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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심해. 해가 뜨듯, 좋은 세상이 와”

  • 등록일
    2005/03/27 12:23
  • 수정일
    2005/03/27 12:23
미공개 다큐멘터리로 본 인물 - 조선의용군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 김재중 기자 jjkim@digitalmal.com “사나운 비바람이 치는 길가에, 다 못가고 쓰러진 너의 뜻을, 이어서 이룰 것을 맹세하노니, 진리의 그늘 밑에 길이길이 잠들어라. 불멸의 영령.” 조선의용군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 2001년, 그가 여든 다섯 생을 마감하며 세상에 남긴 마지막 메시지를 『말』이 다시 꺼내든 이유는 조바심 때문일지 모르겠다. 그가 ‘오고야 말 것’이라고 장담하던,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은 아직도 요원하기만 하다. 그렇다. 어쩌면 우리가 그에게서 찾는 것은 ‘위안’일지 모른다. 현실 사회주의로부터 배척받았던 이상주의자의 꿈. 우리는 아직도 그 ‘길’위에 있다. 그리고 그 길을 걸으면서 언제든 그의 목소리를 담은 이 다큐멘터리를 꺼내 볼 것이다. 『길』. 한 비디오저널리스트가 담은 그의 마지막 1년을 축약해 지면에 옮긴다.


다큐멘터리 제작 조천현 전문기자 vjcho@hotmail.com 글 김재중 기자 jjkim@digitalmal.com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 일제강점기 당시 조국을 등진 우리 민족들이 삶의 터전을 일궈온 곳이다. 과거와 현재가 혼재된 도시, 탈북자들이 가장 많이 숨어 살고 있는 도시다. 나는 1990년대 중반부터 이곳을 드나들며 탈북자들을 취재해 왔다. 그러나 그런 활동 때문에 내적 갈등에 빠진 적도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그 이유는 지난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이후 싹튼 남북화해 분위기 때문이었다. 탈북자 문제가 자칫 남북화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지 않을까 고민스러웠던 것이다. 무언가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 헤매던 그런 과정에서 만난 사람이 바로 김학철 선생이었다. 지난 2001년 초, 나는 조선족 문학인 출판기념회장에서 처음 그를 보았다. 그 기회에 나는 평소 알고 지내던 연변문학인으로부터 그를 소개받고자 했다. 그러나 연변문학인들조차 그를 만나기 꺼려하는 분위기였다. 얼마 후 다시 연길을 찾은 나는 혼자서 연길시 총류가에 있는 그의 집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가 살고 있는 집 문에는 ‘볼 일 없는 사람은 이 문을 두드리지 말라(한인막고문)’는 글귀가 붙어 있었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설명하고 그에게 인터뷰에 응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그는 나의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부했다. 그래서 카메라를 숨기고 그가 하는 말을 몰래 담았다. “남북의 통일은, 이북 정권의 붕괴를 전제로 합니다. 어떤 형태로든 붕괴되지 않으면 통일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김일성 부자를 차우세스크 부부에게로 보내버리는 것만이 유일 정확한 통일방안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충격과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내심 북한 정권의 붕괴가 통일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조선의용군, 1938년 일본의 노예가 되기를 거부하면서 일본 군벌을 타도하고 조국의 독립을 되찾기 위해 목숨을 건 122명의 전사들이다. 그가 속한 조선의용대는 일본군의 진지 앞에 까지 침투하여 일본군정을 탐지하고 일본군 문서를 변조하는 등 게릴라 활동을 벌였다. 대원들은 대부분 20대 젊은이들이었다. 김학철, 그는 조선의용대 최후의 분대장이었다. 1941년 12월 중국 화북성 호가장 전투에서 일본군과 격전 중 한쪽 다리에 총상을 입고 일본군 포로가 되었다. 이 전투에서 조선의용군 대원 4명이 전사했다. 동료들은 그가 이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믿고 추도식까지 했으나 그는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그를 포로가 아닌 정치범으로 대우를 했다. 