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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력과 자본, 코카콜라와 인도

바람을 이용한 에너지 생산은 현재까지 가장 환경을 덜 파괴시키는 에너지 생산 방법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전력 총수요를 맞추려면 전국토에 풍력 발전 시설물을 설치해야 한다. 엄청난 항공기 운항 수요에 맞춰 엄청난 에너지를 계속 만들어 내는 것 보다 항공기 운항 자체를 줄여야 한다. 항공기 운항을 줄이면 항공 회사들, 석유 회사들의 이익이 줄어든다. 이와 같은 에너지 덜 쓰기 운동은 근본적으로 자본의 이익과 충돌한다. 가디언 원문 원문 + 추가 보충 자료 인도에 있는 코카콜라 공장에서 막대한 물을 퍼올려 공장 근처 주민들의 식수가 점차 고갈되고 있다고 함. 인도 코카콜라 공장에서 나오는 진흙 폐기물을 근처 농부들에게 비료로 줬으나 과도한 중금속 성분이 들어간 것으로 밝혀짐. 인도에서 판매되는 코카콜라, 펩시콜라에 살충제 잔유 물질이 과다하게 들어갔다고 함. 한겨레21 기사 영어 자료 1 영어 자료 2 영어 자료 3 영어 자료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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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대안언론 소식정리 - 2005.0423

이라크 국회의원 미군 병사가 폭행: 미국의 이라크 점령에 반대하는 한 정치 지도자의 포스터를 자신의 차에 붙이고 가던 이라크 국회의원. 경비소에서 근무중이던 한 미군 병사가 그걸 보고 국회의원 신분증을 그의 얼굴에 내동댕이 치고 수갑 채우고 질질 끌고 갔다고 함. 엑슨-모빌 지구온난화 회의론 단체에게 거액 지원: 지구 온난화라는 말에 회의적인 언급이나 연구를 해 오던 단체들이 석유 재벌 엑슨-모빌로 부터 최소 8백만 달라의 지원금을 받은 것으로 들어남. 미국 컬럼비아 대학 친이스라엘 학생들의 조직적인 학문자유 억압 팔레스타인 문제 토론할 때마다 조직적으로 친이스라엘 발언을 하지 않는 교수들과 학생들을 조롱하고 억압함. 이스라엘 정부 정책과 행위에 대한 정당한 비판도 반유태주의적이라고 비난하는 등 공포 분위기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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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사망 위선의 가장행렬

* 이 글은 보라돌님의 [교황의 선종과 산별탈퇴] 에 관련된 글입니다.

전세계 대다수 대중매체들이 보여주고 있는 교황 우상화는 신물 단계를 넘어 역겨운 지경까지 왔다. 누가 그랬던가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죽었을 때 눈물 찍 콧물 찍 하던 모습은 아름다운 모습이라던 이들이 김일성이 죽었을 때 북쪽 사람들이 눈물 콧물 흘렸던 모습은 소름끼친다고 한 것은 전형적인 오리엔탈리즘이라고. 다이애나나 김일성이나 모두 기존 질서 내의(서구 자본주의 질서 및 스탈린주의 질서) 수혜자들이었고 그들의 죽음에 눈물 흘린 이들은 대부분 기존 질서 이데올로기에 세뇌당한 (유럽 사람이던 북쪽 사람이던) 이들이었다. 물론 그 유명인들과 인간적 정감을 나눴던 일부의 친인척, 친구들은 제외하고 말이다. 앞으로 또 광적으로 대중매체들이 보여줄 장례식 광경과 (거기에는 감옥에 있어야할 전쟁 범죄자 부시와 블레어 등이 찬조출연한다) 자신들이 뭘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울부짓을 신도들의 모습을 떠올리니 지옥의 묵시록이 따로 없다. 교황의 대한 지겨운 추도사는 흘러 넘치니 뭐 또 볼 필요가 없고 비판적은 글들을 살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여기 전문 번역한 호이저와 슈와즈의 글은 최근 진보매체에 실린 교황의 생애를 다룬 글 중 가장 탁월한 글이라 생각한다. 역사적, 정치적 분석을 너무나 정치하게 해놨다. 다른 글 몇가지도 있는데 링크만 이렇게 걸어 놓기로 한다. 원문이 상당히 긴 분량이어서 핵심적인 단락 몇 개를 앞에 실어봤다. 나머지 부분도 읽으면 역사, 정치, 신학 공부가 꽤 될 것 같다. 미국 대중매체와 교황: 정교 분리에 대한 공격 | The US media and the pope—an assault on the separation of church and state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대한 영국식 부고장: 교황의 손엔 피가 묻어있다 | A British Obituary of Pope John Paul II: The Pope has blood on his hands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양치기의 옷을 입은 수구주의자 | Pope John Paul II, a reactionary in shepherd's clothing [주요 단락 발췌 | 전문 번역은 발췌문 아래에] 원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정치적 부고장 |Pope John Paul II: a political obituary 저자: 마리우스 호이저(Marius Heuser) 피터 슈와즈(Peter Schwarz) | 2005년 4월 6일 번역: FLOSS (http://blog.jinbo.net/floss) | 2005년 4월 7일 폴란드에서 터져나온 이런 강력한 노동자 운동은 동유럽 뿐만 아니라 서유럽 정부들의 큰 우려를 불러일으킨다. 폴란드 노동자 운동이 소련과 다른 동유럽 국가들에게 퍼진다면 그건 스탈린주의 통치를 위협할 뿐만 아니라 서유럽에서는 노동자들의 새로운 전투적 투쟁을 고무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투쟁의 물결을 1970년 중반 사회민주주의 및 노동조합 관료들이 막게 된다. 요한 바오로 2세는 폴란드와 동유럽에서 폭력 혁명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큰 위기 의식을 갖게 된다. 그는 스탈린주의 통치가 좌파가 아니라 우파, 즉 폴란드 노동자 계급 중 제국주의에 동조하는 지도층에 의해 전복되게 하려 했다. 이런 그의 노력에 미국 중앙정보부(CIA) 뿐만 아니라 미국 중앙정보부 및 미국 국무부와 연관이 있던 미국 노동 총연맹 산업별 조합 협의회(AFL-CIO)가 여러가지 대외 활동을 통해 도움을 준다. 따지고 보면 카톨릭 교회는 세계 제일의 단일 재산권자이다. 따라서 카톨릭 교회는 잔혹했지만 자본주의적 재산권을 옹호했던 라틴 아메리카의 독재정권을 비호했고 국가 재산권에 기반을 둔 소련 및 동유럽의 스탈린주의 정권에 반대한 것이다. 요한 바오로 2세는 폴란드와 동유럽에서는 자유와 독립이라는 외투로 그의 정치적 개입을 은폐시켰지만 남미에서는 그가 정치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본질적으로 수구적이라는 것을 거리낌없이 펼쳐 보인다. 그는 남미 엘리트 지배계급에 동조하면서 이른바 "해방신학자"들을 처벌한다. 해방신학자들은 억눌린 사람들이 우익 군사 독재정권에 맞서 싸울 때 같은 길을 걸은 이들이었다. 동시에 우익 독재정권을 지지한 사제들은 카톨릭 교회의 고위직에 오르게 된다. 아르헨티나 군사독재정권 시절 교황 대사였던 피오 라기(Pio Laghi)와 칠레 군사독재정권 때 교황 대사였던 안젤로 소다노(Angelo Sodano)는 요즘 둘 다 추기경이다. 생명의 복음(Evangelium Vitae)이라는 회칙을 통해 성(sexual)관습에 대해 강제적인 명령을 내리고 낙태 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피임법을 거부한다. 아이를 낳기 위한 목적이 아닌 모든 성행위는 비도덕적으로 간주된다. 아프리카와 세계 여러 곳에 참혹한 에이즈가 퍼져 있는데도 콘돔조차 쓰지 말라고 하는 정책은 더욱 사회적으로 파괴적이고 비인간적인 것이다. 자신의 우익적인 견해와는 별도로 카톨릭 교회가 억눌린 사람들의 보호자로서의 자세를 갖춰야만 교회가 기존 질서의 기둥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늘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사회적 교의에 대한 수많은 글을 쓰면서 자본가 계급의 과도한 욕심과 사회적 악을 비난했다. 쿠바 방문길에서는 신자유주의와 그 후유증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그러나 이런 비판은 자본주의 제도 그 자체을 겨냥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이라크 1차 및 2차 전쟁에 반대하는 교황의 분명한 입장은 다음과 같은 연관관계로 조명해야 한다. 단기적인 것에 집착하는 부르주아 정치인들에 비해 1500여년의 전통을 지닌 카톨릭 교회의 성직자들은 장기적으로 생각하는 편이다. 