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체코학생과 펩시콜라

6월 25일

-헤이스팅스에 단 하나 있는 영화관

 

-벌써 25일이라니. 앞으로 남은 5개월 정도의 시간이 여전히 멀게만 느껴지지만, 특히나 여기 와서 갓 사귄 사람들이 지난 주 이번 주 다음 주 줄줄이 떠나는 걸 보면서 더더욱 앞으로 여기서 보낼 시간이 길게만 느껴지는데, 한편으론 내가 비행기를 탄 날이 5월 마지막 날이었고, 이제 월말이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하니 시간이 금세 또 이렇게 흘렀구나 싶다.

 

-같은 하우스 메이트인 빅터는 이제 여기 온지 2주째인데 이틀에 한번씩은 타운센터에 나가 펍에서 노는 것 같다. 지난 주 이번 주 그리고 다음 주까지, 학원에 길어야 한 달정도 머물다 돌아갈 학생들이 매주 월요일마다 몰려들고 있다. 왜 이리 체코, 슬로바키아 사람들이 많은지. 물론 걔네가 보기엔 아시아 사람들이 많다고 느낄런지도. 가재는 게편이라는 속담이 이럴 때 쓰이는 건진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확실한 건 체코, 슬로바키안들이 한 그룹을 이뤄서 주로 놀고, 일본에서 온 친구 한 명을 포함한 한국인들끼리 한 그룹을 이뤄서 주로 노는 것 같다. 이렇게 분석하고 있는 나는 어디에 서있는가. 확실한 건, 체코, 슬로바키안들하고 어울리진 않는다는 거.

 

이번 주에 새로 시작한 친구들 중에는 이제 겨우 18살인, 아직 secondary school 도 졸업을 안 한 친구 두 명이 내가 속한 반으로 배정이 되었다. 역시나 남자들이 같은 나이의 여자들에 비해 어리구나 싶은 생각이 또 들었던 게, 같은 18살인데 약간 덜 자란 듯 보이는 체코 남자 아이(?)에 비해 슬로바키아에서 온 여자 분은 훨씬 더 성숙해보인다. 물론 어디까지나 내 편견이 개입된 주관적인 판단. 어찌됐든. 난 그네들 나이 때 아무것도 모르고 집 학교 집 학교 이렇게밖에 못 살았는데. 부러운 마음 반, 가족을 떠나 올 수 있는 용기에 감탄 반, 대충 그런 느낌이다. 나이주의를 싫어하면서도 스스로 무의식중에 타인을 나이라는 잣대로 평가하는 건 어쩔 수 없는 내 버릇인가보다.

 

-나랑 같은 반 친구 중에 리비아에서 온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은행에서 일을 하다 왔다고 한다. 요 근래에 온 사람중에 드물게 올해 말까지 머무를 예정이라고 하는 사람인데, 쉽게 친해지기가 어렵다. 다만, 한번 우연찮게, 히드로 공항에서 입국심사를 받던 경험을 공유하면서 같은 유색인종이라는 일종의 동류의식을 확인하는 재밌는 경험을 했다. 리비아에서 왔고, 나이(!)도 꽤 있는 것 같아서 이라크 전쟁에 대한 당신의 생각이나 리비아 내에서의 여론에 대해서 물어보려고 했는데, 서로 다른 맥락을 커버하기엔 우리 둘 다의 영어가 너무 짧았던 것 같다. 사족을 달자면, 이 동네 뉴스를 보면 거의 매일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에 관련된 뉴스가 나온다. 물론 주로 오늘은 어느 군인이 죽었다, 그 군인은 이라크에 간 첫번째 여군이었다, 그 군인은 참 성실한 사람이었다 등의 뉴스와 한편으론, 총리가 사망한 군인에 대해 애도를 표하면서 영국 군인은 그래도 용감히 임무를 수행할 것이라고 말했다는 뉴스나, 오늘 영국 왕자가 에딘버러에서 있었던 참전 사망 군인 추모 퍼레이드에 참석했다 등등이 대부분이다. 내가 여기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매체에서전쟁에 대한 다른 목소리를 발견하긴 힘든 것 같다. 적어도 bbc 뉴스에서는 그렇다.

 

-전에도 언급했지만, 여기 있는 한국 사람이 대여섯명 정도 되는데, 3명 정도의 여성분들은 회사를 다니다 때려치고 여길 왔다고 하고, 두 명 정도의 여성분들은 대학을 다니다 온 것 같고, 한 명의 남자 분은 군대를 마치고 여기로 온 대학생이다. 다 더하면? 딱 여섯 명이구나. 이번 주에 여자 분 한분이 새로 왔는데 아마 나처럼 12월까지 머물 예정인 것 같다. 여튼. 한국인들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이를 물어보고, 남자의 경우엔 군대를 다녀왔는지, 그 다음 질문은 뭘 하다 왔는지, 여기엔 얼마나 머물 건지, 이렇게 질문 3종 세트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첫 만남에서 이루어진다. 다른 남자분 한 명은 여기선 나랑 같은 나이인데 한국 나이로는 한 살 차이가 난다. 어찌나 나에게 꼬박 이라고 부르면서 존대를 하는지.

