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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03/30
    일 덜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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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5/03/30
    국방부=국가공격부: 악마의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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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5/03/30
    사회주의자 소련 수용소에 갇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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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5/03/30
    영화: 유태인만 죽은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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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5/03/27
    교회 졸업했어요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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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5/03/26
    [사진] 가난 어린이 쓰레기 푸에르토리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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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5/03/25
    베네수엘라 CIA 민주주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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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5/03/24
    안락사 기독교 이라크(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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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5/03/23
    블로그 시계 달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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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5/03/22
    쿠바 미국 인권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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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덜 합시다!

작년 반전 집회장에서 만난 "일 덜하기 정당" (Work-Less Party)에서 나온 이의 말이 맵돕니다. 지금 하는 일의 3분의 2정도만 하고 나머지는 가족과 대화, 이웃과의 연대, 문화/체육/학술 활동 등에 써야 한다. 나머지 일감은 실업의 고통에 있는 이웃에게! 우리의 훌륭하신 자본가님들과 근엄하신 노동윤리 주창자들에겐 기절초풍할 이야기네요. 한국처럼 노동시간이 긴 사회는 훨씬 덜 일해야겠네요. 사실 이런 이야기는 좋은 의미에서 하는 이야기이고 이미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총체적으로 보면 강제적으로 일 덜 하는 사회가 돼 있지요. 즉, 완전 고용이 돼 버리면 필연적으로 과잉 생산의 문제가 생기고, 가격의 하락, 이익의 감소, 그리고 자본 자체의 위기가 오겠지요. 따라서 적절한 실업군의 유지는 자본주의 사회에선 필수인데 그것은 단지 이익 보전의 목적 뿐 아니라 "너 까불면 실업자 돼, 굶어 죽기 싫으면 까불지마" 하는 폭력적 메시지가 까지 담고 있지요. 직업 갖고 있는 사람들은 반대로 필요 이상의 많은 노동을 강요받을 수 있지요. 단순 노동시간이 법에 의해 제약받는다면 노동 강도를 높혀 메꾸기도 하고요. 1,000명을 고용하던 조직이 200명 인원감축하고 나머지 800명에게 노동시간이나 노동강도를 높혀 200명의 일감을 떠안게 합니다. 물론 시간외 수당 등 합법적 테두리 안에서 하게 되니까 800명은 일단 임금총액이 높아지니 좋아하는 사람도 생깁니다. 나머지 200명은 800명이 휴가 가거나 병가로 일을 못 나올 경우 비상대기조로 투입되고요. 물론 연월차, 퇴직금. 복지후생비등은 전혀 없지요. 조직 입장에서는 생산성이나 생산량에 큰 영향없이 과거 1,000명 있을 때와 비슷하게 조직을 운영하지만 200명 감축에서 오는 연월차, 퇴직금, 복지후생비 등의 엄청난 비용절감을 하게 되고 (800명에게 주는 시간외 수당을 제외하고도) 경영진은 일약 유능한 경영자 반열에 오르면서 두둑한 보너스 및 스톡옵션 등을 받겠지요. 청년 실업, 중년 실업, 하여간 총체적 실업, 비정규직이 문제인 지금 정규직 일 좀 덜하고 정규직 일 좀 나눠 가지면 안 될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이크, 자본가님들의 핏대가 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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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국가공격부: 악마의 사전

국방부. 국가 방위부의 준말이다. 영어로는 Department of Defense. 그런데 미국 국방부를 보면 이건 국가 방위부가 아니라 국가 공격부다. 국공부. Department of Offense. 반만년 역사 동안 외침을 한 적이 별로 없다는 한국도 어떻게 미국 국공부와 엮이다 보니 베트남에서는 적극적 공격임무를 이라크에서는 공격 임무에 충실한 미군을 도우기 위해 이른바 재건임무를 떠맡았다. 악마의 사전이라는 게 있다. 흔히 알고 있는 단어들이 엉뚱한 뜻을 갖게 되는 현상을 모아 정리한 건데 종류도 여러가지다. 오늘은 부시 정권때 만들어져 가고 있는 기괴한 단어 중 몇 개 발췌해 보기로 한다. --------------------------------------------------------------------------------- [원문] 부시 시대의 악마의 사전에 삽인된 단어들 Entries for a Devil's Dictionary of the Bush Era 민주주의 [명사]: 1.과도하게 수출되어 국내 공급이 고갈된 제품. 2.우리한테만 투표할 때 해당 (참고, 폭정: 다른 이에게 투표할 때 해당) 사회 안정: 다음의 두가지 문제를 제외하고는 좋은 생각: "사회"라는 말이 "사회주의"라는 말과 겹치는 것. 안정을 보장하는 것은 자유 시장을 능멸하는 것. 중국: 월마트 참조. 월마트: 민족국가, 미래 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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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자 소련 수용소에 갇히다

* 이 글은 간장 오타맨...님의 [“안심해. 해가 뜨듯, 좋은 세상이 와”] 에 관련된 글입니다.
