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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냥함 혹은 따뜻함

수감시절의 일기들을 다시 보면 내가 지금 하는 고민들이 그 때와 비교해 어떻게 달라져있을지 살펴볼 수 있을 것 같은 호기심이 든다. 그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달라졌다면 어떤 부분에서 달라졌는지, 여전히 그때와 다를 바 없는 화두를 들고 있다면 그건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이기도 하다. 요즘 내가 하는 고민들에서 막혀있는 부분들을 뚫어주거나 혹은 뭔가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기대감. 아, 이런게 나한텐 중요한 문제의식이었구나 라는 걸 찾고 싶은 마음도 있고.

 

그런데 문득 출소날 오전 풍경이 떠올랐다. 그나마 인간으로 연결되고 대화가 좀 통하는 직원이 있었는데, 내가 '죄수복'을 벗고 새로운 속옷을 입으려는 순간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던 그와 눈이 마주친 것이다. 나의 알몸을 온전히 보여줄 수밖에 없었던. 이제 한시간 뒤면 나도 그와 같은 '민간인'이 될 수 있는 과정이었는데, 그 순간까지도 난 '수용자'라는 신분을 다시 한번 확인받은 셈이다. 내 알몸이 노출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을 수 있는 상태는 내가 나 스스로를 교도관과 같은 인간이 아니라고 자기최면을 걸 때에 가능하다.

 

뭔가 부당한 일을 경험했을 때, 그 경험에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반응은 크게 두 가지다. 1) 그 부당함에 대한 내 의견을 표현하거나 2)그 부당함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나의 상황을 스스로 합리화하는 것이다.

 

동등하지 않은 권력관계에서 약자인 내가 나를 표현하는 것은 적잖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내가 느낀 것, 생각한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갖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 표현으로 인해 내가 받을지 모르는 불이익까지도 미리 염두해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친밀하지 않은 뭔가 공적인 관계에서 바로 버럭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성향 탓에 더해 이런 저런 것들을 두고 재는 신중함 때문에 이미 한두번 그냥 참고 넘어가는 상황들이 쌓인 상태일 때, 비슷한 상황이 재차 발생한다면 난 또 다시 그냥 참고 넘어가게 될 확률이 커진다.

 

제때 표현하지 않은 나 자신을 두고서 자학과 자기합리화를 왔다갔다하는 과정이 시작된다. 나를 표현할 용기가 없었던 나 자신을 비난했다가, 나를 화나고 겁나게 만든 교도관 개인에 대한 증오와 분노를 던지기도 한다. 나를 화나게 한 그 상황과 상대방을 탓하는 과정 그리고 제대로 표현을 못한 스스로를 비난하는 과정을 겪다보면 어느 순간 나의 감각이 무던해지는 상황이 찾아온다. 스트레스 상황에 노출되고 싶지 않은 무의식적 자기방어의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무던해진다는 것은 그 상황을 더 이상 예전처럼 큰 문제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애초에 내가 부당하다고 생각했던 상황을 야기한 권력관계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약자인 나는 원래 그런 대우를 받는 것으로 여기게 된다. 지배체제에 저항해보기보단 그냥 그 체제 자체를 받아들이게 되는, 어찌보면 가장 서글픈 과정이기도 하다.

 

내가 나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는 자괴감, 상대를 나와 같은 인간이 아닌 '또라이'로 보기도 했지만 동시에 나 자신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위치지으면서 수치심이나 억울함 자체를 가지지 않으려 했던 모습들. 징역 때를 벗는 것은 내가 맺었던 관계양상 그리고 그 관계에서 내가 익숙해졌던 관계맺기의 전략들을 반추해보는 과정이기도 하다. 자기 표현을 하지 못한 나 자신에 대한 비난과 원망, 상대와의 소통가능성에 대한 신뢰를 스스로 먼저 접었던 순간들이 떠오를 때 무력감이 찾아든다.

 

나의 알몸을 여과없이 볼 수밖에 없었던 그 직원도 뭔가 불편하긴 했던지 부하직원들에게 차양막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그리고선 아직 옷을 덜 갈아입은 사람들은 그 뒤에서 갈아입으라고 했다. 그 지시는 혹여나 인권위 진정을 당할까 하는 몸사림때문이었다기 보단, 설령 자신은 명확히 의식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어쨌든 타인의 알몸을 보는 자와 자신의 알몸이 보여지는 자 사이의 관계를 불편하게 여길 수 있는 인간으로서의 감수성이 발현되었기 때문이라고 믿고 싶다.

 

그런 인간성, 누구나 어느 시점에선 발현될 수 있는 인간으로서의 감각들을 신뢰하며 살고 싶다. 그 감각을 요즘 나는 따뜻함 혹은 상냥함으로 부르고 있다. 나에게 자기표현이란 타인의 상냥함을 믿는만큼 나 자신의 따뜻함을 잃지 않기 위한 의미의 행동이다. 나 스스로를 '그런 취급을 받아도 되는' 인간 이하'의 존재로 만들지 않는것. 내가 인간이고 싶은 만큼 상대와도 인간으로 연결되고자 하는 것. 그때 상호간의 소통과 이해도 가능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지난 나의 일기들을 펼쳐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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