미국이 중동에서 벌리고 있는 야만적 행동이 장기적으로는 카톨릭 교회를 포함해 전체 자본주의 세계를 불안하게 만들수 있다고 교황청은 인식하고 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죽음을 이용해 카톨릭 교회를 한번 띄워주려고 대중매체들은 어처구니 없게 장황한 특집보도를 일삼고 있다. 이는 곧 카톨릭 교회와 그것이 옹호하려 하는 부르주아 통치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 [전문 번역] [1] 요즘 대중매체들은 너나 할것 없이 죽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오늘날의 성자로 치켜세우고 바티칸 교황청의 화려하고 신비스러운 장례의식를 아무 생각없이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요한 바오로 2세의 인간적 모습이라던가 현대 역사 속에서 그가 맡았던 역할에 대해서는 깊이 있는 이야기를 거의 안 하고 있다. 교황 재직 27년을 포함해 카롤 요제프 보이틸라(Karol Joseph Wojtyla - 고인의 본명)의 생애 중 가장 두드러졌던 정치적인 문제들은 거의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 [2] 로마 카톨릭 교회(천주교)는 아주 오래 세월 동안 수구 정치의 기반이었다. 프로테스탄트(개신교) 개혁운동을 거부하면서 유럽 봉건 질서의 기둥 역할을 하기도 했고 나중에는 부르주아 지배의 방파제 구실도 했다. 카톨릭 교회를 대표하는 사람으로서의 개인적 특성을 굳이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교황의 역할은 매우 정치적일 수 밖에 없다. [3] 요한 바오로 2세는 정치와 종교에 있어 매우 수구적이었고 자본주의 국가와 스탈린주의 정권을 다루는데 상당한 경험을 쌓고 떠난 교황이었다. 그는 그 경험을 바탕으로 지난 25여년 동안 일어났던 세계사의 격동적 사건들 속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다. [4] 카롤 요제프 보이틸라는 1920년 5월 18일 폴란드의 바도비체(Wadowice)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9살 되던 해 세상을 떴고 옛 오스트리아 제국의 전직 장교였던 아버지는 그가 21살 때 죽었다. [5] 모범 학생으로 알려졌던 그는 1938년 크라코프(Krakow)에서 철학과 문학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연극에 심취하게 된다.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략점령 기간 중에는 강제로 중노동을 하기도 했는데 이 때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고 1942년 크라코프 교구의 지하 신학교에 들어간다. [6] 1946년 11월 1일 사제서품을 받고 그 후 2년 동안 로마에서 지내는데 그 동안 십자가의 성 요한에 대한 신학과 신비주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는다. 그 후 계속 폴란드에 돌아가 계속 공부를 하는데 졸업 후 1954년 루블린(Lublin) 카톨릭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된다. [7] 1958년 9월 28일 주교가 되고 1964년 크라코프의 대주교가 된다. 1964년은 바티칸 교황청의 존속과 운명에 있어 매우 중요한 해이기도 하다. 그해 교황 피우스 12세가 죽게 되면서 그 동안 카톨릭 교회 명성에 먹칠을 했던 교황권력이 끝나게 된다. 즉 피우스 12세는 스페인, 이탈리아, 독일 파시스트 정권들과 협력을 했고 교황청은 유럽 유태인 말살정책에 반대하는 것을 거부한 적이 있다. [8] 후임자인 요한 23세(1958-1963)와 바오로 6세(1963-1978)는 카톨릭 의례와 종교적 관행에 있어 커다란 변화를 주도했는데 라틴어가 아닌 자국어 미사 집전 그리고 여러 자유주의적인 개혁 등이 포함됐다. 요한 23세와 바오로 6세는 또한 카톨릭 교의에 암묵적으로 있었던 반유태주의를 카톨릭 교회에서 없애려고 노력했다. [9] 크라코프 대주교 시절 보이틸라는 폴란드 스탈린주의 정권과 갈등을 빚게 된다. 비록 그는 폴란드 정권의 정치적 지배를 문제삼지 않았지만 카톨릭 교회가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영향력을 계속 쥐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그는 노바 후타(Nova Huta)라는 새로운 산업 도시에서 교회를 세울 수 있게 되고 1967에는 추기경이 된다. [10] 보이틸라가 1978년 10월 16일 교황으로 선출된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덴마크 출신 아드리안 6세가 1년 동안 교황직에 있은 후 455년 만에 처음으로 이탈리아 출신이 아닌 사람이 카톨릭을 대표하게 된 것이다. 두 명의 이탈리아 추기경과 경합을 벌인 끝에 8번째 투표에서 111명의 추기경 중 94명이 폴란드 출신 추기경인 보이틸라에게 지지표를 던진 것이다. 그때 그는 58세였는데 교황치고는 드물게 어린 나이였다. [11] 그가 교황으로 선출된 것은 정치적 의미에서 결코 실수가 아니었다. 1960년대말 부터 서유럽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과 동유럽 스탈린주의 나라들은 모두 격렬한 사회적 갈등으로 인해 계속 흔들리고 있었다. 보이틸라의 전임자인 요한 23세와 바오로 6세는 카톨릭 교의와 카톨릭 내부 권력의 개혁을 통해 사회적 격변에 대응하려고 했다. [12] 즉 1960년대 전반기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카톨릭 교리를 다소 완화시키며 주교와 평신도에게 보다 많은 역할을 주는 개혁의 길을 연 것이다. 요한 23세는 또한 소련과의 관계에 있어 다소 느슨한 정책을 폈는데 바오로 6세는 이 정책을 계속 유지했다. 두 교황 모두 스탈린주의 정권들과 보다 친밀하게 협력하면서 지내려고 했다. [13] 1978년 바오로 6세에 이어 교황이 된 요한 바오로 1세(본명 - 알비노 루치아니 Albino Luciani)는 두 전임 교황의 정책을 이어가려 했다. 그러나 교황이 된지 불과 33일 만에 그는 침대에서 죽은 모습으로 발견된다. 교황청이 부검을 거부했기 때문에 그의 죽음을 둘러싼 정확하고 상세한 내용은 하나도 밝혀진게 없다. [14] 보이틸라가 교황이 되면서 이데올로기와 정치적 측면에서 중대한 전환점이 만들어지게 된다. 그는 얼마 안 있어 시대에 역행하는 교황으로 여겨진다. 즉 더욱 공개적으로 카톨릭 교회를 당대의 새로운 시대정신에 반대하는 세력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개인적으로 전념했던 성인(saint)과 동정녀 마리아 숭배문화를 퍼뜨리고 경직된 사회적 도덕성을 옹호하는가 하면 개별 교구에 대한 교황청의 권위를 강화하며 수 많은 비판적 신학자들을 처벌했다. 정치적인 면에서 볼 때 폴란드 출신 교황을 선출하는 것은 레오니드 브레즈네프(Leonid Brezhnev)의 소련 정권에 대한 도전을 의미한 것이다. -- 교황과 폴란드 연대노조 (the Solidarity) -- [15] 교황 선거가 있을 무렵 폴란드에서는 스탈린주의 정권과 노동자 계급간의 갈등이 극적으로 높아진다. 1956년 노동자들의 반란을 정부가 유혈진압한 이후 폴란드는 여러 사회적 갈등이 계속 되면서 점차 무너져 간다. 1970년 생활필수품 가격 인상에 반대하는 시위의 물결 속에 집권당 및 정부의 최고 권력자인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Wladyslav Gomulka)가 강제로 사퇴한다. 그의 후임자인 에드바르트 기에레크(Edward Gierek)는 가격인상을 철회한다. [16] 1976년 기에레크가 다시 가격인상을 시도하자 파업과 대규모 시위 및 바리케이드 투쟁이 시작된다. 그 이후로 노동자 방어위원회 및 독립 노동조합들의 초기 위원회가 조직된다. 다시 시작된 가격인상 반대 파업 후 1980년에는 이 조직들이 하나로 통합돼 연대노조(the Solidarity)를 만드는데 수백만의 노동자들이 참여하게 된다. [17] 폴란드에서 터져나온 이런 강력한 노동자 운동은 동유럽 뿐만 아니라 서유럽 정부들의 큰 우려를 불러일으킨다. 폴란드 노동자 운동이 소련과 다른 동유럽 국가들에게 퍼진다면 그건 스탈린주의 통치를 위협할 뿐만 아니라 서유럽에서는 노동자들의 새로운 전투적 투쟁을 고무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투쟁의 물결을 1970년 중반 사회민주주의 및 노동조합 관료들이 막게 된다. [18] 사회민주주의자인 독일의 헬무트 슈미트(Helmut Schmidt) 총리는 폴란드 노동자들에게 맞서는 기에레크 정부를 꾸준히 지원했고 기에레크와는 개인적인 친분을 유지하기도 했다. [19] 요한 바오로 2세는 폴란드와 동유럽에서 폭력 혁명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큰 위기 의식을 갖게 된다. 