[전문 번역에 들어가기 전] 현실 사회주의가 붕괴했음에도 왜 여전히 사회주의에 대한 열망은 식지 않는가? 프랜시스 푸쿠야마 Francis Fukuyama가 "역사의 종언과 마지막 인간(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이라는 도발적 논문을 통해 자유 민주주의와 기술 주도의 자본주의 체제의 승리를 선포한 후에도 사회주의에 대한 이상은 아직도 꿈틀거리고 있다. 그건 현실 사회주의가 진정한 사회주의답지 못했다는 데 있다. 조선반도의 사회주의자 김학철을 내몰고 감옥에 가둔 김일성 정권과 모택동 정권. 독일의 사회주의자 나탄 스타인버거를 19년간 강제수용소에 갇아버리고 볼셰비키 혁명가들을 죽여버린 스탈린 정권. 아인슈타인이 "왜 사회주의인가"라는 글에서 우려한 대로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은 거대한 관료체제 변질되고 자유, 평등, 연대에 기초한 보다 나은 세상의 꿈을 차단하게 된다. 그들이 사회주의 간판을 내걸고 만든 사회는 결코 사회주의자들이 꿈꿨던 그런 사회가 아니었고 그것이 빌미가 돼 사회주의라는 인류의 이상은 조롱거리가 돼버렸다. 오늘 김학철과 나탄 스타인버거의 삶을 비교해 보면서 진짜 두 사회주의자들은 어떤 삶을 살았고 그들이 이루고자 했던 사회는 무었이었는지 생각해 본다. 소련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많은 이들과는 달리 우파로 전향하지 않은 스타인버거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사회주의라는 말에 덧붙여진 거짓과 억압이라는 쓰레기 그리고 스탈린주의는 전부 영원히 없어져야 합니다. 소련과 그 영향권에 있었던 정권들은 사회주의와 아무 관련이 없었습니다." [번역하고 나서] 잘못됐거나 부적절한 번역 등등 있으면 댓글 부탁합니다. ===================================================================== 원문: 나탄 스타인버거 94세로 세상을 뜨다: 파시즘과 스탈린주의 항거 투쟁에 바친 삶 (Nathan Steinberger dies at 94: A life dedicated to the fight against fascism and Stalinism. By Verena Nees. 2005년 3월 9일) 번역: FLOSS (http://blog.jinbo.net/floss) | 2005년 3월 27일 [1] 2005년 2월 26일 독일 베를린의 한 병원에서 94살의 나탄 스타인버거(Nathan Steinberger)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내인 에디트(Edith)는 2001년에 운명했다. 두 사람은 혁명의 격동과 노동자 운동의 비극적 패배로 점철된 한 시대를 처음부터 끝까지 살았던 세대에서 남은 마지막 생존자들 중의 일부였다. 그들은 살면서 끔찍했던 독일 파시즘과 소련 스탈린주의를 겪어야만 했는데 옛 소련에서 독일 공산당(KPD) 당원으로 살다가 죽지 않고 빠져나온 바 있다. [1997년 나탄 스타인버거 인터뷰 참조 http://wsws.org/articles/2005/mar2005/sint-m09.shtml] [2] 1910년에 베를린에서 정통 유태교 가정의 막내로 태어난 나탄 스타인버거는 비교적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다. 그가 세상에 대해 처음 가졌던 느낌은 전쟁, 굶주림에 이어 일어난 베를린 노동자들의 혁명적 투쟁으로 채워지게 된다. 동시에 그 또한 1920년대의 문화적 회오리 속에 빠져든다. 다섯 살 때 그는 누나에게 줄 오페라와 연극 표를 사려고 줄을 선 적도 있고 그의 형은 다다이즘(Dada) 연극단과 집에서 공연연습을 했다. 그는 다른 여러 공연물에 엑스트라 역으로 출연해 용돈을 벌기도 했고 나이가 꽤 될 때 까지 그의 문학과 그림에 대한 지식으로 친구들과 손님들을 놀라게 했다. [참고] 다다이즘: 1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 문화에 대한 회의에서 나온 예술 조류로 기존 서구 예술에 대한 파격적 저항을 시도했음. [3]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그는 네 살이었고 러시아 혁명 때는 일곱 살이었다. 90살 때 그의 어린 시절의 추억에 대해 질문을 받자 그는 이렇게 회상했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베를린은 소용돌이 속에 휩쌓였다. 모든 이들이 레닌과 트로츠키에 대해 이야기 했다. 뒤돌아 보니 러시아에서 일어났던 일들은 베를린과 독일 전체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고 확실히 이야기 할 수 있다" [4] 1918년 11월 혁명 중의 가장 큰 시위와 거리 투쟁 가운데 일부가 스타인버거 가족이 살던 아파트에서 근처에서 일어났다. 그는 형 레오(Leo)와 함께 빈 탄피들을 가지고 놀았는데, 그 탄피들은 스파르타쿠스단(혁명조직 Spartakusbund 또는 Spartacus League: 나중에 독일 공산당의 핵심 조직 중 하나가 되는데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와 칼 리프크네히트 [Karl Liebknecht]가 주도했음)과 자유의용군(Freikorps: 반동적 준군사조직) 사이의 무장 전투가 잠시 잠잠할 때 거리에서 주은 것들이었다. 종종 수업이 끝난 후 그는 시위에 참여하기도 했고 저녁에는 근처 마을 회관으로 달려가 독일 공산당(KPD), 독일 독립 사회민주당 (USPD), 독일 사회민주당 (SPD) 소속의 노동자들이 벌렸던 뜨거운 정치 토론에 참석하기도 했다. [참고] 자유의용군 (Freikorps) 조직원들이 나중에 나치의 주요 간부들이 된다. [5] 그는 형 아돌프(Adolf)의 영향을 받아 곧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하게 되는데, 아돌프는 나중에 마트하우젠(Mauthausen) 수용소에서 나치에 의해 살해당한다. 