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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오는 날 딴 생각

눈이 너무나 많이 온 이 아침, 난 지각도 하지 않고 아침 8시에 출근을 했다. 이런 날에도 너무나 열심히 일하는 대중교통 종사자 분들 덕분이긴 하지만, 이럴 때조차 지각을 못하는 내가 좀 싫다.

 

새벽에 일어나서는 밖에 눈이 이미 다 내려서 쌓여있는줄만 알았다. 그래서 우산 없이 나왔다가 전철역까지 걸어가는데 쏟아지는 눈발에 마치 폭우 속을 걷는 느낌이었다.

역에 내리니 이제 막 동이 트려는데 눈은 더 빗발처럼 내리고 있었다. 눈을 피해 가려고 조금 돌긴 하지만 시장길을 택해 걸어갔다. 아직 문을 연 가게가 보이지 않는데 그 사이로 야채를 배달하는 트럭에서 물건을 꺼내어 가게로 옮기는 사람들을 보았다. 이렇게 눈이 많이 와서 교통이 마비되는 날에도 유통상들은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경외심과 섬뜻함이 동시에 들었다.

 

학교로 가려면 이제 마을버스로 갈아타야 하는데 버스가 과연 다닐까 하는 의문과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근데 왠걸 나를 태우고 갈 5번 버스가 곧바로 도착하는 것이다. 아스팔트 색깔이 아예 흰색으로 도배된 그 길을 운전기사 아저씨는 너무나 잘 헤치고 나아갔다.

학교에 도착해서 교무실에 와보니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이 눈 속에 역시나 아무도 오지 못했구나 싶었다. 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다들 식당에서 모여 시무식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원래는 7시 반 시작인데 교장이 늦게 도착을 해서 8시에 시작을 했다고 한다. 거의 모든 교사가 참석한 듯 했다. 내 부장쌤은 심지어 따따블 택시를 불러타고 왔단다. 아침 7시 20분에 교무실에서 메신저로 전체 교사 메세지를 돌린 것을 보고 속으로 경악을 했다.

 

자연재해와도 같은 이 악조건 속에서 각자 따따블 택시를 타든 아침에 두시간 먼저 집에서 나오든 해서 시무식에 참석을 한 것이다. 그렇게 출근을 '사수'한 뒤에는, 눈 때문에 늦거나 못 온 사람들에 대해서 다 이해한다고 말하는 여유까지 보이는 이 사람들에 정말 할 말을 잃었다.

 

교사들이 시무식을 했던 식당에 되어있던 치장과 테이블세팅, 음식들. 그리고 분주히 움직이는 식당노동자들의 모습. 내가 그분들을 고용한 것도 아니고, 난 시무식 참석대상도 아니지만, 이 아침에 눈길을 뚫고 출근해서 음식준비를 했을 모습이 떠올라서 서글퍼졌다.

 

자꾸 작년 겨울 런던에서 이렇게 눈이 많이 왔을 때 버스노동자들은 아예 차고에서 눈싸움을 하며 운전을 안 하고 있고 지하철도 제대로 안 다니면서 모든 노동자들이 이틀씩 휴가를 가졌던 기억이 오늘 아침에 내가 받은 인상들과 겹쳐진다. 뜬금없을지 모르지만, 한국에서 '혁명'이 불가능한 이유를 알아버린 것만 같다. '불굴의 한국인'들은 어떤 조건에 처하더라도 자본주의가 만들어 놓은 일상을 지킬 수 있는 저력이 있는 것이다. 거기엔 어떠한 예외성도 인간미도 느껴지지 않는다.

'까라면 까는' 이 표현이 오늘 몸소 이해가 되어버렸다.

 

이렇게 눈이 계속 오는데 집엔 어떻게 돌아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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