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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 캘리니코스 방한 강연 (5월 21-22일)

올 5월은 풍성한 행사의 달이다. 인권영화제 (5월 20-26일), 맑스 코뮤날레 (5월 28-29일 : 27일 전야제) , 거기다가 캘리니코스 강연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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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맑스 코뮤날레 (5월 28-29일 : 27일 전야제)

꼭 가보고 싶어서 작년 부터 생각해 둔 행사이니까 꼭 가보리라. 인권영화제 (5월 20-26일), 알렉스 캘리니코스 방한 강연회 (5월 21-22일)와 더불어 5월에 참 좋은 행사가 많다. 블로그에서 만난 좋은 사람들 이들 행사에서 많이 뵙길 바라며. 맑스 코뮤날레 홈페이지 행사 자세한 안내는 여기 클릭. 행사 배경에 관한 글은 여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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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 : 김진균 장례식

하나의 거짓없이 벌거벗은 글은 우리를 당혹케 한다. 예술이라는 기교로 치장되지 않은 그런 말. 김남주 시인의 글이 그렇고 백기완 선생의 말이 그렇다. [김진균 선생 추도시 중에서] 악랄한 자본 축적이 역사 진보로 둔갑하고 거짓 경쟁에서 이기면 영웅도 되고 스승도 되고 문화 예술은 가진자의 도락이요 학문은 이긴자의 쓸모로 강요되는 [김진균 선생 추도사 중에서] 그러나 이 세상 사람들이 세상을 살다 보면 자꾸 거죽을 쓰게 됩니다. 넝마를 쓰게 되고 그래서 거짓의 넝마가 마치 명주인 것처럼 백주대낮에 활보하는 사기꾼들, 엉터리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 한마디로 요약하면 돈 많은 놈들이 돈 없는 사람들을 뺏어 먹음으로써 있는 놈 하고 없는 놈하고를 갈라놓는 거여. 이 독점자본주의의 죄악 아닙니까. 그런데 이 한 개인 개인한테 침투하다 보니까 어드런 현상으로 나타나느냐 한 개인이 자꾸 분열증에 빠져요. 아름다운 이상과 각박한 현실 그런 분열증 있잖아. 욕심과 야망이라고 하는 분열증이죠. 아무리 아름답고 옳은 것을 제시해도 자기 한 개인의 이익을 쫓아서 아름답고 옳은 것을 짓밟아 버리는 인간 내면의 치명적인 분열증상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것이 바로 독점 자본주의 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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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헛들었다. Aretha Franklin

우연히 블루스 브라더스(Blues Brothers / 1980년)라는 좀 오래된 영화를 봤다. 레이 찰스(Ray Charles) 중년의 모습도 볼 수 있다. 거기서 확 시선을 끈 것은 Aretha Franklin(아레싸 프랭클린 / 아레사 프랭클린)이라는 중년의 흑인 여자 가수였다. 머라이어 캐리나 휘트니 휴스턴 처럼 미모나 가성으로 범벅된 음악이 아니였다. 바로 배에서 나오는 목소리로 부르는 엄청난 가창력이었다. 레스토랑 여주인 역할로 나와 Think 라는 노래를 열창하는데 이건 그냥 전율이다. 으악... 음악 지금까지 헛들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아레사 대표곡인 Respect, Think 등은 60년대에 나왔다. 그럼 그동안 한국에서는 도대체 무슨 팝송을 들은 것인가? 궁금하면 아마존 닷 컴에서 제공하는 샘플 노래 86곡을 들어볼 수도 있다. 참고: 임진모의 아레싸 프랭클린에 대한 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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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묘비