공산주의 청년연합(Communist Youth Federation)에 14살 때 들어간 그는 공산주의 고등학생 협회(KoPeFra: Kommunistische Pennälerfraktion)와 사회주의 학생 연합(SSB: 여기서 주도적 역할을 함)을 만드는데 가담한다. [6] 또한 어린 시절 이미 독일 노동자 운동의 문제를 알게 되고 러시아 혁명을 독일에서 해 보려는 시도를 경험하게 된다. [7] 1923년은 공산주의 및 사회민주주의 노동자 사이에 커다란 희망과 긴장이 감돌던 해 였다. 일년 내내 파업이 계속됐다. "정치적으로 의식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 곧 그것이 일어난다' 하는 그런 느낌이 공기 중에 만질 수 있는 물체처럼 있었지요." "베를린의 노동자들과 젊은이들 모두 독일판 10월 혁명을 뜨거운 기대 속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그 때 난 그걸 아주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지요." 따라서 독일 공산당 지도부가 너무나 오래 머뭇거리는 바람에 거센 운동의 정점을 놓쳐버렸을 때는 실망이 더욱 더 클 수 밖에 없었다. "어느 날, 모든 것이 다 끝났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냥 멈춰버린 거죠. 그걸 어떻게 설명할 수 없었지만 갑자기 열정은 사라지고 실망이 퍼졌어요. 독일 공산당에 속하지 않았던 노동자들이 특히 실망했었죠. 며칠 동안 억누르는 듯한 침묵이 이어졌습니다." [8] 러시아 공산당 내에서 스탈린파와 레온 트로츠키가 이끌던 스탈린 반대 좌파(Left Oppositionist) 사이의 투쟁이 일어나자 1923년 이후 독일 공산당 안에서도 갈등이 터지고 만다. 그런 정치적 문제들을 이해하기엔 아직 어렸던 그와 같은 지역내 청년 동지들은 모두 1926년 공산주의 청년연합(KJVD)에서 쫓겨난다. 당시 당 노선에 비판적이었던 지도급 인사인 칼 코르쉬(Karl Korsch)가 그가 속한 지역내 청년동지들 전부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9] 그러나 그는 사회주의 학생연합 활동에 계속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와 그의 친구들은 정치만 가지고 토론한 것이 아니라 에릭 카스트너(Erich Kästner) 아놀드 즈바이크(Arnold Zweig) 같은 작가들과 토론도 하고 심리학과 성에 대해서도 논의했다. 1929년 대학 입학 시험에 합격한 후 제일 좋아했던 과목인 심리학을 연구해 보려고 의학 학부에 등록하기도 했으나 나중에 정치 경제학으로 진로를 바꾼다. 농업 과학을 전공한 그는 당시 모스크바 국제 농업 연구소의 대표적 인물 중의 하나였던 저명한 과학자인 칼 비트포겔(Karl Wittfogel)의 지도를 받았다. [10] 공산주의 청년연합에서 쫓겨난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1928년에는 독일 공산당(KPD)의 당원이 됐다. 스탈린과 그의 추종자들이 주창했던 사회 파시즘 이론이라는 주제를 놓고 그 해 부터 독일 공산당 안에서 격렬한 논쟁이 시작됐다. 그 이론에 따르면 사회 민주주의와 파시즘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스탈린파의 자살적 성격의 정략이 노렸던 것은 점점 영향력을 늘려가고 있던 나치 파시즘 추종자들에게 대항해 사회민주주의 노동자들과 공산주의 노동자들이 벌이려고 했던 그 어떤 연합 투쟁도 무력화 시키려는 것이었다. [11] 그는 본능적으로 이런 정략을 거부했다. "이런 극좌적 정략은 정치적으로 무지한 사람들한테나 먹히는 겁니다. 1918년과 1923년 독일에서 혁명적 경험을 한 이들의 절대 대다수는 사회민주당(SPD)과 나치 파시즘 추종자들을 동일시 하는 그 이론을 배격했어요. 나는 거리에서 대중 선동전을 할 때 그 어떤 경우에도 사회 파시즘이라는 말을 한번도 쓰지 않았어요." [12] 점점 늘어나던 나치의 영향력에 대항해 독일 공산당과 사회민주당 노동자들이 연합 전선을 펼칠 것을 호소한 레온 트로츠키의 글들을 그 무렵 그는 처음 보게 된다. [13] 얼마후 그의 인생의 극적으로 바뀌게 된다. 지도교수였던 칼 비트포겔의 추천을 받아 1932년 학위과정을 마치기도 전에 모스크바 국제 농업 연구소에 일자리를 얻은 것이다. 독일 공산당의 열렬한 당원이던 여자친구 에디트도 함께 가게 된다. 원래 모스크바에 2년만 있기로 돼 있었는데 1933년 히틀러가 집권을 하게 되자 두 사람은 독일로 돌아갈 수 없는 형편이 된다. 두 사람은 독일 공산당 당원으로 알려졌을 뿐 아니라 동시에 유태인이였기 때문이다. [14] 독일에서 노동자 운동이 패배하고 파시즘이 승리하자 두 사람은 절망에 빠지게 되고 그들을 정치로 이끌었던 1920년대의 혁명적 낙관주의와 스탈린 정권 하의 소련은 전혀 공통점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한편 소련 농촌 지역에서 강제 집단농장을 만드는 과정에서 끔찍하고 잔인무도한 일들이 일어났었다고 모스크바 국제 농업 연구소의 선배 연구원들이 그에게 알려준다. 또한 레닌과 가까웠던 동지이자 스위스 출신의 혁명가인 프리츠 플라텐(Fritz Platten) 같은 옛 볼셰비키 혁명가들도 만나게 되면서 플라텐과 예전 당원들이 어떻게 점점 소외돼 가는지도 목격하게 된다. 그 시점에서 이미 트로츠키 지지자들은 국외로 망명했거나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가 참석했던 당 모임에서 개방적인 정치적 토론은 거의 없어지게 된다. 