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이달의 노동자 역사

1928년 <12월 테제> :노동자 농민이여, 이 땅 위에 생동하는 ‘노농 소비에트’ 깃발을 세우자! _안태정

1928년 <12월 테제> :

노동자 농민이여, 이 땅 위에 생동하는 ‘노농 소비에트’ 깃발을 세우자!

 

 안태정 (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위원)

 

아, <12월 테제> … …!!!

다시 말해서, ‘조선농민 및 노동자의 임무에 관한 결의’는 1928년 12월 10일 국제공산당 코민테른(Communist International, 1919.3.2~1943.5.15) 집행위원회가 채택한 것이었다. 그것은 1928년 11월 코민테른에 의하여 기존의 조선공산당 승인이 취소된 직후였다. 그리하여 1929년 이후 <12월 테제>는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시대 조선의 혁명적 노동운동과 혁명적 농민운동 또는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세력의 조선혁명에 대한 ‘통일적인’ 기본 입장이나 방침 또는 비전(vision), 규범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나아가 <12월 테제>는 1945년 9월 11일 재건된 조선공산당의 정치노선의 역할을 했던 박헌영이 기초한 <현 정세와 우리의 임무>(8월 테제)에도 일정한 영향력을 미쳤다. 또 <12월 테제>는 1945년 12월 17일자 《해방일보》광고에 나왔듯이 해방 직후에도 널리 읽혀졌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주세죽(朱世竹, 1901~1953)과 박헌영(朴憲永, 1900~1955)

 

<12월 테제>는 1928년 7월 17일부터 9월 1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제6회 대회를 방청한 서울파의 이동휘(李東輝), 엠엘파의 양명(梁明), 화요파의 김단야(金丹冶) 등으로부터 ‘조선문제’에 대한 보고를 듣고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동양서기국 조선문제위원회(이탈리아의 윌터넨Wiltanen, 러시아의 미프Mif, 중국의 구추백瞿秋白, 일본의 좌야학佐野學으로 구성)가 토의하여 작성한 것이었다. 이렇게 보면 <12월 테제>는 조선의 공산주의 그룹들이 표명한 ‘조선문제’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국제공산당 코민테른 조선문제위원회가 ‘종합’한 것이라고 해도 좋다.

 

<12월 테제> 이전에는 공산주의 그룹들이 제각기 다른 ‘조선혁명론’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그동안 조선 공산주의운동 내부의 ‘분파투쟁’을 심화시켜 혁명적 노동운동과 혁명적 농민운동 또는 조선공산당 운동의 발전을 저해하는 작용을 어느 정도 했다. 그러나 말했듯이 <12월 테제>는 조선 공산주의 그룹 대표와 코민테른을 대표한 조선문제위원회가 ‘합작’한 일제 식민지시대의 통일적인 조선혁명론이었다. 즉 분파투쟁의 한 요인이었던 다양한 ‘조선혁명론’이 <12월 테제>로 ‘종합’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1929년 이후부터 <12월 테제>를 중심으로 삼아 혁명적 노동운동과 혁명적 농민운동 또는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세력이 단결해서 조선혁명운동의 활성화를 위하여 노력하게 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동휘(李東輝, 1873~1935)                         김단야(金丹冶, 1899~1938)

 

그러면 <12월 테제>는 어떻게 하여 혁명적 노동운동과 혁명적 농민운동 또는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으로 노동자와 농민을 참여하게 해서 조선혁명운동을 발전시키려고 했는가?

 

우선, <12월 테제>는 노동자와 농민에게 조선혁명을 해야 하는 이유를 제시했다. 즉 <12월 테제>는 일본제국주의의 경제적 착취, 정치적, 민족적 압박이 야기한 자본주의적 발전의 취약성, 봉건제 및 전(前)자본주의적 관계 온존 등이 조선인민의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 발전을 저지하여 조선인민의 경제적 빈곤, 정치적 무권리, 사회적 불평등, 문화적 부자유 등 삶의 모든 측면에서 ‘궁핍화’를 심화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조선인민이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을 이룩하려면 조선혁명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둘째, <12월 테제>는 노동자와 농민에게 당시에 어떠한 조선혁명을 해야만 하는 것인지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즉 <12월 테제>는 “제국주의 타도와 토지문제의 혁명적 해결은, 그 발전의 첫 번째 단계로서 조선혁명이 지니는 주요한 객관적․역사적 실질이다. 이 의미에서 조선혁명은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셋째, <12월 테제>는 노동자와 농민에게 어떻게 해야 그런 조선혁명을 성공할 수 있게 하는지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토지혁명을 하지 않고는 민족해방투쟁도 승리할 수 없다. 민족해방투쟁과 토지에 대한 투쟁을 거의 결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최근(1919, 1926)의 혁명운동은 나약했고, 결국 실패했다. 제국주의 굴레에 대한 승리는 토지문제의 혁명적 해결과 노농민주독재의 수립(소비에트 형태로)을 전제로 하며 그를 통해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은 프롤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 아래에서 사회주의혁명으로 전화한다.”

