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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건 쓰나미가 아니라 가난"

  • 등록일
    2005/03/27 12:08
  • 수정일
    2005/03/27 12:08
김성환의 History Today - 남아시아 해일 재난에 대한 좌파의 시각 편집부 editor@digitalmal.com 김성환 본지 편집위원 작년 12월 16일 남아시아를 강타한 지진해일은 사망자만 15만 명에 이르는 충격적 사건이었다. 언론은 천편일률적으로 인력으로는 어쩔 수 없었던 자연재해라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스리랑카의 트로추기주의적 좌파정당인 사회평등당 총서기 위제 디아스의 지난 2월 4일 시드니에서 있었던 연설을 통해 좌파는 이 재난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들어보자. <본문 > 오늘(2월 4일)은 스리랑카가 영국의 식민통치로부터 독립한 지 57년째를 맞은 국경일입니다. 정부는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해 농민과 군대의 행진 행사를 가질 것입니다. 비록 쓰나미 재난 때문에 그 열기가 예전 같지는 않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의문은 남습니다. 빈농, 어부, 청년 실업자 등 스리랑카의 노동자 대중이 그런 기념식에 참석해야 할 이유가 있는 걸까요. 재난의 주범은 가난


스리랑카 총인구의 5%에 달하는 1천 2백만 명이 지금 난민 캠프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45만 명은 지난 20년 동안 부르주아 정부들이 잇달아 벌인 내전 때문에 떠돌이 신세가 된 사람들입니다. 나머지는 이번 쓰나미로 인해 비참한 상황에 처하게 된 사람들입니다. 쓰나미로 성인 남녀와 어린이 약 4만 명이 죽었고 4천 명이 실종됐습니다. 내전 기간 동안 죽은 사람들이 약 6만 5천 명입니다. 쓰나미는 결코 자연재해가 아닙니다. 피해의 주범은 이 지역 반(半)식민지 국가들 전반에 만연해 있는 가난입니다. 프라풀 비드와이는 <프론트라인 > 최근호에 쓴 글에서 “재앙의 정도는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그 원인은 사회구조에 있다. 일본에서는 1회의 자연재해로 평균 63명이 죽지만 페루에서는 그보다 46배나 많은 2천 9백 명이 죽는다. 1985년 허리케인 엘레나가 미국을 덮쳤을 때 단 5명 만이 죽었다. 그러나 1991년 사이클론이 방글라데시를 강타했을 땐 무려 50만 명이 죽었다. 한번 지진으로 1만 명 이상이 죽는 일은 제3세계에서만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나는 주로 스리랑카에 대해서 언급할 것인데 이는 내가 그곳에 대해 잘 알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곳이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의 여타 후진국들에 만연해 있는 일반적인 상황을 대표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 국가들 국민들 대다수가 겪고 있는 가난은 인재(人災)입니다. 그 가난의 뿌리는 신이나 자연의 영역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연은 이들 나라들에게 유용한 광물자원과 쾌적한 기후조건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국민의 대다수를 비참한 가난에 빠져 있게 한 것은 바로 사회구조인 것입니다. 가옥과 인명 피해를 당한 이들은 주로 바닷가에 살고 있던 빈민들입니다. 그들 대부분은 어부이거나 일정한 직업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집은 오두막이라고나 할 정도로 허술해서 쓰나미는 말할 것도 없고 아주 작은 규모의 홍수나 태풍에도 견디지 못합니다. 쓰나미가 지나간 뒤 찍은 일부 사진에서 때때로 광활한 판자더미 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견고한 집을 볼 수 있었을 겁니다. 자본가의 집은 견뎌낼 수 있을 만한 쓰나미였다는 말입니다. 어부들은 작업 때문에 바닷가에서 살지만, 그 밖의 많은 사람들은 땅 한 뙈기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바닷가에 삽니다. 