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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12/10
    세월의 분계선 _ 양규헌
    한내
  2. 2010/11/16
    전태일과 들뢰즈 _양규헌
    한내
  3. 2010/10/13
    한여름 밤의 꿈 _양규헌
    한내

세월의 분계선 _ 양규헌

세월의 분계선

 양규헌 (노동자역사 한내 대표)

 

묻혀가는 공간 속에서 흘러가는 계절, 세월은 오늘이 가면 내일이 오고 내일은 또 그렇게 바람처럼 보이지 않는 시간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늘 가고 오는 시간의 행진은, 보이지 않는 세월의 분계선인 한해가 가고, 내일이면 똑같은 시간이지만 상이한 하루가 다가온다. 

인생이 그렇게 가고 오고, 오고 가는 세월의 순환 과정에서 아쉬움과 안타까움과 허무와 절망을 감출 수 없는 것은 우리가 갖는 삶의 무게의 중량 때문일지도 모른다.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진 나이가 되고서는 젊었을 때 없었던 조바심과 새로운 고민들이 생겨난다. 한동안 생이 영원할 것만 같았던 ‘패기와 기세’는 삶의 흔적에 비례하여 차츰 소멸되어 간다는 나약함도 어쩔 수 없다.

특정한 종교의 유신론을 거부하는 것은 때로는 스스로의 의지를 시험하는 것이기도 하다. 흙에서 와서 흙으로 가는, 우주먼지에서 와서 우주먼지로 돌아가는, 물질에서 물질로의 회귀라고 생각하는 입장에서는 허무가 더 강하게 엄습해 오는 모양이다.

지나간 시간을 회상하면 한숨 속에 아쉬움이 담겨있는 것은, 노동자계급이 안고 있는 절망의 늪에서 희망의 끈을 부여잡기에 너무나 많은 모순들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새롭게 만들어진 장벽도 아닌, 이미 오래 전에 확인했던 모순임이 확실하지만 연륜의 분계선을 접하는 지금은 그렇게 무겁다. 계절이 순환되어도, 시간이 뒤죽박죽이 되어도, 참과 거짓의 논리가 어처구니없는 현상으로 노출되어도 억압적 모순은 결집된 힘으로 제거하지 않으면 방법이 없다.

속은 썩어 문드러진 야만의 자본주의는 거죽만 돈으로 처발라 번지름한 채, 미처 날뛰고 있다. 자본주의의 육중한 틀 속에 갇혀 허우적거리는 노동자, 민중은 자본의 세균이 득실거리는 공간에 노출되어 한숨으로 보내는 시간의 길이가 얼마일까

광분하고 있는 비정상적 모순은 정신병원에 감금시켜야 하지만 마땅한 정신병원 하나도 없으니 미친 자본은 노동자, 민중을 향해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법제도조차도 무용론을 앞세우며 미친 짓거리와 폭력으로 노동자계급의 희망을 앗아가며 이윤배가의 도구인 노동자로 위치 지운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전태일 열사를 수 십 년 팔아 오는 동안, 투쟁은 이벤트로 전락하고 계급적 연대투쟁이 방기됨으로서 노동자들의 분노를 파편화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다. 이 틈새를 비집고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노동계급 내부에 균열을 가하며 기본권조차 앗아가는 절망의 분계점에 와 있다.

보편과 특수에서 인간이 공통적으로 갖는 사유의 보편성과 개인이 느끼는 감정의 특수성이 어우러져 사회가 되고, 인류임이 분명한데 '우리는 어느 정도 공통적이고 특수성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마땅히 답을 찾기 어려운 것이 고난의 한해를 보내는 마음이다.

 

가버린 해와 새해의 의미는 형식적일 수 있다. 순환되는 역사의 흐름에서 변화발전의 합법칙성의 조응하지 못하는 현실을, 모순을 하나씩 파괴시켜야하는 임무가 방기되기도 하고, 힘의 역관계 속에서 주춤거림을 과도하게 해석할 이유도 없다.

