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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거부 기자회견을 했던 게 벌써 지난 겨울 12월의 일이에요. 그 시점으로부터 구속되기 전까지 3개월 정도의 시간을 갖게 되리라 예상을 하면서 수감 전까지 지리산 종주, 단식, 사랑니 뽑기 이 세 가지 정도는 꼭 해야지 생각을 했어요. 사랑니는 술약속들을 조정하는 와중에 일찌감치 뽑아버렸어요. 갑작스런 구제역의 여파로 지리산에는 못 갔지만 대신 월출산과 두륜산을 오르면서 그 아쉬움을 대신했구요. 몸을 한번 깨끗이 하고 감옥에 가야겠단 생각에서 단식을 하고 싶었는데, 술 마실 일도 많고 정신도 차분히 유지하긴 힘들 테니 차라리 감옥 다 살고 나와서 몸을 게워내라는 얘기에 단식은 일단 접어두었습니다.
사람들과 만나는 약속들을 미리 조정하면서 만나고 싶은 사람들 최대한 다 만난다고 했지만 그래도 아쉬움이 남긴 했어요. 그래도 이 정도면 후회는 없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선고 재판 전날 밤을 보냈죠.
그런데 막상 재판 당일에 예상과 달리 구속이 안 되고 나니 처음엔 어리둥절했지만, 오후가 되고 따뜻한 봄 햇살을 맞으며 걸으려니 기분이 너무 좋아지는 거예요. 보고픈 사람들을 다시 만나고 손을 잡고 마음껏 이야기 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린다는 것이 이렇게 가슴 벅찬 일인 줄을 실감한 적은 처음입니다. 그전까지는 구속되는 시점에 관해서는 엎어 치나 메치나 조삼모사라고만 생각하고 어차피 들어갈 거 빨리 가면 빨리 나오고 좋을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막상 같이 못 돌아나올줄 알았던 법원 정문을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함께 걸어나오고 나니 마치 출소한 사람처럼 기분이 좋더라구요. 감옥 가기 전 일주일과 감옥 다녀와서의 일주일은 분명 동일한 양만큼의 시간이지만 그 두 다른 시간이 제게 주는 의미는 질적으로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 중입니다.
감옥 안에서 맞이할 줄 알았던 4월을 바깥에서 맞이하며 피는 꽃들도 볼 수 있고, 이 따뜻한 계절을 함께 못 볼 줄 알았던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시 보게 되니 그저 감사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다시 감옥에 걸어 들어간다고 해도 아주 잠깐 힘들긴 하겠지만 마치 소풍을 다녀오는 기분으로 발걸음을 뗄 수 있을 것 같은 가벼운 마음마저 들고 있어요. 기대했던 출소의 시점이 한 달 정도 늦춰질 수 있다는 것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구요. 몇 시간 뒤에 구속된다 생각하고 친구들에게 썼던 편지가 다만 살짝 민망할 따름입니다.
18개월이라는 실형을 선고하긴 했지만, 항소신청시한이 끝나고 형이 확정되는 시점까지 형 집행을 유예시켜준 판사 분에게 고마워졌어요. 판사는 적어도 자기 눈 앞에서 자기 손으로 병역거부자를 감옥에 보내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판사의 결정을 존중하고 싶구요. 판사 분에게 감사의 인사를 담아 편지를 써볼까 생각 중이에요. 마치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았던 프리모 레비가 당시 수용소 관리였던 독일인에게 수십년 뒤에 편지를 썼던 것처럼이라고 하면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분들에 대한 모욕이 되려나요. 저에게 실형을 선고했지만 "수형생활 잘 하시라"면서 최대한의 배려를 해준 그 판사가 왠지 답장을 보낼 것 같은 기분도 드네요.
검찰청 공판과 직원과 선고 당일 오후에 통화를 했어요. 1주일 간의 항소신청기간이 지나면 형이 최종확정이 되기에 집행할 날짜를 조정하기 위해 전화를 하셨대요. 형을 집행하는 시점 즉 제가 호송차 타러 나가는 날도 일정 한도 내에서 제가 편한 날을 선택할 수 있게 된 이 상황을 생각하면서 지난 10년간 병역거부운동을 해온 이들에 대한 생각에까지 이르렀어요. 한 때는 병역거부자들을 구속 수사 하는 사법부에 대해 “증거인멸과 도주의 우려가 없으므로” 불구속 수사를 주장하던 시절도 있었잖아요. 그런데 이제는 판사가 먼저 “피고인은 도주의 우려가 없다고 여겨지기에 법정에서 구속을 하지는 않겠다”고 말하고 심지어 형을 집행하는 검찰 직원도 저에게 먼저 감옥에 가기 좋은 날이 있느냐고 선택을 물어보게 된 것도 10년 병역거부운동의 성과라면 성과라고 생각해요. 물론 감옥에 가는 현실 자체가 바뀐 건 아니기에 이렇게 섣불리 말하는 것도 좀 그렇긴 하지만, 병역거부운동을 해온 이들에 대한 감사를 새삼 표현하고 싶어졌어요.