해안철도는 주변에는 많은 철도용지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곳에 무허가 판잣집을 짓는 것이지요. 지금은 다 날아가 버렸지만요. 그들에게는 은행 통장도 없고 사회보장 혜택도 없습니다. 집이 없어지면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불법 점거자’로 취급받아 보상에서도 제외됩니다. 서민 생명 경시하는 지배층 이들은 사전에 어떠한 경보도 받지 못했습니다. 쓰나미가 스리랑카 동부 해안을 강타한 직후 방송에서 한마디 보도만 했었더라도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었을 겁니다. 해일이 서남 및 남부 해안에 도달하기까지는 30분이 걸렸습니다. 사람들이 15분 동안만 내륙을 향해 걸을 수 있었다면 모두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경보는 없었습니다. 정부 측의 이러한 치명적 실수를 정당화하고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수많은 합리화 논리가 동원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12월 26일이 공휴일이라 관공서가 문을 닫았기 때문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의 원인은 정부나 엘리트층이 서민들의 생명에 대해 총체적으로 관심이 없었다는 데 있습니다. 특히 스리랑카에서는 야만적인 내전 때문에 인간의 생명은 훨씬 값싸게 취급받아 왔습니다. 정부가 서민들의 고통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것은 구호활동에서도 드러났습니다. 정부당국과 군은 재앙이 일어난 지 이틀이 지나도록 손을 쓰지 않았습니다. 자발적으로 일어나 피해 주민들을 도운 인접 지역 주민들이 아니었더라면 수천 명이 더 죽었을 겁니다. 서민들의 이러한 자발적 구호활동은 지배 부르주아 정당들이 노동계급과 피억압 대중들을 갈라놓기 위해 수십년 동안 만들어 내고, 재생산하고, 활용해먹은 인종적, 종교적 갈등을 초월하고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합니다. 제국주의 주인장들에게 철저하게 복종하는 토착 부르주아지들은 대중들의 사회적, 민주적 요구를 해결해 줄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애초부터 그들은 반동적인 싱할라 쇼비니즘의 분리 통치 전략에 의존해야만 했지요, 1948-49년에 타밀어를 하는 플랜데이션 노동자들에게서 그들이 인도에서 온 이주자라는 이유로 공민권을 박탈하면서 시작된 차별정책은 1956년에 싱할라어를 유일한 공식언어로 지정하고 토착 타밀족에게서도 공민권을 박탈하는 사태로 이어졌습니다. 마침내 1983년 내전이 시작되자 쇼비니즘에 대한 호소는 더욱 격렬해졌습니다. 이렇게 인위적으로 조성한 비합리적인 지역분리 정책은 이번 쓰나미 이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생존자들을 구조할 때 아무 위력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도움을 구하는 사람이 싱할라인인지, 타밀인인지, 무슬림인지에는 아무 관심도 없었던 것입니다. 각지에서 온 난민들을 수용하고 있는 장소가 불교 사원이든, 기독교 교회이든, 무슬림 모스크이든 가리지 않았습니다. 민중의 편에 선 노동대중 구호 활동 가운데서도 계급관계가 전면에 드러났습니다. 주도권을 쥐고 활동한 것은 인구 중에서 사회적으로 가장 잘 조직된 노동대중이었습니다. 특히 병원 노동자들은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들은 최근의 건강권을 지키기 위한 투쟁 과정에서 숱한 욕을 들어먹어야 했습니다. 자본주의적 언론매체는 그들은 환자에 대한 적으로 묘사했었지요. 노동대중이 쓰나미 피해자들 구호활동에 즉각 자발적으로 참여하자 지배계급은 겁을 집어먹었습니다. 그건 마치 서민들이 금지된 영토를 침범한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정부는 신속하게 모든 구호활동을 군의 지휘 아래로 이전시켰습니다. 그 결정을 합리화하기 위해 언론을 동원해 대중들이 일으킨 몇몇 유아 성 추행 및 강간 사건을 확대 과장 보도하도록 했습니다. 