'만족해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행복할 때 비로소 자유가 시작된다.'는 동화의 메시지처럼, 한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이 시점에서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노동자계급의 임무를 방관하며 넘어갈 수가 없다.

지나가는 해와 새해의 분기점은 공간의 개념 이상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해도 이 시기에 새해에 대한 희망의 씨앗을 준비하는 것은 당연한 과제라고 생각하며 희망의 출발은 ‘견고한 자본의 거대한 성’에 작은 파열구를 내기 위한 조건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작은 위안을 담아본다.

 

시간과 계절이 흘러, 또 다시 한해를 맞이할 때, 가슴을 짓누르는 절망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전태일열사의 해방정신을 세워내고 간접고용, 파견노동자투쟁을 비정규투쟁이 아닌 계급투쟁으로 조직하여 미쳐 날뛰는 자본에 작은 파열구를 만들어 내는 연말과 새해가 되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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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과 들뢰즈 _양규헌

전태일과 들뢰즈

양규헌 (노동자역사 한내 대표)

 

밤에 말에게 재갈을 물린다. 욕조에서 나오자마자 사슬달린 재갈이나 두꺼운 벨트로 말의 발을 단단히 묶는다. 완벽한 무구들, 고삐와 엄지손가락을 죄는 고문 도구들을 지체 없이 장착한다. 그것들을 마구에 장착한다. 그리고 음경을 금속케이스에 집어넣는다. 주인의 뜻대로 낮이나 밤이나 2시간 동안 고삐를 죈다. 3, 4일간 감금. 고삐는 단단히 조이고 헐거워지기를 반복한다. 주인은 말에게 다가갈 때는 언제나 채찍을 들고 있으며, 채찍질을 한다. 말이 참지 못해 저항하면 고삐를 더 단단히 죈다.

 

사육과정을 통해 야생말의 욕망은 재배치되어 주인이 쥐는 고삐와 채찍, 편자의 발에 혼연일체가 되어 움직일 수 있는 사육된 말로 다시 태어난다. ‘들뢰즈’는 이러한 방식으로 ‘기관 없는 신체’를 만드는 것은 반드시 패배할 수밖에 없으며, 욕망을 재배치하는 것을 통해 욕망의 흐름이 자유롭게 횡단하고 기쁨으로 소용돌이치는 사회를 향해 획기적으로 변혁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들뢰즈’의 주장처럼 욕망과 신체의 해방과정은 먼 후일의 과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실천 속에 담겨있는 것이라는 확신으로 프랑스의 노동자계급은 당당하게 총파업의 깃발을 올렸다.

 

"정년 2년 연장"에 반대 투쟁에 프랑스 전역은 봉기를 가늠하게 하는 투쟁들이 물결치고 있다. 이 투쟁에는 노동자뿐만 아니라 대학생은 물론, 중고등학생들까지 시위에 결합하며 '68봉기'를 가늠하게 하는 노학연대가 프랑스 전역을 휩쓸었다.

 

정유공장노동자들의 파업으로 프랑스는 연료가 바닥난 자본주의의 모습을 보는 거 같고, 미화원 노동자들이 파업과, 교통, 운수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시민들의 발이 묶이고 불편이 늘어나고 있지만, 프랑스 시민들의 파업지지율은 증가되고 있는 현상을 목격할 수 있었다.

 

청소년들은 "'사르코지' 네가 청소년들이 거리로 나오도록 꼬드겼어"라고 외치며, 시위대들은 '파리 교외로의 명랑한 산책으로는 더 이상 투쟁의 의미가 없다','우리가 국가경제를 마비시켜야만 지배계급의 관심은 우리를 향할 것이다'라고 외친다.

