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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자 소련 수용소에 갇히다

* 이 글은 간장 오타맨...님의 [“안심해. 해가 뜨듯, 좋은 세상이 와”] 에 관련된 글입니다.
[전문 번역에 들어가기 전] 현실 사회주의가 붕괴했음에도 왜 여전히 사회주의에 대한 열망은 식지 않는가? 프랜시스 푸쿠야마 Francis Fukuyama가 "역사의 종언과 마지막 인간(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이라는 도발적 논문을 통해 자유 민주주의와 기술 주도의 자본주의 체제의 승리를 선포한 후에도 사회주의에 대한 이상은 아직도 꿈틀거리고 있다. 그건 현실 사회주의가 진정한 사회주의답지 못했다는 데 있다. 조선반도의 사회주의자 김학철을 내몰고 감옥에 가둔 김일성 정권과 모택동 정권. 독일의 사회주의자 나탄 스타인버거를 19년간 강제수용소에 갇아버리고 볼셰비키 혁명가들을 죽여버린 스탈린 정권. 아인슈타인이 "왜 사회주의인가"라는 글에서 우려한 대로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은 거대한 관료체제 변질되고 자유, 평등, 연대에 기초한 보다 나은 세상의 꿈을 차단하게 된다. 그들이 사회주의 간판을 내걸고 만든 사회는 결코 사회주의자들이 꿈꿨던 그런 사회가 아니었고 그것이 빌미가 돼 사회주의라는 인류의 이상은 조롱거리가 돼버렸다. 오늘 김학철과 나탄 스타인버거의 삶을 비교해 보면서 진짜 두 사회주의자들은 어떤 삶을 살았고 그들이 이루고자 했던 사회는 무었이었는지 생각해 본다. 소련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많은 이들과는 달리 우파로 전향하지 않은 스타인버거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사회주의라는 말에 덧붙여진 거짓과 억압이라는 쓰레기 그리고 스탈린주의는 전부 영원히 없어져야 합니다. 소련과 그 영향권에 있었던 정권들은 사회주의와 아무 관련이 없었습니다." [번역하고 나서] 잘못됐거나 부적절한 번역 등등 있으면 댓글 부탁합니다. ===================================================================== 원문: 나탄 스타인버거 94세로 세상을 뜨다: 파시즘과 스탈린주의 항거 투쟁에 바친 삶 (Nathan Steinberger dies at 94: A life dedicated to the fight against fascism and Stalinism. By Verena Nees. 2005년 3월 9일) 번역: FLOSS (http://blog.jinbo.net/floss) | 2005년 3월 27일 [1] 2005년 2월 26일 독일 베를린의 한 병원에서 94살의 나탄 스타인버거(Nathan Steinberger)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내인 에디트(Edith)는 2001년에 운명했다. 두 사람은 혁명의 격동과 노동자 운동의 비극적 패배로 점철된 한 시대를 처음부터 끝까지 살았던 세대에서 남은 마지막 생존자들 중의 일부였다. 그들은 살면서 끔찍했던 독일 파시즘과 소련 스탈린주의를 겪어야만 했는데 옛 소련에서 독일 공산당(KPD) 당원으로 살다가 죽지 않고 빠져나온 바 있다. [1997년 나탄 스타인버거 인터뷰 참조 http://wsws.org/articles/2005/mar2005/sint-m09.shtml] [2] 1910년에 베를린에서 정통 유태교 가정의 막내로 태어난 나탄 스타인버거는 비교적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다. 그가 세상에 대해 처음 가졌던 느낌은 전쟁, 굶주림에 이어 일어난 베를린 노동자들의 혁명적 투쟁으로 채워지게 된다. 동시에 그 또한 1920년대의 문화적 회오리 속에 빠져든다. 다섯 살 때 그는 누나에게 줄 오페라와 연극 표를 사려고 줄을 선 적도 있고 그의 형은 다다이즘(Dada) 연극단과 집에서 공연연습을 했다. 