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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갈 날짜를 고르다가

병역거부 기자회견을 했던 게 벌써 지난 겨울 12월의 일이에요. 그 시점으로부터 구속되기 전까지 3개월 정도의 시간을 갖게 되리라 예상을 하면서 수감 전까지 지리산 종주, 단식, 사랑니 뽑기 이 세 가지 정도는 꼭 해야지 생각을 했어요. 사랑니는 술약속들을 조정하는 와중에 일찌감치 뽑아버렸어요. 갑작스런 구제역의 여파로 지리산에는 못 갔지만 대신 월출산과 두륜산을 오르면서 그 아쉬움을 대신했구요. 몸을 한번 깨끗이 하고 감옥에 가야겠단 생각에서 단식을 하고 싶었는데, 술 마실 일도 많고 정신도 차분히 유지하긴 힘들 테니 차라리 감옥 다 살고 나와서 몸을 게워내라는 얘기에 단식은 일단 접어두었습니다.

 

사람들과 만나는 약속들을 미리 조정하면서 만나고 싶은 사람들 최대한 다 만난다고 했지만 그래도 아쉬움이 남긴 했어요. 그래도 이 정도면 후회는 없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선고 재판 전날 밤을 보냈죠.

 

그런데 막상 재판 당일에 예상과 달리 구속이 안 되고 나니 처음엔 어리둥절했지만, 오후가 되고 따뜻한 봄 햇살을 맞으며 걸으려니 기분이 너무 좋아지는 거예요. 보고픈 사람들을 다시 만나고 손을 잡고 마음껏 이야기 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린다는 것이 이렇게 가슴 벅찬 일인 줄을 실감한 적은 처음입니다. 그전까지는 구속되는 시점에 관해서는 엎어 치나 메치나 조삼모사라고만 생각하고 어차피 들어갈 거 빨리 가면 빨리 나오고 좋을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막상 같이 못 돌아나올줄 알았던 법원 정문을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함께 걸어나오고 나니 마치 출소한 사람처럼 기분이 좋더라구요. 감옥 가기 전 일주일과 감옥 다녀와서의 일주일은 분명 동일한 양만큼의 시간이지만 그 두 다른 시간이 제게 주는 의미는 질적으로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 중입니다.

 

감옥 안에서 맞이할 줄 알았던 4월을 바깥에서 맞이하며 피는 꽃들도 볼 수 있고, 이 따뜻한 계절을 함께 못 볼 줄 알았던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시 보게 되니 그저 감사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다시 감옥에 걸어 들어간다고 해도 아주 잠깐 힘들긴 하겠지만 마치 소풍을 다녀오는 기분으로 발걸음을 뗄 수 있을 것 같은 가벼운 마음마저 들고 있어요. 기대했던 출소의 시점이 한 달 정도 늦춰질 수 있다는 것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구요. 몇 시간 뒤에 구속된다 생각하고 친구들에게 썼던 편지가 다만 살짝 민망할 따름입니다.

 

18개월이라는 실형을 선고하긴 했지만, 항소신청시한이 끝나고 형이 확정되는 시점까지 형 집행을 유예시켜준 판사 분에게 고마워졌어요. 판사는 적어도 자기 눈 앞에서 자기 손으로 병역거부자를 감옥에 보내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판사의 결정을 존중하고 싶구요. 판사 분에게 감사의 인사를 담아 편지를 써볼까 생각 중이에요. 마치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았던 프리모 레비가 당시 수용소 관리였던 독일인에게 수십년 뒤에 편지를 썼던 것처럼이라고 하면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분들에 대한 모욕이 되려나요. 저에게 실형을 선고했지만 "수형생활 잘 하시라"면서 최대한의 배려를 해준 그 판사가 왠지 답장을 보낼 것 같은 기분도 드네요.  

 

검찰청 공판과 직원과 선고 당일 오후에 통화를 했어요. 1주일 간의 항소신청기간이 지나면 형이 최종확정이 되기에 집행할 날짜를 조정하기 위해 전화를 하셨대요. 형을 집행하는 시점 즉 제가 호송차 타러 나가는 날도 일정 한도 내에서 제가 편한 날을 선택할 수 있게 된 이 상황을 생각하면서 지난 10년간 병역거부운동을 해온 이들에 대한 생각에까지 이르렀어요. 한 때는 병역거부자들을 구속 수사 하는 사법부에 대해 “증거인멸과 도주의 우려가 없으므로” 불구속 수사를 주장하던 시절도 있었잖아요. 그런데 이제는 판사가 먼저 “피고인은 도주의 우려가 없다고 여겨지기에 법정에서 구속을 하지는 않겠다”고 말하고 심지어 형을 집행하는 검찰 직원도 저에게 먼저 감옥에 가기 좋은 날이 있느냐고 선택을 물어보게 된 것도 10년 병역거부운동의 성과라면 성과라고 생각해요. 물론 감옥에 가는 현실 자체가 바뀐 건 아니기에 이렇게 섣불리 말하는 것도 좀 그렇긴 하지만, 병역거부운동을 해온 이들에 대한 감사를 새삼 표현하고 싶어졌어요.

 

제 친구 조은은 판사로부터 1년 6개월을 선고받으면서 “진정성이 느껴지는 선한 얼굴”이라는 얘기를 들었어요. 저는 비록 ‘선한 인상’이라는 소리는 못 들었지만 대신 “도주의 우려가 없다”는 얘기를 들었으니 조은과 동급으로 취급받은 것이라고 스스로 믿고 있어요. 얼마 전 갔던 치과에서 들었던 “잉여의 몸”이란 표현에 이어 이번엔 “도주의 우려가 없는 피고인”이라는 표현까지 듣고 나니 제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고민거리를 제공받은 기분이에요. 아무튼 이후에 병역거부를 고민하는 분들은 법정에서 선고 후 바로 구속이 안 될 수도 있다는 것도 염두에 두면 수감 이전 생활을 계획하는 데에 도움이 되겠네요. 물론 더 좋은 것은 저를 끝으로 병역거부 때문에 감옥에 가는 사람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는 것이고요.

 

 

 

봄봄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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