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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분계선 _ 양규헌

세월의 분계선

 양규헌 (노동자역사 한내 대표)

 

묻혀가는 공간 속에서 흘러가는 계절, 세월은 오늘이 가면 내일이 오고 내일은 또 그렇게 바람처럼 보이지 않는 시간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늘 가고 오는 시간의 행진은, 보이지 않는 세월의 분계선인 한해가 가고, 내일이면 똑같은 시간이지만 상이한 하루가 다가온다. 

인생이 그렇게 가고 오고, 오고 가는 세월의 순환 과정에서 아쉬움과 안타까움과 허무와 절망을 감출 수 없는 것은 우리가 갖는 삶의 무게의 중량 때문일지도 모른다.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진 나이가 되고서는 젊었을 때 없었던 조바심과 새로운 고민들이 생겨난다. 한동안 생이 영원할 것만 같았던 ‘패기와 기세’는 삶의 흔적에 비례하여 차츰 소멸되어 간다는 나약함도 어쩔 수 없다.

특정한 종교의 유신론을 거부하는 것은 때로는 스스로의 의지를 시험하는 것이기도 하다. 흙에서 와서 흙으로 가는, 우주먼지에서 와서 우주먼지로 돌아가는, 물질에서 물질로의 회귀라고 생각하는 입장에서는 허무가 더 강하게 엄습해 오는 모양이다.

지나간 시간을 회상하면 한숨 속에 아쉬움이 담겨있는 것은, 노동자계급이 안고 있는 절망의 늪에서 희망의 끈을 부여잡기에 너무나 많은 모순들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새롭게 만들어진 장벽도 아닌, 이미 오래 전에 확인했던 모순임이 확실하지만 연륜의 분계선을 접하는 지금은 그렇게 무겁다. 계절이 순환되어도, 시간이 뒤죽박죽이 되어도, 참과 거짓의 논리가 어처구니없는 현상으로 노출되어도 억압적 모순은 결집된 힘으로 제거하지 않으면 방법이 없다.

속은 썩어 문드러진 야만의 자본주의는 거죽만 돈으로 처발라 번지름한 채, 미처 날뛰고 있다. 자본주의의 육중한 틀 속에 갇혀 허우적거리는 노동자, 민중은 자본의 세균이 득실거리는 공간에 노출되어 한숨으로 보내는 시간의 길이가 얼마일까

광분하고 있는 비정상적 모순은 정신병원에 감금시켜야 하지만 마땅한 정신병원 하나도 없으니 미친 자본은 노동자, 민중을 향해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법제도조차도 무용론을 앞세우며 미친 짓거리와 폭력으로 노동자계급의 희망을 앗아가며 이윤배가의 도구인 노동자로 위치 지운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전태일 열사를 수 십 년 팔아 오는 동안, 투쟁은 이벤트로 전락하고 계급적 연대투쟁이 방기됨으로서 노동자들의 분노를 파편화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다. 이 틈새를 비집고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노동계급 내부에 균열을 가하며 기본권조차 앗아가는 절망의 분계점에 와 있다.

보편과 특수에서 인간이 공통적으로 갖는 사유의 보편성과 개인이 느끼는 감정의 특수성이 어우러져 사회가 되고, 인류임이 분명한데 '우리는 어느 정도 공통적이고 특수성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마땅히 답을 찾기 어려운 것이 고난의 한해를 보내는 마음이다.

 

가버린 해와 새해의 의미는 형식적일 수 있다. 순환되는 역사의 흐름에서 변화발전의 합법칙성의 조응하지 못하는 현실을, 모순을 하나씩 파괴시켜야하는 임무가 방기되기도 하고, 힘의 역관계 속에서 주춤거림을 과도하게 해석할 이유도 없다.

'만족해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행복할 때 비로소 자유가 시작된다.'는 동화의 메시지처럼, 한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이 시점에서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노동자계급의 임무를 방관하며 넘어갈 수가 없다.

지나가는 해와 새해의 분기점은 공간의 개념 이상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해도 이 시기에 새해에 대한 희망의 씨앗을 준비하는 것은 당연한 과제라고 생각하며 희망의 출발은 ‘견고한 자본의 거대한 성’에 작은 파열구를 내기 위한 조건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작은 위안을 담아본다.

 

시간과 계절이 흘러, 또 다시 한해를 맞이할 때, 가슴을 짓누르는 절망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전태일열사의 해방정신을 세워내고 간접고용, 파견노동자투쟁을 비정규투쟁이 아닌 계급투쟁으로 조직하여 미쳐 날뛰는 자본에 작은 파열구를 만들어 내는 연말과 새해가 되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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