일제 식민지 백성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는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나가사키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형기 내내 그는 강제 노역에 시달렸다. 그러나 일제는 수감기간 내내 총상을 입은 다리를 치료 해주지 않았다. 전향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결국 그는 썩어가는 다리를 절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조국독립에 한 다리를 바친 것이다. 그 후 50년 간 그는 오른쪽 다리 하나로 힘겹게 살아야만 했다. “‘항일투사’라는 말, 역겹다” 2개월 후, 그가 한국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망설임 끝에 그를 만나기 위해 김해공항을 찾았다. 공항에는 윤세주 열사의 가족들이 그를 맞이하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의용군으로 함께 싸웠던 윤세주 열사 탄생 기념강연회에 후손들이 그를 초대했기 때문이다. 강연은 솔직하고 강렬한 힘이 느껴졌다. 강연 중 그는 남북의 왜곡된 독립운동사를 비판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우리는 무장투쟁을 하느라고 했습니다. 큰 성과를 올리지는 못했지만 우리 조선의용대가 일본을 반대해서 싸운 것은 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해방 후에는 역사가 이렇게 잘못 만들어 놓았습니다. 한국에 나온 지는 벌써 10여년쯤 됐는데 일부 독립 운동가들을 만나보니까, 어떤 분들은 전선에 나가보지 않아서 무장한 일본군의 얼굴도 보지 못한 분들 이예요. 중국군이 잡아 온 일본군 포로의 얼굴은 보았겠지만, 무장한 일본군의 얼굴을 보지도 못한 분들이 계속 독립운동가로서 행세를 하고 있더라고. 그것을 몇 십 년 동안 우려먹고 있더라고. 그걸 보고 대단히 실망 했습니다. 그 때 우리가 항일 투쟁을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항일투쟁을) 안하고 어떻게 (그냥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걸 두고두고 우려먹고, 대단히 굉장하시더라고. 그래서 저는 항일투사라는 말만 들으면 막 역겹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밀양서 이거 하신다고 하실 때도, ‘항일투사’라는 말은 빼주십시오 그랬습니다.” 다음 날, 그는 서울로 올라가기 위해 밀양을 떠났다. 일주일간의 짧은 여정 동안 짜여진 계획은 팔순 노인에게는 다소 무리가 따랐다. 그러나 그는 누구에게도 부축이나 도움을 받지 않았다. 혼자서 걷고 혼자서 자기 자신을 책임지는 것이 철저했다. 나는 그와 그의 아들을 마포에 있는 나의 집으로 초대했다. 마포나루는 그의 기억 저 편에 살아 있었다. 1946년 10월, 30세가 되던 해 이 마포나루에서 공산당원 신분으로 조직의 부름을 받아 북으로 갔던 곳이었다. “여기서 배를 탔어. 여기서 배를 타고 어딜 갔냐면, 지금 오두산 전망대 있잖아. 그 앞으로 해서 임진강이 합류되는 데로 해서 쭉 내려가 가지고는 옹진반도로 건너가는데. 해병대들이 검문을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두부장수를 해서 돈을 벌었는데 폭격에 다리를 잃었다. 지금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불편하니까 누이동생하고 조카가 마중 나왔다.’ 이렇게 거짓말을 했지. 그게 통하더라고.” “여기 나루터를 통해서 떠나시고 나서 한국에는 한번도 못 오신 거죠?” “못 왔지. 내가 떠날 때 우리 외삼촌한테 말했거든. 내가 3년 후에 돌아온다. 돌아오면 싹 사회주의 나라로 만든다. 이렇게 큰소리 치고 갔거든. 그런데 43년 후에 돌아왔다고 내가, 일흔이 넘어서 아이구. 그래 돌아왔어.” “나는 내 백골을 봤어” 한국에 혼지 10일째 되던 날 그가 몹시 피곤해하자 주위 사람들이 병원을 찾아볼 것을 권유했다. 검사결과, 평생 목발을 짚고 다닌 데에다 무리한 일정이 겹쳤기 때문이었다. 겨드랑이에 나 있는 종기를 고약으로 치료하려 했지만, 의사는 종합검진을 받자며 입원을 권유했다. 그는 병원 생활을 하고 있으면서도 자신과 관계되는 기사를 꼼꼼히 챙겨 읽었다. 그러던 중 그는 자신의 아픈 과거를 털어놓기도 했다. “하루는 이 놈이(일본간수) 쫓아오더니, ‘야, 네 다리 보겠냐’ 그러는 거야. 자른 다리를 무연고자 묘지에 묻어버렸거든. 그래서 ‘내 다리 어떻게 됐냐’ 그랬지. 그랬더니 ‘야, 말마라, 얕게 묻었던 모양이야’ 하는 거야. 개구멍으로 개들이 들어와서 썩은 다리를 두고 쟁탈전을 벌이더라는 거야. 그래서 이 놈이 마당 쓰는 참대 비로 막 때려 쫓았대. 