 

프랑스 '국립청소년교육연구소'의 발표에 의하면 “혁명적인 행동에 의해 이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혁시켜야 한다”고 응답한 청년의 수는 80년대 11%에서 현재 28%로 급격히 늘어나고 있으며, 사르코지 집권 이후 집회, 시위에는 프랑스 청년 절반가량이 참여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는 가운데, 방학과 휴가를 마친 11월, 프랑스 노동자들의 근본적 변혁을 향한 투쟁에 전 세계 노동자계급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몇 개월 전부터 야단법석을 떨었던 11월 11-12일 G20 서울회의는 지난 수 십 년간 노동자민중을 고통의 나락으로 밀어 넣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정책과 구조를 온존시킴으로서 노동자계급 내부의 대립관계를 더더욱 강화시키려 하고 있을 뿐, 경주 재무장관회의 결과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프랑스 정상회담 일정만 결정한 정도이다.

이런 상황에서 전태일 열사 40주기 노동자대회가 서울의 한복판에서 열렸다.

 

전태일 열사 정신은,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지 않는 세상, 누구나 차별받지 않고 동등한 세상"을 꿈꾸는 해방정신이며 그 정신을 계승, 발전시킨다는 결의의 집합이 노동자대회의 전통일 것이다.

열사정신 계승의 외침이 매년 반복되어도 70년대 청계천은 중단되거나 달라진 것이 아니라 진행형일 뿐이다. 때문에 ‘투쟁의 상징 전태일’에서 ‘인간적 전태일’을 꿈꾸는 건 시기상조가 아닐까.

 

40년 전, 그를 죽음으로 내 몬 구조적 폭력은 현재 신자유주의의 거대한 무기를 하나 더 빼들고 노동자계급을 공격하며 70년대 청계천인 영세사업장과 비정규 노동자들에게 배고픔에 대한 호소조차 가로막으며 노동자계급 내부의 대립구도를 통해 ‘사육하는 말’을 만들어 가고 있다.

 

모순에 저항하고 절규하며 투쟁하는 열사의 정신이 발견되지 않고, 열사의 행렬이 반복적으로 이어지고 있어도 그 정신은 가을바람에 낙엽 흩날리듯, 분산고립의 형태로 부각될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유일하게 노동해방정신의 명맥을 이으며 열사정신 계승을 외치는 대오가 '노동해방 선봉대'였다.

 

2007년부터 매년 11월 초에 ‘노동해방선봉대’를 조직하여 전국 각 지역과 투쟁현장에서 사회변혁운동을 전파하고 당면 노동자민중 투쟁을 조직하기 위해 활동해 왔다. 올해도 11월 4일 서울 양재동을 출발하여 전국 투쟁현장을 돌고, 전태일의 해방정신을 선전, 선동하며 노동자대회 전야제에 결합함으로서 그 일정을 마쳤다.

 

'노동해방선봉대'의 선전선동은 민주노조운동의 변혁지향에 대한 노선을 복원해 내고, 활동가들의 실천적 모습과 결의롤 통해, 당면한 현재 위기를 극복하고, 70년대의 전태일을 오늘의 전태일로 부활시키기 위한 몸부림이 ‘기관 없는 신체’에 뜨겁고 격동적인 심장의 박동을 부추긴다.

 

정년을 줄이는데 반발하는 프랑스 청년, 노동자들. 정년을 늘리기 위해 투쟁해야하는 한국의 노동자들, 상반되는 요구가 작금의 상태를 반영하지만, 분명한 것은 사회복지조차도 투쟁에 비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고, 근본적 변혁이 수반되지 않는 한, 이런 모순은 끊임없이 반복된다는 게 진실이다.

 

노동자대회에 결집된 대중적 투쟁의지가 도처에서 분출하고 있으며 공권력을 앞세운 이명박정권의 공세도 만만치 않다. 재능을 비롯한 특수고용의 문제는 해결기미를 보이지 않고, KEC노동자들에 대한 총체적 탄압에 대한 대응은 병원에 갇혀 있으며, 용산참사는 대법에 의해 진실이 왜곡되고, 수원과 광명에서는 철거민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쌍용차는 전망 없는 졸속매각으로 제2의 상하이차를 반복하고 있다. 현대차 비정규노동자들은 공장을 점거하며 불안정노동에 저항하며 생존을 향한 투쟁의 깃발을 올렸다.