제 친구 조은은 판사로부터 1년 6개월을 선고받으면서 “진정성이 느껴지는 선한 얼굴”이라는 얘기를 들었어요. 저는 비록 ‘선한 인상’이라는 소리는 못 들었지만 대신 “도주의 우려가 없다”는 얘기를 들었으니 조은과 동급으로 취급받은 것이라고 스스로 믿고 있어요. 얼마 전 갔던 치과에서 들었던 “잉여의 몸”이란 표현에 이어 이번엔 “도주의 우려가 없는 피고인”이라는 표현까지 듣고 나니 제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고민거리를 제공받은 기분이에요. 아무튼 이후에 병역거부를 고민하는 분들은 법정에서 선고 후 바로 구속이 안 될 수도 있다는 것도 염두에 두면 수감 이전 생활을 계획하는 데에 도움이 되겠네요. 물론 더 좋은 것은 저를 끝으로 병역거부 때문에 감옥에 가는 사람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는 것이고요.
봄봄봄!
"바라건대, 지치지 말기를. 제발 그러하기를. 모든 것이 유한하다면, 무의미 또한 끝이 있을 터이니."
-<호수와 바다 이야기>
마법의 주머니 3종세트를 선물해준 용석, 고마워!
0. 한동안 쓰던 진보넷 블로그가 있었어요. 영국에 갓 건너가서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시작했던 블로그엿어요. 여기에 포스팅을 하면 누군가는 읽어주고 피드백을 해주겠지 하는 마음이 있었어요. 어느 순간 그 블로그 방문자가 제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불어났고, 그때부터 저는 블로그에 글을 쓰는 것이 조심스러워지더라구요. 이 글을 누가 읽을 것인가 하는 생각은 분명 제가 쓰는 글의 투와 내용을 정하는데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요.
1. 지난 금요일엔 영등포구치소에 가서 백승덕씨를 보고 왔어요. 영등포구치소엔 무척이나 오랜만에 다시 가본 것 같아요. 그런데 여전히 변한게 하나도 없더군요. 아마 바로 옆에 있는 영등포 교도소와 함께 올 봄에 이사를 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나중에 제가 수감되면 찾아올 사람들을 생각하며 구치소 민원실 이곳 저곳을 둘러보았죠.
승덕씨가 수감될 무렵인 재작년 가을에 정말 우연히 신촌 거리에서 마주친적이 두어번 있었던 것 같아요. 각자 다른 술자리에서 놀고 있다가 늦은 밤거리에서 마주친 것이죠. 그렇게 본 것이 마지막이었던 분과 1년 여의 시간이 흐른뒤 유리창 너머로 마주하니 기분이 새롭더군요. 이 얘기 저 얘기를 나누는데 10분 약간 넘는 접견 시간이 어느새 끝나버렸어요. 감옥 안에 있는 사람이 감옥 밖에 있는 저를 오히려 위로하는 상황이었어요. 출소날 꼭 마중을 나가야겠어요. 승덕씨는 지난달 1급수를 달았고, 이번달 말에 가석방으로 출소할 예정입니다.
1급수를 달면 매일 한번씩 접견이 가능해지고, 아마 전화통화나 접견시간에서도 혜택이 있는 것 같아요. 국가가 모범수라고 인정을 해주는 것이죠. 학창시절 교사들에게 인정받아 생존하는 법을 체득했던 저는 수용시설에서 과연 어떤 방식으로 공무원들과 관계를 맺게 될지 제 스스로도 자뭇 궁금해지네요. 자발적으로 체제에 순응했던 모범생이 이젠 국가에 대한 반동분자가 되어 국가가 먹여주는 밥을 먹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네요. 다행인 점이 있다면 지금의 저는 이제 내면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면서 눈 앞의 상대를 인간으로 바라볼 수 있는 방법을 배웠고 계속 연마 중이라는 것입니다.