* 이 글은 prometheus님의 [길을 잃다.] 에 관련된 글입니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단지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마르크스 묘비에 새겨진 그의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 11번) 진보네 블로그를 보다 보면 사람의 가슴을 후벼파는 섬뜩한 글들이 종종 있다. 너무 진실된 그래서 너무 잔인한 글들. 예를 들어 지금 트래백을 건 prometheus님의 글들. 오늘 우연히 <결국>이라는 글을 봤는데 최근 쓴 5개의 글은 참으로 가슴 아프다. 이렇게 글 읽고 가슴 시렸던 적은 아마 김규항의 좀 오래된 글을 읽은 후 처음인 것 같다. [길을 잃다.] 중에서 세상을 바꿔보겠노라며 호기롭게 살았던 때가 있었다. 하룻밤에도 몇번씩 권력을 쥐락펴락하며 부조리한 모든 것에 저항하겠노라며 .... 책상머리에 앉아 논평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삶을 향한 사람들의 처절한 몸부림을 그저 기사 거리고 전락시키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단 한줄을 써도 마음을 움직이는 글, 실천을 조직하는 글, 세상과 자신을 바꾸는 글을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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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자 운동과 계급, 자본

* 이 글은 김규항님의 [박경석] 글에서 소수자 운동과 계급에 관련된 글입니다.
[소수자 생각 1] 들뢰즈(Deleuze)와 가타리(Guattari)는 소수자(minority)란 숫적(number)으로 적은 사람들이 아니라 힘 관계에서 약자인 사람들이라 정의한다. 한국의 장애인들 처럼 숫적으로나 힘 관계에서 약자인 소수자들이 대부분이기에 흔히 소수자는 숫적으로 적은 사람들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만델라가 감옥에 있던 시절 남아프리카의 소수자는 숫적으로 절대 다수였던 흑인이었다. 숫적으로는 많았으나 백인정부의 인종차별 정책에 의해 힘 관계에서 약자의 위치였다. 전세계 노동자들도 소수자들이다. 숫적으로는 압도적으로 많지만 자본과의 역학 관계에서 약자의 위치에 서기 때문이다. 채용비리 등으로 이른바 부패노조가 욕먹는 이유는 약자의 입장을 대변해야 할 이들이 자신들의 힘을 이용해 부당한 이득을 취하기 때문이다.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을 위해 싸워야 하는 이유도 이런 힘의 관계에서 가장 약할 수 밖에 없는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연대해야하기 때문이다. 자기들만의 이익을 위해 비정규직과의 연대를 거부하는 정규직 노조는 소수자운동을 할 자격이 없다. [소수자 생각 2] 계급과 분리된 소수자 운동의 비극은 이른바 선진국(고도 자본화 국가)의 중상층 페미니즘 운동과 미국의 라이스 국무장관으로 상징된다. 페미니즘 운동이 일정한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투표, 직업선택, 차별임금, 가정폭력, 한국의 호주제 문제 등에서 여성이 받았던 차별이 너무 명백히도 부당했기 때문이다. 고도 자본화 국가에서의 중상층 페미니즘은 어느 정도 여성차별이 없어지자 그 동력을 잃고 만다. 싸울 목적이 거의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보 페미니즘 운동가들은 싸움을 멈추지 않고 있다. 바로 이른바 제3세계(저 자본화 국가) 여성들이 겪고 있는 부당한 대우 때문이다. 이들이 저자본화 국가에서 여성들이 맞닥뜨리는 사회적 문제는 결국 국가들 사이의 계급 문제, 국내에서의 계급 및 성차별 문제다. 힘 관계에서 지구상에서 가장 약자일 수 밖에 없는 저자본화 국가들의 여성 문제는 결국 자본 문제, 지구 자원 및 지적 재산권의 독과점 문제 등의 주제를 벗어나 논의되기 힘들다. 그러나 고도 자본화 국가 중상층 페미니즘은 이런 문제를 회피하고 싶어한다. 관심을 보여봤자 저자본화 국가 여성들이 불쌍하다며 연민하며 약간의 모금 내지 경제적 지원 하는 정도다. 그거라도 하면 괜찮은 축에 속한다. 선진국 중상층 페미니스트들의 경제적 이해관계는 근본적으로 저자본화 국가 여성들과 대립된다. 그래서 그들의 운동은 명백히 한계가 보인다. 얼마전 호주제 폐지 소식에 만세를 부르던 인물 중에 이계경 한나라당 의원이 보였다. 호주제 폐지 정말 잘 한 일이다. 이계경 의원도 거기에 많은 노력을 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계경 페미니스트의 한계는 바로 거기까지다. 한나라당에서 무슨 자본의 문제, 계급의 문제를 논하겠는가. 바다 건너 미국의 라이스 국무장관은 소수자인 흑인이라도 열심히 노력하면 이렇게 성공할 수 있다는 상징이다. 킹 목사가 바랬던 세상, 흑인 아이와 백인 아이가 손잡고 사는 세상, 그 세상이 조금 오긴 왔는데 그 모양이 이상하다. 백인 아이였던 부시와 흑인 아이였던 라이스가 손잡고 정답게 이라크를 침공하고 아이티를 유린하고 베네수엘라를 위협한다. 제국의 깃발 아래 흑백이 모여 하는 짓이 정말 가관이다. 이것이 미국 흑인 소수자 인권 운동이 바랬던 것인가? 자국의 이익을 위해 흑백이 손잡고 힘 약한 나라의 힘 약한 민중들을 죽이고 그들의 삶을 어지럽게 하는 게 미국 흑인 소수자 운동의 목적이었는가? 그 어떤 소수자 운동도 일정 목표를 이뤘다고 해서 끝난 게 아니다. 목표 달성 후에 더 약한 위치의 소수자들을 외면하는 소수자 운동은 진정한 소수자 운동이라 부르기 힘들다. 가장 약한 위치에 있는 소수자들 문제를 어찌 자본 문제, 계급 문제와 분리할 수 있겠는가. <앞의 트랙백을 잘못 날렸네요 (리눅스 이렇게 생겼어요).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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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efox 미국 안보 공포