 

이렇게 <12월 테제>는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여 민족해방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노동자와 농민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요컨대 그것은 노동자와 농민에게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토지문제의 혁명적 해결과 노농 소비에트(평의회) 건설’이었다. 더 줄인다면 ‘노농 소비에트 건설’이었다. 왜냐하면 토지혁명을 하려면 그 주체가 반드시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바로 봉기기관이면서도 권력기관이기도 한 ‘노농 소비에트’였다. 그것이 노동자와 농민을 혁명적 노동운동과 혁명적 농민운동 또는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참여하도록 하는 원동력으로 제시되었다. 그것이 조선인민의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의 도래(到來)를 위한 조선혁명의 추진력으로 제출되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특히, <12월 테제>는 노동자와 농민에게 조선인민의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을 위하여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토지문제의 혁명적 해결과 노농 소비에트를 건설하기를 원한다면, 혁명적 노동운동과 혁명적 농민운동뿐만 아니라 그것과 더불어 노동자와 농민의 전위대로서 강철 같은 조직, 공산당을 건설해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즉 “공산당의 복구․강화 없이는 일본제국주의의 속박으로부터 조선을 해방하기 위한, 그리고 토지혁명을 수행하기 위한 지속적이고도 결정적인 싸움은 불가능하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1928년 <12월 테제>는 분파투쟁 속에 있는 다양한 공산주의 그룹을 ‘통일적인’ 정치조직으로 단결시키기 위한 강령의 역할을 했다. 또 <12월 테제>는 노동자와 농민에게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조선인민의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를 위해서는 ‘토지문제의 혁명적 해결과 노농 소비에트를 건설’해야 한다는 ‘프레임’으로 비전을 제시하는 역할을 했다.

노동자와 농민은 <12월 테제>가 제시한 강령과 비전의 진정성을 믿고 일본제국주의 및 이와 연결된 지주와 부르주아지에 대항하여 혁명적 노동운동과 혁명적 농민운동 또는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1929년부터 끈질기게 벌인 결과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할 수 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재유(李載裕, 1905~1944)

 

해방 직후 <12월 테제>의 영향을 받은 <8월 테제>에 의하여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고 노동자와 농민은 ‘인민위원회’를 건설하고 공장과 토지를 자주 관리하는 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동자와 농민의 노력들이 또 다른 제국주의국가인 미국 군대의 군화발에 짓밟힘을 당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혁명적 노동운동, 혁명적 농민운동의 한 사례>

 

오늘날에 나는 다음과 같이 원한다.

오늘날에 나는, 힘없고 다양한 이른바 ‘진보’ 세력을 힘 있고 통일적인 정치조직으로 단결시킬 만한 <12월 테제> 같은 성격의 강령의 역할을 하는 ‘것’이 조속히 작성되기를 바란다.

오늘날에 나는, 여전히 경제적 불평등, 전쟁상태, 환경파괴 등으로 민중을 고통스럽게 하는 자본주의(자본과 자본주의국가)를 지양(止揚)해서 민중을 웰빙(well-being, 심신의 안녕과 행복)하게 할 만한 ‘프레임’을 구성하여 비전을 제시하는 <12월 테제> 같은 성격의 역할을 하는 ‘것’이 하루빨리 작성되기를 바란다.

 

나는 다음과 같이 언뜻 막연하게 생각해 본다.