2. 어제 광화문 교보에서 이 책 저 책 보며 시간을 때우고 있었어요. 어제는 사전 코너에서 영어 사전과 국어 사전을 들여다보면서 감옥 안에 어떤 사전을 들고 갈까 고민을 하고 있었어요. 밖에 있을 땐 인터넷으로 바로 찾으면 되지만, 안에서 사전이 없으면 좀 답답할 것 같단 생각이 들었거든요.
사전을 고르다보니, 안에서 무슨 공부를 하다가 나올까 생각이 이어지더라구요. 영어공부와 일어공부는 좀 해야겠단 생각이 들었고, 시 소설도 많이 보고, 그동안 사놓고 못 본 책들도 몰아서 봐야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그럼 구체적인 계획을 짜봐야겠단 생각까지 들었고, 문득 고3 수험생 시절로 돌아간 기분도 들더라구요. 수능 시험 본 이후로 뭔가 계획적으로 공부해본 적이 없었는데, 감옥에 가면 이렇게 계획을 짜는 것만으로도 징역의 시간들을 빨리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심지어 1년 6개월 시간이 이 공부를 다하기엔 짧은 건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어요.
물론 징역이 징역이니만큼 개인시간 갖기도 힘들 것이고, 하루 노동이 끝난 뒤엔 티비소리와 방 사람들과의 관계, 친구들에게 편지쓰는 시간 등등 공부만 한다는 건 김치국부터 마시는 생각이라는 것도 알고 있어요. 그래도 제 발로 감옥에 들어가야 하는 이 분열적인 상황에서 뭔가 목표의식을 갖는 것이 스스로를 위안하는 데에 도움이 되기도 하는 것 같네요.
3. 승덕씨가 추천해 준 <관용>이란 책을 교보문고에서 샀습니다. 옮긴이 후기에 작년에 출소한 우공님 얘기도 나오더라구요. 기대가 많이 되네요.
*cafe.daum.net/copeace
내가 총을 들 수 없는 이유
1.
군대 대신 감옥에 가는 것, 이것은 제 삶에 있어 가장 큰 화두 중 하나였습니다. 어느 특정한 시점에 병역을 거부하기로 결심한 것은 아닙니다. 병역을 거부하는 이유를 짧고 간결한 말로 설명하는 것도 쉽지가 않습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제가 병역거부라는 선택지를 처음 알게 된 2003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제 자신에게 군인이 되어 총을 들고 서있는 저의 모습을 납득시키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이 글은 제가 병역을 거부하기까지 거쳐 온 고민의 여정을 보여주는 글이 될 것 같습니다.
2003년 발발한 이라크 전쟁은 제가 국가와 전쟁 그리고 군대에 대해 진지하게 사유하게 된 첫 번째 계기였습니다. 당시 갓 대학에 입학한 새내기였던 저는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을 반대하는 집회에 다녀오면서 ‘국익’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국가의 이익은 구체적으로 누구의 이익을 의미하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받아온 국가교육과정을 통해 ‘체력은 국력’이라는 식으로 저와 국가를 동일시하고 있던 제 가치관은 이때부터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민중의 지팡이’라고 알고 있던 경찰이 시위대를 진압하는 모습을 보면서 지금껏 내가 배우고 믿어왔던 세상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병역거부를 계속 고민하던 저는 미군기지확장이전 반대 투쟁이 벌어지던 2006년 평택 대추리에서 펼쳐진 일련의 사건들을 경험하면서 병역거부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저 자신이 살아오던 땅에서 계속 살고 싶어 했던 주민들에게 정부가 한 일은 군대와 경찰을 동원하며 그들을 모두 몰아내는 것이었습니다. ‘여명의 황새울’ 작전이 벌어지던 5월 4일 동틀녘 대추리에서 저는 군대와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을 눈앞에서 보았습니다. 압도적인 힘의 우위를 내세운 국가폭력 앞에 사람들은 똑같이 폭력으로 맞서거나 혹은 무기력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악마와 싸우다가 악마가 되는 일을 피하기 위해 비폭력적인 대응방식을 고민했지만, 국가안보를 지킨다는 군대가 자국 국민을 적으로 몰아 공격하는 모습을 보면서 원초적인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제게 있어 군대는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 것’을 내면화하는 공간입니다. 평택 대추리, 광우병 촛불집회, 용산참사 때의 전·의경을 보면서 저는 한 인간이 어떻게 다른 인간에게 폭력을 휘두를 수 있는지 질문을 던져보았습니다. 이라크 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 동안 투하되는 미사일을 보면서 어떻게 사람이 살고 있는 곳에 미사일을 쏠 수 있는지 이해해보고자 했습니다. 제가 내린 결론은, 상대를 나와 같은 감정과 욕구를 지닌 인간으로 보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총구를 겨눌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에게 군인이 되는 것의 의미는 정부의 정책을 관철시키기 위한 동원과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로봇이 되는 것이라는 점이 보다 명확해졌습니다.