그리고는 이걸 다시 깊게 묻기 전에 나에게 와서 ‘한번 보겠냐’ 그런 거야. 그래서 내가 ‘가져와라’ 그랬지. 이 놈이 (내 다리를) 새끼줄에 매어 들고 와서 보여주는데. 완전히 백골이 됐어. 그런데 발가락하고 무릎 관절까지 다 붙어있더라고. 그런데 백골은 백골인데 빗물이 들어가 썩어 거뭇거뭇해. 그걸 보고 너무 기가 막혀서 말이야. 그걸 도로 묻었는데, 나는 내 다리, 내 백골 봤어” 그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그런 그에게도 행복한 때가 있었다. 북한 『로동신문』 기자로 일하면서 김일성을 비판하는 기사를 썼다는 이유로 외금강휴양소로 좌천되었던 시절이다. 한국에서도 출판된 소설 『최후의 분대장』은 조선의용대 시절의 항일운동을 다룬 자전적 소설이다. 그는 이 책 후기에서 남북통일은 김일성 부자를 붕괴시키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고 썼다. 이 내용을 보고 한국 내 진보세력들은 그를 멀리하게 되었고, 보수 세력들은 그를 이용하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 그러나 그는 이런 상황에 아랑곳 않으면서 자신의 철학과 신념을 끝까지 지켜왔다. “이북이 자꾸 무슨 수해를 만났다 한재를 만났다 하지만, 체제 자체가 일을 안 하게 돼 있어 그런 거예요. 일을 해도 자기가 갖지 못하거든. 수재나, 천재, 가뭄은 조그만 영향을 끼친 거지. 중요한 것은 체제 문제였어요. 안된다고. 그래서 (중국에서는) 얼마나 굶어죽었냐면 3천만 명이 굶어죽었어요. 3백만이 아니야. 똑똑히 동그라미 하나 더 쳐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었는데도 아침부터 밤까지 ‘지상낙원이다’ 이러거든. 공산당에 제일 중앙, 높은 사람들까지 말이야. 이것들이 어디 사람이야. 백성이 굶어죽는데, 아침부터 위대하다고 만세 부르면 뭐하냐 이거야. 그래서 반발을 했지. 그래서 『이십세기 신화』란 소설을 쓴 거야.” 『이십세기 신화』는 공산주의 운동이 실패했다는 내용을 다룬 소설이다. 그는 1966년부터 1980년까지 중국 당국으로부터 이러한 글을 쓰지 못하도록 금지 당했다. 1966년 중국 문화대혁명 때 『이십세기 신화』의 원고가 발각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그는 10년간 감옥생활을 하고, 14년간 강제노동을 해야만 했다. 『이십세기 신화』는 탈고한지 31년 9개월 만인 1996년 한국에서 출판되었다. 아직도 이 책은 중국의 금서목록에 올라있다. “사회주의 세상은 반드시 온다” 그의 건강상태는 예상 밖으로 나빠져 있었다. 그는 예기치 않는 수술을 해야만 했다. 일주일 후 나는 다시 그의 병실을 찾았다. 아들 김해양씨는 아버지의 기사가 실린 주간지를 읽고 있었다. 북한 인권문제에 관한 기사였다. 독방과 인연이 많은 김학철 선생. 그는 병실이 마치 형무소의 감방과 같다며 답답해했다. 그는 퇴원하여 중국 연길로 돌아가자고 재촉했다. 퇴원을 앞두고 그는 아무이상이 없다는 것을 일부러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듯 식사를 했다. 식사 후 그는 아들의 부축을 받으며 운동까지 했다. 그의 의지력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가 이 세상에서 얻고자 했던 것은 자유를 찾아가고자 하는 사회주의자적 삶이 아니었을까. 병실을 나온 그는 오랜만에 나에게 인터뷰를 자청했다. 사회주의자들로부터 박해를 받고 살아가면서도 결코 사회주의의 길을 포기하지 않은 김학철 선생. 그는 사회주의자임을 분명하게 밝혔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고 바라는 진정한 사회주의는 꼭 실현될 것이라 믿고 있었다. 그는 한국이 처한 빈부의 격차를 가슴 아파하기도 했다. “옆 병실에 모녀가 와서 돈이 없다며 퇴원을 했어. 비참하잖아요. 한쪽에서는 호화판으로 살고. 결국 앞으로 먼 장래에는 사회주의 사회가 된다고. 안 될 수가 없지. (지금까지는) 시행착오야. 시행착오를 해서 개인숭배를 하고 그러니 그게(사회주의가) 되겠어. 20세기에 공산주의자들이 뼈아픈 경험을 했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리고 대가를 치렀어. 이제 다음 세대에는 그런 형태가 나오지 않아.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말이 없어져요.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1당 독재고, 1당 독재는 1인 독재야. 이건 20세기의 뼈아픈 경험이야. 다수당제 가운데서 공산당이 잘해서 정권을 쥐면 쥐는 거고 놓치면 놓치는 거고, 이러면서 의회투쟁을 해나가야지 뭐.” “진정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온다고 믿습니까?” “꼭 그렇게 되는걸 뭐. 아침에 해가 뜨면 한낮이었다가 저녁이 되는 것처럼, 사회발전 법칙에 따라 꼭 된다고. 