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칼럼] 장소를 누릴 권리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내가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곳은 아마도 여기, 인권운동사랑방 사무실일 것이다. 이사 온 지 15개월 정도 됐다. 대문까지 닿기 전 약 10미터 정도의 급경사가 난관이지만 조금만 더 오르면 산책할 수 있는 공원 숲길이 나온다는 점이 숨을 틔워준다. 마당도 있다. 얼마 전에는 다른 사무실에서 얻어온 빨간 파라솔이 마당 한편에 세워졌다. 붉게 물든 햇빛그늘 아래에서 담배를 피우는 맛이란! 주방이 넓어 좋고 늦게까지 회의를 하다가 가볍게 뒤풀이를 할 수 있는 것도 좋다. 물론 좋은 점만 있을 리는 없다. 불편하거나 아쉬운 점을 말할라치면 훨씬 많이 들 수 있다. 그래도 그 중 한 가지만 뽑으라면, 임대차계약을 다시 할 수 있을지 불안하다는 것.


그렇다. 결정적이다. 내 집인 양 자랑하고 싶다가도 내 집이 아닌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은 수없이 많다. 마당의 깨진 타일을 어떻게 붙여볼까 고민하다가, ‘이거 원래 깨져있던 건데 주인이 물어내라고 하면 어떻게 증명하지?’라고 스스로에게 묻게 될 때, 밤에 수다를 떨며 웃고 즐기다가 사람들의 목소리가 커질 때 이웃들에게 미안해지면서 곧이어 ‘혹시 집주인한테 우리가 시끄럽다고 내보내라고 하면 어떡하지?’라고 물으며 불안해질 때, 벽마다 빼곡히 채워진 자료들을 뒤지며 필요한 자료를 찾다가 ‘이사 갈 때 이걸 다시 어떻게 싸지?’라며 한숨을 쉴 때, 이런 보잘 것 없는 순간들마다 나는 이 공간의 주인이 우리가 될 수 없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손님인 것처럼 이 공간을 드나드는 것은 아니다. 방금 나는 부엌 바닥에 진득하게 들러붙어 있는 묵은 때를 수세미로 박박 문질러 닦았고, 마당 은행나무 옆에는 작년 이맘때쯤 심어놓은 여러해살이 알뿌리 식물에서 고운 보라색 꽃이 자라나 있다. 그런데도 내가 주인이 되지 못하고 계속 미끄러지는 것은 불안정한 세입자의 지위 때문이다.


언젠가 수영장 탈의실에서 아주머니들이 주고받는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스친다. 비슷한 동네에 사시는 분들이라 동네 사람들 이야기를 종종 나누신다. 한 가게에 대한 이야기였다. 커튼집이랬나. 10년 가까이 장사가 아주 잘 되던 가게였는데 건물 주인이 바뀌면서 나가라고 했단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고, 월세를 조금 올려주겠다는 얘기까지 했는데도 그냥 나가라고만 했단다. 장사를 하던 분은 속절없이 가게를 옮겨야 했다. 그런데 건물 주인도 별다른 계획이 없었는지, 임대를 구한다는 광고가 붙고 반년이 지나도록 장사할 사람을 찾지 못했다는 얘기였다. 


아주머니들은 가게를 옮겨야 했던 분의 사정을 안타까워하면서, 건물 주인이 임대 수익을 얻을 수 없게 된 걸 고소하다는 듯 얘기했다. 기억에 남은 건 그 때문이다. 세입자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럴 때 고소해하는 것밖에 없다는 것. 못 나가겠다고 버틸 방법도, 항의할 방법도 별로 없다는 것이다. 물론 상가임대차보호법은 임대차계약의 자동갱신청구권을 세입자에게 주어 5년까지 임차권을 보장한다. 아무리 세입자라지만 한 곳에서 장사를 시작했으면 5년은 한 자리에 있을 수 있도록 한 취지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도 예외조건이 있다. 건물주가 재건축을 하겠다고 하면 계약 해지를 요구할 수 있는 것이다. 


강서구 방화동의 카페 ‘그’는 2010년 8월에 영업을 시작했다. 임대차계약을 할 때는 오래 장사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할 만한 말이 건물주와의 사이에서 오갔고 당연히 정성을 다해 인테리어를 하고 가게를 가꿨다.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상권이라고만 할 수 없는 곳에 사람들이 드나들기 시작했고 골목도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런데 2011년 5월, 그러니까 1년도 채 안 된 시점에, 건물주는 재건축을 하려고 하니 가게를 빼 달라고 한다. 건물주는 구청에서 재건축 승인도 받았다고 한다. 재건축 허가의 철회를 요청하는 진정서를 제출했는데 구청은 ‘민사이므로 행정기관으로써는 어쩔 수 없다’고만 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방화동 카페 '그'  (출처 : http://www.reduncle.com/trackback/49)

 

건물주는 카페 ‘그’의 임차인에 대해 명도소송을 건다. 명도소송은 건물 소유주가 자신의 권리를 회복하기 위해 법원으로부터 강제 퇴거의 권한을 구하는 소송이다. 여러 개발 사업들에서 건물주가 세입자들을 대상으로 청구하는 소송이다. 법원은 건물의 소유권이 소유주에게 있다는 점을 확인하고 세입자에게 나가라는 판결을 내린다. 백이면 백, 세입자들은 나가라는 명령을 받게 되고 나가지 않는 이들은 용역업체 직원들의 손에 끌려 나오게 된다. 