나는, 경제적 불평등, 전쟁상태, 환경파괴 등 결코 진(眞) 선(善) 미(美)하지 않는 오늘날의 현실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그런 현실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제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

나는, 모든 사람과 사람이 그리고 사람과 자연이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을 위해서는 그런 세상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마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

 

이제, 앞으로 더 비참(悲慘)해지고 더 참담(慘憺)해 지기 전에, 자기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다함께 그런 ‘조건’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과거 속에서 현재 속에서 찾아내어 되살리고 보편화시키기 위하여 실천해야 하거나, 그것이 안 되면 다 같이 그런 ‘조건’을 창조해 내기 위하여 실천해야 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바보사, 구로역사연구소, 노동자대회_박준성

바보사.구로역사연구소.노동자대회

 

박준성(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위원)

 

1990년대, ‘바보사’는 꼭 읽어야할 역사책으로 꼽혔다. 10여만 부 이상 나갔다고 하니 틀린 말은 아니다. 본래 이름은 ‘바로 보는 우리역사’인데 줄여서 바보사라고 불렀다. ‘바로 보는’이라는 제목을 놓고 말이 많았으나 줄여서 ‘바보사’라는 이름을 만들려고 일부러 ‘바로 보는 우리역사’라고 이름을 붙였다. 전태일 열사가 ‘바보회’를 만들던 심정이었다.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알게 되면서 기계와 노예처럼 살아온 자신과 평화시장의 노동자들이 ‘바보’였다고 자각하였다. 바보처럼 억눌려 살아온 처지와 현실에서 벗어나 인간답게 살려고 노력하는 바보가 되자고 ‘바보회’를 만들었다.

 

전태일 열사가 ‘바보회’를 만들었듯이 노동자 민중도 바보처럼 믿어온 ‘지배층 중심의 역사’를 벗어나 자신들의 역사를 바로 보아야 세상의 주인 노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한 생각들이 ‘책을 내면서’에 담겨 있다.

 

“우리는 이 책을 <바보사>로 약칭하기를 주저하지 않으면서, 지금껏 지배자들이 항상 우매하고 무식하다고 깔보고 짓밟아 온 민중의 역사를 참되게 대변하고자 한다. 고통과 굴종의 역사를 거부했던 1980년대 민중의 역사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우리는 이 <바보사>가 1990년대에도 이땅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힘찬 진군을 멈추지 않을 민중의 가슴에 살아 숨쉬는 ‘바로 보는 우리 역사’이기를 기대한다”

 

<바로 보는 우리역사>의 총론인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내가 썼다. 1984년부터 노동운동, 농민운동, 민중운동 단체에서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역사와 역사인식’ 같은 제목으로 강의했던 내용을 종합해서 정리한 글이었다. 글 끄트머리에서 전태일이 자각했던 ‘바보’를 떠올리며 노예 같은 존재와 삶을 이야기하였다.

 

“지배자들의 삶이나, 그들이 불어넣어 준 환상과 허위의식에 물든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노예적 삶은 역사적 삶이 아니다. 자신의 노예적 상태를 깨닫고 그것에 대항하여 싸우는 노예는 이미 노예가 아니지만,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노예 상태를 감수하는 노예는 노예일 뿐이다. 노예적 존재를 기쁘게 묘사하거나 자신의 주인을 친절하고 훌륭하다고 찬양하는 노예는 꼭두각시이거나 천박한 환각에 빠져 있는 멍청이일 뿐이다”

 

바보사는 구로역사연구소에서 공동작업으로 만든 노동자 민중의 역사였다. 좁은 공간에서 연구원들이 뜬 눈으로 밤을 새우며 쓰고, 돌려 읽고, 고치기를 수 없이 되풀이한 끝에 만들었다.

 

구로역사연구소는 1984년에 창립된 망원한국사연구실이 모태였다. 1987년 6월항쟁과 7,8,9 노동자투쟁의 거센 바람이 휘몰아 친 뒤 망원한국사연구실과 ‘한국근대사연구회’를 통합하자는 ‘역사연구자 대중조직론’이 제기되었다. 한국사 연구자들을 대상으로 삼아 연구자 대중조직을 만드는데 중점을 둘 것인가, 아니면 민중운동과 결합하여 실천할 것인가 하는 점이 쟁점이었다.

 

밤을 밝히고 피를 말리는 토론 끝에 총회에서 망원한국사연구실을 그대로 유지하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총회의 결과는 무시되었다. 그럴듯하게 포장한 이념과 노선 밑바닥에는 미묘한 이해관계가 얽히고설켜 있었다. 결국 대중조직 건설을 주장하던 연구자들은 한국근대사연구회와 통합하여 1988년 9월 한국역사연구회를 만들었다.