누가 하겠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누가 안하겠다고 해서 안되는 것도 아니야. 자연의 이치야.” 다음 날, 김학철 선생은 평상시와 같이 중산복으로 갈아입고 떠날 준비를 했다. 그는 자신이 사용하던 모든 것들을 챙기게 했다. 그가 남긴 행적들에 대한 책임 같은 것 때문일까. 그의 꼼꼼한 성격이 단적으로 느껴졌다. 인천공항으로 가는 길. 바다를 가로질러 달리면서 그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그의 눈은 언제나 무엇을 생각하는 눈빛이었다. 평생을 사회주의자로 살아오면서 그는 단 한번도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다. 마지막 여행이라도 되는 듯 그는 아물지 않은 상처를 안고 말없이 중국 연길의 집으로 떠났다. 그가 떠난 지 10여일 후, 나는 동해안을 여행하던 중 중국으로부터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김학철 선생이 위독하다는 아들 김해양씨의 전화였다. 멀쩡하던 그가 위독하다니 나는 불안했다. 그 다음날 나는 연길에 도착했다. 궂은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 내리는 소리가 발길을 더욱 재촉했다. 나는 초조하고 마음이 바빴다. 그의 이층집을 보는 순간 나는 마치 아버지의 마지막 임종 순간처럼 긴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안도했다. 그는 자신이 위독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나를 걱정해줄 정도로 여유를 보였다. 그는 나를 맞이하기 위하여 목욕을 하고 한 치도 흐트러짐 없는 꼿꼿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곡기를 끊은 지 12일째 되는 날이었다. “나는 죽을 때까지 싸웠어” “자기 한명을 알면 그대로 깨끗이 승복하고 가는 게 제일 원칙이라고. 가족에게 조금도 피해를 끼치지 말고. 나는 내 장례식에 딱 열두 명, 가장 친한 사람만 모았어. 부고도 안내. 지난 5월까지 집필하고 서울 가서 석달 입원하고 (이제 곧) 죽는 거야. 나는 죽을 때까지 싸웠어. 외로운 싸움을 했다고.” 외다리 하나로 살아온 그의 인생 역정은 과연 무엇을 위한 투쟁이었을까. 그는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가 쓰던 책이며 물건들은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평소 가장 존경한다는 노신의 문학 전집, 남북을 통틀어 이만한 작가를 찾기 어렵다는 홍명희의 『임꺽정』, 열 번씩이나 통독했다는 우리말 사전. 그는 유언처럼 젊은이들이 나라를 생각하는 삶을 살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는 본래 모습으로 깨끗이 되돌아가야 한다면서 먼저 관장을 하고, 옛 의용군 시절에 입었던 중산복으로 갈아입었다. 조선의용대에 입대하던 그 모습 그대로 그는 삭발도 했다. 그는 그렇게 원하던 대로 누구보다 고결한 임종을 맞이했다. 그를 흠모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인 작가 조정래 선생은 “김학철 선생이야말로 진정한 작갚라고 회고한다. “작가는 진실만을 말하는 존재다. 작가가 외롭거나 괴롭다고 해서 정권과 야합한다면 그건 작가가 아니다. 그래서 인류 문화사가들은 ‘작가는 인류의 스승’이라고 말한다. 이 대목을 철두철미하게 지켜온 작가가 바로 김학철 선생이다. 그 역시 북한이나 중국 정권과 가깝게 지낼 수 있는 기회가 왜 없었겠는가.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이 대목을 모르면 ‘김학철’을 영원히 모르는 것이다.” 임종 후, 그가 마지막으로 살던 집에는 종이 박스에 담겨진 그의 유골이 도착했다. 그런데 유골이 담긴 박스 위에는 ‘홍성걸’이라는 낯선 이름이 적혀 있었다. 홍성걸. 그의 본명이었다. ‘김학철’이라는 이름은 조선의용대에 입대하여 활동하기위한 가명이었던 것이다. 그는 행여 고향의 옛 친구들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것을 걱정해, 유골 함에 본명을 써 넣었다. 그의 유골은 고향을 찾아 두만강을 따라 원산 앞바다로 떠내려갔다. 한 송이 꽃잎 같은 인생. 그가 좋아하던 꽃잎들도 해 저무는 두만강의 노을과 함께 떠내려가고 있었다. 아침 해가 뜨면 한낮이었다가 저녁이 되는 것처럼 사회주의는 필연적으로 온다고 그는 말했다. 그 사회주의는 과연 그의 희망처럼 실현될 수 있을까. 우리에게 인간의 참다운 삶의 길이란 무엇일까. 김학철, 그의 얼굴을 다시 떠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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