당 민주주의는 관료주의와 음모에 의해 차차 말살돼 간다. [15] 1935년에는 박사학위를 받게 된다. '국가 사회주의의 농업 정치학'이라는 박사논문은 출판되기는 하지만 얼마 안 있어 그의 과학 연구작업은 갑자기 중단되게 된다. 레닌그라드 당 서기 키로프(Kirov) 살해 후 숙청이 시작된다. 스탈린 반대파로 알려진 사람들 뿐 아니라 그때까지 스탈린의 충실한 추종자들까지도 점점 스탈린의 비밀 경찰인 GPU의 손아귀에 들어간다. 1936년 모스크바 국제 농업 연구소에서 해직당한 후 그는 1935년에 태어난 딸 마리안느(Marianne)와 아내를 부양하기 위해 독일어를 가르치면서 겨우 연명해 간다. [16] 모스크바 재판이후 나치를 피해 소련으로 이주했던 독일인들은 체포의 물결 속으로 빠지게 된다. "스탈린은 자신의 정치를 비판할 가능성이 있다면 그 어떤 누구라도 가만두지 않았어요. 그리고 스탈린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의 정치 때문에 독일에서 혁명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죠." [17] 1937년 5월 노동절 전날 저녁 그는 체포당한다. 아내 에디트도 독일이 소련 침략을 개시했던 1941년에 같은 운명에 처한다. 당시 여섯살이었던 딸은 잘 알고 지내던 유태인 가정에서 맡아 주게 된다. [18] 고난은 1956년까지 계속된다. 그는 처음 악명 높았던 부티르키(Butyrky) 감옥에 갇히고 나중에 시베리아의 콜리마(Kolyma)로 이송된다. 그의 죄목은 '반혁명적 트로츠키 행동'이었고 그의 '죄'는 무엇보다도 예전에 독일 공산주의 청년연합에서 15살 때 쫓겨난 것 때문에 더 무거워지게 된다. 아내 에디트는 카자흐스탄(Kazahstan)의 노동수용소로 끌려갔고 거기서 겨우 목숨을 이어 가게 된다. [19] 부티르키 감옥에서 그는 체포의 물결이 결코 제멋대로 이루어 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러시아 10월 혁명에 적극적으로 가담했고 가장 당에 헌신했던 이들이 제1순위로 체포가 됐다는 걸 알게 된다. 그가 처음 감옥에서 함께 지낸 이들은 스탈린 반대 좌파 지노비에프(Zinoviev)의 아들과 옛 볼셰비키 당원이자 당 역사가인 블라디미르 이바노비치 네브스키 (Vladimir Ivanovich Nevsky)였는데 네브스키는 페트로그라드(Petrograd) 혁명 위원회의 조직원으로 1917년 혁명 당시 군 준비 작업에 참여했고 레닌의 제1차 노동자 정부에서 교통부 장관을 지낸 사람이다. 나탄 스타인버거가 부티르키 감옥에 도착하고 몇 주가 지나서 네브스키는 총살을 당한다. [20] 그 당시 스타인버거 부부의 동지들 거의 대부분이 죽었으나 둘은 아무튼 살아남게 된다. 딸과 다시 만난 스타인버거 부부는 1956년 동베를린으로 가게 됐으나 동독 정부는 그들에게 절대적으로 침묵할 것을 강요한다. 스탈린 강제 수용소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하지 못하게 된다. 동독이 무너지고 이어 소련이 해체되고 나서야 비로서 나탄 스타인버거는 끔찍했던 스탈린 치하에서 겪었던 일들을 말할 수 있게 된다. 굴라그(Gulag: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많은 이들과는 달리 그는 우파로 전향하지 않고 청년 시절의 사회주의 이상을 지켜낸다. [21]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스탈린주의는 결코 사회주의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많은 친구들과 지인들이 축하해 주던 90살 생일을 맞이하여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살아오면서 내린 결론을 정리한다: "나는 젊은이들이 스탈린주의가 무엇이었는지 이해했으면 해요. 사회주의라는 말에 덧붙여진 거짓과 억압이라는 쓰레기 그리고 스탈린주의는 전부 영원히 없어져야 합니다. 소련과 그 영향권에 있었던 정권들은 사회주의와 아무 관련이 없었습니다." [22]그의 말년은 평탄하지 못했다. 아내 그리고 알고 지내던 많은 이들이 점점 더 세상을 떠났는데 작년에는 사회주의 학생연합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오랜 학교 친구인 막스 카하네(Max Kahane)가 죽었다. 거의 글을 쓸 수 없었고 청각장애가 심해 사는게 힘들었고 외로웠다. 그러나 유머 감각과 평생지기 친구들과 함께 그가 끝까지 지켜낸 것이 있다. 그것은 새로운 세대가 1930년대가 남긴 교훈을 보고 익혀서 보다 나은 사회를 이루기 위해 그의 세대가 헌신했던 투쟁을 이어받아 해 주리라는 신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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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유태인만 죽은게 아니다

히틀러가 죽인 집단에는 유태인들 뿐만 아니라 집시, 장애우, 공산주의자들이 들어가 있다. 특히 나치의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증오는 무척 컸다. 많지는 않지만 내가 본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이런 사실이 부각된 경우는 별로 기억에 없다. 물론 숫자상 유태인이 제일 많이 죽은 것은 사실이나 집시, 장애우, 공산주의자들도 함께 박해받았다는 사실을 빼는 것은 뻔한 정치적 음모가 보인다. 특히 유태인이면서 동시에 공산주의자였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역시 유명 할리우드 영화에서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 그런 영화가 있다면 전문가들께서 이 문외한을 깨우쳐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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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졸업했어요 (1)