 

군대 다녀왔냐는 질문에 안 다녀왔다고 했더니 다행히도 더 꼬치꼬치 캐묻진 않았다. 한국에선 군대 아직도 안 다녀왔다는 사실을 정당화 할 수 있는 핑계가 늘 필요했는데, 그렇게 물어봐주지 않아서 정말 땡큐였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스스로 무언가 아직 군대를 안 다녀온 타당한 이유를 내가 그네들에게 입증해야할 것 같은 자격지심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나 더러 대학생이냐고 물어봐서, 왠지 대학생이라고 말하면 같은 한국인들, 특히나 회사 다니다 온 여자 분들한테 무시를 당할 것만 같은 묘한 자존심에 학원에서 돈 벌다가 왔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런진 몰라도 나랑 지금은 같은 나이인 다른 남자분은 동생 취급을 받지만(물론 그 남자분 스스로가 누님들에게 깍듯이 대하는 측면도 크다) 나는 서로 존댓말 하고 누구씨 하고 부르는 관계로 지내고 있다. 사실 돌이켜보면 한국에서 내가 맺던 관계 중에는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내가 보살핌을 받는 경우가 많았고, 또 내 스스로도 그런 관계를 원했던 것 같은데, 여기 와선 이유는 모르겠지만 본능적으로 스스로 나이 많고 경험 많고 연륜 있어 보이는 사람처럼 보이려는 태도를 보여온 것 같다. 원인은 아직 잘 모르겠다. 좀 더 생각해봐야겠다.

 

-영화관에 가서 받았던 몇가지 느낌. 유럽 하면 떠올리게 되던 일종의 환타지, 예컨대 그들이 갖고 있는 역사성 혹은 같은 자본주의 사회지만 왠지 덜 천박할 것 같은 이미지 혹은 얘네 사회의 예술에 대한 감수성? 이런 것들이 오늘 영화관에 가서 많이 깨졌던 것 같다. 3시 영화였는데 3시 10분이 넘어가도록 줄줄이 다른 영화 예고편을 틀어주고, 게다가 모든 영화는 미국 영화 혹은 자막이 필요없는 영화들이었던 점. 영화 마지막 장면이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가기도 전에 모든 사람이 자리를 떠버리는 모습. 사실 한국에서도 흔한 모습이지만 막상 여기서도 한국과 전혀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고 나니 묘한 느낌이었다. 너무 많이 기대를 했나보다. 아니면 예컨대 독일이나 프랑스에 비해 다른 모습을 가진 것일 지도 모르는 거고. 자본주의의 위대함이랄까. 안젤리나 졸리가 나오는, 오늘 갓 개봉한 unwanted라는 영화였는데 영어가 잘 들리지도 않고, 다른 생각을 많이 한 것 같다. 한국처럼 번역가가 많은 곳도 없겠단 생각도 문득 들었고.

 

- 체코인과 콜라. 다시 하우스메이트 이야기. 나보다 1년 더 늦게 태어난 친구이다. 89년 90년에 소위 동구권이 붕괴됐으니 적어도 이 친구는 어린 시절 몇 년 간은 공산주의를 경험했을 것이다. 이 친구를 보면서 흥미로웠던 건, 이 홈스테이에 들어온 바로 다음 날부터 마트에 가서 펩시콜라를 사와서 자긴 콜라를 너무 좋아한다면서 너도 좀 줄까 이렇게 물어보는거다. 역시나 내 환상에 기인한 묘한 궁금증에, 딴에는 고민해서, 너 일부러 코카콜라 말고 펩시콜라 사온거냐고 물어봤다. 대답은 별거 없었다. 그냥 펩시가 땡겨서 샀고, 자기는 코카콜라도 좋아한단다. 그래서 체코가 옛날에는 공산 치하였는데 지금은 사람들이 콜라를 많이 좋아하느냐고 물어보고 싶었는데, 역시나 둘 다 영어가 모자라고 괜히 물어보다가 민감한 부분을 건드리진 않을까 싶어서 꾹 참았다.

그런데 기회가 다시 찾아왔다. 그 친구도 나처럼 노트북을 들고 왔는데, 도시바 모델에 꽤나 쌔끈해보이는 노트북이다. 결정적으로 스피커가 내꺼보다 더 빠방하다. 너 노트북 스피커 좋아보인다고 말했더니 그 친구가 만족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하길, 도시바가 스피커에 강하다고 말을 하더라. 여튼. 그 친구 노트북에 무슨 놈의 음악이 그리도 많던지, 난 조심스럽게 내 엠피쓰리로 옮겨도 되냐고 물었더니 흔쾌히 그러라고 한다. 후훗. 또다시 조심스럽게 묻기를, 이 많은 음악 다 너가 씨디로 샀냐고 물었다. 이 역시 유럽 애들은 지재권에 더 민감하다는 얘기를 듣고 난 후 생긴 일종의 편견에서 기인한 질문이었다. 근데 이 귀여운 친구 말하길, 당연하단 표정으로 자기 친구한테 옮겨받은 거라고 한다. 속으로 피식 웃을 수 밖에 없었다. 불법 다운로드는 어디에나 있구나 싶었다.

안타깝게도 내가 아는 음악이 별로 없었다. 물론 글로벌 자본주의 시대에 어울리게 한국에서도 인기있는 팝송도 많았지만. 그 친구 말하길 자긴 아메리칸 팝송이 많다고 한다. 역시나 내 호기심을 자극해서 계속해서 감탄사를 연발했더니, 체코에 아메리칸 송이 무지 많다고 한다. 그리고 자기네 나라 가수도 보통 영어로 음반을 녹음한다고. 논술지문에서나 보던 미국 문화의 세계화를 실감하던 순간이었다. 그래도 이 친구를 비롯한 몇몇 체코인들이 아메리칸 헤피엔딩이란 표현을 쓰면서 헤피엔딩으로 끝나는 영화를 평하는 걸 보면 또 속으로 아 얘네가 그래도 생각이 아예 없는 건 아니구나 또 혼자 속으로 재단하게 된다. 허허

 

영화를 보고 나서 느낀 걸 쓰려했는데 너무 길어져버렸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