 

나는 처음부터 통합을 반대하지는 않았다. 1980년대 공부했던 관계나 인연으로 따지면 한국역사연구회를 만드는데 앞장섰던 연구자들 가운데 가깝게 지낸 사람들이 많았다. 더 많은 역사연구자들이 ‘혁명적 지식인’으로서 역사를 무기로 대중과 만나 변혁운동에 함께 복무하는 조직으로 발전하는 것이라면 반대할 까닭이 없었다. 머리로는 호응하되 몸으로 동의하기는 어려웠는지, 통합 논의가 그런 방향으로 나가지 못했다.

 

논의 과정에서 나는 망원 독자유지론을 주장하였으나, 연구자들의 존재와 속성을 볼 때 어떠한 연구자 조직이 바람직한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토론과 논쟁에 익숙한 체질이 아닌데다 인간관계까지 겹치니까 몸과 마음이 지쳐갔다. 1988년 3월에 있을 혼인 준비를 핑계로 잠시 휴가를 얻기까지 했다.

 

새롭게 건설할 연구자 조직은 내 삶과 연구와 실천의 중요한 근거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를 ‘대중’으로 설정하여 ‘대중조직’의 연구자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망원한국사연구실은 더 이상 버틸만한 힘이 없었다. 망원한국사연구실을 유지하자던 집행부와 일부 회원들이 새로운 연구소를 준비했다.

 

아끼고 믿었던 후배들은 대부분 따라오지 않았다. 술자리나 토론 자리에서 이루어졌던 약속과 현란한 말잔치는 거품이었다. 책을 복사했다가 뱉어 놓는 듯 한 번지르르하고 어려운 말이나 글이 모두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술값이 아깝지는 않았다. 말과 글의 주눅에서 벗어나 말과 글을 다시 돌아보게 한 값비싼 체험을 했으니까. 요즘처럼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지 않으면 군자가 아니겠는가”하는 논어 앞 대목을 그 때도 실감했다면 오히려 배운 것이 적었을지 모르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1988년 11월 13일 전국노동자대회 _ 사진 : 홍지욱/ 노동자역사 한내 소장 자료>

 

1988년 11월 13명의 연구원들이 구로역사연구소를 열었다. 1985년 구로노동자연대투쟁의 현장이며 노동운동의 중심지인 구로지역을 찾아 자리를 잡고 연구소 이름에도 ‘구로’를 넣었다. 창립일도 전태일 열사의 분신 18주기인 1988년 11월 13일 전날인 11월 12일로 잡았다. 그해 11월 13일은 연세대학교 노천극장에서, 매년 가을 열리는 노동자 대회의 역사가 시작된 ‘전태일 열사 정신 계승 및 노동악법 개정 전국노동자대회’가 열린 날이었다. 노동자 운동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전국’의 노동자들이 한 자리에 가장 많이 모인 노동자대회였다.

 

11월 13일 오전에는 마침 1980년대 같이 공부한 후배가 가슴 아픈 혼인식을 치뤘다. 양쪽 부모님들이 완강하게 반대하였고, 주례도 공부 모임의 이세영 선배가 섰다. 피로연은 안가고 바로 연세대로 달려갔다. 내가 도착했을 때 대회는 이미 끝났다. 여의도로 행진하는 대열을 따라 잡았다.

 

행진에 나서기 직전 노동자 선봉대원들과 파업하던 인천 세창물산 노동자들이 연단 위로 뛰어 나가 손가락을 깨물어 하얀 광목 위에 ‘노동 해방’ 네 글자를 썼다고 한다. 행진 대열 맨 앞에서 피로 쓴 노동해방 깃발이 5만여 노동자 학생 시민들을 이끌었다. 여의도에 도착한 노동자들은 국회의사당 앞에서 ‘망국 민정당 규탄 및 노동 악법 개폐 촉구 대회’를 열고, 전경련 앞에서 ‘노동악법 옹호하는 독점재벌 규탄 대회’를 열었다.