2.
병역을 거부하고 이제 (아마도) 감옥에 갈 날을 기다리고 있는 지금, 제가 그동안 만났던 아이들 얼굴이 생각납니다. 올 봄에 초등학교로 교생실습을 나가서 만난 아이들입니다. 급식실로 가는 그 짧은 길에서도 제 손을 서로 잡지 못해 아쉬워하고, 밥 먹을 때도 서로 제 옆에 앉으려는 아이들을 보면서 제가 그들의 삶에 중요한 존재가 된 듯한 기분에 행복했습니다. 쉬는 시간마다 달려와서 저랑 묵찌빠를 하면서 마냥 좋아하는 아이들, 복도에서 걷다가 떨어진 필통을 주워줘서 고마웠다고 편지를 쓴 아이, 자기도 커서 교생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제가 살아있음을 느꼈습니다. 아이들 한명 한명의 얼굴을 보면서 각자가 지닌 기쁨과 고통에 기꺼이 공감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제가 대학에서 공부한 교육학은 교육이 무엇인지 더 나아가 인간은 어떻게 성장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져주었습니다. 교육이 무언가에 대한 고민은 내가 사는 이유 그리고 내가 지금 중요시 여기는 가치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습니다. 비록 한 달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교생실습기간을 거치며 제가 결론 내린 교육의 목적은 ‘서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었습니다. 서로 티격태격하는 갈등을 겪으며 자신의 바닥을 경험하겠지만 서로의 부족함을 감싸주고 존재로 연결되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성장해나간다고 믿습니다.
제가 이해하는 ‘안보’는 각자가 안전함을 느끼며 살 수 있는 상태입니다.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 법을 배우고 살상훈련을 하는 것은 ‘안보’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국가안보를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는 군대에서 서로에 대한 두려움과 적개심을 경험하게 될 제 자신을 상상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개인의 양심을 죽일 수밖에 없는 상명하달의 조직문화, 남성중심의 위계질서와 같은 군사문화가 군대를 통해 사회전반에서 유지되고 재생산되는 메커니즘에 동참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는 타협할 수 없는 제 내면의 진지한 목소리이며 이런 저의 신념을 도저히 속일 수 없었기에 기꺼이 병역거부의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3.
얼마 전 집속탄금지협약 1차 당사국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라오스에 다녀왔습니다. 지금도 라오스에서는 불발 상태로 남아있는 집속탄으로 인해 하루에 한 명꼴로 사망자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베트남전쟁 당시 라오스 전역에 투하한 수백만 개의 집속탄들이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피해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국제사회에서 비인도적인 무기로 낙인이 찍힌 집속탄에 대해 한국정부는 여전히 국가안보를 이유로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으며, 한국의 기업들 역시 집속탄을 생산하여 이윤을 챙기고 있습니다.
최근 이슈가 된 연평도 사건에서 한국정부는 보다 강경한 대응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뉴스에는 이에 맞춰 한국군이 자랑하는 다연장로켓포를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초토화되는 것은 북의 해안포가 아니라 누군가의 삶 혹은 우리의 인간성입니다. 포격을 한 북한도 비판받아야 하지만, 갈등국면을 조장한 한국 정부도 비판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이번 사건으로 한국에서도 여러 사람이 목숨을 잃었지만 북한에서도 분명 한국의 공격으로 죽거나 다친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처럼 계속 서로에 대한 공포와 적개심을 키워나간다면 앞으로 눈물을 흘릴 사람들은 더 많아질 것입니다.
이 세상에 죽어도 괜찮은 생명은 없습니다. 한국을 비롯한 주변국들은 더 이상의 군비경쟁을 멈추어야 합니다. 서로간의 적대를 조장하고 군비를 증강하는 것으로 이익을 보는 것은 소수의 지배계급과 군수업체들뿐입니다. 폭력은 또 다른 보복과 폭력의 악순환을 낳습니다. 저의 병역거부는 이 악순환의 고리 속에서 제가 택할 수 있는 최소한이자 최선의 선택입니다.