* 이 글은 진보네님의 [불여우와 진보 블로그] 에 관련된 글입니다.
Firefox(파이어폭스 / 불여우)에 Extension(기능 추가)라는 멋진 기능이 있다. 원래 불여우를 좀 가볍게 만들기 위해 핵심 기능만 디폴트(default)로 집어넣고 나머지 기능은 사용자가 추가하도록 돼 있다. 최근에 U.S. Homeland Security Threat Level(미국 안보 위협 경보)라는 끔찍한 기능도 추가됐다. 미국 국가안전부 (Department of Homeland Security)에서 제공하는 안보 경보를 불여우 상태 막대(Status Bar) 오른쪽에 집어넣게 한 것이다. 아래 그림 오른쪽 밑을 보면 Elevated 라는 현재 경보 상태가 떠 있다. 5단계 중 중간인 3단계에 해당한다. 인터넷 브라우징을 하면서도 미국 안보경보에 신경을 써야하는 미국 네티즌들이 참 불상타. 2차대전 종전 이후 60여년간 끊임없이 세계를 돌아다니며 침략,전복,혼란야기 등으로 세계지도를 피로 물들인 미국정부가 과연 이런 안보경보를 발행할 정당성이 있는지 참 의아스럽다. 오히려 베네수엘라 같은 나라가 미국의 침략,전복,혼란야기 등에 대비한 안보 경보를 발행해야 하는 게 정상인데 뭐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이런 정부 차원의 대대적 세뇌전략에 미국 민중들 대다수는 또 어이없이 그러려니 하고 살아갈 것이다. 이런 세뇌 불감증이 더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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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나치, 한국 민주선거