그는 다른 여러 공연물에 엑스트라 역으로 출연해 용돈을 벌기도 했고 나이가 꽤 될 때 까지 그의 문학과 그림에 대한 지식으로 친구들과 손님들을 놀라게 했다. [참고] 다다이즘: 1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 문화에 대한 회의에서 나온 예술 조류로 기존 서구 예술에 대한 파격적 저항을 시도했음. [3]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그는 네 살이었고 러시아 혁명 때는 일곱 살이었다. 90살 때 그의 어린 시절의 추억에 대해 질문을 받자 그는 이렇게 회상했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베를린은 소용돌이 속에 휩쌓였다. 모든 이들이 레닌과 트로츠키에 대해 이야기 했다. 뒤돌아 보니 러시아에서 일어났던 일들은 베를린과 독일 전체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고 확실히 이야기 할 수 있다" [4] 1918년 11월 혁명 중의 가장 큰 시위와 거리 투쟁 가운데 일부가 스타인버거 가족이 살던 아파트에서 근처에서 일어났다. 그는 형 레오(Leo)와 함께 빈 탄피들을 가지고 놀았는데, 그 탄피들은 스파르타쿠스단(혁명조직 Spartakusbund 또는 Spartacus League: 나중에 독일 공산당의 핵심 조직 중 하나가 되는데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와 칼 리프크네히트 [Karl Liebknecht]가 주도했음)과 자유의용군(Freikorps: 반동적 준군사조직) 사이의 무장 전투가 잠시 잠잠할 때 거리에서 주은 것들이었다. 종종 수업이 끝난 후 그는 시위에 참여하기도 했고 저녁에는 근처 마을 회관으로 달려가 독일 공산당(KPD), 독일 독립 사회민주당 (USPD), 독일 사회민주당 (SPD) 소속의 노동자들이 벌렸던 뜨거운 정치 토론에 참석하기도 했다. [참고] 자유의용군 (Freikorps) 조직원들이 나중에 나치의 주요 간부들이 된다. [5] 그는 형 아돌프(Adolf)의 영향을 받아 곧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하게 되는데, 아돌프는 나중에 마트하우젠(Mauthausen) 수용소에서 나치에 의해 살해당한다. 공산주의 청년연합(Communist Youth Federation)에 14살 때 들어간 그는 공산주의 고등학생 협회(KoPeFra: Kommunistische Pennälerfraktion)와 사회주의 학생 연합(SSB: 여기서 주도적 역할을 함)을 만드는데 가담한다. [6] 또한 어린 시절 이미 독일 노동자 운동의 문제를 알게 되고 러시아 혁명을 독일에서 해 보려는 시도를 경험하게 된다. [7] 1923년은 공산주의 및 사회민주주의 노동자 사이에 커다란 희망과 긴장이 감돌던 해 였다. 일년 내내 파업이 계속됐다. "정치적으로 의식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 곧 그것이 일어난다' 하는 그런 느낌이 공기 중에 만질 수 있는 물체처럼 있었지요." "베를린의 노동자들과 젊은이들 모두 독일판 10월 혁명을 뜨거운 기대 속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그 때 난 그걸 아주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지요." 따라서 독일 공산당 지도부가 너무나 오래 머뭇거리는 바람에 거센 운동의 정점을 놓쳐버렸을 때는 실망이 더욱 더 클 수 밖에 없었다. "어느 날, 모든 것이 다 끝났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냥 멈춰버린 거죠. 그걸 어떻게 설명할 수 없었지만 갑자기 열정은 사라지고 실망이 퍼졌어요. 독일 공산당에 속하지 않았던 노동자들이 특히 실망했었죠. 며칠 동안 억누르는 듯한 침묵이 이어졌습니다." [8] 러시아 공산당 내에서 스탈린파와 레온 트로츠키가 이끌던 스탈린 반대 좌파(Left Oppositionist) 사이의 투쟁이 일어나자 1923년 이후 독일 공산당 안에서도 갈등이 터지고 만다. 그런 정치적 문제들을 이해하기엔 아직 어렸던 그와 같은 지역내 청년 동지들은 모두 1926년 공산주의 청년연합(KJVD)에서 쫓겨난다. 