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갈매기

- 언제부턴가 '나'에 대한 고민이 부쩍 늘어났던 것 같다. 나는 누굴까, 나는 왜 태어났을까,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내 미래는 어떠할까 등등. 아마도 우연한 계기로 '매트릭스'를 다시 보게 되면서 이런 고민은 더 깊어져만 갔던 것 같다. 그리곤 정답을 알 수 없는 괴로움에 끊임없이 바닥을 치며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게 됐던 것 같다. 하루에도 여러번씩 감정 굴곡이 바뀌는, 일종의 조울증인 건지도 모르겠다.

매트릭스의 문제제기는 상당히 흥미롭다. 예컨대 이미 자본주의라는 매트릭스 안에서 사람들은 '소비'의 자유 이상을 고민하기가 힘들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자유로운 존재라고 생각하게 되기 쉽다. 당시에 이런 저런 책을 읽으며, 매트릭스라는 시스템의 '바이러스'는 곧 시스템의 '오류'이며, 이는 '저항'이자 '자유'라는 식의 멘트에 혹했던 기억이 난다. 끊임없이 나란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나의 모습은 그럼 과연 '오류'인 것인지, 혹은 이 마저도 이미 시스템 안에서 예측가능한 하나의 모습에 불과한 것인지 궁금증이 뒤따랐다.

그 와중에 헤이스팅스로 옮겨와서 6개월 정도 살기로 결정을 한 셈이다. 그래서 자꾸만 도피성 유학 이런 말을 스스로 하게 된다. 여기 와서나의 고민은 이제 '내가 왜 여기에 있는가'하는 것으로 바뀌어 버렸다. 여기 오기로 결심한 건 나였는데, 여기 왜 있나를 고민하는 내 모습이 참, 뭐랄까..기분이 복잡하다.


-일요일 오전, 빨래를 널어넣고 웨스트 힐로 산책을 나갔다. 지름길을 알았기 때문에 15분 정도면 힐에 도착해서 눈 앞에 펼쳐진 바다를 바라볼 수가 있다. 하늘에 구름이 참 특이해서 담아두고 싶었는데 챙겨야지 했던 카메라를 깜박해버렸다. 혼자 느지막이 걷다보니 또 생각이 많아져서 메모라도 해야겠다 싶었는데 펜과 노트도 없이 나와서 대략 좌절. 그나마 챙겨들고 나온 mp3를 들으며 바다를 향해 가만히 앉아 있었다.

끊임없이 먹을 것을 찾아 여기 저기를 찾아 헤메이는 갈매기를 보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과연 갈매기와 얼마나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걸까. 먹고 자고 싸는 것 이상의 무언가의 재미가 나에게 있긴 한걸까 하는 생각. '갈매기의 꿈'에 나오는 조나단 생각이 났다. 그러다가 문득 한편으론, 갈매기처럼 살면 안 되는 걸까 하는 생각도 들어버렸다. 자본주의라는 시스템 속에서 어떻게 하면 돈을 덜 벌고 소비를 덜 하며 좀 더 자율적으로 살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은, 어떻게 하면 잘 먹고 잘 살까 하는 고민과도 얼마든지 연결될 수 있을테니 말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한 시간 정도 하면서 앉아있었나보다. 이번에도 역시나 새롭게 알게된 지름길을 따라 모리슨으로 내려와서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인터넷이 뚫리고 나니 주말 내내 노트북과 함께 지냈나보다. 사람들 연락도 하고, 여행 계획도 세우고, 열심히 영화 다운도 받고. 학원에서 내준 숙제는 손도 안 건드린 것 같다. 풉. 토요일에는 아예 밖에도 안 나갔으니 오타쿠 생활을 한 셈이다.