10여년 전 전철을 타고 갈 때였다. 젊은 한 청년이 올라타더니 <예수 믿고 천국가자. 예수 안 믿으면 불구덩이 지옥에 간다> 대충 이런 요지의 말을 열렬히 해댄다. 퇴근길이라서 잔뜩 피곤해 전철에서 달콤한 잠을 자보려고 야무진 생각을 하고 있는 참에 뱃속에서 우러나오는 그 우렁찬 외침이 참으로 거슬린다. 될 수 있으면 참으려고 했는데 별 내용도 없는 이야기를 몇분씩이나 계속 반복하자 은근히 인내심이 바닥나기 시작한다. <저 여기요, 무슨 말씀하시는지는 알겠는데요, 좀 조용히 합시다!>. 헉! 그 청년 매서운 눈초리로 홱 나를 쳐다본다. 생각지 못한 반격에 좀 놀라기도 좀 약오르기도 한 모양이다. 얼굴이 좀 굳어지는가 싶더니 정거장에 전철이 멈추자 <너 함부로 까불면 큰일 난다> 하며 내린다. 헉! 이거 완전 조폭 분위기네. 끌끌 불쌍한 어린 양 하나 구제하는 데 실패하셨수다 그려.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버스나 전철에서 장사하는 아저씨를 보면 그들이 아무리 소리쳐도 묵묵히 견뎌내는데 왜 <예수 천국, 불신 지옥> 이야기만 나오면 참기 힘든 것일까? 장사하는 아저씨들은 처자식 줄줄이 달린 생계형이고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은 신념형이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 천국, 불신 지옥>하는 사람들 중에도 그걸 해야 밥벌이가 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러면 진작 그렇다고 이야기할 것이지... 한국사회에서 살다 보면 남녀노소 구별없이 가장 많은 호객행위를 당하게 되는 일은 주로 이런 <예수 천국 불신지옥> 조직을 통해서다. 심지어 몇년전 토론토에 들를 일이 있어 갔는데 거기서도 한 전철역에서 호객행위의 대상이 됐다. 그때는 그래로 좀 젊잖은 목사님한테서다. 바다 건너 왔으니까 호객 내용이 좀 바뀌었나 싶었는데 영 아니다. 호객 당하는 입장에선 좀 신물난다. 이런저런 이유로 개신교 교회, 천주교 성당을 몇년쯤 들락날락 했던 입장에서 그리고 거기서 좀 배운 바가 있는 처지에서 그런 호객 행위를 매몰차게 거절하기란 쉽지 않다. 어떻게 하면 이 호객행위를 우아하게 거절할 수 있을까? 생각을 거듭해 짜낸 것이 바로 <교회 졸업했어요>이다. <교회 졸업했어요> 좀 살펴보면 인생의 쓴 맛 단 맛 본듯한 분위기도 비스무레 풍기는 그래서 호객하는 사람도 좀 쉽게 대처할 수 없는 말이다. 이 한마디하면 대부분 <어 이거 뭐야> 하면서 주춤한다. 즉각 응답이 오는 경우는 지금까지 없었다. 보통 내공이 튼튼하지 않으면 대답하기 힘들다. 그래서 호객행위 당할 때마다 즐겨 사용한다. 오늘은 이른바 부활절이다. 육신의 부활이라는 신화 내지 종교적 신념을 과학적 사실로 등치시켜 버리는 행위가 지구 구석구석에서 행해지는 사실 소름끼치는 날이기도 하다. 오늘날 고통받는 이들에게 힘이 되어 줄, 시대를 너무 빨리 앞서간 사회주의형 인간 예수가 아니라 박제된 독수리처럼 종교적 아이콘으로 십자가에 박혀있는 예수가 기념되는 날이라 씁슬하기도 하다. 오늘 부활절을 맞이해 어디선가 <예수 천국 불신지옥> 프로파겐다는 쭉 계속되고 있으리라. <교회 졸업했어요> 이 한 마디 하는 데는 사실 수 많은 시행착오와 공부가 필요했다. 이어지는 글들에서 하나씩 풀어가도록 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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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가난 어린이 쓰레기 푸에르토리코

[사진 누르면 큰 사진 창이 뜹니다.] 사진 출처: http://www.digitalphotocontest.com/photodisplay.asp?photoid=723153 사진 찍은 이(Viveca Venegas)의 말: 10억 인구가 절대 빈곤에서 살고 있다. 3억명은 식량 부족에 시달리고 있고, 매년 6천만명이 굶주림으로 죽고 있다. 이런 사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 간의 연대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미국을 비롯한 부자 나라들은 그들 제품[주석: 아마도 국민총생산이나 일년 정부예산 이야기 하는 듯]의 0.7% 만 빈곤국가 지원에 쓰고 있다. 우리의 생태계, 우리의 세계는 그 어느 때보다 위험에 처해 있다. 우리가 당장 행동에 옮기지 않는다면 곧 가난이 우리를 덮칠 것이다. 사진 찍은 이의 설명에 대한 한 미국인의 답변: 정말 좋은 사진이다. 색감이 생생히 살아있고 사진 그 자체가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사진 찍은 이의 설명에 들어간 정보는 조금 지나친 것 같다. => 숫자가 완전히 정확하지는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큰 숫자(억, 천만 단위)는 UN에서 발표한 통계치와 다르지 않다. 자신이 극한 빈곤에 살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그런 숫자 감각에 무딜 수 밖에 없나 보다. 씁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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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 CIA 민주주의

* 이 글은 달팽이님의 [[펌] 차베스의 베네수엘라 '제2의 쿠바'인가?] 에 관련된 글입니다.