* 이 글은 onscar님의 [미국, 선군정치의 나라(?)] 에 관련된 글입니다.
현대사에서 나치와 히틀러 만큼 악마적인 것으로 그려지는 게 있을까? 사실 당시 유럽의 모든 자본주의, 스탈린주의 국가들을 정복하려 했으니 모든 유럽국가들의 공공의 적이 되는게 당연했다. 반인류 범죄의 대표로 인류사에 길이 남을 것이고 그렇게 교육해야 하는 것도 너무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흔히 너무도 흔히 교육 현장이나 대중매체 보도에서 빠지는 것은 바로 나치 독일이 민주적 선거로 수립된 정권이라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과정은 합법적, 민주적 절차에 의해서 였다. 1932년 37% 지지도가 1934년 무려 90% 된 것도 경악스럽다. 1932년 총선 37% (나치스당 제1당) 1933년 총선 43% (나치스당 제1당) 1934년 국민투표 투표율 96%, 찬성 90%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죽자 히틀러를 총리 겸 대통령으로 추대하는 투표) 박정희와 유신정권은 어땠는가? 1971년 7대 대통령 선거 박정희 득표율 53.2% 1975년 국민투표 투표율 79.8%, 찬성 73.1% (유신헌법 찬반투표: 사실상 대통령 재신임 및 독재 승인투표) 전두환과 5공을 절차적으로 합법화시켜준 선거는 또 어땠는가? 1980년 국민투표 투표율 95.5%, 찬성 91.6% 불행히도, 히틀러와 나치 독재, 박정희와 유신 독재, 전두환과 제5공화국 독재 등 국가 파시즘을 민주적으로 승인해 준 것은 대다수 국민들이었다. 물론 이 중에는 민중, 서민, 저소득 노동자 등등이 포함된다. 국가가 위기에 빠졌으니 파시즘을 민주적 절차로 옹호해 달라는 요청에 대부분 사람들이 찬성한 것이다. 부시 대통령도 2번의 합법적, 민주적 선거 절차에 의해 각각 49%, 51% 지지율로 당선됐다. 전체 득표율에선 져도 투표인단 확보에서만 이겨도 대통령이 된다는 괴상스런 미국 대통령 선거제도 덕을 본 2000년 선거는 그렇다 치더라도, 2004년 선거에선 전체 득표율, 선거인단 숫자 모두 부시가 이겼다. 테러 위협론을 들먹이며 제1기 집권내내 공포분위기 조성하고도 2004년 대선에서 히틀러나 박정희처럼 압도적 지지를 받지 못한 것이 숫자상 그나마 다행이긴 하나 그 비율이 무슨 소용 있겠는가? 올해 미국인들이 제일 좋아한다는 미식축구 결승전(NFL Super Bowl)과 미국 프로농구(NBA) 개막 행사는 그야말로 나치의 베를린 올림픽을 연상케 하는 광적인 미국 국가주의, 군사 절대주의를 드러낸 종교집회장 그 자체였다. 대부분의 개막 행사를 군인과 무기로 채워놓은 소름끼치는 광경을 연출했고 종교부흥회장에 모인 사람들처럼 관중들은 열광했다. 오죽하면 미국의 진보적 고등학생 하나가 그걸 꼬집었을까: 수퍼 보울, 맹목적 애국주의의 전시장 Blind Patriotism on Display at Super Bowl (요즘 강의석 등 고등학생들 보면 정말 부럽다. 대단한 사회의식이다). 민주 선거 절차로 집권했다고 모든 일에 정당성이 부여되는 것은 아니다. 그 내용이 중요한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말은 민(民)이 주인이 된다는 뜻인데 여기서 민의 개념을 한 국가에만 제한시키면 얼마든지 나치, 유신, 5공, 부시정권, 고이즈미 정권 등의 파시즘이 가능해 진다. 내 나라에서 내 맘대로 하겠다는데, 그것도 민주 선거 절차로 민의 뜻을 받들어 파시즘 하겠다는데 뭔 상관이냐는 공포스런 논리가 튀어나온다. 내 국가만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힘 약한 나라 사람들을 죽이고 짓밟는 행위는 결코 민주 선거 결과라는 것으로 정당화 될 수 없다. 민(民)이 라는 말이 한 국가의 사람들만 의미할 때, 그것도 파시즘 동원체제하의 사람들만 의미할 때, 그건 민이 아니라 그냥 파시스트 구성원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들의 민주선거라는 허울좋은 외투는 파시즘 합리화 선거라는 본질을 가릴 뿐이다. 민(民)을 한 국가의 사람들로 제한하는 한 이런 괴기스런 선거는 없어지기 힘들 것이다. 민(民)은 그냥 모든 사람들이다. 국적, 인종에 관계없는 숨쉬는 이웃들. 이런 넓은 개념의 민(民)을 고려하지 않은 파시즘 구성원들의 선거는 무효다. 절차는 하자가 없을지라도 내용이 썩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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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덜 합시다!