 

진통 끝에 구로역사연구소를 열고, 노동운동사에서 한 획을 그은 노동자대회에서 느꼈던 감격으로 신나게 구로역사연구소 시절을 보냈다. 내가 선택한 구로역사연구소의 길이 옳다는 것을 몸으로 증명하고 말과 글에 책임을 져야 했다. 혼인 초 아내와 함께 지낸 시간 보다 구로역사연구소와 보낸 시간이 더 많았다. 연구소에서 번번이 밤을 새웠다. (그렇다고 그게 다 연구와 활동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버전으로 이야기하면, 테트리스 점 수 올리느라, 새로운 게임 끝까지 가보느라 막차를 놓쳐 할 수 없이 연구소에서 잔 적도 여러번 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전국노동자대회 후 한강다리를 건너 여의도로 행진하는 노동자_사진: 홍지욱/노동자역사 한내 소장자료 >

 

그 이후 조직을 만들거나 참가할 때면 구로역사연구소 초기처럼 활동하기 어려울 것 같아 주춤거렸다. 연구소가 가장 중점을 둔 사업과 활동은 민중사학의 성과를 대중화하는 작업이었다. 창립 직후부터 민중사학에 입각한 대중교과서를 준비하여 1990년 2월에 <바로보는 우리 역사>(1.2)를 냈다. 또 한 축이 대중교육 사업이었다. 여기 저기 도맡다시피 교육을 다니다 보니 ‘박준성의 구로역사연구소’라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다른 연구원들에게 미안하고 들을까봐 민망스러운 말이었다.

 

구로역사연구소는 1993년 8월 역사학연구소로 이름을 바꾸었다. 구로역사연구소로부터 따지면 22년이 지났다. 어떤 조직도 처음 만들 때 세웠던 거창한 취지를 제대로 실천하기가 쉽지 않다. 그 사이 연구소를 떠난 연구자들도 있고, 새로 들어온 연구자 들도 늘어나 13명으로 시작한 연구원 수가 지금은 40여명 가까이 된다. 연구원 수는 늘어 났어도 연구소는 회원들의 회비로 간단간닥 유지하고, 연구원들은 반 이상이 불안정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지에서 어렵게 연구자의 길을 가고 있다.

 

돌아보면 언제나 아쉽고 부족한 것 투성이기 마련이지만, 나나 연구소나 혁명적 지식인으로서 변혁운동에 얼마나 보탬이 되었을까. 그래도 연구소는 전태일의 ‘바보회’를 생각하며, ‘전태일 열사정신 계승 전국노동자대회’에 맞춰 연구소를 창립한 뜻을 살려 연구와 출판, 교육을 계속해왔다. 2003년 11월에는 ‘투쟁의 역사, 희망의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창립 15주년 기념심포지움을 열었고, 성과를 묶어 2005년 11월 <노동자, 자기 역사를 말하다>를 펴냈다. 올 2010년 전태일 열사 40주기를 맞아서는 11월 7일 노동자대회에 맞춰 11월 6일 전태일재단과 함께 ‘청계피복 노동운동과 전태일의 재현’이라는 심포지움을 열었다.

 

망원한국사연구실, 한국근대사연구회, 한국역사연구회, 구로역사연구소를 만들었던 20여년 전의 ‘진보적인 소장파 연구자’들이 이제는 학계의 중견 연구자들을 넘어 원로가 되어가고 있다. 나이만 먹은 것이 아니라 몸도 마음도 늙어간다. 한편으로는 썩어가는 냄새가 난다는 소리도 들린다. 스스로 다시 한 번 껍질을 벗고, 뒤에서 흘러오는 샘물과 섞이지 않으면 강물은 맑아지지 않는다. 아직은 장강의 뒷물에 밀려 퇴출될 때는 아니다. 오히려 가장 낮은 곳, 바다로 향해 함께 가야하지 않을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1987년 이전, 민중민주헌법쟁취를 위한 노동자들의 조직과 10월투쟁 _ 김영수

1987년 이전, 민중민주헌법쟁취를 위한 노동자들의 10월투쟁

 

김영수 (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위원)

 

대부분의 사람들은 1987년 6월항쟁으로 군부독재정권을 무너뜨린 것에 대해 민주시민의 승리로 간주한다. 이는 학생운동을 주도하는 대학생 및 제도권 야당의 정치세력, 중간층의 화이트칼라 노동자, 그리고 민족민주진영의 운동세력 등 민주적인 시민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참여하여 승리한 대항쟁이었다는 평가다. 이러한 경향은 민주항쟁의 주요한 요구사항도 ‘호헌철폐 독재타도, 대통령 직선제 쟁취’ 등 탈계급적인 수준에 머물게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1987년 6월항쟁의 주체와 요구사항을 이렇게 평가할 경우, 6월항쟁의 이면을 보지 못한 채 항쟁의 역사를 왜곡시킬 수 있다.