그는 스탈린주의 통치가 좌파가 아니라 우파, 즉 폴란드 노동자 계급 중 제국주의에 동조하는 지도층에 의해 전복되게 하려 했다. 이런 그의 노력에 미국 중앙정보부(CIA) 뿐만 아니라 미국 중앙정보부 및 미국 국무부와 연관이 있던 미국 노동 총연맹 산업별 조합 협의회(AFL-CIO)가 여러가지 대외 활동을 통해 도움을 준다. [20] 요한 바오로 2세와 카톨릭 교회의 스탈린주의에 대한 적대감을 대중매체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헌신으로 동일시한다. 이건 아주 기괴한 왜곡이다. 5백년이 넘도록 민주주의에 가장 비타협적으로 반대하는 조직을 이끌어 온 것은 바로 교황이기 때문이다. 그 역사는 카톨릭 교회가 봉건 영주로서 사제계급의 권력과 재산을 옹호하려고 했던 즉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났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21] 카톨릭 교회의 스탈린주의에 대한 증오는 스탈린식 관료체제의 반민주적이고 카스트(caste)적인 지배 때문이 아니다. 하나의 조직으로서 카톨릭 교회의 내부를 운영하는 모습은 반민주주의적이고 카스트적인 지배와 완벽하게 일치한다. 카톨릭 교회의 성직자 계급제도 자체가 하나의 카스트 제도이며 그건 자본주의 사회 이전에 시작돼 현재는 자본주의 사회 관계 속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다. [22] 따지고 보면 카톨릭 교회는 세계 제일의 단일 재산권자이다. 따라서 카톨릭 교회는 잔혹했지만 자본주의적 재산권을 옹호했던 라틴 아메리카의 독재정권을 비호했고 국가 재산권에 기반을 둔 소련 및 동유럽의 스탈린주의 정권에 반대한 것이다. [23] 이렇게 근본적으로 수구적일 수 밖에 없는 카톨릭 교회는 공개적으로 폴란드 연대노조에 동조하게 된다. 교황으로 임명된 후 8개월이 채 지나기 전 요한 바오로 2세는 폴란드로 처음 "순례자의 여행"을 떠나고 1983년과 1987년에도 그의 고국을 방문하게 된다. 1980년 1월 그는 레흐 바웬사(Lech Walesa)가 이끄는 연대노조 방문단 일행를 만난다. 그 후 여러 경로를 통해 교황청은 최소 5천만 달라를 모아 연대노조에게 재정지원을 한다. [24] 그러나 교황청의 목적은 노동자들의 사회적 요구를 지원하려는 게 아니었다. 그건 오히려 노조운동을 수구적인 카톨릭 이데올로기와 폴란드 민족주의 영항 밑에 두려고 한 것이며 노조운동이 기존 질서에 대항하는 국제적인 위협으로 커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반세기에 걸쳐 권위와 질서를 수호하면서 쌓은 경험을 지닌 위계질서 속의 카톨릭 교회는 폴란드에서 진행중인 그런 대중운동이 수동적 방법으로는 통제될 수 없기에 적극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해 다른 방향으로 돌려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25] 폴란드 출신 교황의 임명 후 폴란드에서는 카톨릭교가 급속히 안정적으로 정착된다. 보이틸라는 지치지도 않고 계속 그가 폴란드 출신임을 말하면서 폴란드 민족주의에 아부하고 폴란드를 기독교 국가라고 알려 나간다. 1979년 6월 바르샤바 승리의 광장에 모인 기쁨에 들뜬 사람들을 앞에 놓고 그는 "폴란드 민족이 인도주의와 인류의 발전"에 이바지한 업적을 칭송하면서 그것은 오로지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해되고 평가되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연설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절정을 이룬다: "유럽 지도에 독립적인 폴란드 없이는 유럽이라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다!" [26] 교황이 폴란드에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폴란드 노동자들은 그 후 일어난 대량실업과 극심한 가난 같은 비참한 일들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출범 당시 연대노조 운동에는 카톨릭 뿐만 아니라 비종교적이고 사회주의적인 강력한 세력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세력들은 스탈린주의 정권에 저항할 효과적인 전망이 부족했다. [27] 교황청이 개입하면서 바웬사를 중심으로 한 카톨릭 민족주의 진영이 노조운동을 주도하게 된다. 레닌 조선소에서 전투적인 노동 지도자로서 쌓은 명성과 완고한 카톨릭 신앙을 크게 내세운 레흐 바웬사는 공공연하게 교황의 역할을 인정했는데 1989년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위대하신 교황 성하이시며 위대하신 인간이신 요한 바오로 2세 없이는 연대노조와 내 자신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28] 교황은 연대노조에 정치적으로 재정적으로 도움을 주기 했지만 폴란드 정권과는 공개적으로 대결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온건하고 절제있게 행동해 주길 바란다고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정부와의 대결이 더욱 과격해지자 연대노조는 노동자들은 절제시키고 통제하기 위해 점진적으로 개입해 갔다. [29] 연대노조는 권력 때문에 싸우는 게 아니라고 바웬사는 계속 강조했다: "우리는 통치하길 원하지 않고 오히려 정부가 우리를 인정해 주길 바랍니다. 우리는 정부가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를 감시하고 싶을 뿐입니다." 1981년 12월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Wojciech Jaruzelski) 정권은 군사 계엄령을 선포하고 수천 명의 노동자와 연대노조 지도자들을 체포했다. 나중에 야루젤스키는 교황이 보여줬던 절제심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기도 했는데 교황의 사망 사건을 다룬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교황이 그 때 사회적 감정을 자극하지 않도록 잘 참았줬다"고 말했다. [30] 폴란드 스탈린주의 정권 몰락 후 노조 지도자들이 집권하고 자본주의를 재도입하면서 연대노조가 노동자 계급 앞에서 스스로의 신뢰성을 빠르게 깍아내려가자 교황은 그 속도에 점점 더 걱정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결과적으로 카톨릭 교회의 영향력에 상처가 생길 수 있으며 새로운 질서가 위험에 빠질 수 있다며 어느 정도 타당한 걱정을 했다. [31] 1991년과 1993년 고국 방문 때 그는 단순히 서구식 자본주의를 모방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2003년 마지막 폴란드 방문 중에는 더욱 대놓고 이야기했다. 자유를 얻기 위해 치른 댓가를 잊어버릴 때 "무정부주의 상태"가 멀지 않게 있다고 했다. 그는 연대노조가 정치에서 손을 떼야 한다고 훈계했고 폴란드에서 일어나고 있는 두드러진 사회 부조리를 지적했다. 그건 바로 임금은 제대로 지불되지 않고 소규모 회사들은 거의 다 없어지고 노동자들은 휴가 및 가족들과 지낼 시간을 뺐겨가는 현실이었다. -- 소련에 대한 요한 바오로 2세와 미국의 정책 -- [32] 폴란드 태생 교황을 선출한 카톨릭 교회의 결정은 미국의 대소련 외교정책의 변화와 밀접히 맞물려 있었다. 지미 카터(Jimmy Carter) 정권 시절 그리고 로날드 레이건(Ronald Reagan) 정권 때에는 더욱 더 공개적으로 적대적 대결 정책이 긴장완화 정책으로 바뀌어 갔다. [33] 크라코프 대주교로서 보이틸라는 지미 카터 정부의 국가안보 담당 보좌관으로 있던 폴란드 태생의 브렌진스키(Zbigniew Brzezinski)와 이미 수많은 편지를 주고 받고 있었다. 미국의 공식 대표자로 요한 바오로 1세의 장례식에 참석한 브레진스키는 1978년 교황 투표 기간 내내 로마에서 머물렀고 보이틸라는 교황으로 뽑힌다. [34] 이러한 교황청과 미국 사이의 협력 관계는 레이건 정권 시절 더욱 강화된다. 당시 교황청 미국 대사였던 제임스 니콜슨(James Nicholson)은 소련에 대항하는 미국과 교황청 간의 "전략적 동맹"을 이야기한다. 교황청의 비밀 외교에 대한 책을 펴낸 언론인 칼 번스타인(Carl Bernstein)과 마르코 폴리티(Marco Politi)가 모은 정보에 따르면 미국 중앙정보부 국장인 윌리암 케이시(William Casey)와 부국장인 버논 월터스(Vernon Walters)는 1981년 부터 교황과 정기적으로 비밀스런 의논을 했다고 한다. 주로 내용은 연대노조에 대한 미국 중앙정보부의 재정적 지원 및 세부적 계획 수립 및 실행 작업 지원이었다. [35] 외부의 압력이 깊어지고 내부적 사회 압력이 늘어가자 소련의 지배 관료계급은 자본주의 전환 정책을 시행하게 된다. 