- 목요일 저녁부터 와있던 집주인이 도무지 돌아갈 생각을 않는다. 보통 완전히 독립되어있는 플랏도 아니고, 방이 나란히 붙어서 부엌과 화장실을 공유하다보니 자꾸만 마주치게 되어서 영 신경이 쓰인다. 그래도 며칠 또 이렇게 같이 살면서 부딪히다 보니 집주인 캐릭터도 대충 파악이 되고 있다. 나이가 30대 초반인데, 아직 내공이 부족한 것 같다는 느낌이 갈수록 강하게 든다. 세입자인 나와의 관계에서 그렇게 쿨하지가 못 한 것 같다. 얘가 나보고 이것 저것 조언을 가장한, 내가 해서는 안 될 것들 목록을 여러 번에 걸쳐서 얘기해 줄 때마다 처음엔 은근히 주눅이 들었는데, 이제는 집주인이 왜 이렇게 쪼잔할까 하는 생각도 많이 든다.

예컨대, 지난 약 3주간 나 혼자 지내면서 화장실 세면대가 때가 타길래 부엌에 있는 철수세미를 가지고 한번 문질렀는데, 오늘 걔가 나더러 수세미로 문질렀냐고 물어보더라. 그러면서 이 세면대가 자기 부모님이 프랑스에서 사온 건데 역사가 있는 세면대니 어쩌니 하면서 여기 이렇게 상했다는 말을 몇 번을 반복해서 한 것 같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좀 당황스럽기도 하고 해서 난 몰랐다, 미안하다는 말밖에 못했는데, 생각해보면 그럼 집주인인 니가 좀 깨끗하게 관리 좀 해놨으면 내가 철수세미질을 안 했을 거 아니냔 생각이 들더라. 혹은 오늘 아침에 세탁기에서 빨래를 꺼내 널고 있는데 은근슬쩍 다가오더니, 빨래가 적을 때는 'half load' 버튼을 눌르라고 한다. 그냥 하면 물이 많이 든다고 하면서 말이다. 허 참. 그래서 나도 안다, 내가 그 버튼 누르고 해봤더니 시간이 더 걸리더라, 이렇게 말하니 걔가 그랬냐면서 그냥 돌아서버린다. 모르긴 몰라도 얘는 정작 그 버튼 누르고 사용한 적이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여기는 인터넷 설치비만 110파운드, 한국돈으론 22만원 정도니깐 한국 인터넷을 생각하면 무지 비싼 셈이다. 그리고 나서 한달에 내는 돈은 4만 4천원 정도. 결과적으로 이제 집에서도 자유롭게 이렇게 인터넷을 쓰고 있지만 설치하는 과정에서도 지금 돌이켜보면 볼수록 얘가 쪼잔하게 굴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그래도 밉거나 하진 않다. 그냥 귀엽단 생각을 하고 있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정말 애늙은이가 되어버린 것 같긴 하다. 암튼 결론은, 역시나 유럽 애들도 유럽 애들 나름이라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된다.

나는 꼬박꼬박 부엌에서 뚝딱뚝딱 뭔가를 만들어서 해먹는데, 얘는 계속해서 인스턴트 음식을 사와서 해먹곤 하는 것 같다. 나야 여기서 주말에 딱히 만날 사람이 없는게 이상하지 않다고 스스로 생각이 드는데, 집주인인 얘는 친구도 없는지 집에만 있는 걸 보면, 이 친구가 정말 친구가 없는 걸까 하는 생각도 들고. ㅎㅎ 암튼 이 친구 안 마주치려고 집에서 눈치를 보느라 결과적으로 이번 주말은 외롭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도 이제 그만 여기 머물고 이쯤해서 돌아가주면 좋겠다. 결정적으로 밤에는 쌀랑하니 추워서 보일러를 좀 틀고 싶은데 괜히 틀었다가 또 얘 잔소리 들을까봐 못 트는 상황이 맘에 안 든다. 씨익.




메이화가 저번에 헤이스팅스 놀러왔을 때 찍은 사진. 이스트힐에서 바라본 모습. 바다 건너 보이는 곳이 이스트본이라고 한 것 같다. 기차로 30분 정도 걸리는 곳. 토요일에 사람들과 갈 뻔했는데 째버렸다. -_-




이스트힐에서 웨스트힐을 바라보며 찍은 사진. 올드타운의 모습이 보인다. 시시각각 변하는 구름의 모습을 더 담아내고 싶었는데.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