 

6월항쟁은 1987년 6월에 발생하였지만, 1970년대의 반유신투쟁 혹은 1980년 광주항쟁의 연속이었으며, 노동자·민중이 생존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일상적으로 전개하였던 투쟁의 연속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지배권력을 안정시키기 위해 양면적인 전략, 즉 제도권 야당의 정치세력과 대학생들을 포용하는 통제전략을 구사한 반면, 노동자·민중들의 투쟁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탄압하는 통제전략을 구사하였다.

신군부세력 및 전두환 정권은 1970년대에 민주노조활동을 전개했던 사람들을 사회정화조치의 일환으로 삼청교육대에 보내기도 했으며, 노동운동의 투쟁에 대응할 수 있는 정부의 ‘노동대책회의’를 상설화하였다. 또한 노동관계법, 즉 근로기준법·노동조합법·노동위원회법·노동쟁의조정법 등 4개의 법을 반민주적으로 개정하여 노동자들의 기본적 권리를 탄압하였다. 특히 노동조합법의 ‘제3자 개입금지’ 조항은 민주노조운동의 활동가들을 탄압하는 주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전두환 정권은 이 외에도 정당하게 파업투쟁을 전개하는 노동자들에게 가차없이 공권력을 행사하였다. 대표적인 경우가 1981년 이후의 청계피복 노동조합 복원투쟁, 1984년 택시노동자들의 전국적인 연대투쟁, 1984년 대우자동차 노동조합의 파업투쟁, 그리고 1985년 구로지역 중소기업 노동조합의 동맹파업투쟁 등에 대해 폭력적인 공권력을 행사하였다. 구로동맹파업투쟁에 참여했던 5개 노조의 노동자 중에서 약 1,300여 명이 “불구속, 구류, 구속, 부상, 해고, 강제사직” 등의 탄압을 받았다.

 

전두환 정권은 노동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불법행위도 자연스럽게 자행하였다. 그것은 1984년 초반부터 노동운동과 관련된 활동가들의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그들을 채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반인륜적 범죄행위도 마다하지 않았다. 노동부는 노동현장으로 자신의 생활공간으로 이전한 학생운동 출신의 활동가들을 불순분자로 간주한 상태에서, 그들을 취업하지 못하게 하는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단위 사업장에 배포하였으며, 그들을 구속하기까지 하였다. 1987년 들어 정부는 소위 위장취업자라는 이유로 6.29이전까지 43명, 6.29 이후 9월 2일까지 37명 등 모두 80명의 현장활동가를 구속하였고, 노사분규와 관련하여 6.29이후 9월 8일까지 모두 2,618명을 연행하여 이중 388명을 구속하였다. 이 외에도 민주노조운동의 선진적인 개별주체들에 대한 직업적 깡패와 경찰의 납치・감금・협박・집단폭행 등이 자행되었다.

 

이처럼 전두환 군부독재의 반민주적 폭력은 노동자·민중들을 대상으로 일상화되었다. 단순히 대통령이 군인출신이었기 때문에 군부독재정권이었던 것이 아니라, 노동자·민중들의 기본적인 권리를 부정하고, 노동자·민중들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미명하에 헌법을 유린하는 행위를 일상적으로 자행하였기 때문에 군부독재정권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1987년 이전에 제5공화국의 헌법을 폐기하기 위한 투쟁에 나섰다. 대표적인 경우가 85년 10월에 결성된 ‘전국 노동자 민중민주민족통일헌법쟁취위원회’와 1986년 10월 26일에 결성된 ‘민주헌법쟁취 서울지역 노동자투쟁위원회’이다. ‘민주헌법쟁취 서울지역 노동자투쟁위원회’는 1986년 10월 26일 서울 신대방동 돈보스꼬 청년회관에서 노동자, 학생 등 300여 명이 참여해 결성식을 치렀다. 1986년 5.3인천사태 이후의 상황을 고려할 때, 노동자들은 개헌투쟁을 전개하면서 민주헌법 쟁취를 주요 슬로건으로 내세우고, 대통령 직선제 쟁취, 노동3권 쟁취 등을 위한 투쟁에 나섰던 것이다. 노동자들은 ‘민주헌법쟁취 서울지역 노동자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난 이후, 대림동 로터리에서 30여 분간 가두시위를 전개하면서 개헌투쟁의 필요성을 집중적으로 선전하였다. 이처럼 민주노조운동의 선진적인 활동가들은 이러한 투쟁기구를 중심으로 ‘민중민주주의 개헌투쟁’에 참여하게 되었고, 정치적 노동조합운동의 주체로 성장하게 되었다. 노동자 정치운동의 개헌투쟁은 노동자 정치운동과 민중민주운동의 통일단결을 위한 노력으로 가속화되었다. 1986년 11월 29일에는 수도권 차원에서 민중민주주의 개헌투쟁을 전개하였고, 1987년 박종철 고문살인사건을 계기로 발생된 2.7투쟁과 3.3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민주헌법쟁취 서울지역 노동자투쟁위원회 결성선언문>