미하일 고르바체프(Mikhail Gorbachev)가 소련 공산당 당수가 된 것은 아이러니칼하게 들리지만 로마에서 보이틸라를 교황으로 뽑았던 것과 별 다를바 없는 이유때문이었다. 폴란드에 일어난 사건들은 소련 관료계급을 심하게 흔들게 된다. 결국 소련 지배계급은 자본주의 재산권을 도입해 새로운 통치 기반을 만들어 소련에서는 폴란드에서와 같은 비슷한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고르바체프가 실행했던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 개혁정책)의 핵심적 목적이었다. [36] 1989년 12월 고르바체프는 소련 공산당 총서기로서는 처음이자 유일하게 바티칸에서 교황을 만나게 된다. 3년 후 고르바체프는 다음과 같은 말로 교황의 역할을 칭송하게 된다: "교황이 없었더라면 요 몇해 동안 동유럽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은 불가능했었을 것입니다." -- 교황과 남미 -- [37] 요한 바오로 2세는 폴란드와 동유럽에서는 자유와 독립이라는 외투로 그의 정치적 개입을 은폐시켰지만 남미에서는 그가 정치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본질적으로 수구적이라는 것을 거리낌없이 펼쳐 보인다. 그는 남미 엘리트 지배계급에 동조하면서 이른바 "해방신학자"들을 처벌한다. 해방신학자들은 억눌린 사람들이 우익 군사 독재정권에 맞서 싸울 때 같은 길을 걸은 이들이었다. [38] 1983년 처음 니카라구아를 방문하면서 요한 바오로 2세는 공개적으로 에르네스토 카르데날(Ernesto Cardenal) 신부를 질책하는데 카르데날 신부는 두 명의 동료 신부들과 함께 산디니스타(Sandinista) 정부에서 장관직을 맡고 있었다. 1995년 다시 니카라구아를 방문하면서 교황은 민중교회(Iglesia Popular: People’s Church)와 그가 자기 마음대로 낙인 찍은 "혁명과정에 참여한 기독교인들의" 잘못된 교회일치운동을 힐난한다. 동시에 그는 산디니스타의 극렬한 반대자인 우익 계열의 대주교 미구엘 오반도 이 브라보(Miguel Obando y Bravo)를 추기경에 임명한다. [번역자 추가] 산디니스타 정권: 소모사 독재정권을 몰락시키고 1979년-1990년 집권한 민중 중심의 사회주의 정부. 교회일치운동(ecumenism): 카톨릭, 개신교 등 교파를 초월한 기독교 교회 통합 운동. [39] 요한 바오로 2세는 수많은 해방신학자들을 쫓아내고 그들 자리에 보수적인 주교들과 사제들을 심어놓는다. 르 몽드 디쁠로마띠끄(Le Monde Diplomatique)에 실린 프랑스와 우타르드(François Houtard)의 글 중 일부를 보도록 하자: "자율과 가나한 사람들의 권리보호를 내세우며 남미에서 생긴 풀뿌리(민중) 교회 조직들은 고립되가고 일부는 파괴되기도 했다. 그들과 함께 한 신부들은 사제직을 박탈당했고 공동체 시설에 접근할 수 없게 됐다. 때로는 새로운 조직들이 똑같은 이름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번역자 추가] 르 몽드 디쁠로마띠끄: 프랑스에서 발간되는 대표적 좌파 잡지. 웹사이트 http://mondediplo.com [40] 동시에 우익 독재정권을 지지한 사제들은 카톨릭 교회의 고위직에 오르게 된다. 아르헨티나 군사독재정권 시절 교황 대사였던 피오 라기(Pio Laghi)와 칠레 군사독재정권 때 교황 대사였던 안젤로 소다노(Angelo Sodano)는 요즘 둘 다 추기경이다. [41] 소다노는 칠레에서 살인을 일삼은 피노체트(Pinochet)의 독재 통치를 다음과 같이 칭찬한다: "명작에도 작은 실수가 있기 마련이다. 그림에 있는 실수에 너무 신경쓰지 말고 그림이 주는 멋드러진 전체적인 느낌에 집중하기를 바란다." 1998년 런던에서 피노체트에게 체포영장이 발부됐을 때 교황 스스로가 칠레의 파시스트 장군이었던 피노체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기도 했다. [42] 스스로 반유태주의자임을 공언한 피우스 9세, 나치와 무솔리니 정권에 협력한 피우스 12세, 2차 세계대전 중 크로아티아(Croatia) 파시스트 정권과 가까웠던 스테프니아크(Stepniak) 추기경 등을 위한 시복식을 거행함으로써 요한 바오로 2세는 자신의 우익 신념을 좀 더 보여주게 된다. [번역자 추가] 시복식: 성인의 반열에 들기 이전 (시성식) 거쳐야 하는 복자 추대 의식. "복자"란 하늘의 복을 받은 자로서 신앙의 모범을 보인 인물. -- 보수적인 교회 정책 -- [43] 카톨릭 교회의 극보수적인 교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요한 바오로 2세의 교회 정책은 수구적이었다. 1960년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시작된 개혁 정책들의 정신을 되돌려 놓는 정책을 펴기 시작한다. [44] 우선, 그의 성모 마리아와 성인 숭배문화를 들 수 있다. 473명에게 시복을 함으로써 전임 교황들이 400여년 동안 추대한 성인 숫자 보다 2배 이상 많은 성인을 만들어 낸다. [45] 생명의 복음(Evangelium Vitae)이라는 회칙을 통해 성(sexual)관습에 대해 강제적인 명령을 내리고 낙태 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피임법을 거부한다. 아이를 낳기 위한 목적이 아닌 모든 성행위는 비도덕적으로 간주된다. 아프리카와 세계 여러 곳에 참혹한 에이즈가 퍼져 있는데도 콘돔조차 쓰지 말라고 하는 정책은 더욱 사회적으로 파괴적이고 비인간적인 것이다. 독일정부의 합법적 낙태제도의 일부로 운영되며 임신한 여성들에게 조언을 해주는 모든 위원회에서 (독일의 주교들과 신도들의 거센 저항에도 불구하고) 카톨릭 교회가 철수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46] 교황의 보수적인 인사(personnel) 정책 또한 지속적으로 갈들을 불러 일으켰다. 여러 교구에 보수적인 주교들(Wolfgang Haas, Joachim Meisner, Hans Hermann Gröer, Kurt Krenn)을 독단적으로 임명함으로써 논쟁의 불을 지폈다. 레오나르도 보프(Leonardo Boff), 오이겐 드레버만(Eugen Drewermann), 한스 쿵(Hans Küng), 티사 발라수리야(Tissa Balasuriya) 등 비판적 신학자들에겐 출판 금지 및 수업 금지 명령을 내려 재갈을 물려놨다. [47] 교황을 비판한 1980년의 논문으로 인해 교회 내에서의 수업 금지 명령을 받은 스위스의 신학자인 한스 쿵은 교회의 내부 분위기와 요한 바오로 2세의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교황은 그의 권위를 이용해 시복자의 숫자를 너무 부풀려 놓고 있다. 그는 동시에 독재적 권력을 이용해 평판이 좋지 못한 신학자, 사제, 수도자, 주교에 대한 조사를 지시하는데 누구보다 먼저 비판적 생각과 열정적인 개혁으로 알려진 신자들을 조사 형식을 빌려 처벌한다. 피우스 12세가 그 시대 가장 중요한 신학자들(Chenu, Congar, de Lubac, Rahner, Teilhard de Chardin)을 처벌한 것 처럼 요한 바오로 2세와 그의 수석 조사관인 랏징거(Ratzinger) 또한 비판적 사제와 신학자들(Schillebeeckx, Balasuriya, Boff, Bulányi, Curran, 프랑스 Gaillot 주교, 미국 시애틀 Hunthausen 대주교)을 처벌했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카톨릭 교회는 탄핵, 공포, 자유의 결핍이 퍼져있는 감시기구로 변질돼 가고 있다. 주교들은 자신들을 평신도들의 종이 아니라 교황청에서 파견된 통치자로 여기고 있다. 신학자들은 체제순응적으로 글을 쓰거나 아예 절필을 해 버린다. [48] 비판적 목소리들은 침묵을 강요받는 동안 근본주의적이며 철저한 서열체계로 만들어진 오푸스 데이(Opus Dei) 같은 조직이 교회 성직자 계급제도 내에서 영향력을 점차 늘려갈 수 있었다. 많은 오푸스 데이 조직원들이 주교와 추기경으로 임명됐다. 오푸스 데이는 카톨릭 교회의 중앙 행정기관인 교황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고 다음 교황을 선출하는데 중대한 역할을 할 수도 있다. [49] 오푸스 데이는 1928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예수회(Jesuit) 소속의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Josemaria Escrivá)가 만들었는데 전세계적으로 8만명의 회원이 있는 비교적 작은 조직이다. 오푸스 데이는 스페인의 파시스트 프랑코 정권 하에서 번성하게 되는데 당시 10개 교구의 주교직을 꿰찼다. [50] 죽은 지 불과 27년 만인 2002년 요한 바오로 2세가 시복을 내린 에스크리바는 한때 히틀러를 "스페인 교회의 구원자"로 묘사한 적도 있다. 