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2009/04/02

마지막 사무실 나온 날.
아침엔 은근 정신이 없었다. 미리 시뮬레이션을 해봐도 여러 가지 일을 한번에 후다닥 처리하는 건 늘 힘들다. 짐도 붙이고 계좌도 닫고 빨래 건조대도 넘기고 환전도 하고.. 그나마 햇살이 너무 좋아서 다행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아침에 정신이 없어서 심지어 내셔널 갤러리도 무심히 지나치고 말았다. 좀 더 서서 지켜보다 올 걸..

그 동안 사무실 분위기가 참 'appalling' 하다고 생각하며 이 곳을 뜰 뻔 했는데, 오늘 생각지도 않은 환송 선물(?)을 받았다. 알고 보니 지난 주에 안드레아스랑 하비엘이 선물로 줄 책 한 권과 롤링 페이퍼 카드를 준비해서 나토 행동 하러 뜨기 전에 이본 할머니한테 넘기고 갔었나 보다. 전혀 예상치 못한 카드와 책 선물이어서 무지 감동을 받았다. 헤헤. 카메라를 오늘 챙길 생각을 전혀 안 했었는데 너무너무 아쉬운 순간이었다. 날도 좋았는데 다같이 사진이라도 찍어둘 걸. 힝.

오후 내내 부랴부랴 일들을 마치고..한국 돌아가면 그나마 덜 서둘면서 일 할 수 있을만큼은 해놓은 것 같아 마음 한구석이 므흣하다. 사무실 컴에 저장해 놓은 파일들 중에 한국 가서도 필요할 거들을 웹하드와 메일에 올려놓았다. 생각해보니 12월 중순부터 일을 시작해서 크리스마스 휴가를 빼곤 단 하루도 휴가를 안 내고 매일 같이 일을 했으니, 일본 가서는 정말 푸욱 쉬다 와야겠다. 참, 오늘 심지어 하워드한테도 메일을 받았다. 그렇게 무심해보이던 사람들이 갈 때 되니 좀 챙겨주는 것 같아서 이건 뭥미 싶다. ㅎ

여느 매주 수요일처럼 파인트를 잔뜩 마시고 돌아오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내가 정말 내일 비행기를 타는 건지 가물가물 하다. 비행기에 타면 밥먹고 와인 한 잔 하고 그냥 푸욱 자고 싶다. 그러면 이 곳에서의 기억들을 조금이라도 더 잘 보존된 기억으로 남길 수 있지 않을까.

난 병역거부를 처음 결심하고 나서부터 내 병역거부를 얘기하는 게 괜히 떠벌리는 것 같기도 하고 딱히 내가 할 얘기도 없고 그래서 남들과 내 자신의 병역거부에 대해 얘기 나누는 걸 무의식 중에 피해왔던 것 같다.(혹시나 말 했다가 정작 이유가 뭐든 감옥에 안 가게 되면 그것도 쪽팔릴 거라는 마음도 한 구석에 있었고). 그런데 이상하게 여기오고 나선 술 마시면 사람들이 자꾸 물어보는 것도 병역거부에 대한 얘기이고 그러다 보니 이제는 남들한테 얘기하는 것도 너무 자연스러워져버린 것 같다. 차라리 잘 됐다 싶기도 하다. 여기서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면서 나도 모르는 어느 순간에 나 자신이 많이 가벼워진 것 같다. 감옥이 마치 내 삶의 종착점인양 여기며 감옥에 언제 가게 될까 하는 진빠지는 고민도 덜어낸 것 같고. 오히려 감옥과 별개로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좀 더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게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정도면 도피성으로 출발했던 영국 체류가 성공적인 거 아닐까 자평을 해본다.


(참, 오늘 저녁에 술 마시며 티비로 중계되는 G20 반대 데모를 보다가 'snatch squad' 의 존재를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비폭력 핸드북 번역하면서 영어는 이해되는데 잘 상상이 안 되어서 하비엘에게 물어보고 나서야 대충 감을 잡았던, 시위대 잡아가는 전문 훈련 집단이다. 한국처럼 징병이 되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지원해서 사람 때려잡는 직업을 갖는 사람들의 멘탈리티는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 내가 직접 연루된 게 아닌데도 경찰들이 겁주면서 시위대 몰아가는 거 보면 그냥 가슴이 벌떡벌떡 뛴다. 물론 괜히 경찰들 흥분시키는 시위대들 문제도 많지만 말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