 

들뢰즈의 논리적 철학과 전태일의 해방 철학이 결합하여 거대하게 조직된 ‘노동해방선봉대’를 힘 있게 조직하고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모순에 따른 저항을 조직하고 실천하는 것은 현 시기 노동자계급이 기본 임무가 아닐까.

분출하는 투쟁의 물꼬를 열어 내고, 도처에서 진행되는 투쟁을 계급적 투쟁으로 발전시켜, 투쟁대오의 한가운데 노동해방의 깃발을 세워내며, 전 세계 노동자계급의 투쟁으로 확산되어, 광란의 자본주의를 척결하고 해방된 세상을 열어가는 거대한 횃불이 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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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밤의 꿈 _양규헌

한여름 밤의 꿈

 

 양규헌(노동자역사 한내 대표)

 

침울한 날씨로 일관했던 여름이 지나고 가을철에 접어들었다. 자본이 쏟은 배설물로 계절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일교차의 폭은 기록이 달성되고 있다. 봄과 가을의 정서와 느낌은 여름과 겨울에 묻혀 가고 있다.

계절에 특별한 의미는 강조하지 않더라도, 이맘때쯤이면 높은 하늘에 아득해지는 꿈과 희망을 찾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단풍이 물드는 아늑한 공간에서 감미롭고 잔잔한 선율이 격동하는 음악과 마주하며, 영혼 깊이 젖어오는 감동을 느끼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의 바람일 것이다. 새로운 계절은 접하며 금새 그 끝자락이 가물거리는 지나버린 여름을 생각하게 한다. 절박한 상황 속에서 기억이 상종하는 동안, 생애가 몸부림치는 동안, 계절 속에 과거가 역사 속에 담겨지고, 기억 속에 계절은 잔잔한 향수와 그리움을 불러오기도 한다.

  

지난 여름 김종배열사 추모제를 마치고 찾아들어간 북한강변이 내려다보이는 식당에서 '진추하'와 '아비'가 부르는 '한여름 밤'이란 노래가 작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수 십 년 만에 들어보는 노래가 심금을 파고든다. ["한여름 밤 별은 밝게 빛나고 있습니다.....한 여름 밤의 꿈...날 자유롭게 해 주세요..나무 위 새들처럼..."] 이 노래를 들으며 지난 시절 여름에 대한 기억, 추억들이 오버랩된다.

 

논바닥 물이 온천수처럼 뜨거워질 만큼, 땡볕이 내리쬐는 무더운 여름, 하루 종일 논을 매고 몰려오는 피로를 이웃들과 함께 저녁의 뜨거운 칼국수로 식히며 생쑥으로 피워낸 모깃불 앞에서 진한 연기를 연거푸 부채질하며 모기와 더위를 쫓으며 두런거리는 이웃과의 대화와 함께 풀벌레소리와 영롱한 별들이 마당 멍석위로 내려앉는 한여름 밤. 에 정겨움이 스쳐간다.

 

15년 전 여름, 나를 포함 수배자 세 명이 김종배 동지의 안내로 오대산을 찾았다. 마시고 싶도록 맑은 계곡물을 건너 넓게 펼쳐진 배추밭 언저리에서 바라보는 여름 밤하늘은 짧은 시간에 불과했지만, 수배에 찌들은 우리들의 마음을 넉넉하게 풀어주는데 손색이 없었다. 눈이 시리도록 빛나는 별들의 조화와, 가끔씩 획을 긋는 유성과 뿌옇게 펼쳐진 은하수 너머가 우리들의 세상일 수 있다는 환상. 작은 두 팔로 그것을 껴안을 수 없지만 마음은 영롱한 별바다에 묻혀 가는 오대산의 여름밤은 막걸리에 취하기보다 우주와 자연의 오묘한 조화의 한가운데 그렇게 취하고 있었다.