오푸스 데이는 비밀 결사체처럼 조직되는데 침묵 맹세에서 부터 빈번한 기도, 채찍과 허리띠를 이용한 자기 징벌행위 등 일련의 독자적인 행동 지침을 갖고 있다. 또한 사내다움과 통솔력을 받드는 풍조를 퍼뜨리면서 여자를 "열등하다"고 정의하고 여자들의 복종과 엄격한 순종을 요구한다. [51] 많은 전임 교황들과 비교가 될 만큼 요한 바오로 2세는 타종교들에 대해서는 개방적 정책을 추구했다. 그는 개신교 교회(1983년), 유태교 회당(1986년), 이슬람 사원(2001년)을 방문한 최초의 교황이었다. 1986년 이래 해마다 타종교 신자들이 함께 기도하는 세계 기도 모임이 열리고 있다. 2000년에 교황은 이스라엘의 홀로코스트 기념관을 방문해 카톨릭 교회 역사 속에서 신자들이 저지른 죄에 대해 용서를 구했으나 홀로코스트에 침묵을 지킨 피우스 12세와 카톨릭 교회와의 관계를 끊어놓질 않았다. [52] 무엇보다 먼저 위기 상황으로 점철된 부르주아 사회를 지탱시키는 역할로 종교를 강화시킬 필요가 있자 겉으로는 이렇게 관용적인 것처럼 떠벌리고 다니고는 있었으나 이런 모습은 그의 관용적이지 못한 교칙과는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불과 이년 전에 교황은 다른 교파와 연합해 종교단체를 만들지 못하게 명령을 내린다. 한편 타종교들은 오류가 상당히 있다는 비판도 서슴치 않았고 그가 지지한 "도미누스 예수스(Dominus Jesus)"라는 선언문은 개혁 교회가 진정한 교회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 교회의 위기 -- [53] 자신의 우익적인 견해와는 별도로 카톨릭 교회가 억눌린 사람들의 보호자로서의 자세를 갖춰야만 교회가 기존 질서의 기둥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늘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사회적 교의에 대한 수많은 글을 쓰면서 자본가 계급의 과도한 욕심과 사회적 악을 비난했다. 쿠바 방문길에서는 신자유주의와 그 후유증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54] 그러나 이런 비판은 자본주의 제도 그 자체을 겨냥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19세기 후반 노동자 계급 속에서 사회주의가 중요한 세력으로 처음 등장하자 카톨릭 교회는 사회적 교의를 명료하게 가다듬어 사회주의의 영향력에 대항하려고 했다. 그것은 바로 사회주의 혁명을 정죄하는 한편 자본주의에 대해 제한된 비판을 하고 노동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의 곤경에 대해 동정의 마음을 전한다는 것이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러한 전통의 틀 안에서 많은 일을 했다. 즉, “100주년 회칙(Centesimus Annus)”을 통해 사회주의는 본질적으로 무신론주의라고 거부해 버린다. [55] 이라크 1차 및 2차 전쟁에 반대하는 교황의 분명한 입장은 다음과 같은 연관관계로 조명해야 한다. 단기적인 것에 집착하는 부르주아 정치인들에 비해 1500여년의 전통을 지닌 카톨릭 교회의 성직자들은 장기적으로 생각하는 편이다. 미국이 중동에서 벌리고 있는 야만적 행동이 장기적으로는 카톨릭 교회를 포함해 전체 자본주의 세계를 불안하게 만들수 있다고 교황청은 인식하고 있다. [56] 2차 이라크 전쟁이 일어나기 바로 직전 교황은 기독교 신자인 이라크 부수상 타리크 아지즈(Tariq Aziz)를 만나고 워싱톤과 바그다드에 특사를 보내 전쟁을 막아보려고 노력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2차 이라크 전쟁을 비난했다: "강대국이 약소국을 상대로 벌이는 이 전쟁은 그 어느 때보다 더욱 더 부자들과 가난한 사람들 사이를 갈라놓는 분열의 골이 깊이 파져 있음을 보여줍니다." [57] 요한 바오로 2세의 평화와 사회적 조화에 대한 언급은 그의 이데올로기와 정치적 행적과는 뚜렷하게 대비된다. 대중선동의 가치를 충분히 살리면서 진행된 100여 차례의 해외 여행과 그러한 언급의 효과로 그의 즉위 기간 동안 카톨릭 신자 수는 급격히 늘어난다. 현재 카톨릭 교회의 신자 수는 10억여명이 넘으며 그중의 반은 남미와 북미가 차지하고 있다. [58] 그러나 신도 수가 증가했다고 해서 카톨릭 교회 자체가 직면하고 있는 광범위한 위기상황이 덮어질 수 있는 건 아니다. 신자 증가율은 전체 인구 증가율을 따라잡지 못해 왔다. 인구 증가율만큼 신도 수가 늘어나는 곳은 카톨릭이 작은 규모의 소수 종교로 돼 있는 아프리카와 아시아 일부에서 뿐이다. 증가율을 비교해 볼 때 남미는 정체 상황이고 유럽과 북미는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남미에서는 카톨릭 교회가 다양한 복음주의적 개신교 교회들에게 그 기반을 뺐기고 있는 현상이 광범위하게 포착되고 있다. [59] 대중매체들이 요한 바오로 2세를 거의 성인화시키고 있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카톨릭 교회의 대중 장악력은 계속 감퇴하고 있고 스스로를 카톨릭 신자라고 여기는 사람들 사이에서 조차도 카톨릭 성직자들에 대한 평판은 매우 나쁜 상태이다. 적극적이고 헌신적인 교구 신자들이 떠나가면서 몇 나라에서는 교회가 재정 위기까지 직면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디트로이트를 비롯한 주요 도시에서 카톨릭 학교들이 문을 닫고 있다. [60] 사제들과 교회 관리자들이 연루된 최근의 성학대 추문으로 인해 이러한 위기는 증폭돼 왔다. 즉위 기간 동안 일어났던 광범위한 아동 성학대 추문을 요한 바오로 2세가 감추려고 했다는 것도 이제 분명해 졌다. [61] 그는 미국, 아일랜드, 오스트리아 등의 카톨릭 교회에서 일어난 성학대 행위를 은폐하려 했고 성학대 행위가 대중에게 알려지면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치부해 버렸다. 이는 곧 교황청의 성관습 문제에 대한 태도가 얼마나 가식적이었는지 분명히 보여준다. 이는 또한 보통 사람들의 정상적 성관습에 대해서 끊임었이 도덕성을 요구한 카톨릭 교회의 태도와도 뚜렷한 대조가 된다. 이를 통해 요한 바오로 2세와 교황청 전체의 주된 관심사는 성직자 계급과 그들의 권력, 권위, 그리고 자체 비리에 대한 감시를 받지 않으려는 의지를 지켜내는데 있었다는 것을 생생히 알 수 있다. [62] 요한 바오로 2세는 카리스마가 있는 사람이었고 카톨릭 교회에 대한 대중의 지지도가 계속 떨어지자 이를 어떻게든 만회해 내고 교회를 굳건히 붙들어 두는 능력도 있었다. 그가 떠남으로써 구태스럽고 딱딱하게 굳은 수구적 카톨릭 교회에 대한 안밖의 압력은 증폭될 것이다. 요한 바오로 2세의 죽음을 이용해 카톨릭 교회를 한번 띄워주려고 대중매체들은 어처구니 없게 장황한 특집보도를 일삼고 있다. 이는 곧 카톨릭 교회와 그것이 옹호하려 하는 부르주아 통치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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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국가공격부: 악마의 사전

국방부. 국가 방위부의 준말이다. 영어로는 Department of Defense. 그런데 미국 국방부를 보면 이건 국가 방위부가 아니라 국가 공격부다. 국공부. Department of Offense. 반만년 역사 동안 외침을 한 적이 별로 없다는 한국도 어떻게 미국 국공부와 엮이다 보니 베트남에서는 적극적 공격임무를 이라크에서는 공격 임무에 충실한 미군을 도우기 위해 이른바 재건임무를 떠맡았다. 악마의 사전이라는 게 있다. 흔히 알고 있는 단어들이 엉뚱한 뜻을 갖게 되는 현상을 모아 정리한 건데 종류도 여러가지다. 오늘은 부시 정권때 만들어져 가고 있는 기괴한 단어 중 몇 개 발췌해 보기로 한다. --------------------------------------------------------------------------------- [원문] 부시 시대의 악마의 사전에 삽인된 단어들 Entries for a Devil's Dictionary of the Bush Era 민주주의 [명사]: 1.과도하게 수출되어 국내 공급이 고갈된 제품. 2.우리한테만 투표할 때 해당 (참고, 폭정: 다른 이에게 투표할 때 해당) 사회 안정: 다음의 두가지 문제를 제외하고는 좋은 생각: "사회"라는 말이 "사회주의"라는 말과 겹치는 것. 안정을 보장하는 것은 자유 시장을 능멸하는 것. 중국: 월마트 참조. 월마트: 민족국가, 미래 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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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자 소련 수용소에 갇히다

* 이 글은 간장 오타맨...님의 [“안심해. 해가 뜨듯, 좋은 세상이 와”] 에 관련된 글입니다.