당시 당 노선에 비판적이었던 지도급 인사인 칼 코르쉬(Karl Korsch)가 그가 속한 지역내 청년동지들 전부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9] 그러나 그는 사회주의 학생연합 활동에 계속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와 그의 친구들은 정치만 가지고 토론한 것이 아니라 에릭 카스트너(Erich Kästner) 아놀드 즈바이크(Arnold Zweig) 같은 작가들과 토론도 하고 심리학과 성에 대해서도 논의했다. 1929년 대학 입학 시험에 합격한 후 제일 좋아했던 과목인 심리학을 연구해 보려고 의학 학부에 등록하기도 했으나 나중에 정치 경제학으로 진로를 바꾼다. 농업 과학을 전공한 그는 당시 모스크바 국제 농업 연구소의 대표적 인물 중의 하나였던 저명한 과학자인 칼 비트포겔(Karl Wittfogel)의 지도를 받았다. [10] 공산주의 청년연합에서 쫓겨난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1928년에는 독일 공산당(KPD)의 당원이 됐다. 스탈린과 그의 추종자들이 주창했던 사회 파시즘 이론이라는 주제를 놓고 그 해 부터 독일 공산당 안에서 격렬한 논쟁이 시작됐다. 그 이론에 따르면 사회 민주주의와 파시즘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스탈린파의 자살적 성격의 정략이 노렸던 것은 점점 영향력을 늘려가고 있던 나치 파시즘 추종자들에게 대항해 사회민주주의 노동자들과 공산주의 노동자들이 벌이려고 했던 그 어떤 연합 투쟁도 무력화 시키려는 것이었다. [11] 그는 본능적으로 이런 정략을 거부했다. "이런 극좌적 정략은 정치적으로 무지한 사람들한테나 먹히는 겁니다. 1918년과 1923년 독일에서 혁명적 경험을 한 이들의 절대 대다수는 사회민주당(SPD)과 나치 파시즘 추종자들을 동일시 하는 그 이론을 배격했어요. 나는 거리에서 대중 선동전을 할 때 그 어떤 경우에도 사회 파시즘이라는 말을 한번도 쓰지 않았어요." [12] 점점 늘어나던 나치의 영향력에 대항해 독일 공산당과 사회민주당 노동자들이 연합 전선을 펼칠 것을 호소한 레온 트로츠키의 글들을 그 무렵 그는 처음 보게 된다. [13] 얼마후 그의 인생의 극적으로 바뀌게 된다. 지도교수였던 칼 비트포겔의 추천을 받아 1932년 학위과정을 마치기도 전에 모스크바 국제 농업 연구소에 일자리를 얻은 것이다. 독일 공산당의 열렬한 당원이던 여자친구 에디트도 함께 가게 된다. 원래 모스크바에 2년만 있기로 돼 있었는데 1933년 히틀러가 집권을 하게 되자 두 사람은 독일로 돌아갈 수 없는 형편이 된다. 두 사람은 독일 공산당 당원으로 알려졌을 뿐 아니라 동시에 유태인이였기 때문이다. [14] 독일에서 노동자 운동이 패배하고 파시즘이 승리하자 두 사람은 절망에 빠지게 되고 그들을 정치로 이끌었던 1920년대의 혁명적 낙관주의와 스탈린 정권 하의 소련은 전혀 공통점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한편 소련 농촌 지역에서 강제 집단농장을 만드는 과정에서 끔찍하고 잔인무도한 일들이 일어났었다고 모스크바 국제 농업 연구소의 선배 연구원들이 그에게 알려준다. 또한 레닌과 가까웠던 동지이자 스위스 출신의 혁명가인 프리츠 플라텐(Fritz Platten) 같은 옛 볼셰비키 혁명가들도 만나게 되면서 플라텐과 예전 당원들이 어떻게 점점 소외돼 가는지도 목격하게 된다. 그 시점에서 이미 트로츠키 지지자들은 국외로 망명했거나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가 참석했던 당 모임에서 개방적인 정치적 토론은 거의 없어지게 된다. 당 민주주의는 관료주의와 음모에 의해 차차 말살돼 간다. [15] 1935년에는 박사학위를 받게 된다. '국가 사회주의의 농업 정치학'이라는 박사논문은 출판되기는 하지만 얼마 안 있어 그의 과학 연구작업은 갑자기 중단되게 된다. 레닌그라드 당 서기 키로프(Kirov) 살해 후 숙청이 시작된다. 스탈린 반대파로 알려진 사람들 뿐 아니라 그때까지 스탈린의 충실한 추종자들까지도 점점 스탈린의 비밀 경찰인 GPU의 손아귀에 들어간다. 1936년 모스크바 국제 농업 연구소에서 해직당한 후 그는 1935년에 태어난 딸 마리안느(Marianne)와 아내를 부양하기 위해 독일어를 가르치면서 겨우 연명해 간다. [16] 모스크바 재판이후 나치를 피해 소련으로 이주했던 독일인들은 체포의 물결 속으로 빠지게 된다. "스탈린은 자신의 정치를 비판할 가능성이 있다면 그 어떤 누구라도 가만두지 않았어요. 