차례 광고출연으로 벌어들인다.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이 오늘의 미디어다. 그 위대한 인기를 이슈화하고 확대재생산해서 더 큰 미디어의 수익을 만들어내는 것이 오늘날 미디어의 정체다. 그 미디어가 쏟아내는 의제와 그 속에 함축되어 있는 이데올로기가 우리 사회를 끌고 간다. 문화마저도 ‘문화산업’의 시각으로 바라본다. 어떤 미디어도 시장에서 성공하지 못하면 공염불인 현실이다. 미디어의 모든 의제가 산업론에 기반해 있고, 공공성과 공익성에 대한 논의는 고용효과, 성장 동력에 묻혀 소수 공영론자들의 한물간 옛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암울하기만한 미디어의 공공성 논의에 실낱같은 희망의 조짐이 보이기도 한다. 정책 입안자와 학자와 서비스 공급자들이 하나같이 돈벌이 미디어만을 강조하는 이 시대에, 꺼져가는 공공 미디어의 불씨를 다시 짚이려는 움직임이 조심스럽게 일고 있다. 지난 달 14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방송통신법 제정을 위한 토론회’는 그 동안 미디어의 진화과정에서 흔히 제시되었던 산업론과 시장주의의 논점을 벗어나, 방송환경변화에 따른 방송의 공공성 퇴색에 어떤 대응이 필요한가를 고민했다는 점에서 신선했다. 서울과 같은 대도시를 행복하고 건강한 인간의 삶터로 만들기 위해 미디어가 해야 할 역할은 지대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디어를 시청률, 돈벌이, 채널수, 성장동력 등 경제지수로만 평가하는 작금의 담론은 빨리 바뀌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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