[전문 번역에 들어가기 전] 현실 사회주의가 붕괴했음에도 왜 여전히 사회주의에 대한 열망은 식지 않는가? 프랜시스 푸쿠야마 Francis Fukuyama가 "역사의 종언과 마지막 인간(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이라는 도발적 논문을 통해 자유 민주주의와 기술 주도의 자본주의 체제의 승리를 선포한 후에도 사회주의에 대한 이상은 아직도 꿈틀거리고 있다. 그건 현실 사회주의가 진정한 사회주의답지 못했다는 데 있다. 조선반도의 사회주의자 김학철을 내몰고 감옥에 가둔 김일성 정권과 모택동 정권. 독일의 사회주의자 나탄 스타인버거를 19년간 강제수용소에 갇아버리고 볼셰비키 혁명가들을 죽여버린 스탈린 정권. 아인슈타인이 "왜 사회주의인가"라는 글에서 우려한 대로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은 거대한 관료체제 변질되고 자유, 평등, 연대에 기초한 보다 나은 세상의 꿈을 차단하게 된다. 그들이 사회주의 간판을 내걸고 만든 사회는 결코 사회주의자들이 꿈꿨던 그런 사회가 아니었고 그것이 빌미가 돼 사회주의라는 인류의 이상은 조롱거리가 돼버렸다. 오늘 김학철과 나탄 스타인버거의 삶을 비교해 보면서 진짜 두 사회주의자들은 어떤 삶을 살았고 그들이 이루고자 했던 사회는 무었이었는지 생각해 본다. 소련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많은 이들과는 달리 우파로 전향하지 않은 스타인버거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사회주의라는 말에 덧붙여진 거짓과 억압이라는 쓰레기 그리고 스탈린주의는 전부 영원히 없어져야 합니다. 소련과 그 영향권에 있었던 정권들은 사회주의와 아무 관련이 없었습니다." [번역하고 나서] 잘못됐거나 부적절한 번역 등등 있으면 댓글 부탁합니다. ===================================================================== 원문: 나탄 스타인버거 94세로 세상을 뜨다: 파시즘과 스탈린주의 항거 투쟁에 바친 삶 (Nathan Steinberger dies at 94: A life dedicated to the fight against fascism and Stalinism. By Verena Nees. 2005년 3월 9일) 번역: FLOSS (http://blog.jinbo.net/floss) | 2005년 3월 27일 [1] 2005년 2월 26일 독일 베를린의 한 병원에서 94살의 나탄 스타인버거(Nathan Steinberger)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내인 에디트(Edith)는 2001년에 운명했다. 두 사람은 혁명의 격동과 노동자 운동의 비극적 패배로 점철된 한 시대를 처음부터 끝까지 살았던 세대에서 남은 마지막 생존자들 중의 일부였다. 그들은 살면서 끔찍했던 독일 파시즘과 소련 스탈린주의를 겪어야만 했는데 옛 소련에서 독일 공산당(KPD) 당원으로 살다가 죽지 않고 빠져나온 바 있다. [1997년 나탄 스타인버거 인터뷰 참조 http://wsws.org/articles/2005/mar2005/sint-m09.shtml] [2] 1910년에 베를린에서 정통 유태교 가정의 막내로 태어난 나탄 스타인버거는 비교적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다. 그가 세상에 대해 처음 가졌던 느낌은 전쟁, 굶주림에 이어 일어난 베를린 노동자들의 혁명적 투쟁으로 채워지게 된다. 동시에 그 또한 1920년대의 문화적 회오리 속에 빠져든다. 다섯 살 때 그는 누나에게 줄 오페라와 연극 표를 사려고 줄을 선 적도 있고 그의 형은 다다이즘(Dada) 연극단과 집에서 공연연습을 했다. 그는 다른 여러 공연물에 엑스트라 역으로 출연해 용돈을 벌기도 했고 나이가 꽤 될 때 까지 그의 문학과 그림에 대한 지식으로 친구들과 손님들을 놀라게 했다. [참고] 다다이즘: 1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 문화에 대한 회의에서 나온 예술 조류로 기존 서구 예술에 대한 파격적 저항을 시도했음. [3]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그는 네 살이었고 러시아 혁명 때는 일곱 살이었다. 90살 때 그의 어린 시절의 추억에 대해 질문을 받자 그는 이렇게 회상했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베를린은 소용돌이 속에 휩쌓였다. 모든 이들이 레닌과 트로츠키에 대해 이야기 했다. 뒤돌아 보니 러시아에서 일어났던 일들은 베를린과 독일 전체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고 확실히 이야기 할 수 있다" [4] 1918년 11월 혁명 중의 가장 큰 시위와 거리 투쟁 가운데 일부가 스타인버거 가족이 살던 아파트에서 근처에서 일어났다. 그는 형 레오(Leo)와 함께 빈 탄피들을 가지고 놀았는데, 그 탄피들은 스파르타쿠스단(혁명조직 Spartakusbund 또는 Spartacus League: 나중에 독일 공산당의 핵심 조직 중 하나가 되는데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와 칼 리프크네히트 [Karl Liebknecht]가 주도했음)과 자유의용군(Freikorps: 반동적 준군사조직) 사이의 무장 전투가 잠시 잠잠할 때 거리에서 주은 것들이었다. 종종 수업이 끝난 후 그는 시위에 참여하기도 했고 저녁에는 근처 마을 회관으로 달려가 독일 공산당(KPD), 독일 독립 사회민주당 (USPD), 독일 사회민주당 (SPD) 소속의 노동자들이 벌렸던 뜨거운 정치 토론에 참석하기도 했다. [참고] 자유의용군 (Freikorps) 조직원들이 나중에 나치의 주요 간부들이 된다. [5] 그는 형 아돌프(Adolf)의 영향을 받아 곧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하게 되는데, 아돌프는 나중에 마트하우젠(Mauthausen) 수용소에서 나치에 의해 살해당한다. 공산주의 청년연합(Communist Youth Federation)에 14살 때 들어간 그는 공산주의 고등학생 협회(KoPeFra: Kommunistische Pennälerfraktion)와 사회주의 학생 연합(SSB: 여기서 주도적 역할을 함)을 만드는데 가담한다. [6] 또한 어린 시절 이미 독일 노동자 운동의 문제를 알게 되고 러시아 혁명을 독일에서 해 보려는 시도를 경험하게 된다. [7] 1923년은 공산주의 및 사회민주주의 노동자 사이에 커다란 희망과 긴장이 감돌던 해 였다. 일년 내내 파업이 계속됐다. "정치적으로 의식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 곧 그것이 일어난다' 하는 그런 느낌이 공기 중에 만질 수 있는 물체처럼 있었지요." "베를린의 노동자들과 젊은이들 모두 독일판 10월 혁명을 뜨거운 기대 속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그 때 난 그걸 아주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지요." 따라서 독일 공산당 지도부가 너무나 오래 머뭇거리는 바람에 거센 운동의 정점을 놓쳐버렸을 때는 실망이 더욱 더 클 수 밖에 없었다. "어느 날, 모든 것이 다 끝났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냥 멈춰버린 거죠. 그걸 어떻게 설명할 수 없었지만 갑자기 열정은 사라지고 실망이 퍼졌어요. 독일 공산당에 속하지 않았던 노동자들이 특히 실망했었죠. 며칠 동안 억누르는 듯한 침묵이 이어졌습니다." [8] 러시아 공산당 내에서 스탈린파와 레온 트로츠키가 이끌던 스탈린 반대 좌파(Left Oppositionist) 사이의 투쟁이 일어나자 1923년 이후 독일 공산당 안에서도 갈등이 터지고 만다. 그런 정치적 문제들을 이해하기엔 아직 어렸던 그와 같은 지역내 청년 동지들은 모두 1926년 공산주의 청년연합(KJVD)에서 쫓겨난다. 