 

6월항쟁의 과정에서는 노동자 대중들의 조직적 동원을 추진할 전국적 지도체계가 부재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참여 노동자들의 비율이 점차 늘었고 항쟁이 노동자 계급으로 확산되는 시점에서 지배블록의 6.29민주화조치가 이루어졌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노동자들은 매일 출근해야만 했었던 상황이었지만, 퇴근 이후에 도심을 누볐던 넥타이 부대가 노동자가 아니고 누구였단 말인가? 가두투쟁을 전개할 때, 차의 경적 소리로 투쟁을 북돋아주고 최루탄과 경찰에 쫒길 때 몸을 숨겨 주었던 사람들이 노동자․민중이 아니고 누구였단 말인가? 그들을 시민으로 간주하는 것 자체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다. 노동운동은 비록 6월항쟁의 과정에서 비조직적이었고 개별적・분산적 수준이었지만, 개헌투쟁의 주요 동력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지배세력의 입장에서 보면, 6월항쟁이 노동자 계급으로까지 확산되는 것을 방관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투쟁들을 6월항쟁과 무관한 것으로 간주하기 쉽다는 점이다. 특히 노동운동을 ‘양날개론’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그렇다. 노동운동은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노동자들의 경제적 이해만을 추구하는 활동을 전개하는 것이고, 정당운동만이 국가권력의 성격을 변화시키기 위한 정치적 활동을 전개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경향성은 6월항쟁의 주도세력이나 요구사항들을 노동자·민중의 계급적 속성과 무관한 것으로 인식한다. 일반적으로 6월항쟁이 성공하게 된 결정적 요인을 ‘넥타이 부대’의 동참에서 찾는다. 그런데 1987년 당시의 ‘넥타이 부대’는 1987년 7-9월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면서 사무전문직 노동운동의 핵심적 주체로 존재하였다. 그리고 1987년 이전에 민중민주헌법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했던 노동자들은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 쟁취’ 등과 요구들을 자신의 이해로 간주하였다. 노동자․민중들은 정치권력의 형식적 민주화를 추구하면서도 동시에 사회구조의 실질적인 민주화를 추구하려 하였다. 이는 정치적 민주화의 요구 내용들이 노동자․민중들의 이해와 통일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노동자․민중들은 자신의 권리가 실질적으로 보장되는 국가권력을 수립하려 하였던 것이다.

 

1987년 이전에 민중민주헌법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했던 노동자, 1987년 6월항쟁과 7-9월 노동자 대투쟁에 참여했던 노동자․민중들은 진정한 평화주의자들이다. 노동자․민중들이 추구하는 평화는 인간에 대한 ‘착취의 폭력’을 무너뜨리고자 하는 평화, 인간에 대한 ‘폭력적 지배체제’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평화, 그리고 노동자․민중들에게 순종과 복종만을 추구하는 ‘강제의 폭력’을 소멸시키고자 하는 평화 등이다. 노동자․민중들의 ‘새로운 6월 민주항쟁’은 바로 자본주의 사회의 폭력구조를 진정한 평화구조로 변화시키려는 과정이다. 정치적 민주화만으로 진정한 평화를 구축하기는 힘들다. 사회의 하부구조(social infra-structure)가 실질적으로 민주화되는 과정, 즉 노동자․민중들의 이해를 중심으로 구성되거나 운영되는 사회만이 진정한 평화를 구축할 수 있다. 노동자․민중들은 ‘새로운 6월항쟁’으로 다음과 같은 평화사회, 즉 사회구성원 중에서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노동자․민중들의 이해가 우선적으로 고려되는 사회, 그들의 이해가 사회적․국가적 이해로 전화되는 사회, 그리고 노동현장의 공동체적 관계가 사회구성원 모두의 사회적 관계로 전화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할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