4.
제게 있어 병역거부는 저의 삶의 방식 자체에 대한 성찰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 계기입니다. 누군가의 병역거부 소견서에도 언급된 적이 있지만, 저 역시 애초에 평화로워서 병역거부를 결심하게 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병역거부를 고민하면서 여성주의와 평화주의에 대한 고민을 심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전쟁없는세상’을 통해 만난 사람들 덕분에 채식을 시작했고, 자전거를 타게 되었습니다. 적게 벌고 덜 소비하며 세상에 가능한 해를 덜 끼치며 사는 삶의 방식에 대한 고민들을 시작한 것입니다. 돌이켜 보면 지금 제 삶의 8할은 병역거부를 고민하고 <전쟁없는세상>에서 활동을 시작한 이후에 만들어졌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병역거부를 고민하며 아직 닥치지 않은 수감생활을 미리 상상하는 것은 제게 스트레스가 되기도 했습니다. 미래의 삶에 대한 고민을 할 때마다 제가 언젠가는 감옥에 가게 된다는 생각이 잊지 않고 찾아와 저를 괴롭힐 때가 있었습니다. 감옥에 갔다가 나중에 후회하지 않겠느냐며 저의 결정을 만류하는 어머니의 얼굴을 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군대를 안 가고 감옥에 가는 것이 왜 꼭 저여야 하냐고 말하는 부모님과 싸우면서 그분들에게 이해를 받지 못하는 것에 슬프고 화가 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기어이 부모님의 뜻을 거슬러야만 하는 사실에 대한 죄송한 마음도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병역을 거부하기까지의 고민과 결심에 자극과 영향을 준 친구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습니다. 병역거부는 분명 제 개인의 선택이지만 그것이 결코 저 혼자만의 고민의 결과는 아니라고 믿습니다.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제가 병역거부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제가 완전하거나 잘 나서가 아니라 주변에서 비폭력적인 삶의 방식을 실천하는 사람들을 보며 저도 많은 자극을 받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의 저에게 병역거부는 어떤 특별한 선택이라기보다는 제 삶의 맥락 속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된 선택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저의 병역거부가 군대의 존재이유에 대해 환기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내 양심의 자유, 네 양심의 자유라는 상대주의를 넘어, 우리 사회의 군사주의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이번 병역거부가 저로 하여금 타인의 상처와 고통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공감할 수 있는 존재로 살아갈 수 있도록 쉼 없이 깨우쳐주는 자극이 되었으면 합니다.
2010년 12월 14일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문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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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없는세상 홈페이지에 올라간 소견서를 그대로 긁어왔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문명진이라는 말이 아직도 낯설다. 마치 14일 하루만을 향해 달려왔던 것 같은 기분이다. 14일이 지나고 어느새 금요일 새벽인 지금, 공허한 기분이 여전하다. 14일에 찾아주었던 그 많은 사람들에게 아직 감사 인사도 못 드렸는데.
동생이 네이버에서 내 기사를 찾아보고 연락을 주었을 때, 병무청과 트러블이 생겨서 엄마한테 얘기를 하는데 엄마도 같이 화를 내주었을 때, 무척이나 기뻤다. 가족으로부터의 지지와 이해를 내가 원했다는 게 새삼 자각이 된다.
소견서 꾸역꾸역 쓰면서 고생하다가 막상 그게 끝나고 나니 이제 구속날짜와 그에 따른 가석방 날짜를 저울질하고 있는 내모습이 보인다. 가석방 날짜 고민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을텐데, 그래도 한줌의 예측가능성이나마 붙잡고 싶은 기분인 것 같다.
오늘 조은 면회에 이스라엘 기자를 동행해서 다녀왔다.
조은에게 물어보는 질문을 잽싸게 통역하는데,
영어로 정확히 뭐라고 했는진 기억 안 나지만,
"감옥에서 지내는 것이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 같냐?"
는 요지의 질문이었다.
군대를 거부했지만, 감옥이라고 군사주의 문화가 덜 하진 않다.
나 한명 감옥에 간다고 해서 세상에서 크게 알아주는 것도 아니다.