이쯤 오면 이 얘기가 겹치는 풍경들이 떠오를 것이다. 개발 사업에 저항하는 철거민들이 겪어야 했던 모진 수난들, 눈앞에서 무너져 내리는 지붕, 챙겨 나올 새 없이 집과 함께 부서져버리는 삶의 역사, 장기 입원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 아닌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온갖 부상, 울부짖는 사람들, 순식간에 폐허가 되는 삶의 자리……. 그런 상황까지 가는 걸 막아보겠다고 망루를 지어 하늘로 올라간 사람들, 그러다가 땅으로 다시 내려올 수 없게 된 사람들, 이 구조에 저항하는 것은 한 치도 용납하지 않겠다며 무력을 사용하는 경찰, 깨끗하게 사람의 흔적이 지워진 땅에 여유롭게 건물을 지어 올리는 건설자본……. 


이 익숙한 연상 작용은, 그러나 익숙했기 때문에 더욱 근본적인 문제를 놓치게 하기도 했다. 눈에 보이는 싸움이 있기 전에는 문제를 깨닫기 어렵게 만드는 익숙함. 집이든 가게든 소유주가 나가라고 하면 나갈 수밖에 없는 처지가 너무 보편적이라, 보편적인 문제로 인식되기보다는 자연스러운 상황으로 이해되는 역설.


최근 부동산 경기가 좋지 않다. 막무가내로 개발이 추진되던 때와 비교하면 다행스러운 상황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상황이 답답하고 애달픈 사람들이 있다. 역설적이게도 철거민들이 그렇다. 개발을 멈추라고 그토록 싸워온 이들이 막상 개발이 멈춘 상황에서 더욱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은 문제의 핵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준다. 


개발 붐이 불어 여기저기 곳곳이 개발 구역으로 지정되고 개발 사업이 승인되기 전부터 개발 이익을 기대한 토지와 건물의 거래가 이루어졌다. 바뀐 건물 주인들은 기존의 세입자들을 내보냈고, 아무런 기댈 곳 없는 세입자들은 속절없이 집을 떠났고 가게를 비웠다. 다행히도 운이 좋아 남은 세입자들, 못 나간다고 기를 쓰고 버텨 남은 세입자들은, 이제 폐허가 된 동네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그 사이에 개발 사업이 승인된 곳이든 승인조차 못 받고 땅 장사만 한바탕 휩쓸고 간 곳이든, 황량하기는 마찬가지다. 


사람이 살 것처럼 보이지 않는 동네에, 떠나지 않을 수 있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문제는 건물 주인들이 나가라고 한 순간, 이미 시작되었다. 쫓겨나지 않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쫓겨나지 않아야 하는 것이므로, 살기 위해 떠날 수밖에 없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이미 떠난 사람들은 스스로 떠났으니 문제가 없고, 아직 떠나지 않은 사람들은 쫓겨나지 않았으니 문제가 없다고 말해버리면, ‘문제’는 사라져버린다. 단지 소유했다는 이유로 누군가의 삶을 쥐락펴락 할 수 있는 권한을 휘두를 수 있는 이 사회의 문제. 


카페 ‘그’는 싸움을 시작했다. 상가임대차보호법에 대해 헌법소원을 청구했다. 단지 건물을 소유했다는 이유로 건물에 세 들어 사는 사람들의 삶까지 소유해서는 안 된다는 상식을 법으로부터 확인 받기 위해서다. 나가라 말라 할 수 있는 권한을 너무 쉽게 인정해버렸던 한국사회에서, 나가라 말라는 말이 함부로 입 밖에 나와서는 안 되는 말이라는 걸 주장하기 위해서다. 이건 단지 쫓겨나지 않기 위한 싸움이 아니다. 땅을 가꾸고 동네를 만들고 삶을 이어가는 것은 결국 그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진실을 구성하기 위한 싸움이다. 


우리는 사람답게 살기 위해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공간은 사람답게 살 권리인 ‘인권’의 문제로 접근되어야 한다. 누구나 저마다의 장소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사람으로부터 장소를 빼앗는 것이 사람다운 삶을 방해하는 매우 큰 위협이라는 것을, 그래서 세입자의 불안정한 지위는 단순히 건물을 점유하는 데 있어서의 불안정한 지위가 아니라, 삶을 가꿔가는 데 있어서의 불안정한 지위를 의미한다는 것을, 이제 말하기 시작해야 한다. 가지지 못했으니 어쩔 수 없다는 체념과 똑같이 가질 때 평등이 가능하다는 이념 사이에는 디딤돌이 필요하다. 무엇을 얼마나 가졌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신념. 그래서 평등하게 장소를 누릴 권리를 지금 만들기 시작해야 한다. 

 

 

 

 

 

본문 PDF파일 다운받기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