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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기

7월 2일

 

- 세탁기가 너무 사랑스럽다. 이 동네는 세탁기가 부엌에 딸려 있는데, 지금 사는 집은 건조대도 천장 높은데다가 리프트처럼 올릴 수가 있어서 저녁 먹고 설거지 하기 전에 세탁기를 돌렸다가 대충 씻고 정리하는 동안에 끝난 빨래들을 바로 천장으로 올려보낼 수가 있다. 한국에선 드럼(트롬?)세탁기가 한창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여기는 모든 세탁기가 드럼 세탁기이다. 싱크대 찬장 밑에 살포시 들어 앉아 열심히 작업을 수행하는 세탁기. 옵션도 다양해서 이것 저것 실험(?)해보고 싶은 호기심을 자극한다. 버튼을 누르면 뚝딱 군말없이 돌아가는 세탁기. 이렇게 말하고 나니 문득 박민규의 어느 소설이 생각날 것만 같다. 불쑥, 나동과 용석이 추천해주는 소설들이 그리워진다.

 

- 오늘 점심은 여기 한국 학생들 몇몇과 함께 내 플랏에서 카레를 해먹는 것으로 때웠다. 오뚜기 카레 가루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밥이 에러긴 했지만 아무튼 맛있게 냠냠 헤치워버렸다. 음식을 해먹으면서 나날이 이 곳의 살림용품들 특히나 주방용품들의 세심한 부분 하나하나 적응이 되고 있다. 처음엔 낯설던 것들도 이제는 그것들의 배치 하나하나가 이해되기 시작하면서 묘한 짜릿함마저 든다. 허허

 

- 매번 장보는 비용이 알게 모르게 조금씩 오르고 있다는 걸, 오늘 가계부(!)를 쓰면서 깨달았다. 처음엔 초기 정착비용이려니 생각했는데 막상 또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홈스테이 하면서 홈스맘의 영향을 받아 시나브로 좀 더 푸짐하고 그럴듯한 음식들에 대한 욕구가 생겨나서 그런 것 같다. 쑥쑥 줄어들어가는 지갑을 보면서 가슴 한구석이 에려 오지만, 잘 챙겨먹어야 한다는 욕구가 아직은 워낙 압도적인 것 같다. 사실 집에서 엄마가 살림하는 것에 비하면 난 발톱 떼에도 못 미치겠지만, 스스로 잘 살고 있다는 생각에 므흣해진다. 좀 더 너스레를 떨자면, 누군가의 노동에 기대지 않고도 스스로 내 먹을거리를 요리한다는 생각에 또 한번 므흣. 모리슨이라는 자본주의 사회의 전형적인 마트에서 수천가지 물건 속에서 합리적인 소비를 하는,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개인이 되는 듯한 착각이 허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돈만 있으면 얼마든 내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는 듯한 경험은 꽤나 달콤한 맛을 선사한다.   

 

- 어제는 홈스맘 아들 조나단의 노래를 들으러 올드 타운의 한 펍에 찾아갔다. 기네스 한 병과 라거 파인트 하나 밖에 안 마셨는데 그걸로만 도합 6파운드. 한국에서 맥주 500cc 가격을 생각하면 속상하지만, 러블리 조나단의 노래를 지칠만큼 오래 들을 수 있었다는 것으로 위안을. 지난 일요일에 가든에서 놀면서 어느 순간에 조나단이 기타를 들고 노래를 몇 곡 부르고 나서는 지금은 술을 마셔서 제 실력이 아니니 펍에서 자기 노래를 들으면 프로페셔널한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막상 가서 보니 조나단의 모습은 프로페셔널의 모습을 넘어 어느 순간엔 에너지를 몽땅 다 써버리고 쓰러질 것처럼만 보여서 보기 안쓰러운 감정마저 들었다. 그러면서 든 상반된 생각 두 가지. 세상 어느 일이나 돈 버는 일은 쉬운 게 없구나. 한편으론, 회사를 다닌다거나 어딘가에 직접적으로 고용되지 않고도 좀 더 자유롭게 돈을 버는게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구나 싶은 생각. 홈스맘의 말에 의하면 조나단은 어려서부터 기타치고 피아노치고 노래부르는 것을 좋아했단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벌 수 있는 모습이 부러울 따름이다.

 

- 한편으론 얼른 알바를 구해서 돈도 벌고 영어도 더 자주 듣고 말하고 싶은 생각도 크지만 다른 한편으론 매일 무언가 스스로에게 핑계를 만들어 가면서 알바 찾는 것을 게을리 하고 있다. 이러다 정말 잔고가 엥꼬에 좀 더 가까워지면 좀 더 빠릿빠릿하게 움직이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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