 

모든 별들은 차츰 광채를 잃어가고 새벽별만이 먼동을 손짓하고 새벽 경운기 소리가 적막을 깰 때까지 뜬눈으로 지새운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은 재현시키지 못할 추억이기에 그리움이 더하는지 모른다. 삭막함에서 벗어나 잠시 갖게 되는 마음에 풍요는 돌이킬 수 없는 아쉬움 속에 자리하는 짧은 여름밤 . 그러나 행복했었다.

 

그리고 십 수 년이 경과한 여름은 정서와 보편적 사고를 마비시키고 있다. 참과 거짓이 서로 뒤엉켜 뒤죽박죽이 되며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정의인지 판단하기 어려워지는 여름이다.

노동부는 없어지고 고용부가 생김으로써 노동자는 권리와 인격이 실종되어 물건이 되고 말았다. 타입오프를 앞세워 노동운동은 물론, 노동자의 존재이유를 부정하고 있다. 대운하의 기초공사로 4대강은 묻지 마 강으로 흐르고 있다. 생존의 몸부림으로 투쟁했던 쌍용차 노동자들은 이명박 임기동안에 징역에서 나올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용산 망루에 철거민들은 중형을 선고 받고, 전철연의 지도부였다는 이유 때문에 남경남의장이 7년이라는 중형을 선고 받았다.

 

소위 사회고위층이라는 자들에게 '인사검증 기준을 강화하라'는 대통령의 주장에서 '나는 빼고'라는 전재를 달고 있다. 가계 빚 증가의 위험성이 제기되는데 DTI완화로 대출이 느는 것은 문제가 없다는 중앙은행 총제의 자질이 골 때린다.

 

동의오토, 기륭전자, 재능교육을 비롯한 간접고용, 특수고용, 파견노동을 포함한 비정규노동자들은 거리에서 "1000일 이상의 장기투쟁"이 보편화되고 있다. 그럼에도 신자유주의의 계급말살정책에 대응하는 노동자계급의 상황은 '우리는 보이지 않고 너와 나만 앙상하게 남아'있다.

지난해 여름밤을 달궜던 용산의 여름밤은, 평택의 여름밤은, 그리고 대한민국의 지나간 여름밤은, 자유를 저당잡힌 징역보다 더더욱 답답하고 짜증스럽고 치솟는 분노가 더위를 한층 부채질하는 긴 여름밤이 되어 가을의 중턱에 걸려있다.

 

어린 시절 꿈꾸었던 여름밤의 꿈을 실현하고 싶다. 잠 못 이루고 밤하늘을 주시하던 오대산에서 김종배 동지와의 한여름 밤을 별들과 함께 다시 그려내고 하반기 투쟁의 열정일 지폈던 그 열정을 되찾고 싶다. 그리고 숨 막히는 여름밤의 희망을 가을이란 계절에서 찾고 싶다. 그 희망이 세익스피어가 살던 르네상스 시대가 암흑의 중세시대라고 할지라도 세익스피어가 작품으로 표현하고자했던 '한여름 밤의 꿈'을 계급투쟁으로 이루고 싶다.

 

고전과 예술에 관심을 두고 이성적 중심 사고를 강조하던 중세시대에 전개했던 '한여름밤의 꿈'이 글로벌시대를 앞세우는 21세기의 지루한 여름, 절망의 '한여름 밤' 보다 낫지 않았을까. 반복되는 절망을 딛고 노동자계급의 우렁찬 함성이 구름 없는 가을하늘의 적막을 깨뜨리고, 찬 기운이 온몸을 움츠리게 하는 노동자, 민중의 길바닥 농성투쟁이 없어지는 계절이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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