[ 번역에 들어가기 전 ] 최근 베네수엘라에 대한 미국 흑색선전 언론의 악의적인 논평/기사와 이를 그대로 실어주는 연합뉴스의 행태는 도를 넘어섰다. 미국 정부가 민주적으로 선출되고 대다수 민중에게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는 베네수엘라 차베스 정부에 대에 끊임었이 퍼붓는 전복시도는 하나도 보도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부정적인 모습만 비추고 있다. 베네수엘라 민중의 삶이 분명 과거 민중수탈 시대보다 좋아지고 있다는 명백한 사실조차 이야기 안 하고 있다. 어느 정권이든 찬반, 긍정 및 부정 양면이 있는 것이고 이걸 공정하게 보도하는 것이 언론의 기본 아닌가? 이런 면에서 악의적인 기사를 쏟아내고 있는 미국 흑색선전 언론들과 이를 아무 여과없이 전달하는 연합뉴스는 언론이라 부르기 힘들다. 세계 최초로 혁명이 아닌 <민주적 선거>로 선출된 칠레 아옌데 사회주의 정부를 군사 쿠테타로 무너뜨리고 수십년간 라틴 아메리카에서 군사 독재정권, 신자유주의 폭력 정권을 비호해온 미국 정부는 베네수엘라의 민중의 뜻을 더러운 계략으로 짓밟으려 하고 있다. 라틴 아메리카와 전세계에서 벌이고 있는 미국 정부의 민주주의 캠페인은 민중의 삶을 위한 민주주의가 아니라 미국의 자본 이익에 부합하는 정치행태를 말한다 [참고: 쿠바 미국 인권 민주주의].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계속 넘어뜨리고 미국 자본 이익에 충실한 정치 모리배들에게 정권을 주려고 획책할 수 있는가? 한국의 기나긴 군사독재 기간 동안 무수한 반민주주의 참상에 대해 미국 정부는 뭘 했는가? 미국 자본 이익에 충실한 군사정부였기에 민주주의 캠페인 조차 벌이지 않고 수수방관하지 않았는가? 미국의 보호를 받는 사우디 아라비아 독재왕정은 또 어떤가? ==================================================================================== 발췌 번역 + 약간 추가 | 원문: CIA 어떻게 베네수엘라 내정에 간섭 하는가 (전직 CIA 요원 Philip Agee 인터뷰)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이른바 민주주의 캠페인이 베네수엘라에서 전면적으로 펼쳐지고 있다. 1980년대 니카라구아 상황처럼 야당 세력들에게 수천만 달라의 공작 자금이 뿌려지고 있다. 공작금은 미국 국제개발국(USAID: the United States 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과 계약을 맺은 민간 컨설팅 업체들이 나눠주고 있다. 공작금을 갖고 미국 정부는 여러 갈래의 야당 세력을 규합해 2006년 베네수엘라 대선에서 정권 교체를 이루려 하고 있고 이것이 실패할 경우 2012년, 2018년 등 계속 정권교체를 시도하려 한다. 이는 미국 정치 제도의 안정과 미국 정치 계급의 안위가 달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첨가: 미국정부는 미국식 자본주의 제도 이외의 사회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힘들다. 대안 사회의 출현은 미국 자본계급에겐 악몽이다. 마치 마이크로소프트 빌 게이츠에게 대안 소프트웨어인 자유 소프트웨어가 악몽이듯. 오죽하면 최근 한 인터뷰에서 자유 소프트웨어 하는 사람들을 공산주의자들이라고 했겠는가.] 1970년대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 피노체트 정권 등 잔혹한 군사독재 정권들이 있었다 [추가: 한국 박정희 정권 포함]. 모두 CIA의 비호를 받는 정권들이었다. 그 때 미국 외교정책을 짜는 상층부 사이에 새로운 발상이 생겨났다. 억압, 실종, 암살로 얼룩진 군사정권을 통해 미국의 이익을 담보해 내는 것이 꼭 최상의 방법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미국의 정치계급과 이해관계를 같이 하는 정치 특권층이 민주적 정부로 선출되게 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 정부는 대중 세력이 아니라 이른바 <과두정치>로 대표되는 라틴 아메리카의 전통적인 정치 계급이 맡는다는 전제조건이 있었다. 그래서 채택된 것이 이른바 <민주주의 프로젝트>인데, <자유롭고, 공정하고, 투명한> 선거를 통해 권력이 <민중>이 아니라 <정치 특권층>에게 돌아가게 한다는 것이다. [첨가: 그런데 이 <민주주의 프로젝트>가 엉뚱하게 차베스 정권이라는 민중정권을 탄생시켰으니 미국 정부는 억장이 무너지는 것이다. 그래서 3일 천하로 끝나긴 했지만 쿠테타도 지원하고 대통령 소환제도를 통해 정권전복도 시도해 해 보고 내년 대통령 선거에도 개입하려 하는 것이다.] [첨가: <과두정치>는 미국 두 보수주의 정당인 공화당 민주당이 대표적이다. 진보 사기극을 벌리고 있는 미국 민주당은 이라크 침략 추가 예산안에도 절대 다수가 찬성할 만큼 미국 자본 이익에 환장한 공화당과 별 다를 바 없는 정당이다. 낙태, 동성애 문제 등 자본 이익과 별 상관없는 문제들에 대해서 단지 진보적 흉내를 낼 뿐이다. 한국의 두 보수주의 정당인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은 미국의 공화당 민주당의 복사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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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락사 기독교 이라크