당시 당 노선에 비판적이었던 지도급 인사인 칼 코르쉬(Karl Korsch)가 그가 속한 지역내 청년동지들 전부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9] 그러나 그는 사회주의 학생연합 활동에 계속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와 그의 친구들은 정치만 가지고 토론한 것이 아니라 에릭 카스트너(Erich Kästner) 아놀드 즈바이크(Arnold Zweig) 같은 작가들과 토론도 하고 심리학과 성에 대해서도 논의했다. 1929년 대학 입학 시험에 합격한 후 제일 좋아했던 과목인 심리학을 연구해 보려고 의학 학부에 등록하기도 했으나 나중에 정치 경제학으로 진로를 바꾼다. 농업 과학을 전공한 그는 당시 모스크바 국제 농업 연구소의 대표적 인물 중의 하나였던 저명한 과학자인 칼 비트포겔(Karl Wittfogel)의 지도를 받았다. [10] 공산주의 청년연합에서 쫓겨난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1928년에는 독일 공산당(KPD)의 당원이 됐다. 스탈린과 그의 추종자들이 주창했던 사회 파시즘 이론이라는 주제를 놓고 그 해 부터 독일 공산당 안에서 격렬한 논쟁이 시작됐다. 그 이론에 따르면 사회 민주주의와 파시즘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스탈린파의 자살적 성격의 정략이 노렸던 것은 점점 영향력을 늘려가고 있던 나치 파시즘 추종자들에게 대항해 사회민주주의 노동자들과 공산주의 노동자들이 벌이려고 했던 그 어떤 연합 투쟁도 무력화 시키려는 것이었다. [11] 그는 본능적으로 이런 정략을 거부했다. "이런 극좌적 정략은 정치적으로 무지한 사람들한테나 먹히는 겁니다. 1918년과 1923년 독일에서 혁명적 경험을 한 이들의 절대 대다수는 사회민주당(SPD)과 나치 파시즘 추종자들을 동일시 하는 그 이론을 배격했어요. 나는 거리에서 대중 선동전을 할 때 그 어떤 경우에도 사회 파시즘이라는 말을 한번도 쓰지 않았어요." [12] 점점 늘어나던 나치의 영향력에 대항해 독일 공산당과 사회민주당 노동자들이 연합 전선을 펼칠 것을 호소한 레온 트로츠키의 글들을 그 무렵 그는 처음 보게 된다. [13] 얼마후 그의 인생의 극적으로 바뀌게 된다. 지도교수였던 칼 비트포겔의 추천을 받아 1932년 학위과정을 마치기도 전에 모스크바 국제 농업 연구소에 일자리를 얻은 것이다. 독일 공산당의 열렬한 당원이던 여자친구 에디트도 함께 가게 된다. 원래 모스크바에 2년만 있기로 돼 있었는데 1933년 히틀러가 집권을 하게 되자 두 사람은 독일로 돌아갈 수 없는 형편이 된다. 두 사람은 독일 공산당 당원으로 알려졌을 뿐 아니라 동시에 유태인이였기 때문이다. [14] 독일에서 노동자 운동이 패배하고 파시즘이 승리하자 두 사람은 절망에 빠지게 되고 그들을 정치로 이끌었던 1920년대의 혁명적 낙관주의와 스탈린 정권 하의 소련은 전혀 공통점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한편 소련 농촌 지역에서 강제 집단농장을 만드는 과정에서 끔찍하고 잔인무도한 일들이 일어났었다고 모스크바 국제 농업 연구소의 선배 연구원들이 그에게 알려준다. 또한 레닌과 가까웠던 동지이자 스위스 출신의 혁명가인 프리츠 플라텐(Fritz Platten) 같은 옛 볼셰비키 혁명가들도 만나게 되면서 플라텐과 예전 당원들이 어떻게 점점 소외돼 가는지도 목격하게 된다. 그 시점에서 이미 트로츠키 지지자들은 국외로 망명했거나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가 참석했던 당 모임에서 개방적인 정치적 토론은 거의 없어지게 된다. 당 민주주의는 관료주의와 음모에 의해 차차 말살돼 간다. [15] 1935년에는 박사학위를 받게 된다. '국가 사회주의의 농업 정치학'이라는 박사논문은 출판되기는 하지만 얼마 안 있어 그의 과학 연구작업은 갑자기 중단되게 된다. 레닌그라드 당 서기 키로프(Kirov) 살해 후 숙청이 시작된다. 스탈린 반대파로 알려진 사람들 뿐 아니라 그때까지 스탈린의 충실한 추종자들까지도 점점 스탈린의 비밀 경찰인 GPU의 손아귀에 들어간다. 1936년 모스크바 국제 농업 연구소에서 해직당한 후 그는 1935년에 태어난 딸 마리안느(Marianne)와 아내를 부양하기 위해 독일어를 가르치면서 겨우 연명해 간다. [16] 모스크바 재판이후 나치를 피해 소련으로 이주했던 독일인들은 체포의 물결 속으로 빠지게 된다. "스탈린은 자신의 정치를 비판할 가능성이 있다면 그 어떤 누구라도 가만두지 않았어요. 그리고 스탈린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의 정치 때문에 독일에서 혁명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죠." [17] 1937년 5월 노동절 전날 저녁 그는 체포당한다. 아내 에디트도 독일이 소련 침략을 개시했던 1941년에 같은 운명에 처한다. 당시 여섯살이었던 딸은 잘 알고 지내던 유태인 가정에서 맡아 주게 된다. [18] 고난은 1956년까지 계속된다. 그는 처음 악명 높았던 부티르키(Butyrky) 감옥에 갇히고 나중에 시베리아의 콜리마(Kolyma)로 이송된다. 그의 죄목은 '반혁명적 트로츠키 행동'이었고 그의 '죄'는 무엇보다도 예전에 독일 공산주의 청년연합에서 15살 때 쫓겨난 것 때문에 더 무거워지게 된다. 아내 에디트는 카자흐스탄(Kazahstan)의 노동수용소로 끌려갔고 거기서 겨우 목숨을 이어 가게 된다. [19] 부티르키 감옥에서 그는 체포의 물결이 결코 제멋대로 이루어 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러시아 10월 혁명에 적극적으로 가담했고 가장 당에 헌신했던 이들이 제1순위로 체포가 됐다는 걸 알게 된다. 그가 처음 감옥에서 함께 지낸 이들은 스탈린 반대 좌파 지노비에프(Zinoviev)의 아들과 옛 볼셰비키 당원이자 당 역사가인 블라디미르 이바노비치 네브스키 (Vladimir Ivanovich Nevsky)였는데 네브스키는 페트로그라드(Petrograd) 혁명 위원회의 조직원으로 1917년 혁명 당시 군 준비 작업에 참여했고 레닌의 제1차 노동자 정부에서 교통부 장관을 지낸 사람이다. 나탄 스타인버거가 부티르키 감옥에 도착하고 몇 주가 지나서 네브스키는 총살을 당한다. [20] 그 당시 스타인버거 부부의 동지들 거의 대부분이 죽었으나 둘은 아무튼 살아남게 된다. 딸과 다시 만난 스타인버거 부부는 1956년 동베를린으로 가게 됐으나 동독 정부는 그들에게 절대적으로 침묵할 것을 강요한다. 스탈린 강제 수용소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하지 못하게 된다. 동독이 무너지고 이어 소련이 해체되고 나서야 비로서 나탄 스타인버거는 끔찍했던 스탈린 치하에서 겪었던 일들을 말할 수 있게 된다. 굴라그(Gulag: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많은 이들과는 달리 그는 우파로 전향하지 않고 청년 시절의 사회주의 이상을 지켜낸다. [21]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스탈린주의는 결코 사회주의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많은 친구들과 지인들이 축하해 주던 90살 생일을 맞이하여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살아오면서 내린 결론을 정리한다: "나는 젊은이들이 스탈린주의가 무엇이었는지 이해했으면 해요. 사회주의라는 말에 덧붙여진 거짓과 억압이라는 쓰레기 그리고 스탈린주의는 전부 영원히 없어져야 합니다. 소련과 그 영향권에 있었던 정권들은 사회주의와 아무 관련이 없었습니다." [22]그의 말년은 평탄하지 못했다. 아내 그리고 알고 지내던 많은 이들이 점점 더 세상을 떠났는데 작년에는 사회주의 학생연합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오랜 학교 친구인 막스 카하네(Max Kahane)가 죽었다. 거의 글을 쓸 수 없었고 청각장애가 심해 사는게 힘들었고 외로웠다. 그러나 유머 감각과 평생지기 친구들과 함께 그가 끝까지 지켜낸 것이 있다. 그것은 새로운 세대가 1930년대가 남긴 교훈을 보고 익혀서 보다 나은 사회를 이루기 위해 그의 세대가 헌신했던 투쟁을 이어받아 해 주리라는 신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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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 CIA 민주주의

* 이 글은 달팽이님의 [[펌] 차베스의 베네수엘라 '제2의 쿠바'인가?] 에 관련된 글입니다.
