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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근아니지: 언어적 제국주의와 소수화

내가 제국에 있었을 때 <언어적 제국주의> 혹은 언어의 영역에서 불평등적 권력관계가 우거지는지 알고 있었지만 한국으로 왔을 때까지 잘 못느꼈다. 제국의 공교육 체제가 외국어에 대한 교육을 조금밖에 제공하지 않은 것을 느끼고 한국어를 공부하기를 시작했을 때도 한국어에 대한 교육의 완전한 없음을 많이 느끼고 신경을 썼다. 그러지만 <언어적 제국주의>라는 것을 당하는 나라, 제국어(제국의 언어)의 피해국(被害國)에서 살지 않아서 제국에서 내국적인 언어의 독점과 원주민의 언어들에 대한 회복투쟁만 느꼈다.


내가 한국어를 공부하기 시작한 직후에 연습을 많이 하려고 했다. 한국어능력이 완전히 없었어도 하려고 했다. 친구의 이름들을 한글으로 쓰는 것인 놀이를 통해 한글을 배우고 나서 독학하면서 매일매일 새로운 단어나 표현을 배웠다. 한국어를 배우거나 잘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아서 한국어를 공부하는 것은 취미나 놀이로 접근했다. 당연히 즐거웠다. 내가 자신의 저질적인 능력에 대한 상관이 없고 <그냥 잘 못하면 잘 못함을 기꺼이 할 거야>라고 생했다. 지금도 같은 접근성을 취해가고 있다.


알다시피 이런 사고방식은 제국어를 잘 할 수 있고 제국어의 피해자의 투쟁을 무시할 수 있음에 의한 특권의 성과이다. 제가 한국 사람들이 제국어를 억지로 배워야 되며 제국어를 잘 할 필요성을 느껴서 심각한 과제로 접근하기 때문에 제국어를 배우기를 취미나 놀이로 접근할 수가 없지 않지만 관헌의 탄압에 따른 상황에서 벗어나기 어렵다고 본다.


오늘 밥과 김치를 먹고 벽에 처다보고 언어적 제국주의에 대해 생각하면서 질 들뢰즈와 휘릭스 기타리의 <천개 고원>에서 제시된 다수적 언어의 소수화를 기억나서 이 책을 역시 돌아보게 되었다.


들뢰즈와 기타리에 따르면 다수적 언어와 소수적 언어는 언어의 2가지가 아니라 똑같은 한 언어의 2가지 접근성이나 처우양식이다. 다수는 언어의 균질화, 표준화, 침체된 불변화를 촉진하며 언어적 기존의 기준에 따라 유지하려는 처우양식이다. 소수는 언어의 끊음 없는 변형, 변화, 불령(不逞), 창의나 창조, 혼합, 등의 처우양식인 과정이다. 2가지 처우양식이 문법, 발음, 등의 언어적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친다. ()라고 불러도 다수와 소수는 양적인 현상을 지적하지는 않는다. 다수와 소수는 무엇이 존재하는 형태를 지적하지도 않는다. 소수와 다수는 과정이다. 또한 이 2가지는 상이하지만 서로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상조하는 것이다. 크기가 없으면 작기도 없겠지. 두거움이 없었으면 차가움도 없겠지. 짠 맛이 없었면 매운 맛이 존재할 수 있을까? 아마 딴 맛이 생존했으면 그러겠지ㅋㅋ.


다수적 언어의 소수화는 사투리나 소수자의 언어가 아니다. 어떤 영토에서 사투리의 문법, 발음, 등이 정상화된 <표준어>라고 평가할 수 있거든. 다시 말하듯이 양적인 것이나 권력을 계산하는 식으로 알 수 없다. 언어의 소수화는 정상화된 표준으로부터 끊음 없이 변화되어가는 것이다. 어떤 기존의 언어적 형태를 모방하는 식으로 소수화되지 못한다. 소수적 수던, 기계, 속성들을 혼합해 이용하는 것이다. 다수적 언어가 언어의 소수화되어가는 과정으로부터 불변의 소리, 발음, 문법, 구조, 표현, 말을 뽑는 식으로 작동한다. 소수화는 언어를 끊음 없는 변화과정에 두어서 작동한다.


사람들이 들뢰즈와 기타리의 이론들을 자신에 맞은 식으로 재해석하며 변형시켜서 들뢰즈와 기티리의 이론들의 소수화가 되는가? 무아하하!


제국이라면 제국어가 언어의 소수화되어가는 식으로는 구성된다. 제국이 아니라도 어떤 표준어가 언어의 소수화되어가는 과정으로부터 언어적 속성을 뽑으며 불변의 침체형태에 두어서 구성되며 표준어가 존재한다고 고려할 수 있겠다. 소수화는 자결, 자치, 자율이라고 볼 수 있다. 잉그리시(englishi)라는 컹그리시는 한국이나 한국의 내국적 어디에 맞은 제국어의 한 가지이다. 컹그리시에 독특한 발음, 문법, 소리, 표현, 등들은 컹그리시의 표준어라고 볼 수 있다. Fry은 후라이라고, english은 잉그리시라고, cheese은 치즈라고 부르는 등의 불변의 발음을 뽑아 다수적 언어가 되었다. 언어 제국주의를 저해서 어른 봉숭이, 검은 물 혹은 검은 콩차, 등등을 대안적으로 말하는 것을 원래 좋아했다.


제국어가 한국어를 더럽히고 있는 것인가? 대한민국의 공교육 체제가 제국어를 다수적 언어로 가르치려면 한국에 독특한 맞춘 컹그리시의 진정한 표준어를 어쩔 수 없이 가르쳐간다. 관헌의 탄압으로 가르쳐간다. 제국어에 대한 불매운동이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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