피해자 및 자원봉사자들 모두로부터의 공적인 분노에 직면한 정부는 한발짝 물러나 군은 난민캠프의 안전만 담당하게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지 않은 1월 6일, 쿠마라퉁가 대통령은 스리랑카의 총 25개 행정구역 가운데 14개 구역에 적용되는 일련의 가혹한 비상조치법을 공포했습니다. 그것들은 의회는 물론 각료회의의 토론도 거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인권위원회가 시민은 자신이 적용받게 될 법률에 대해 알 권리가 있다고 발표하기 전까지 그 법률들은 비밀에 부쳐져 있었습니다. 긴급조치법은 공공질서와 기초 공공 서비스를 유지한다는 미명 아래 군과 경찰에 과도한 권한을 주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임명한 소관 부서장 및 지역 군사령관들은 구호활동을 위해 건물, 토지, 자동차를 징발할 권한을 갖습니다. 나아가 그들은 쓰나미 관련 구호활동 뿐만 아니라 국가안보 관련 일을 위해 어떤 사람에게든 일을 시킬 수 있습니다. 이는 징병제를 실시하는 것과 같은 조치로서 민주적 권리에 대한 중대한 침해인 것입니다. 지난 20년 동안 군의 야만적이고 살인적인 행동들을 상기할 때 이번 조치법들로 인해 대중들이 심각한 위험에 놓이게 된 것은 확실합니다. ‘재난을 독재의 기회로’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쿠마라퉁가 대통령은 남부지방 함반토타에서 가진 군중연설에서 선거는 5년 뒤로 연기해야 할 것이라는 의견을 피력했습니다. 민주적 권리에 대한 이러한 공격에 대해 야당들 가운데 좌파든 우파든 어느 곳도, 심지어 노조 지도부도 항의를 표시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항의의 부재는 ‘쓰나미 충격’의 결과가 아닙니다. 또한 인도주의적 활동이 중단 없이 진행되게 하기 위한 배려에서 나온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돼 대다수 국민이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는 상황에서 노동자와 빈민들의 민주적 권리를 보장해줄 여유가 없어졌기 때문인 것입니다. 현재 스리랑카 인구의 40% 이상이 하루 1달러 수입으로 최저생계비 이하 수준에서 살고 있습니다. 자유무역지대 노동자들은 월 45달러의 임금으로 겨우 생계를 유지하고 있구요. 이러한 상황에서 민주적 권리와 대의정치는 지배계급에게 점점 더 불필요한 부담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헌법을 파괴하고 독재체제를 수립하려는 시도는 그들에게 오랜전부터 하나의 아젠다였습니다. 2003년 11월, 쿠마라퉁가는 국민연합전선 정부로부터 3명의 장관직을 강탈하는 사실상의 헌정 쿠데타를 시도했습니다. 3개월 뒤 그녀는 독단적으로 정부 전체를 장악했습니다. 노동계급을 대변한다고 하는 어느 정당도 이러한 조치들에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안정된 정부’라는 것은 다른 말로 타밀 소수민족에게 전쟁을 선포하는 정부를 말합니다. 한때 스리랑카 최대의 노동계급 정당이었던 랑카 사마 사마자는 스탈린주의 공산당과 함께 대통령 측에 가담하여 반민주 조치들을 지원했습니다. 민주적 권리들을 짓밟은 지배 엘리트들은 제국주의 국가들 특히 부시 정부와의 관계 개선에 의해 더욱 고무되었습니다. 쓰나미 이후 미국은 1만 3천 명의 군사요원과 21척의 해군 함정 그리고 75대의 수송기를 인도양에 배치했습니다. 스리랑카는 부시 정부의 남아시아 지역에 대한 지정학적 전략 구상에서 핵심적인 지역입니다. 예일대의 역사학자 존 루이스 개디스는 뉴욕타임즈에 이렇게 썼습니다. 쓰나미 재난은 “부시에게는 이라크에 대한 선제공격과 그 실패, 그리고 이슬람 세계와의 갈등에서 벗어날 하나의 기회이다. 이곳은 미국이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일을 할 수 있는 모범적 지역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언론이 미군을 인도주의적 구호활동자들로 홍보했음에도 지난 수십년 동안 제국주의에 억압당하고 착취당해온 이 지역의 노동계급과 빈민들은 그들을 환영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베트남이라는 아픈 기억을 간직하고 있으며, 최근 미군이 이라크에서 벌인 야만적 행동들이 이들에게 미 제국주의 및 제국주의 전체에 대한 적대감을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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