[ 번역에 들어가기 전 ] 최근 베네수엘라에 대한 미국 흑색선전 언론의 악의적인 논평/기사와 이를 그대로 실어주는 연합뉴스의 행태는 도를 넘어섰다. 미국 정부가 민주적으로 선출되고 대다수 민중에게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는 베네수엘라 차베스 정부에 대에 끊임었이 퍼붓는 전복시도는 하나도 보도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부정적인 모습만 비추고 있다. 베네수엘라 민중의 삶이 분명 과거 민중수탈 시대보다 좋아지고 있다는 명백한 사실조차 이야기 안 하고 있다. 어느 정권이든 찬반, 긍정 및 부정 양면이 있는 것이고 이걸 공정하게 보도하는 것이 언론의 기본 아닌가? 이런 면에서 악의적인 기사를 쏟아내고 있는 미국 흑색선전 언론들과 이를 아무 여과없이 전달하는 연합뉴스는 언론이라 부르기 힘들다. 세계 최초로 혁명이 아닌 <민주적 선거>로 선출된 칠레 아옌데 사회주의 정부를 군사 쿠테타로 무너뜨리고 수십년간 라틴 아메리카에서 군사 독재정권, 신자유주의 폭력 정권을 비호해온 미국 정부는 베네수엘라의 민중의 뜻을 더러운 계략으로 짓밟으려 하고 있다. 라틴 아메리카와 전세계에서 벌이고 있는 미국 정부의 민주주의 캠페인은 민중의 삶을 위한 민주주의가 아니라 미국의 자본 이익에 부합하는 정치행태를 말한다 [참고: 쿠바 미국 인권 민주주의].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계속 넘어뜨리고 미국 자본 이익에 충실한 정치 모리배들에게 정권을 주려고 획책할 수 있는가? 한국의 기나긴 군사독재 기간 동안 무수한 반민주주의 참상에 대해 미국 정부는 뭘 했는가? 미국 자본 이익에 충실한 군사정부였기에 민주주의 캠페인 조차 벌이지 않고 수수방관하지 않았는가? 미국의 보호를 받는 사우디 아라비아 독재왕정은 또 어떤가? ==================================================================================== 발췌 번역 + 약간 추가 | 원문: CIA 어떻게 베네수엘라 내정에 간섭 하는가 (전직 CIA 요원 Philip Agee 인터뷰)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이른바 민주주의 캠페인이 베네수엘라에서 전면적으로 펼쳐지고 있다. 1980년대 니카라구아 상황처럼 야당 세력들에게 수천만 달라의 공작 자금이 뿌려지고 있다. 공작금은 미국 국제개발국(USAID: the United States 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과 계약을 맺은 민간 컨설팅 업체들이 나눠주고 있다. 공작금을 갖고 미국 정부는 여러 갈래의 야당 세력을 규합해 2006년 베네수엘라 대선에서 정권 교체를 이루려 하고 있고 이것이 실패할 경우 2012년, 2018년 등 계속 정권교체를 시도하려 한다. 이는 미국 정치 제도의 안정과 미국 정치 계급의 안위가 달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첨가: 미국정부는 미국식 자본주의 제도 이외의 사회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힘들다. 대안 사회의 출현은 미국 자본계급에겐 악몽이다. 마치 마이크로소프트 빌 게이츠에게 대안 소프트웨어인 자유 소프트웨어가 악몽이듯. 오죽하면 최근 한 인터뷰에서 자유 소프트웨어 하는 사람들을 공산주의자들이라고 했겠는가.] 1970년대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 피노체트 정권 등 잔혹한 군사독재 정권들이 있었다 [추가: 한국 박정희 정권 포함]. 모두 CIA의 비호를 받는 정권들이었다. 그 때 미국 외교정책을 짜는 상층부 사이에 새로운 발상이 생겨났다. 억압, 실종, 암살로 얼룩진 군사정권을 통해 미국의 이익을 담보해 내는 것이 꼭 최상의 방법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미국의 정치계급과 이해관계를 같이 하는 정치 특권층이 민주적 정부로 선출되게 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 정부는 대중 세력이 아니라 이른바 <과두정치>로 대표되는 라틴 아메리카의 전통적인 정치 계급이 맡는다는 전제조건이 있었다. 그래서 채택된 것이 이른바 <민주주의 프로젝트>인데, <자유롭고, 공정하고, 투명한> 선거를 통해 권력이 <민중>이 아니라 <정치 특권층>에게 돌아가게 한다는 것이다. [첨가: 그런데 이 <민주주의 프로젝트>가 엉뚱하게 차베스 정권이라는 민중정권을 탄생시켰으니 미국 정부는 억장이 무너지는 것이다. 그래서 3일 천하로 끝나긴 했지만 쿠테타도 지원하고 대통령 소환제도를 통해 정권전복도 시도해 해 보고 내년 대통령 선거에도 개입하려 하는 것이다.] [첨가: <과두정치>는 미국 두 보수주의 정당인 공화당 민주당이 대표적이다. 진보 사기극을 벌리고 있는 미국 민주당은 이라크 침략 추가 예산안에도 절대 다수가 찬성할 만큼 미국 자본 이익에 환장한 공화당과 별 다를 바 없는 정당이다. 낙태, 동성애 문제 등 자본 이익과 별 상관없는 문제들에 대해서 단지 진보적 흉내를 낼 뿐이다. 한국의 두 보수주의 정당인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은 미국의 공화당 민주당의 복사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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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미국 인권 민주주의

원문 발췌 번역 + 약간의 첨가 | 원문: 미국, 쿠바, 그리고 민주주의 | U.S., Cuba and Democracy (William Blum) 1959년 쿠바 혁명 이후로 라틴 아메리카는 고문, 실종, 암살로 얼룩졌지만 카스트로 정부를 극렬히 적대시하는 어느 누구도 쿠바에 고문, 실종, 암살이 일상화됐다고 주장하지 못한다. 인권의 중요한 잣대인 의료와 교육에 있어 쿠바는 지난 40여년간 라틴 아메리카 최고 수준을 유지해 왔다. 미국이 걸고 넘어지고 있는 이른바 <민주주의>라는 것은 선거때 마다 후보자 이름 옆에다 X 자 표시하는 행위 그리고 시민권 자유 등 형식적인 정치적 민주주의를 의미할 뿐이며 직업, 식량, 주택등의 경제적 민주주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미국의 지도자들은 자유, 민주주의라는 말을 즐겨 쓰면서도 많은 친미 독재 정권 (사우디 아라비아, 미국과 사이 좋았을 때의 이라크 후세인 정권, 칠레 피노체트 정권 등)을 비호해 왔다. 미국이 민주주의라고 쓰는 말은 사실 다음의 다섯 가지를 의미한다:


1) 세계 전체를 미국의 초국적 기업의 텃밭으로 만드는 것. 2) 미국내 군수업체들을 살찌게 만드는 것. 3) 자본주의 대안 모델이 될 수 있는 그 어떤 사회도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 4) 미국에게 이득이 될 수 있게 가능한한 최대로 정치적, 경제적 헤게모니를 넓혀 가는 것. 5) 냉전주의자들과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그랬듯이 이른바 국제 공산주의자 음모에 대항해 도덕적 십자군 전쟁을 해 나가는 것. ====================================== 원문 발췌 번역 + 약간의 첨가. | 원문: 인권과 쿠바 | Human Rights and Cuba (Felipe Pérez Roque 쿠바 외무부 장관) 쿠바 구안타나모(미국의 영구 임대 군사기지)에서 미국이 벌이고 있는 전쟁포로(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벌이면서도 이들을 전쟁포로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에 대한 인권유린에 대해 유럽연합은 침묵을 지켜왔다. 이것은 명백한 위선이면 이중잣대이다. 미국과 이른바 선진 동맹국들은 이미 평화에 대한 권리를 누리고 있다. 그 국가들은 침략을 받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그들이 항상 침략을 일삼고 있다 (이라크 전쟁). 그 국가들에서는 가난한 이들이 부자들 만큼의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미국에서 가난한 사람이 상원의원이 될 수 있는가(상원의원 대부분이 백만장자들이다)? 부자들의 자녀들이 이라크 전쟁에 가는가? 오히려 가난한 이들의 자녀들이 부자 미국인들의 이익을 지켜주며 죽어가고 있다 (이건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베트남 전쟁 때 한 말과 비슷). 가난한 나라에는 평화에 대한 권리가 없다. 테러리스트, 폭정의 전초기지로 불리거나 해방시킬 필요가 있다는 이유로 폭격과 침략을 당하고 있다. 세계 130여 저개발 국가들은 시장이나 신기술 등에 대한 접근권이 없고 이미 한번 다 갚은 외채에 대한 이자 때문에 경제적으로 수갑을 찬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사회정의> 없이는 <민주주의>는 있을 수 없다. <평등> 없이는 진정한 <인권>이 있을 수 없다. 비록 그것이 종이 위에 형식적으로 있을지라도. 미국은 <군사력>이 강할지는 몰라도 <도덕성>이 없다. 민중을 지켜주는 것은 도덕성이지 무기가 아니다. UN이 이번에 쿠바에 대한 인권결의안을 선언하는 것은 부당하다. 쿠바 혁명후 46년간 쿠바에서는 단 한건도 사법외 처형이나 정치적 실종자들이 없었다. 2004년 1년 동안 라틴 아메리카에서 20명의 기자들이 살해 당했으나 쿠바에서는 46년간 단 한명의 기자도 살해되지 않았다. 죄수들을 간수나 훈련된 맹견 앞에서 무릎 굻게 하는 일도 없었다 (미국 군인들의 이라크 포로 학대 비유). 구안타나모, 이라크, 미국 내(쿠바 청년 5명 구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권유린에 대해서는 왜 UN에서 결의안을 내지 않으려고 하는가? 이번 결의안 상정 시도는 우리가 정의롭지도 평등하지도 못한 세상에 살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 [발췌 펌] 원문: 전쟁 반대! 미제국주의 반대! (김민웅) 오랜 세월동안 미국의 대외정책이 가지고 있는 야만적 본질에 대하여 추적 분석해온 윌리암 블럼(William Blum)은 그의 저서 『불량국가』(Rogue State/Common Courage Press, Monroe, 2000)에서 이렇게 미국의 본질을 갈파하고 있다. "미국의 대외정책이 지난 수십 년 동안 벌여왔던 죄악을 폭로하면 사람들은 마치 연쇄토막 살인사건과 그 범인을 사랑하는 여인의 입장과 같은 상황에 서있게 될지 모른다. 여인은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남자가 그런 끔찍한 일을 벌였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토막 난 시신의 일부를 눈앞에 보여줘도 자신의 애인이 그런 일을 했다고 결코 믿지 못할 것이며, 혹 그걸 인정한다 해도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가 다 무슨 다른 선한 이유가 있어서, 또는 우연한 실수로, 내지는 어떤 경우에 이르면 인도주의적인 동기에서 그랬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 남자가 바로 미국이다. … 그런데 이 미국은 세계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무기를 사라. 우리의 군대와 우리의 자본이 그대들의 땅에 마음대로 들락거릴 수 있도록 하라. 그리고 그대들의 지도자들이 무엇을 결정하든 우리가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달라. 그러면 우리는 그대들을 지켜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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