미국의 한 여자가 식물인간 상태에 있다. 그는 식물인간이 되기 전 인위적으로 자기 생명을 연장시키지 말라고 이야기 했다. 남편은 법에 호소해 아내의 뜻대로 음식을 넣어주는 튜브를 제거해 달라고 했다. 법원은 그렇게 하라고 했다. 환자 부모가 재심을 요구했고 기나긴 법정 공방이 계속된다. 최근에 다시 튜브를 제거해도 좋다는 판결이 나고 실제로 튜브가 제거되자 개신교와 천주교 신자들이 들고 일어났고 그들의 표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공화당, 민주당 상하원 대다수 의원들이 동조에 나섰다. <독실한> <개신교> 신자인 부시도 당연히 그 대열에 동참하고 있다. 어떻게 결말이 날 지는 두고봐야 겠다. 안락사 찬반 여부는 뒤로 하고 저들이 보여주고 있는 이중잣대를 보자. 한 인간의 생명이 그토록 소중하다면 저들이 세금으로 지탱되는 미국의 군인들이 죽여놓은 이라크 10만여 민중들의 생명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그 군인들 중에는 물론 <독실한> 기독교 신자들도 있다. 물론 저들 중에는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이른바 <소수의> <양심적> <기독교인>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부시가 편협한 애국주의와 수구 광풍에 휩쓸린 기독교 유권자 몰표를 등에 업고 작년에 당선된 사실도 있다. 안락사를 요구하는 한 인간의 생명을 지키겠다고 집회도 하고 기도도 하는 이들의 대다수가 과연 지금까지 죽은 그리고 현재진행형으로 죽어가고 있는 이라크 민중들을 위해 한 일이 도대체 무엇인가? 한 천주교 수사는 방송에 나와 식물인간인 그 환자 뜻대로 안락사 시키면 그것은 곧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 것과 같은 일이라고 했다. 비유가 너무 과장됐긴 했지만 그렇다 치고 그러면 십자가에 못 박힌 10만여 이라크의 예수를 미국의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예수는 국가와 인종에 따라 다른가? 생명의 가치는 국적과 피부색이 결정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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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시계 달기

서울 | Seoul 방글라데시 | Bangladesh
베네주엘라 | Venezuela 밴쿠버 | Vancouver
이 시계 달기 서비스가 언제까지 무료로 될 지 모르겠으나 일단 써보도록 하지요. (1) 진보넷 블로그 자기소개란에 시계 달기 내 블로그 관리 -> 기본정보 -> 자기 소개 글자 제한 안 넘는 범위에서 다음 코드 복사 - 붙여넣기. [EMBED src=http://www.clocklink.com/Clocks/0001-Gray.swf?TimeZone=GMT0900 width=180 height=180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wmode=transparent bgcolor=#333333] 맨 앞과 두의 [ ] 각각 다음과 같이 바꾸면 됩니다. < > 시간대, 시계 종류, 크기, 배경색 변경은 아래 참조하세요. (2) 블로그 내용에 시계 달기 [embed src=http://www.clocklink.com/Clocks/0001-Orange.swf?TimeZone=GMT0900 width=250 height=250 wmode=transparent bgcolor=#333333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HTML 수정} 누르시고 위의 코드를 복사 - 붙여넣기 한 다음 맨 앞과 두의 [ ] 각각 다음과 같이 바꾸면 됩니다. < > 배경색은 각자 블로그 환경에 맞게 조정하거나 원래 블로그 배경색이 하얀색이면 코드 자체를 아예 없애도 됩니다. bgcolor=#FFFFFF 시계 사이즈는 길이, 높이 숫자를 조정. width=180 height=180 시간대 및 다른 시계 종류 HTML 코드는 ClockLink.com 참조. 첫번째 시계는 색깔 조정이 됩니다. 0001-Orange 0001-Red 0001-Yellow 0001-Green 0001-Blue 0001-Gray 다른 시계들은 색깔이 하나씩 밖에 없네요. 0002-White 0003-Green 0004-Gray [횡설수설 1] 몇 시간 전 어느 블로그에 뜬 시계를 보고 따라해 봤는데요 그 블로그 주소를 잊어 트랙백은 아쉽게도 못 답니다. [횡설수설 2] table 코드 집어넣으면 테이블 위에 빈 공간이 너무 많이 생기는데요 테이블 관련 코드를 모두 줄바꾸지 않고 연속해서 집어넣으니 이제 잘 됩니다. 신기섭 기자님이 올려주신 팁 (덧글에 있음) 보고 (구글 검색이용) 수정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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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미국 인권 민주주의

원문 발췌 번역 + 약간의 첨가 | 원문: 미국, 쿠바, 그리고 민주주의 | U.S., Cuba and Democracy (William Blum) 1959년 쿠바 혁명 이후로 라틴 아메리카는 고문, 실종, 암살로 얼룩졌지만 카스트로 정부를 극렬히 적대시하는 어느 누구도 쿠바에 고문, 실종, 암살이 일상화됐다고 주장하지 못한다. 인권의 중요한 잣대인 의료와 교육에 있어 쿠바는 지난 40여년간 라틴 아메리카 최고 수준을 유지해 왔다. 미국이 걸고 넘어지고 있는 이른바 <민주주의>라는 것은 선거때 마다 후보자 이름 옆에다 X 자 표시하는 행위 그리고 시민권 자유 등 형식적인 정치적 민주주의를 의미할 뿐이며 직업, 식량, 주택등의 경제적 민주주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미국의 지도자들은 자유, 민주주의라는 말을 즐겨 쓰면서도 많은 친미 독재 정권 (사우디 아라비아, 미국과 사이 좋았을 때의 이라크 후세인 정권, 칠레 피노체트 정권 등)을 비호해 왔다. 미국이 민주주의라고 쓰는 말은 사실 다음의 다섯 가지를 의미한다:


1) 세계 전체를 미국의 초국적 기업의 텃밭으로 만드는 것. 2) 미국내 군수업체들을 살찌게 만드는 것. 3) 자본주의 대안 모델이 될 수 있는 그 어떤 사회도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 4) 미국에게 이득이 될 수 있게 가능한한 최대로 정치적, 경제적 헤게모니를 넓혀 가는 것. 5) 냉전주의자들과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그랬듯이 이른바 국제 공산주의자 음모에 대항해 도덕적 십자군 전쟁을 해 나가는 것. ====================================== 원문 발췌 번역 + 약간의 첨가. | 원문: 인권과 쿠바 | Human Rights and Cuba (Felipe Pérez Roque 쿠바 외무부 장관) 쿠바 구안타나모(미국의 영구 임대 군사기지)에서 미국이 벌이고 있는 전쟁포로(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벌이면서도 이들을 전쟁포로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에 대한 인권유린에 대해 유럽연합은 침묵을 지켜왔다. 이것은 명백한 위선이면 이중잣대이다. 미국과 이른바 선진 동맹국들은 이미 평화에 대한 권리를 누리고 있다. 그 국가들은 침략을 받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그들이 항상 침략을 일삼고 있다 (이라크 전쟁). 그 국가들에서는 가난한 이들이 부자들 만큼의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미국에서 가난한 사람이 상원의원이 될 수 있는가(상원의원 대부분이 백만장자들이다)? 부자들의 자녀들이 이라크 전쟁에 가는가? 오히려 가난한 이들의 자녀들이 부자 미국인들의 이익을 지켜주며 죽어가고 있다 (이건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베트남 전쟁 때 한 말과 비슷). 가난한 나라에는 평화에 대한 권리가 없다. 테러리스트, 폭정의 전초기지로 불리거나 해방시킬 필요가 있다는 이유로 폭격과 침략을 당하고 있다. 세계 130여 저개발 국가들은 시장이나 신기술 등에 대한 접근권이 없고 이미 한번 다 갚은 외채에 대한 이자 때문에 경제적으로 수갑을 찬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사회정의> 없이는 <민주주의>는 있을 수 없다. <평등> 없이는 진정한 <인권>이 있을 수 없다. 비록 그것이 종이 위에 형식적으로 있을지라도. 미국은 <군사력>이 강할지는 몰라도 <도덕성>이 없다. 민중을 지켜주는 것은 도덕성이지 무기가 아니다. UN이 이번에 쿠바에 대한 인권결의안을 선언하는 것은 부당하다. 쿠바 혁명후 46년간 쿠바에서는 단 한건도 사법외 처형이나 정치적 실종자들이 없었다. 2004년 1년 동안 라틴 아메리카에서 20명의 기자들이 살해 당했으나 쿠바에서는 46년간 단 한명의 기자도 살해되지 않았다. 죄수들을 간수나 훈련된 맹견 앞에서 무릎 굻게 하는 일도 없었다 (미국 군인들의 이라크 포로 학대 비유). 구안타나모, 이라크, 미국 내(쿠바 청년 5명 구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권유린에 대해서는 왜 UN에서 결의안을 내지 않으려고 하는가? 이번 결의안 상정 시도는 우리가 정의롭지도 평등하지도 못한 세상에 살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 [발췌 펌] 원문: 전쟁 반대! 미제국주의 반대! (김민웅) 오랜 세월동안 미국의 대외정책이 가지고 있는 야만적 본질에 대하여 추적 분석해온 윌리암 블럼(William Blum)은 그의 저서 『불량국가』(Rogue State/Common Courage Press, Monroe, 2000)에서 이렇게 미국의 본질을 갈파하고 있다. "미국의 대외정책이 지난 수십 년 동안 벌여왔던 죄악을 폭로하면 사람들은 마치 연쇄토막 살인사건과 그 범인을 사랑하는 여인의 입장과 같은 상황에 서있게 될지 모른다. 여인은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남자가 그런 끔찍한 일을 벌였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토막 난 시신의 일부를 눈앞에 보여줘도 자신의 애인이 그런 일을 했다고 결코 믿지 못할 것이며, 혹 그걸 인정한다 해도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가 다 무슨 다른 선한 이유가 있어서, 또는 우연한 실수로, 내지는 어떤 경우에 이르면 인도주의적인 동기에서 그랬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 남자가 바로 미국이다. … 그런데 이 미국은 세계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무기를 사라. 우리의 군대와 우리의 자본이 그대들의 땅에 마음대로 들락거릴 수 있도록 하라. 그리고 그대들의 지도자들이 무엇을 결정하든 우리가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달라. 그러면 우리는 그대들을 지켜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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