근데도 굳이 감옥을 가면서까지 내가 지키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동안 많은 사람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지금의 내가 되었듯이,
내가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작지만 울림을 전달할수 있고,
더 나아가 그게 더 큰 울림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감옥을 선택한 것은 내 저항의 목소리의 일환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조은의 대답이다.
그나마 없는 10분 접견 시간을 까먹어서 조은에게 미안하기만 한데,
한편으로는 이 짧은 인터뷰를 계기로 요 며칠 힘든 기간을
견디고 자기가 감옥에 있는 이유를 환기하며 힘낼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양준혁 선수가 은퇴를 선언했다. 이 소식을 들은 종범신은 '희비가 교차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뭔가 씁쓸해지는 기분이다. 올해 나이 마흔둘. 최근에 대타로 나와 굿바이 결승타를 때리고 2루까지 달리던 영상이 오버랩된다. 이후에 그가 어떤 삶을 살게 될지 앞으로도 종종 궁금해질 것 같다.
"18년 야구생활 하는 동안 내 라이벌은 사람들의 나이에 대한 시선과 선입견이었다"
지난 26일 올 시즌 끝나고 18년 선수생활을 정리하기로 발표했던 삼성 라이온즈의 '양신' 양준혁(41)이 은퇴 발표 후 심경을 밝혔다. 양준혁은 27일 오후 대전구장에서 열리는 한화 이글스와의 경기를 앞두고 가진 기자회견에서 은퇴 후 첫 소감을 "홀가분하다"라고 표현했다.
이어 양준혁은 "올해는 야구 하면서 제일 긴장됐던 해였다. 즐기면서 해야됐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지금은 손 놨으니까 홀가분하다"라고 덧붙였다.
또한 양준혁은 "내가 42살까지 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못햇다. 예전엔 34, 35살만되도 노장 축에 들었다. 당시엔 '10년만 해도 좋겠다'라고 생각했는데 어찌하다보니 이렇게 됐다"라며 "오로지 한 게임, 한 게임에 모든걸 쏟아부었는데 그게 쌓이다 보니 이렇게 됐다"라며 18년 야구 생활을 회고했다.
(중략)
또한 "내가 중년 초반으로서 좋은 모습을 보이고 싶었는데 미안하다"라고 40대 중년들에게 미안함을 전하기도 했다.
은퇴 경기에 대해서는 "나는 은퇴경기를 생각해본 적이 없다. 구단에서 알아서 해줄 것이다"라며 "구단에서 세심하게 챙겨줬다. 처음에 (은퇴한다고 했을 때) 내가 원한다면 다른 구단에 가도 좋다고 말하기도 했다. 덕분에 심적으로 덜 외로웠다"라며 구단에 대한 감사를 표했다.
*출처: http://www.mydaily.co.kr/news/read.html?newsid=201007271809452226&ext=na
*뭔가 꿈만 같았던 7월도 어느새 끝이 보인다.
아침에 일어나 여느 때처럼 창밖 남산을 바라보다가 쌩둥맞게도 문득 이번 여름도 오늘을 기점으로 한풀 꺾이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남산 언저리를 휘감으며 작렬하는 태양빛이 마치 마지막 발악을 하는 것처럼 느껴진 것이다. 아직 8월이 오는 것도 며칠 더 남았는데 여름의 절정이 지났다고 생각하는 것이 섣부른 예단일수도 있겠지만, 쨌든 아스라한 태양을 바라보면서 나는 여전히 몽롱하게 다가오는 나의 지난 두 달을 떠올려 보았더랬다. 기억에 남는 여름이 될 것 같다.
Last Night I had the strangest dream
G C D7 G
Last night I had the strangest dream I ever dreamed before
D G e C D7 G
I dreamed the world had all agreed to put an end to war.
C G C D7 G
I dreamed I saw a mighty room, the room was filled with men.
C G hm C D7 G
And the paper they were signing said they'd never fight again.
G C D7 G
And when the papers all were signed and a million copies made
D G e C D7
They all joined hands and bowed their heads and greatful prayers were
G
prayed
C G C D7 G
And the people in the streets below were dancing round and round
C G hm C D7 G
And Guns and swords and uniforms were scattered on the ground.
G C D7 G
Last night I had the strangest dream I ever dreamed before
D G e C D7 G
I dreamed the world had all agreed to put an end to war.
Fade out......
by Franz Felix; Vienna/Aust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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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아무리 좋아진거지만 징역은 징역이지요 정신차리세요 누가 책보고 공부하게 편의 봐주냐고요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