작년 반전 집회장에서 만난 "일 덜하기 정당" (Work-Less Party)에서 나온 이의 말이 맵돕니다. 지금 하는 일의 3분의 2정도만 하고 나머지는 가족과 대화, 이웃과의 연대, 문화/체육/학술 활동 등에 써야 한다. 나머지 일감은 실업의 고통에 있는 이웃에게! 우리의 훌륭하신 자본가님들과 근엄하신 노동윤리 주창자들에겐 기절초풍할 이야기네요. 한국처럼 노동시간이 긴 사회는 훨씬 덜 일해야겠네요. 사실 이런 이야기는 좋은 의미에서 하는 이야기이고 이미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총체적으로 보면 강제적으로 일 덜 하는 사회가 돼 있지요. 즉, 완전 고용이 돼 버리면 필연적으로 과잉 생산의 문제가 생기고, 가격의 하락, 이익의 감소, 그리고 자본 자체의 위기가 오겠지요. 따라서 적절한 실업군의 유지는 자본주의 사회에선 필수인데 그것은 단지 이익 보전의 목적 뿐 아니라 "너 까불면 실업자 돼, 굶어 죽기 싫으면 까불지마" 하는 폭력적 메시지가 까지 담고 있지요. 직업 갖고 있는 사람들은 반대로 필요 이상의 많은 노동을 강요받을 수 있지요. 단순 노동시간이 법에 의해 제약받는다면 노동 강도를 높혀 메꾸기도 하고요. 1,000명을 고용하던 조직이 200명 인원감축하고 나머지 800명에게 노동시간이나 노동강도를 높혀 200명의 일감을 떠안게 합니다. 물론 시간외 수당 등 합법적 테두리 안에서 하게 되니까 800명은 일단 임금총액이 높아지니 좋아하는 사람도 생깁니다. 나머지 200명은 800명이 휴가 가거나 병가로 일을 못 나올 경우 비상대기조로 투입되고요. 물론 연월차, 퇴직금. 복지후생비등은 전혀 없지요. 조직 입장에서는 생산성이나 생산량에 큰 영향없이 과거 1,000명 있을 때와 비슷하게 조직을 운영하지만 200명 감축에서 오는 연월차, 퇴직금, 복지후생비 등의 엄청난 비용절감을 하게 되고 (800명에게 주는 시간외 수당을 제외하고도) 경영진은 일약 유능한 경영자 반열에 오르면서 두둑한 보너스 및 스톡옵션 등을 받겠지요. 청년 실업, 중년 실업, 하여간 총체적 실업, 비정규직이 문제인 지금 정규직 일 좀 덜하고 정규직 일 좀 나눠 가지면 안 될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이크, 자본가님들의 핏대가 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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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유태인만 죽은게 아니다

히틀러가 죽인 집단에는 유태인들 뿐만 아니라 집시, 장애우, 공산주의자들이 들어가 있다. 특히 나치의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증오는 무척 컸다. 많지는 않지만 내가 본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이런 사실이 부각된 경우는 별로 기억에 없다. 물론 숫자상 유태인이 제일 많이 죽은 것은 사실이나 집시, 장애우, 공산주의자들도 함께 박해받았다는 사실을 빼는 것은 뻔한 정치적 음모가 보인다. 특히 유태인이면서 동시에 공산주의자였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역시 유명 할리우드 영화에서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 그런 영화가 있다면 전문가들께서 이 문외한을 깨우쳐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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