그리고 스탈린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의 정치 때문에 독일에서 혁명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죠." [17] 1937년 5월 노동절 전날 저녁 그는 체포당한다. 아내 에디트도 독일이 소련 침략을 개시했던 1941년에 같은 운명에 처한다. 당시 여섯살이었던 딸은 잘 알고 지내던 유태인 가정에서 맡아 주게 된다. [18] 고난은 1956년까지 계속된다. 그는 처음 악명 높았던 부티르키(Butyrky) 감옥에 갇히고 나중에 시베리아의 콜리마(Kolyma)로 이송된다. 그의 죄목은 '반혁명적 트로츠키 행동'이었고 그의 '죄'는 무엇보다도 예전에 독일 공산주의 청년연합에서 15살 때 쫓겨난 것 때문에 더 무거워지게 된다. 아내 에디트는 카자흐스탄(Kazahstan)의 노동수용소로 끌려갔고 거기서 겨우 목숨을 이어 가게 된다. [19] 부티르키 감옥에서 그는 체포의 물결이 결코 제멋대로 이루어 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러시아 10월 혁명에 적극적으로 가담했고 가장 당에 헌신했던 이들이 제1순위로 체포가 됐다는 걸 알게 된다. 그가 처음 감옥에서 함께 지낸 이들은 스탈린 반대 좌파 지노비에프(Zinoviev)의 아들과 옛 볼셰비키 당원이자 당 역사가인 블라디미르 이바노비치 네브스키 (Vladimir Ivanovich Nevsky)였는데 네브스키는 페트로그라드(Petrograd) 혁명 위원회의 조직원으로 1917년 혁명 당시 군 준비 작업에 참여했고 레닌의 제1차 노동자 정부에서 교통부 장관을 지낸 사람이다. 나탄 스타인버거가 부티르키 감옥에 도착하고 몇 주가 지나서 네브스키는 총살을 당한다. [20] 그 당시 스타인버거 부부의 동지들 거의 대부분이 죽었으나 둘은 아무튼 살아남게 된다. 딸과 다시 만난 스타인버거 부부는 1956년 동베를린으로 가게 됐으나 동독 정부는 그들에게 절대적으로 침묵할 것을 강요한다. 스탈린 강제 수용소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하지 못하게 된다. 동독이 무너지고 이어 소련이 해체되고 나서야 비로서 나탄 스타인버거는 끔찍했던 스탈린 치하에서 겪었던 일들을 말할 수 있게 된다. 굴라그(Gulag: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많은 이들과는 달리 그는 우파로 전향하지 않고 청년 시절의 사회주의 이상을 지켜낸다. [21]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스탈린주의는 결코 사회주의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많은 친구들과 지인들이 축하해 주던 90살 생일을 맞이하여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살아오면서 내린 결론을 정리한다: "나는 젊은이들이 스탈린주의가 무엇이었는지 이해했으면 해요. 사회주의라는 말에 덧붙여진 거짓과 억압이라는 쓰레기 그리고 스탈린주의는 전부 영원히 없어져야 합니다. 소련과 그 영향권에 있었던 정권들은 사회주의와 아무 관련이 없었습니다." [22]그의 말년은 평탄하지 못했다. 아내 그리고 알고 지내던 많은 이들이 점점 더 세상을 떠났는데 작년에는 사회주의 학생연합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오랜 학교 친구인 막스 카하네(Max Kahane)가 죽었다. 거의 글을 쓸 수 없었고 청각장애가 심해 사는게 힘들었고 외로웠다. 그러나 유머 감각과 평생지기 친구들과 함께 그가 끝까지 지켜낸 것이 있다. 그것은 새로운 세대가 1930년대가 남긴 교훈을 보고 익혀서 보다 나은 사회를 이루기 위해 그의 세대가 헌신했던 투쟁을 이어받아 해 주리라는 신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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